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혁명의구조/과학혁명의성격과필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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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질문하나> 와 <잠깐퀴즈>에 응모하신 분들중 가장 정확하고 설득력 있는 답을 제공하신 분께는 솔로몬왕의반지라는 콘라드로렌츠의 명저를 상품으로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앞의 두장을 살펴봄으로서 우리는 이제 과학혁명이란 무엇인가? 그리고 어떤 기능을 하는가?에 대한 문제들을 고려할 수 있게 되었다.

앞의 두장을 간단히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다.
{{|
지배적 패러다임안에서 관찰과 실험이 수행되던중 때때로 '이상 현상'들을 발견하게 되고 그런 '이상 현상'들이 현재의 패러다임의 범주밖에서 일어나고 있는 어떤 가능성들을 과학자에게 보여줄때 과학적 발견의 길이 열리게 된다. 새로운 패러다임 출현의 가능성을 증대시키는 결정적 위기들은 기존 패러다임의 적용 범위를 넘어서는 시도를 하도록 유도하고 과학자들이 새로운 과학 이론의 체계를 정립하도록 자극한다. |}}

앞에서 과학혁명이란, 보다 옛 패러다임이 전반적이거나 부분적으로, 서로 양립되지 않는 새 것에 의해 대치되는 비축적적(non-cumulative)인 발전에서의 에피소드로 간주되었다. 비축적적이라는 말은 과학혁명의구조 전반에서 상당히 중요한 용어이다. 토마스쿤은 과학혁명이 축적에 의한 것이 아님을 설명하는 데 상당히 많은 페이지를 할애하고 있다.

그렇다면 비축적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지 않다고 해서 반드시 과학혁명이라고 불려야 하는가? 라는 문제가 남는다. 그러므로 우리는 패러다임의 변화는 어째서 혁명이라 불리어야 하는가에 대해 살펴보아야 한다. 쿤은 정치혁명과 과학혁명을 비교함으로서 이에 대한 해답을 제시한다.
{{| 정치적 혁명이란, 기존 제도가 주위 상황에 의해 제기되는 문제들을 이제 더 이상 적절하게 해결할 수 없다는 의식이 흔히 정치적 사회의 집단에 편재되어 팽배하면서 시작되듯이

과학혁명이란, 기존 패러다임이 자연 현상에 대한 다각적인 탐사에서 이전에는 그 방법을 주도했으나 이제 더 이상 적절하게 구실을 하지 못한다는 의식이 과학자 사회의 좁은 분야에 국한되어 점차로 증가되면서 시작된다. |}}
이 두가지 혁명의 선행 조건은 위기로 몰고갈 수 있는 기능적 결함을 깨닫는 것이다.

또한가지 유사성은 과학혁명을 유도하는 초기 대상집단의 범위에서 발견되는데 그것은 패러다임이 그 혁명들에 의해 영향을 받게 되는 사람들에게만 혁명 같아 보이면 된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X선의 발견은 천문학자들에게는 혁명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질문하나> 그렇다면 혁명의 파장범위가 넓은 영역의 과학은 패러다임의 선택에 있어 사회적 영향을 더욱 많이 받게 되는가? 그렇다면 그 분야의 과학자들은 다른 분야의 과학자들보다 그 선택에서 보다 신중해야 하는가? 이 문제를 고려해 보아야 하지 않을까?

정치와 과학혁명의 유사점은 좀 더 심오한 측면을 지닌다. 일반적으로 정치혁명은 기존정치제도의 일부를 파괴하는 것을 필연적으로 요구한다. 그리고 이러한 혁명의 기간에 사회는 기존제도에 의해 완전히 통제되지 못한다. 결국 양극화된 진영이 발생하게 되고 각 진영은 자신들의 제도에 구속되어 있기 때문에 무력을 포함한 정치외적인 것들로 혁명의 투쟁에 나서게 된다.

과학에서의 혁명도 정치혁명과 마찬가지이다. 경쟁하는 패러다임의 선택에 있어서 과학자들의 각 진영은 자신들의 패러다임을 이용해 상대방을 굴복시키려하기 때문에 패러다임순환적인 역할을 하게 된다. 즉 과학자들은 패러다임에 기초해서 패러다임을 옹호하게 되고 결국 패러다임을 귀착시키려고 한다. 김우재가 이해하기로는 과학자들이 자연의 본질과 논리에 의해서 패러다임을 선택한다기 보다는 그 외적인 면에 의존하는 경향이 크다는 것 같다. 결국 또한번 과학자들의 심리학이라는 말을 사용하게 되는데 이 말은 쿤의 이론을 이해하는 데 많은 도움을 준다.

그렇다면 왜 패러다임 선택이라는 주제가 논리와 실험만으로 확고하게 풀릴수 없을까? 새로운 패러다임을 받아들이고 예것을 폐기하는 경향은 패러다임의 선택이 과학적 지식의 논리적인 구조로부터 유도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인가?

자 앞에서 수도 없이 다루었듯이 새로운것을 받아들이고 옛것을 폐기하는 것이 혁명의 본질이다. 패러다임은 대체될 뿐, 얼레벌레 넘어가는 법이 없다. 우리는 이 점을 확실히 알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원칙적으로 새로운 현상은 과거의 과학 활동의 어느 부분에도 파괴적인 영향을 미치지 않으면서 출연할 수 있다. 예를 들어 달에서 생명체를 발견하는 것은 현재의 패러다임에 파괴적일 수 있지만, 은하계의 저 먼곳에서 생명체를 발견하는 것은 그렇지 않다. 새로운 이론은 예전에는 몰랐던 것들을 다루거나 좀 더 수준을 높인 것일 수도 있다. 즉 과학적 발전이 원천적으로 축적적일 수도 있다. 우리는 과학의 발전을 이렇듯 축적적인 것으로 포괄시켜 설명할 수도 있다. 그런데 왜 토마스쿤에게는 이것이 과학의 이미지가 되지 않을까? 무엇이 그에게 혁명이라는 강렬한 이미지를 심어 주었을까?

토마스쿤은 역사에서 그것을 보았던 것이다. 이 뛰어난 과학사학자는 과학의 역사에서 새로운 이론의 동화는 이전 패러다임을 파괴하면서 이루어짐을 보았고, 이처럼 예기치 못했던 새로움들이 과학에 차곡차곡 쌓이는 현상을 보지 못했던 것이다. 역사를 지배적인 인식론의 잣대로 보지 않고 제대로 보는 사람이라면 그 속에서 과학혁명을 볼 수 있다. 다음장인 과학혁명의구조/세계관의변화로서의혁명에서 이러한 지배적인 인식론에 대해서 다루게 될것이다.

그렇다면 새로운 종류의 현상이나 새로운 과학 이론의 동화가 그것들보다 구식인 패러다임의 폐기를 강요해야만 하는 본질적 이유가 존재하는 것인가?

축적적인 성격의 정상과학이 그 성공을 거두는 것은, 과학자들이 주어진 도구로 할 수 있는 일만을 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게으른 과학자들이다... -_-;;; (이것은 기존 지식이나 기술에 대한 관계에 상관없이, 유용한 문제들에 지나친 관심을 두는 것이 과학적 발전을 쉽사리 방해할 수 있는 이유가 된다.). 그러나 제대로 된 과학자 -스스로 도구를 만들어 사용할 줄 아는- 는 자연에 대한 그(과학자)의 예측과 그의 도구가 틀린 것임이 밝혀진 경우에만 예기치 못한 발견을 하게 된다. 이해가 갈것이다. 그의 틀린 도구가 바로 기존 패러다임이고 도구가 잘못되었으므로 그 도구는 부숴버려야 된다. 그리고 이러한 이상현상의 발견은 우리가 과학혁명의구조/위기그리고과학이론의출현 에서 다루었듯이 패러다임의 갈등을 유발한다.

또한 과학혁명의구조/위기그리고과학이론의출현에서 다루었듯이 새로운 이론의 전개시 나타나는 현상도 이와 동일하다. 새로운 이론이 전개 될때는 대체로 세가지 종류의 현상이 존재하는데,
첫 번째 것은 기존 패러다임에 의해서 이미 잘 설명된 현상들로 이루어지며, 이것들이 이론 구축에 대한 동기라든가 새 출발의 시점을 제공하는 일은 없다. 과학혁명의구조/위기그리고과학이론의출현의 마지막에서 이야기 했던 아리스타르코스의완벽한 예상처럼 말이다. 자연은 판별할 수 있는 근거를 제공하지 않는다

여러분이 지금까지 이해했던 것에 의하면 그럼 도대체 무엇이 판별할 수 있는 근거를 제공하나요? 객관식으로 할까요? --김우재

두 번째 부류의 현상은 기존 패러다임에 의해 그 본질은 지시되지만 상세한 내용은 이론의 보다 진전된 명료화를 통해서만 이해될 수 있는 것들로 구성된다. 이 현상들에 대한 연구는 새로운 패러다임의 창안을 겨냥하기보다는 기존 패러다임의 명료화에 목표를 둔다.

세 번째 형태의 현상(명료화를 위한 시도가 실패하는 경우에 한해서만 만나게 됨)은 인식된 이상 현상들로서 그 특성은 기존 패러다임에 동화되기를 강력하게 거부한다. (우리에게는 이 세번째 현상(이상현상)이 매우 중요하다.)

그러나 거부만 하면 다인가? 새로운 이론이 이상현상을 해결하는 데 있어서 기존 이론과 양립할 수 있다면 앞에서의 논의는 모두 도루묵이 되어 버리는 것이 아닐까? 즉 새로운 두번째 이론은 첫번째 거을 반드시 대치시켜야 하는 것이다. 예를 하나 들어보자. 오늘날 매우 축적적인 과정을 거쳐 이루어진 것 같아 보이는 에너지 보존 이론조차도 뉴턴의 역학과 열의 칼로릭 이론의 상충에서 비롯된 위기로부터 칼로릭 이론을 폐기시키고 나서야 과학의 한 부분이 되었다. 역사를 제대로 보면 이러한식의 파괴와 혁명 그리고 대치가 보인다.

쿤은 이렇게 말한다.
{{|
만일 자연 현상에 대한 기존 이론의 관계에서 이상 현상을 해결하기 위해 새로운 이론을 환기시키게 하려면, 성공적인 새 이론은 어딘가 그 이전의 것으로부터 유도된것들과는 다른 예측들을 줄 수 있어야 한다. 만약 두 가지가 논리적으로 양립될 수 있는 경우라면 그 차이는 발생하지 않을 것이다. 동화되고 있는 과정에서, 두 번째 이론은 첫 번째 것을 대치시켜야 한다.|}}

그런데 아마도 토마스쿤이 살던 시절에는 그와 반대되는 의견을 펼쳤던 나쁜 (^^) 과학사가들이 많았던 모양이다. 그들은 이런식으로 말했다.

{{|
봐라. 아인슈타인의 상대론적 역학이 진짜로 뉴턴 역학이 잘못된 것임을 증명할 수 있나? 뉴턴 역학은 아직도 대부분의 공학자들에 의해서 사용되고 있지 않느냔 말이다. 다수의 물리학자들도 잘만 사용하더라. 뉴턴이론은 아인슈타인의 이론으로부터 유도된 것이고 그러므로 아인슈타인 이론의 특수한 경우가 되는 것 아닌가? 니가 말하는 파괴와 혁명은 어디 갔는가? 양립한다던 두 이론이 서로 잘만 살고 있지 않는가 말이다.

또 만약에 아인슈타인의 역학이 뉴턴 역학을 이상한 것으로 보이게 만드는 것이라면 그것은 뉴턴주의자들 중에 멍청했던 놈들, 즉 뉴턴의 광신도들에 의해서 뉴턴역학이 상대속도가 빛의 속도보다 빠른 경우에도 뉴턴이론이 맞는다고 주장했던 놈들의 잘못이지 뉴턴의 잘못이 아니지 않는가? 그러니까 그런 엉뚱한 주장들 (원래부터 정통과학도 아니었던) 만이 아인슈타인의 이론에 의해서 잘못된 것으로 밝혀질 수 있는 것이 아닌가 말이다. 이런 멍청이들의 무모함을 제외한다면 뉴턴이론이 도전받았던 적이 있는가? |}}

그러나

이런 방식으로 옛 이론들을 구제하려면 그 적용범위가 매우 좁아진다. 즉 과학자들이 이미 관찰되지 않은 현상에 관하여 과학적으로 얘기한다고 주장할 수 없게 만든다. 이러한 제약은 새로움을 막고 과학의 발전을 막는다. 즉 어느 패러다임에 매이지 않고는 정상과학이란 있을 수 없다. 더욱이 그런 공약은 완벽한 전례가 없는 분야들에까지, 그리고 전례가 없는 정확도까지 확장되어야 한다. 만일 그렇지 못하다면, 그 패러다임은 일찍이 풀리지 않았던 수수께끼를 전혀 제공할 수가 없었을 것이다. 이렇게 되면 놀라움도 이상현상도 위기도 없는 과학이 되어 버린다. 즉 어떤 이론의 합법적인 응용 범위를 제약하게 되는 순간 과학자 사회에서 근본적인 새로움은 사라져 버린다. 과학자들이 그들의 이론을 가지고 자유롭게 상상할 수 있도록 해주어라. 그것이 잘못되더라도 과학은 그 잘못을 발판으로 진보하니까..

이런 나쁜 과학사가들의 이론에는 또 한가지 모순이 있다. 정말 뉴턴의 이론이 아인슈타인의 이론으로부터 유도되는가? 복잡한 수식으로 계산해본 결과 (헉헉헉 ;;;) 아인슈타인의 역학으로부터 뉴턴의 역학이 유도되려면 아인슈타인 이전에는 불가능했을 방식으로 뉴턴의 역학을 재해석해야한다. 이러한 적용의 과정에서 우리는 친숙한 개념들을 뜯어 고쳐야 하며 이런 필요성이 바로 아인슈타인 이론의 혁명적 요소인 것이다. 지구중심설에서 태양중심설로, 플로지스톤에서 산소로, 입자에서 파동으로 이르는 과정에서 일어나는 개념적 변환은 매우 파괴적이다. 이는 개념적 조직망 (과학자들이 그것을 통해서 세계를 보는) 의 변화로서 과학혁명을 말해준다.

자 이제 잇달아 나타나는 패러다임 사이의 차이는 필연적이며 양립불가능하다는 것을 인정하기로 하자. 그런데 우리는 그런 차이들이 어떤유형의 것인가에 대해 말할 수 있는가? 물론 가장 뚜렷한 차이는 그 둘이 서로 다른 이야기로 우리에게 우주의 구성요소들을 말해 준다는 것이겠다. 하지만 패러다임은 물질 이상의 것에서 차이를 보이는데, 그 까닭은 패러다임이 자연에만 관련된 것이 아니라 그 패러다임을 생산한 과학을 지탱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패러다임은 방법들의 원천이요, 문제 영역(problem field)이며, 어느 주어진 시대의 어느 성숙한 과학자 사회에 의해 수용되느 문제풀이의 표본이다. 따라서 새로운 패러다임의 승인은 필연적으로 상응하는 과학을 재정의 하도록 만드는 경우가 많다. 예날 문제들은 비과학적인 것으로 선언될 수도 있고, 사소해 보였던 문제들이 유의미해질 수도 있다. 보라...잇따른 패러다임들은 정말 양립가불가능하지 않은가. 그리고 토마스쿤은 다양한 예들로 자신의 이론을 공고히 하고 있다.

자 이제 우리는 새로운 이론이 축적에 의한 것이 아님을 알게 되었다. 그렇다면 과학자 사회의 합법적 문제와 기준에 대한 관념에 있어서는 어떠한가? 이들역시 축적적인가? 과학에서의 문제와 기준의 축적적 발전의 경우는 이론 축적에서의 경우보다 그 달성이 더욱 힘들다. 18세기의 대부분의 과학자들에 의해서 포기되었던, 중력에 대해 설명하려는 시도는 본질적으로 합당치 않은 문제를 지향한 것은 아니었다. 본유적 힘에 대한 반대는 그리 비 과학적인 것도 아니요, 어떤 경멸의 의미에서 형이상학적인 것도 아니었다. 그런 종류의 판단을 허용하는 외적인 규범은 존재하지 않는다. 실제로 발생했던 것은 기준의 몰락도 아니요 기준의 제기도 아니라, 단순히 새로운 패러다임의 채택에 의해서 요구되는 변화였던 것이다. 더욱이 그런 변화는 그 이후 다시 역전되었고, 또 다시 역전될 수 있었다.

패러다임의 인식적 기능으로부터 규범적인 기능으로 옮겨 강조한다면, 앞의 사례들은 패러다임이 과학적 활동에 형태를 부여하는 방식에 대한 우리의 이해를 확장시킨다. 즉 패러다임은 인식의 대상일 뿐만 아니라, 과학적 활동에 형태(규범)를 부여하는 방식으로도 작용한다. 그런 역할에서 패러다임은 과학자에게 자연이 내포한 그리고 내포하지 않은 실체에 대해 일러주고 그들 실체가 작용하는 방식에 관해 알려주는 기능을 한다. 그런 정보는 그 상세한 내용이 성숙한 과학적 연구에 의해 밝혀지게 되는 하나의 지도를 제공한다. 자연은 무작위로 그 베일을 벗기기에는 너무나 복잡하기 때문에 이러한 지도는 과학자에게 있어 실험 못지 않게 필수적인 요소가 된다. 앞에서도 누누히 말했듯이 자연에 대한 직접적인 인식이 패러다임에 변화를 가져오는 것이 절대로 아니다. 이러한 지도를 이용한 이론의 구체화를 통해서 우리는 패러다임이 연구 활동을 형성하는 구성 요소임을 알 수 있다.

또한 패러다임을 익히면서 과학자는 이론적 방법과 기준을 모두 획득하게 되는데, 이것은 보통 한데 뒤엉킨 혼합체로 얻어진다. 그러므로 패러다임이 변화하게 되면, 통상적으로 문제 그리고 제안된 풀이 등 양쪽의 타당성을 결정짓는 기준에서도 상당한 변동이 일어나게 된다. 이러한 면에서 패러다임은 지도뿐만 아니라 지도를 만드는 데 필수적인 <방향>을 어느정도 제공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앞에서 다루었듯이 과학자사회가 패러다임을 선택하는 문제에 대해 논리적으로 접근하는 것이 불완전한 이유에는 어느 문제들을 해결한 것이 보다 의미가 있는가?라는 것도 포함된다. 서로 겨루는 기준의 주제와 마찬가지로, 가치관에 대한 이런 질문은 총괄적으로 정상과학의 외곽에 위치한 기준에 의해서만 답해질 수 있으며, 그리고 그것은 패러다임 논쟁을 가장 확실하게 혁명적으로 만드는 외부적 기준에 의지하는 것이다.

지금까지는 패러다임들이 과학을 구성한다는 것만을 논의하였다.이제부터는 패러다임이 그 뿐만 아니라 자연을 구성한다는 것의 의미를 밝히고자 한다.

토론 or 답변


질문하나에 대한 답변:
- '혁명의 파장범위가 넓은 영역의 과학은 패러다임의 선택에 있어 사회적 영향을 더욱 많이 받게 되는가?'라는 질문에서 혁명의 파장범위를 조금 더 명확히 정의할 필요가 있다. 만일 그 파장범위가 과학영역 내부에 대한 것이라면 대답은 부정적일 것 같다. 예를 들어,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은 그 파장 범위가 과학계에 컸지만, 실제로 그걸 이해하고 있는 사람들이 거의 없으므로 무슨 압력 같은 것을 미칠 수 있는 사람도 매우 소수였고 결국 그 패러다임에 대한 선택에 있어서 사회적 영향을 거의 받지 않았다고 본다. 그러나 파장이 사회에 미친다는 뜻이라면 그 분야의 과학자들은 다른 분야의 과학자들보다 그 선택에서 보다 신중해야 하겠지만, 그것도 대중 사회가 직접적으로 인식할 수 있는 범위내에서만 그렇다고 생각한다. 예를 들면, 배아 복제와 같은 것이 대표적일 수 있는데, 이 실험은 유전자 연구에서 아주 부분을 차지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모든 유전 연구와 실험(패러다임^^?)을 모두 허용하면서도 유독 인간의 배아 실험에서는 갈팡질팡, 엄청난 사회적 영향을 받고 있다고 하겠다.

퀴즈에 대한 답변:객관식으로 하죠!^^;; 찬성, 찬성!!!

이해 or 오해: 축적적인 성격의 정상과학이 그 성공을 거두는 것은, 과학자들이 주어진 도구로 할 수 있는 일만을 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게으른 과학자들이다... -_-;;; (이것은 기존 지식이나 기술에 대한 관계에 상관없이, 유용한 문제들에 지나친 관심을 두는 것이 과학적 발전을 쉽사리 방해할 수 있는 이유가 된다.).에서 이 이해한 것과 좀 다릅니다. 이런 과학자들이 성향이 필연적으로 위기를 불러일으켜서 혁명을 가능하게 한다는 것이 논지가 아니었던가요? 즉, 수많은 과학자들이 퍼즐 풀이가 매우 중요하다는 것으로 이해했습니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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