진보지체아
문장: 진보지체아에게 '왜 진보하지 않는냐?'는 질문은 유용하지 않다. 유용한 문장은 진보지체아는 복이 있도다이다.
설명: 우리는 존재적 생각과 허구적 생각을 한다. 존재적 생각에는 본질적 생각과 현실적 생각이 있다. 현실적 생각에서 허구적인 경우를 비윤리적이라고 한다. 비윤리적이란 진보의 지체이다. 이는 존재배반적이다. 그래서 현실적 생각에서 존재적으로 윤리화하는 것이 '의식화'이다. 우리는 존재배반적 허구물(nihil nagativum)을 극복하고 긍정적 생각을 하자고 한다.
하지만 존재배반적인 진보지체아가 우리의 현주소인 것은 분명하다. 그런데 이런 진보지체아에게 왜 진보하지 않는냐? 진보하라고 말하는 것은 그냥 진보지체아는 진보지체아이다. 홍시맛나니까 홍시맛난다는 말과 같다. 이런 동어반복은 두번 죽이는 것과 비슷하다. 실익이 없다.
위의 모든 것이외에 '제3의 생각'이 필요하다. 이것이 종교적 생각이다. (실천적 생각이라고 할까했는데 실천적이란 좀 어려운 말이어서 아이들도 이해하도록 종교적 생각을 내세웠다.) 종교적 생각에서 출발점은 '무장해제'이다. 진보지체다. 진보하라. 이러한 생각외에 종교적 생각에서는 '진보지체아의 고민에 귀를 기울이고 그의 요구에 응답이 되고 진보/진보지체의 모든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다 내려놓고 쉬는 것'이 출발점이다.
교육에서는 '원대한 꿈과 선명한 목표'를 이야기한다. 이는 본질적 생각과 현실적 생각과 구조가 같다. 그리고 본질이 현실을 배반하는 것은 아니다. 둘다 존재적인 것이다. 존재를 배반하는 것은 '환상'이다. 환상은 거짓이고 허구적이고 부정적(negativum)이다. 우리는 본질적 꿈과 현실적 목표를 가지고 살아간다. 현실적 목표란 '단계적 기대'와도 비슷하다. 이것은 '세상적'이라는 것과는 조금 다르다. 존재의 명령에 따른다는 것과 '세상을 따른다는 것'은 다르다. 세상적이란 타협적이고 혼합적인 것이다. 반면 현실적이란 언제나 '세대를 본받지 않는(unconformable)'이다. 세상적이란 '환경'을 지배경영하지 못하는 것이다. 문화명령에서 실패하는 것이다. 현실적 목표란 단계적으로 진보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현실적 목표와 '세상적 자랑'과는 다르다. 세상적 자랑은 허탄한 것이다. 다시 말하면 '거짓'이다. 존재를 배반하는 허구물로서의 '자랑'은 결국 병이 나게 하고 '진보지체아'를 양산한다. 환경에 지라는 것이 아니라 '정직'하라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나는 이미 존재를 배반하고 있는 진보지체아라는 현주소이다. 단지 왜 진보하지 않니? 진보해. 이런 말들은 유용하지 않다. 이것은 이미 알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종교적 생각이 필요하다. 종교적 생각은 우리에게 '진보자가 아니라 진보지체아에게 더 관심이 있다'고 말한다. '진보자가 아니라 진보지체아를 더 사랑한다'고 말한다. 종교적 생각은 '진보자가 아니라 진보지체아를 위하여 일한다'고 말한다. 아니 왜 진보자가 아니라 진보지체아에게 더 큰 애정을 보이느냐? 종교적 생각은 '진보'에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라 '생명'에 관심이 있다. 종교적 생각은 '경합'에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라 '무장해제'에 관심이 있다. 종교적 생각은 '일'에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라 '쉼'에 관심이 있다. 종교적 생각은 일하기 위해서 쉰다고 하지 않고 '쉼' 자체가 최상의 복이라고 한다.
종교적 생각은 "The solution is STOP." 이라고 말한다. 종교적 생각은 '(심령이) 진보지체아는 복이 있도다'라고 말한다. 진보지체아에대한 축복이 바로 종교적 생각의 출발점(starting point)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