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원토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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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leteMe '구원이 필요한가?' 에서부터 의문을 갖고있는 사람도 많습니다. ExtractPage를 하시려면 구원토론으로 하시는게 옳을것 같습니다. --벨로린
DeleteMe 페이지이름바꾸기에 대한 의견을 받습니다.
구원의필요성토론 정도가 어떨까요? --ilzamusik


... 용어 정의가 우선인 듯 싶습니다. 구원은 '하다형 타동사' 이기도 하고 '되다형 자동사' 이기도 하며, 기독교에서의 의미는 '인류를 죄악과 고통과 죽음에서 건져내는 일' 이라고 하는군요. 벨로린은 '되다형 자동사' 로서의 구원, 즉 그로 인해 인간이 도달하는 상태A 에 더 관심이 있습니다만.

musiki벨로린님이 말씀하시는 인간이 도달하는 상태A구원이라 부르기보다는 해탈이나 득도로 표현해야 함을 거듭 설명했습니다. "구원"이라는 단어에 대한 집착을 버리시기 바랍니다. 구원은 기독교에서만 주장하는 것이며 "스스로를 구원하다"라는 표현은 한국어에 없습니다. "남을 구원하다"만이 구원입니다. 신이 인간을 구원한것에 한해 말하는 것입니다. 그밖의 것에 대해 구원이라는 표현으로 혼동을 야기하는 행동은 더이상 삼가해줄 것을 요청합니다.

... 혹시 '나는 구원되었다 ' 를 해석할 능력이 없으신지요? 아니면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 라는 말을 전혀 들어본 적이 없으신지요? '예수가 인간을 구원했다 ' 만 구원이라는 편견은 버리세요. 벨로린은 ' 구원된 상태A ' 가 대체 어떤 상태인가가 의문인 겁니다. '해탈' 이나 '득도' 나 '득햏 :) ' 은 스스로의 힘으로 상태A 에 도달 했을때 쓸수 있다- 고 하시면 동의해 드릴 용의도 있습니다만 현재의 musiki님의 요청은 별로 이치에 닿지 않는다고 느껴집니다. 그리고 '신이 인간을 구원했다' 라는 문장의 어디에 토론의 여지가 있는지 상당히 궁금해 지는군요. --벨로린

문제는 musiki벨로린님의 해석능력보다 한국어에 수동태가 명쾌하지 않음에 둬야 겠군요 :) 사실 토론의 여지가 없는 것에 너무 얽매여 토론해온 듯도 합니다. 일단 해탈이나 득도는 스스로의 힘으로 절대지의 상태에 도달하는 방법입니다. 구원은 신의 힘으로 절대선의 상태에 도달하는 방법이구요. 구원되다는 수동태로 해석해야 정확합니다. 구원은 받는것이지 스스로 이루는게 아님은 골백번 설명했습니다. 인간 스스로 이룬다 하시는 능동태구원(save)은 유지에 가깝지 구출에 가깝지 않습니다. :) 그러므로 "구원"보다는 해탈이나 득도 등의 다른 용어로 표현해줘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지요. 또한 이미 능력을 상실한 인간의 경우 능동적 구원이 아니고 신의 수동태구원을 요구하는 겁니다. musiki가 여태 설명한 것은 구원이란 개념은 수동태에 한해서만 쓸 수 있다는 의미죠. 유지가 아니라 구출을 의미하는 겁니다. --musiki
해탈로 도달하는 상태와 구원으로 도달하는 상태가 서로 다르다는 말씀이신지? 이건 나중에 좀더 이야기하기로 하죠. 데, 글을 바꾸면서 의미가 상당히 이상해 졌는데요? --벨로린

틀립니다. 기독교적 관점에서 믿음을 지불하지 않은 상태B믿음을 지불한 상태C는 분명히 다릅니다. 또한 구원된 상태A 는 믿음을 지불한 상태C 에서만 천이 가능한 상태이며, 믿음을 지불하지 않은 상태B 를 구원된 상태A 라고 칭하기에는 상당한 무리가 있습니다. 게다가 인간의 default 상태값믿음을 지불하지 않은 상태B 입니다. 믿음을 지불하기 위해서는 먼저 기독교리에 대한 지식이 필요하며, 그 지식은 타고나는게 아니기 때문이죠. 즉 예수가 하는 구원은 '유지' 보다는 '구출' 에 가깝습니다. :) --벨로린

구원받은 상태는 해탈이나 득도의 상태보다 어설픕니다. 죽어야 완성되거든요. 해탈이나 득도는 살아서 완성한 사람도 존재했겠지만 구원받은 사람은 별로 티가 안납니다. :) 밑에도 말했지만 구원받기 전에 성질 더럽던 사람은 구원받은 후에도 성질 더럽긴 마찬가지죠. :) 사실 인간 태생은 모두 구원된 상태 그대로니까요. 믿기 전에 구원받았다와 믿은 후에 구원받았다는 교파에 따라 해석이 다릅니다. 그러나 대개의 경우 믿기 전에 구원받은 것으로 표현합니다. 믿음을 지불하고 구원을 선물로 받는건 초심자에게 이해하기 쉬우라고 하는 설명이지 본질은 결코 아니라는 의미입니다. musiki의 개인적 견해는 믿음은 단순히 구원받음 자체에 대한 수용입니다. 벨로린님도 이미 구원받았다니깐요. :) 하지만 믿지 않으면 거부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musiki
... 글쎄요. 벨로린이 세상의 죄악과 고통과 죽음에서 자유롭긴 하지만, 예수나 야훼의 힘은 아닙니다(반면교사로의 역할은 충실하긴 했지만). 구원받았다고 하심은 벨로린을 비웃기 위함으로 들리는군요. :) --벨로린
ChatMate님은 다행히도 그렇게 안받으시던데요 :) 이것은 musiki 개인의 견해가 아닌 알미니안주의의 "만민구원설"이라는 견해입니다. 물론 musiki는 칼빈주의 교회에 다니지만, 벨로린 님도 구원받았다는 것은 감리교 전체의 교리입니다. --musiki

... 그런데, 구원이 정말 필요하긴 합니까? --벨로린
첫질문으로 구원이 필요한 것인지를 묻고 다음에 구원자체에 대하여 토론해도 될 것같은데요. 페이지가 커지면 ExtractPage하면 될 듯 합니다.--잡종

musiki는 농담처럼 맨땅에 헤딩이 어려워서 구원을 택했다고 말했습니다마는, musiki 개인의 취향이나 신념에 의거하면 진심입니다. 결코 불교 자체를 비난하려는 의도보다는 해탈의 난이도가 높음을 다소 시니컬하게 비유했다는 점을 양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musiki의 말투가 원체 시니컬해서 심지어는 musiki가 믿는 기독 교나 신 자체에 대해서도 그런 과감한 표현을 서슴치 않습니다. 해탈의 난이도는 구원받는 난이도에 비하면 매우 어려운 레벨입니다. 심지어 바울은 그의 책에서 "의인은 한사람도 없다"라고 말했을 정도로 절대선이나 절대지에 이르는 길은 매우 어려운 길입니다. 쉽게 이룰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몇 안되실 것입니다. 스스로 절대지나 절대선에 도달할 자신이 있는 사람은 구원이 필요없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은 모든 사람들은 구원이 필요하다고 믿고 있습니다. --musiki
DeleteMe ... 가보지도 않고 쉬운지 어려운지 어떻게 아시죠? :) --벨로린
구원은 성립조건이 까다롭지 않거든요 :) --musiki
노예가 된다면야 스스로 생각할 필요가 없기는 하겠죠. :) --벨로린

... 질문을 약간 잘못 이해하신것 같습니다. 다른 존재(존재하는지도 의문이지만)에게 도움을 받느냐 마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과연 인간이 절대지나 절대선(역시 존재하는지도 의문이지만) 따위에 도달해야 할 필요성이 있는지 부터가 의문스럽다는 것인데요. SeeAlso 왜사는가 --벨로린

왜사는가에 대한 답변은 우선 우리가 4대성인이라 부르던 선지자들은 어떻게 생각했는지를 참 고한다면 좋은 참고서가 될 것입니다. 소크라테스는 "조물주의 뜻에 맞게 사는 것"을, 공자는 "하늘 뜻에 맞게 사는 것"을, 예수 는 "하나님의 뜻에 맞게 사는 것"을 제시했고 부처는 "인생은 고통일뿐이며 더이상 살아지지 않는것이 삶의 목적"임을 제시했습니다. 부처는 절대지를 강조했고 나머지는 신의 뜻대로 사는 것을 강조했습니다. 이렇듯, 각 종교에 따라 절대지나 절대선, 혹은 구원을 받을 필요가 있는지 유무나 형태는 다소 다릅니다마는, 이중 한가지 이상을 요구하는 것이 거의 트렌드라 하겠습니다. 물론 이상은 단 순히 참고일 뿐이고, 기독교적 세계관을 설명드리고 "그러한 세계관이 맞다면 이해할 수 있겠다. 그러나 난 그 세계관 자체를 믿지 않는다." 정도로 무신론자 혹은 비기독교인들을 이해시킬 수 있다면 musiki로서는 가장 성공적으로 설명한 토론이 될 것이고, 실패한다면 다시 기심과한국종교musiki처럼 비난받게 될 것입니다.

이하의 내용은 기독교적 관점에서 매우 위험한 부분이므로 musiki의 표현은 단지 비유로 만 이해하시길 권하겠습니다. 절대로 기독교의 교리로 일반화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노시스학파의 의견을 취합한 것이므로 이단의 여지가 있음을 강조합니다. musiki가 차후로 얘기하는 절대지는 신에의 도전을 의미하고 절대선은 신에의 순종을 의미합니다. 어째서 그리 된 것인지는 문맥을 보시면 이해하실 수 있을 겁니다. 성서에 의하면 절대지는 신에 의해 접근을 금지당했던 것이고 절대선의 영생은 허락받은 바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뱀의 꼬임에 넘어가 영생의 나무를 먹지 못하게 되고, 절대 지의 나무의 열매를 먹게 됩니다. 신은 이러한 절대지에 인간이 접근하여 이른바 "해탈"의 여지를 얻어낸데 대해 매우 크게 우려합니 다. -역시 표현은 전부 이해하기 쉽도록 갖다붙인 겁니다.다시한번 강조합니다.- 그리고 인간은 초창기의 낙원, 즉 에덴에서 쫓겨나 고 차후의 출입이 봉쇄됩니다. 또한 인간은 죄의 결과로 죽음을 맞이하게 됩니다. 인간은 점점 죄로 점철져지고 신과 인간의 사이를 점차 차단하면서 신과 인간의 커뮤니케이션은 차차 단절됩니다. 이러한 소통의 문제로 인간사회에서 신의 존재는 차츰 잊혀지고 인간은 신의 초기 형상을 전혀 찾아볼 수 없는 현재의 모습이 되었습니다. 인간은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신의 초기형상으로 돌아가 야 하고 이를 위해서는 신과의 소통이 필요합니다. 이러한 연유로 항시 존재했고 그 체계를 유지해야 했던 것이 바로 종교입니다.

절대지나 절대선에 도달하지 않는다면 발생하는 문제는 하나입니다. 바로 죽음의 문제입니다. 이 러한 죽음의 문제는 죽은 후 다시 살아나는 윤회가 아니라 영원한 죽음을 의미하기에 더욱 큰 문제가 발생합니다. 자아 소멸의 문제는 인간 자아에 있어 가장 큰 문제점임은 부정할 수 없는 일입니다. 인간들이 두려워 하는 것은 희화화된 지옥불이 아니라 "죽은 후 모두 끝이라는 자아소멸의 문제"입니다. 인간은 죽음의 공포를 해결하기 위해 해탈하거나 득도하거나 이도저도 아니면 구원을 요청합니 다. 예수는 마침 제삿밥으로 인간의 죄를 덤터기 쓴 채 죽었습니다. 인간의 죽음은 바로 죄에서 비롯된다고 하였습니다. 죄가 없다면 죽음도 없습니다. 구약시절 죄의 문제를 해결할 한가지 방법으로 인간들은 죄없는 동물에 자신의 죄를 뒤집어 씌워 대신 죽음을 가함 으로서 자신의 죄를 용서받을 수 있었습니다. -참고로 기독교 세계관에서 동물들은 인간을 위해 신이 내린 것이므로 동물을 죽이는 것 은 범죄에 들어가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제사의 방법을 죄없는 인간 한사람이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인간을 위해 모든 죄를 뒤 집어 쓰고 제삿밥으로 죽은 겁니다. 그 죄없는 인간 한사람이 바로 초인이라 불리어지는 예수(Jesus)입니다. 제자들은 그가 하나 님의 아들임으로 무죄할 수 있었다고 믿고 있고 제자들 중 요한(John)은 심지어 예수가 하나님과 동일체임을 파악해냅니다. 이러한 부분은 깊고 어려운 교리이고 요한은 그노시스학파가 매우 주지했던 인물로서 예수와 인간적으로 가장 가까이 있었고 예수의 비밀을 가장 가까이서 직접 관찰한 인물임을 알 수 있습니다. 3개 복음서와 요한의 복음서는 매우 관점이 달랐던 점을 알 수 있습니다. 각설하고, 이러한 "죄의 문제의 해결을 예수가 대신 했고 인류는 죽음에서 구원받았다는 것"이 복음주의자들의 복음의 전부입니다.

이러한 구원의 절차는 매우 쉽습니다. 사실상 모두 구원받은 것이고 이점이 사실이고 아니고를 떠나서 믿기만 하면 최소한 그사람의 세계관에서 그사람은 구원을 받은겁니다. 이제 구원받은 후에는 또한가지 진리를 알 수 있습니다. 이사람이 진실되게 믿고 있는 한 실제로 내세가 있고 없고는 큰 문제점이 안됩니다. 그사람의 세계속에 내세는 분명 있고 내세를 위 해 신의 뜻을 더 따르도록 노력할 것입니다. 신을 따르다 시간을 보낸 사람들은 인생을 허비했을까요? 아닙니다. 이것이 진리이든 아 니든 그들은 그속에서 최소한 행복했고 신을 위한 삶 속에서 인격을 완성했건 스스로 자기최면에 진리를 왜곡해서 보고 살았건 이들의 삶은 실패했다거나 불행했다고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매트릭스 안의 삶이 '깨달은이'들의 삶보다 행복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사람 들이 한사람 한사람 늘어나면 내세가 실제로 존재할 필요없이 현세가 낙원이 될 수 있습니다. 신이 있다고 실제로 실감하고 마음속깊이 믿는다면 사회는 이렇게 될 수 없습니다. 문제는 대다수의 인간이 이러한 능력을 이미 상실했다는 점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를 다니더 라도 실제로 믿음이 유지되는 예는 생각처럼 많지 않습니다. 이러한 문제들이 현대 교회들의 문제점을 야기시키고요. 한명의 해탈한 부 처가 이세상에 얼마나 큰 반향을 일으켰습니까. 석가는 모든 사람이 부처가 될 수 있다고 했습니다. 예수는 누구나 구원받을 수 있다 고 했습니다. 이들은 만민에게 절대지나 절대선에 이를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주었습니다. 인간을 본연의 신의 모습으로 돌려놓을 수 있는 것입니다.

왜 그 길을 가야 하냐고 묻는다면 musiki는 그것이 인간의 본연의 모습이기 때문이라고 답변하겠습니다. 그러나 많은 분들이 이점에 동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어짜피 주어질 죽음에 초연하시다면 그 길을 가십시오. 하지만 musiki는 그것을 원치 않는다는 것 정도만 이해하시기 바랍니다. 좋은게좋다라고 더 좋은 길을 얻을 수 있는데 해 보지도 않고 포기하는 사람들을 보면 안타까울 수 있습니다. 해탈이 길이 어려운이 구원의 길이 어려운지는 현재 산 사람은 답변할 수 없습니다. 지금 잘 선택하시고 자신의 길을 가십시오. 이게 아니다 돌아와서 다시 걸을만큼 짧은 길이 아닙니다. 일생을 다바쳐서 걸어가고 죽어본 후에야 이 길이 옳았다 그르다 답할 수 있는 것입니다. musiki를 포함한 모든 사람들은 어디가 길인지 모르 고 걷는 것이 맞습니다. 갈래길은 여러 길입니다. musiki는 특별히 커다란 절대명제 없이 길"기독교"를 걷고 있습니다. 왜 사람들이 길 "불교"나 "이슬람"을 걸어보지도 않고 기독교가 옳은 길이라 여기느냐 라고 물으신다면 할말은 없습니다. 그러나 걸어 보고 어느 길이 옳았다 말할 때쯤 musiki는 이미 이세상 사람이 아닌 겁니다.

구원이 필요한가 아닌가는 신이 허락했고, 인간이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필요한 자는 오시고 필요없는자는 가시면 됩니다. 인간의 마지막 자존심을 지키고 영원한 죽음을 택하는 것도, 신의 뜻에 순종하며 영원한 삶을 택하는 것도, 나름대로의 가치가 있는 삶이라고 생각합니다. 문제는 인간의 능력으로 더이상 해탈이나 절대선의 가능성이 남아있는가 아닌가에 대한 의문점이겠지만 복음주의자들은 이에 대한 기대를 더이상 접고 신에게 온전히 기댄 듯 싶고 가톨릭의 경우엔 아직 이러한 기대를 접지 않았다... 정도로 이해하시면 좋겠습니다.


많은 분들이 착각하시는 점이 있습니다. 사실상 기독교가 말하는 구원은 기독교인에게만 있 는 것으로 봅니다. 구원의 말의 원뜻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분들이 대다수인데 대해 우려를 표합니다. 구원이란 남에 의해 구조받는경우만이 존재하며 나 스스로 구원하는 일은 없습니다. 물에 빠졌다가 스스로 헤엄쳐 나왔으면서 "내가 나를 구원하였다. " 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용어 선정 자체가 틀립니다. musiki는 천국에 나가는 길이 두가지가 있다고 봅니다. 하나는 예수 가 우리를 구원해 줄것을 믿음으로 구원받는 것이고 하나는 자기의 능력으로 초인이 되어 천국을 정복하는 것입니다. 전자는 구원 이라 칭하고 후자는 해탈이라 칭하겠습니다. 부처는 해탈의 길을 열었고 예수는 해탈할 수 없는 이들이 자기의 능력을 빌어 구원받도록 하는 길을 열었습니다. 구원의 길은 분명 기독교(개신교와 천주교)에만 존재하며, 다른 길로 구원받을수는 없습니 다. 구원의 길은 오직 예수이고 나머지 길은 자기 스스로 걸어들어가는 길입니다. musiki가 기독교를 믿는 이유는 언급을 회 피하겠습니다. --musiki

정확히는 잘 모르지만 불교도 부처님에게 귀의하는 교리가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잡종

세상에는 겉보기와는 다른 게 많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답안지 보면서 수학의정석을 푸는 것이 직접 푸는 것보다는 쉽고 편한 길처럼 보이지요. 그러나 진정한 구원은 "좁은 길"에 있나니... :) --Puzzlist

물론 이러한 불교의 소승 외에도 기독교 계열 역시 절대지를 통해 해탈을 얻는다는 -musiki가 임의로 불교적 표현을 빌린 것입니다.- 그노시스학파 가 있었습니다. 물론 현재의 불 교와 기독교는 이러한 자기수양과 절대지를 통한 해탈에 이르는 소승과 그노시스학파는 다소 비주류거나 혹은 이단으로 배척되고 있는 경향으로 보여지며, 대승복음주의가 주를 이룬다고 하겠습니다. 그러나, 그 주류가 아닌 원류 를 찾아 이치를 따지자면, 불교의 원류는 분명 소승이며, 기독교의 원류는 복음주의가 옳습니다. 부처에 귀 의한다는 의미는 흔히 대승불교에서 구원을 의미하는듯이 표현되나, 이는 구원이라는 단어 자체가 기독교적 의미로 잘못 활용되면서 이를 불교에서 임의 차용하게 된 경위로 보여집니다. 이러한 이유로 불교 본래의 본의보다는 이미 기복신앙화된 기독교적 표현을 빌린 측에 근접하며, 다소 원류에서 왜곡된 형태의 기복신앙적으로 변질된 교리에 가깝다 하겠습니다. musiki가 생각하는 귀의의 원 의미는 구원과는 다소 다른 의미인것으로 보여집니다. 부처라는 초월적 존재로서의 가치에 의지해 구원을 비는 의미라기보다는 부처 라는 절대진리로서의 가치를 깨닫기 위해 이를 갈구하는 의미 정도로 해석하심이 옳을 듯 싶습니다. 불교에서의 부처란 특정 신을 의미 하는 것이 아니니까요. --musiki
벨로린은 '복음주의' 가 정말 원류인지 의심스럽습니다. 그노시스학파 관련 문서는 예수 이전 시기까지 거슬러 올라갈뿐더러, 복음주의는 바울에 의해 주류가 되었을 뿐이라는 이론도 있으니까요. --벨로린
기독교의 원류는 복음주의 맞습니다. :) 그노시스학파의 시발점은 유대교 계열이죠. --musiki
말하자면, 벨로린은 기독교를 복음주의를 선택한 유대교 계열 로 보고 있습니다. 그리고 복음의 주체로서 '예수' 를 언급하면서부터 '기독교' 라는 이름이 붙었고요. 그런데 벨로린이 보기에는 '예수 ' 의 역사성은 그다지 신빙성이 없었거든요. :) --벨로린 동의한표 ilzamusik

예수를 구원자로 받아들여서 구원을 받는다는 의미에서의 구원은 기독교에 밖에 없지요. 불교나 이슬람교에서 구원을 받으려면, 혹은 해탈을 하려면 예수를 믿어야한다고 하지는 않으니까요. 기독교 문제가 지적 됐을때 마다 불교를 걸고 넘어가려는 시도는 뭔지 모르겠습니다.

불교의 해탈 개념보다 기독교의 구원 개념이 더 쉬워보여서 선택하셨다는 musiki님의 말 씀은 농담일거라고 생각하지만, 불교의 해탈은 맨땅에 혼자 헤딩하기다 라는 말씀은 언듯 비하의 의도를 가진듯 들립니다. 역시 오해가 있는 듯 싶습니다. 대승불교의 구원 개념이 기복신앙적이다라는 지적에는 괴물눈깔도 동의 합니다만, 괴물눈깔은 똑같은 이유에 서 기독교 역시 기복신앙적이라고 보는데, musiki님은 대승불교는 기복신앙이지만 기독교는 기복신앙이 아니라고 주장하시는듯 합 니다. 그에 대한 근거라도 있는것인지요? --괴물눈깔

musiki : 어떻게어떻게 해서 구원을 받는다라는 말 자체도 구원이라는 단어에 대한 오해들 중 하나입니다. 구원은 100% 구해주는 사람이 구해주고 싶으냐 아니냐에 달렸습니다. 누가 무얼 해서 구원받는다 는 말 자체가 말이 안되지요. 자신을 구원한다는 말과 똑같이 말입니다. 불교는 구원이라는 개념이 아니라 해탈의 개념이라는 겁니 다. 해탈과 구원은 전적으로 다름을 이해해주시기 바랍니다. 불교를 예로 든 것은 기독교와 불교는 전혀 다른 기반을 가지고 있고 이 두가지 분야의 대표자라 할 만 하기 때문입니다. 이점은 공감하실 수 있으리라 봅니다. 남의 힘으로 구원받는 쪽과, 자신의 힘으로 해탈을 이루는 것. 그리고 기독교가 기복신앙이라는 근거가 더 궁금합니다. 몇번째 말해두지만 내세의 복을 비는 것을 기복신 앙이라 하지 않습니다. 현세의 복만을 비는 것이 기복신앙입니다. 내세의 복을 비는 것조차 기복신앙이라 한다면 지구상의 모든 신앙은 기복신앙이며 이러한 기복신앙에 대해서 musiki는 아무런 문제제기를 할 이유가 없어집니다.

Puzzlist : 그러면 기독교는 현세의 복을 빌지 않는다는 말씀이신지요? 전에 누군가 가 "시험 전날 간절히 기도를 했더니, 시험 볼 때 눈앞에 교과서가 보이더라. 역시 기도에 응답해 주신 하나님은 위대하신 분"이라 며 감사에 몸을 떠는 걸 본 적이 있는데, "시험 잘 보게 해 달라"는 건 기복신앙 아닌가요? 그나저나 그 녀석 나한테 걸렸으 면 컨닝으로 무조건 0점이다.

musiki : musiki는 이러한 기독교의 행각이 기복신앙으로 변질된 기독교의 형태라며 비판하였습니다. 제대로 된 기독교인이라면 자신의 시험을 잘보는 것을 구할 시간에 하나님의 뜻이 이땅에 이루어지기를 기도 합니다. 그리고 천국에서 자신의 상을 크게 해주기를 기원합니다.

Puzzlist : 아, 그렇다면, 불교뿐 아니라 "제대로 된 모든 종교"는 기복신앙이 아닙니다. :)

musiki : 물론이죠. 동의한표입니다. 불교이든 이슬람이든 기독교이든 모두 기복신앙과는 동떨어져 있어야 옳은 것 아니겠습니까. (처음으로 동감하시는 분이 나타났습니다. T_T)

Puzzlist : 그런데 musiki 님께서 당위와 사실을 혼동되게 표현한 것은 옳 지 않습니다. "기독교가 기복신앙이 되어서는 안 된다"와 "기독교는 기복신앙이 아니다"는 전혀 다른 말이니까요. 게다가 현 재의 기독교는 - 다른 종교도 별반 다를 것 없지만 - 기복신앙의 모습이 다분하잖습니까? 예를 들어, 시험 볼 때 교과 서가 보였다는 넘. 저의 동감을 너무 믿지 마세요. :)

musiki : '기독교가 기복신앙으로 변질된 것이 한국 기독교의 문제다' 라고 한 것은 musiki가 3~4일 전부터 내세웠고 숱한 화제를 뿌렸던 화두기 때문에 알고 계셨으리라 제 맘대로 추측하고 그리 쓴겁니다. T_T 근본적인 기독교는 기복신앙과는 동떨어져 있던 것이, 기복신앙적으로 변질된 것이 문제의 발단이며 한국에서는 이 정도 가 좀 더 심하다는 것이 musiki의 지론입니다.

Puzzlist : 네. 그것은 알고 있습니다. 다만 위쪽 몇 개의 글에서 보듯, "기독 교는 기복신앙이다" 대신 "기독교의 본질은 기복신앙이 아니다"나 "기독교는 기복신앙이 되어서는 안 된다"로 더 정확히 써 주셨으면 하는 생각에서 드린 말씀이었습니다. 아래에서 "정의"를 명확히 하신 것처럼요.

musiki : 옙. "기독교의 본질은 기복신앙이 아니고", "이미 기복신앙으로 변모한 한국 기독교는 본질로 회귀하여야만 한다" 라고 정리합니다.

내세의 복을 비는 것을 기복신앙이라 하지 않습니다. 현세의 복만을 비는 것이 기복신 앙입니다. 라는 정의는 수쟁이들이 기독교는 기복신앙과 다르다고 어필하기 위한 의도로 정의한 것으로 의심됩니다. 어떤 사 전을 뒤져봐도 '기복' 이란 단어에서 현세와 내세를 구분하지는 않던데요. 더우기 현세와 연결되어있는 내세라면 내세의 복 역시 현세 와 연결되어 있는 것이 아닌가- 라고 생각하는게 타당한 듯 여겨집니다. --벨로린

musiki : 알겠습니다. musiki가 지금까지 정의(Define)하고 표현해온 기복신앙은 현세의 복을 비는 신앙에 한정합니다. 라고 다시 말하겠습니다.

벨로린 : 좋습니다. 그럼 '부처님께 귀의하여 해탈하는것' 의 어디에 기복신앙적 요소가 있는지 말씀해 주실 차례군요.

musiki : 그건 단순히 앞의 분이 '부처님께 귀의하여 구원받는것'의 의미로 설명하는 대승불교의 교리는 무엇이냐? 는 질문에 답하기 위한 과정이었지 이 자체가 기복신앙을 담고 있다는 말은 아닙니다. 기복적인 의 미로 구원 이란 단어가 쓰의면서 마치 불교도 남의 구원을 바라는 양 변질되는 이해를 막기 위해 설명한 과정의 일부 분 입니다. 그부분을 너무 깊이 파려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안중요합니다. 불교와 기타 고급 종교의 본질은 기복신앙적이지 않습니다.

벨로린 : ... 소승과 대승에 대해 뭔가 잘못 알고 계신것 아닌지요? 소승불교는 자신의 해탈을 위한 것이 맞지만, 대승불교는 남과 함께 해탈하기 위한 것입니다. 불교도 남의 '구원'을 바란답니다. :)

musiki : 말씀하신 구원의 의미가 '남 대신 해탈해서 남을 구원해주길 바란다' 는 의미는 아니겠죠? 기독교의 구원은 예수가 남들의 해탈을 대신해줘서 해탈에 이르지 않고도 말그대로 구조받을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니 그러한 구원의 의미와 다르다는 말입니다.

벨로린 : 기독교에서 쓰인 '구원'은 기복적인 의미가 아닌데 불교에서 쓰인 '구원'은 기복적인 의미란 말씀입니까? 어째서 그런지 설명해 주셨으면 좋겠군요.

musiki : 그점을 계속 파느니더 원론적인 설명을 하는게 토론최소주의에 입각한 토 론일거라 생각하고 말하겠습니다. 애초부터 '구원'은 불교의 교리가 아니며, 한국인들이 해탈에 대해 잘 모르고 기독교의 구원의 개념 에 해탈을 연계해서 생각하는 문제때문에 구원이라고 표현한 듯 싶습니다. 불교에 "구원"은 없습니다. 이러면 그점은 다시 토 론할 필요가 없겠죠?

벨로린 : 부족합니다. 대신 불교에는 해탈이 있습니다. 도 덧붙여 주시지 않으면 musiki님은 기독교적 관점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느낌을 지우기 어렵습니다.

musiki : 어감이 그런거겠죠 :) 이 단락에서 논하는건 해탈이 아니라 구원입니다. 논지를 파악하시면 그런 오해는 없을텐데요. 해탈과 구원은 다르므로 서로 비교하면 안됩니다. 오히려 해탈을 구원의 아류 따위인양 오 해하게 만들면 오히려 불교의 진리를 왜곡시키고 폐를 끼치는 겁니다. 은연중에 구원이 더 높은 가치인양 세뇌당하신것 아닙니까. :)

벨로린 : 아뇨. 구원을 해탈의 아류로 생각합니다. 스스로 벗어나는게 남에게 도움을 받는 것보다 좋은거라고 여기니까요. :) 해탈과 구원은 다르므로 서로 비교하면 안됩니다라고 생각하신다면, musiki님부터 비교하지 마세요. 자꾸 불교를 걸고 넘어지지 마세요.

musiki : '걸고 넘어졌다'라는 표현이 잡종님에게 폐가 되기 때문에 그런 의미로 표현하시길 권하지 않습니다. 불교와 비교하신것은 잡종님이고 musiki는 이에 대해 알기 쉬운 설명만을 드렸을 뿐입니다. 이러이러해서 다르다고요.

벨로린 : musiki님께는 musiki가 기독교를 믿는 이유는 전자가 훨씬 편해보이고 가능성있게 보이기 때문입니다. 맨땅에 혼자 헤딩하는건 너무 어렵거든요. 라는 문장이 비교로 보이지 않으실지도 모르지 만, 벨로린에게는 충분히 비교로 보입니다. :)

Puzzlist : 저도요. :) musiki님은 나름대로 객관성을 유지하려고 노력하시는 것처럼 보입니다만, 여기서 한계 비스무레한 게 보이는 듯.

musiki : musiki 개인의 입장에서 해탈보다는 구원이 쉽다는 얘기였을 뿐입니다. 불교는 Puzzlist님 말씀대로 어느정도는 '답안지 보면서' 해탈의 길을 가는 것이기 때문에 '맨땅에 헤딩하는 해탈'과는 다르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musiki가 어떤 이유로 어떤 성향을 선택했느냐는 musiki 개인의 취향이기 때문 에 공감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이견이 있으셔도 musiki는 이에 태클을 걸 이유가 없고 개개인의 신념 그대로 간직하시면 됩니 다.

벨로린 : 오독하지 마시지요. Puzzlist님의 답안지 언급은 기독교에 대한 것입니 다. 또한 벨로린musiki님의 '비교' 를 문제삼은 것이지 '선택' 을 문제삼은 것이 아니라는 점도 지적해 둡니다. 벨로린 역시 musiki님의 취향에는 공감할 필요성을 느끼지 않습니다. :)

musiki : 오독이 아니라 나중에 Puzzlist님께서 수정하셨더군요. 단순한 취 향에의 표현이 오해의 여지를 불러일으키므로 이점 사과하겠습니다. 또 musiki의 취향과 본 토론과 무관하오니 관련 내용 삭제 하도록 하겠습니다.

DeleteMe 감사합니다. 이제 다른 논점으로 넘어갈 수 있겠군요. :) -- 벨로린

뭔가 musiki 씨와는 대승과 소승에 대한 이해부터 다르고, musiki 씨가 다른 분들과 하시는 토론도 ChatMate가 생각하는 방향과는 다르게 진행되는듯 합니다. 뭐, 딱히 ChatMate가 생각하는 방향으로 가야한다는 법이 있는 것도 아니니 ChatMate는 좀더 천천히 생각을 정리해가면서 가겠습니다. 아무래도 금방 말이 나오는 것과 이야기가 길어지는 것이 있다 보니, 그것이 손을 대는데 머뭇거림의 차이로 연결되는군요.

벨로린이 이해하기로는, 결국 수쟁이들이 말하는 '구원은 기독교에만 있다.' 라는 문 장은 '예수님에 의한 구원은 기독교에만 있다.' 라는 문장의 축약형이라는 말인것 같은데, 제가 이해한게 맞나요? 그렇다면 전혀 토 론의 대상이 되지 않을 것 같습니다만.

당연하죠 :) 좀 더 확장해서 ' 남이 구원해주는 개념 자체가 기독교에만 있다'라는 것이 musiki의 지론이고요.

원죄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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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연합니다. 남이 설정한 '원죄'라는 개념이 기독교에만 있고 (혹시 다른 종교에도 있다면 알려주세요) 종교라는 것이 병을 주면 약을 주어야 성립할 수 있는 것이니 그에 따른 상응하는 대가로 '원죄 개념을 부여한 남이 구원을 해주는' 것도 기독교에만 있는 것이겠지요. 저 위에서 사용하신 비유를 차용해 본다면 일단 물에 빠뜨려 놓고 다시 건져주는정도가 적절하겠군요. --ilzamusik

musiki : 물에 빠진 것은 인간들 스스로이지 신에게 책임을 전가하지는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 원죄는 우리가 만든 우리의 소유물이지 누가 억지로 집어준게 아닙니다.

Roman : 그건 기독교가 주장하는 바입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이 사실이라고 확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기독교인들이 그렇게 생각하고 믿는 것이지, 믿지 않는 사람들이 당연히 그렇게 생각해야만 할 이유는 없습니 다. 그것도 정통 기독교임을 표방한 사람들의 신앙의 영역일뿐입니다. 토론과 기독교에 대한 이야기를 함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이곳 에 있는 사람들이 당연히 그렇다고 생각해야할 신앙의 영역은 없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신도가 되려고 하는 사람도 기독교의 교회에서 그러한 신앙의 믿음을 자기자신과 일체화 된 것으로 느끼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필요할 경우가 있습니다. 토론이나 논쟁 중에 믿음의 영 역을 강조하는 것은 올바른 방식이 아니라고 봅니다. 여기가 만약 교회이고, ilzamusik님이 신도로서 musiki님으로 부터 신앙에 대한 가르침을 받는 중이라면, musiki님의 방식은 옳습니다. 그러나 여기는 교회가 아니고, ilzamusik님은 신도가 아닙니다.

musiki : Roman님 말씀이 옳습니다. 더 자세히 설명해야 겠군요. . musiki는 간혹 교회에서 가르치는 교리와 musiki가 이해시킬수 있는 상식적 비유와 어느쪽으로 설명해야 할지 고뇌를 많이 합니다. musiki식대로 설명합니다. 원죄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인간을 모두 원죄와 그로인한 지옥으로 빠뜨리는 것은 어 느정도는 인간이 만들어낸 교리의 올가미에 불과합니다. 신에게 책임을 전가하지 말라는 것은 이러한 의미입니다.

ilzamusik : ilzamusik이 아는 바와 달라 부연합니다. 위에서 musiki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그리고 인간은 초창기의 낙원, 즉 에덴에서 쫓겨나고 차후의 출입이 봉쇄됩니다. 또한 인간은 죄의 결과로 죽음을 맞이하게 됩니다. 이것이 기독교에서 말하는 원죄라고 ilzamusik은 알고 있습니다만..

musiki : ilzamusik님의 표현이 맞습니다. musiki는 비기독교인의 상식에 가정하고 토론을 이뤄야 한다는 Roman님의 제안에 따라 설명방향을 바꾼 것이지만 이정도면 기독교인들보다 더 정확한 이해를 가지고 있다고 보여지므로 원론적으로 답합니다. musiki가 제시한 문제는 이러한 원죄가 낙원에 갈 길을 원천적으로 막 은 것은 맞지만 선택적 구원을 받은 자들에 한해 천국에 갈 길이 열렸다는 주장으로 연장되어 무조건적인 예수를 통한 구원 외에 낙원 에 갈 길을 원천봉쇄한 것에 대한 우려인 것입니다. 분명 예수의 이전에도 죽지 않고 하늘에 직접 올라간 사람들은 있었듯 무조건 예 수의 구원만이 절대선이나 절대지의 길은 아닌듯 보입니다. 단정적으로 얘기하는 구원외의 가능성 정확히 0%의 원죄론에 대한 우려입니 다. 어느 쪽이 됐든 인간의 선택에 의해 낙원을 망실했으므로 책임은 여전히 인간에게 있습니다. -성경적 세계관이 맞다는 가정 하에 서만 입니다-

ilzamusik : 원죄에 대한 언급이 나온 것이 구원에 대한 필요성은 기독교에서 인간에게 원죄를 설정하고 그에 대하여 구원이라는 구제절차를 두고 있다.라는 저의 발언으로 인한 것이었습니다. 위의 musiki님과의 구원과 그 방식에 대한 기독교 교리 토론은 나중으로 미뤄두고, 일단 본래의 논의로 돌아가서 계속 이야기를 하 겠습니다.

그 전에 예수 이전에는 기독교가 존재하지 않았으며 (구약과 유대교가 있었죠. 예수는 유대교도 였다는 설도 있던데.. )따라서 분명 예수의 이전에도 죽지 않고 하늘에 직접 올라간 사람들은 있었습니다.라는 musiki님의 발언은 기독교에서의 구원을 전제로 하는 듯한 현재 페이지의 논의와는 직접 상관이 없을 듯 합니다. 인간의 선택 과 그에 대한 책임에 대해서는 저와 musiki님의 시각은 상반될 듯 하고 무척 재밌는 논의가 될 듯 하지만 이 페이지에서 하 기에는 적절치 않겠지요. :)

구원이 필요한가?라는 페이지에서 제기하는 첫번째 물음에 대한 저의 의견은 밑에서 괴물눈깔님께서 지적하신 바와 일치합니다. 현생의 고통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이들에게 구원 개념은 필요할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고통의 원인이 어느 종교의 세계관에서 필수적인 요소라면 그 종교의 세계관은 (어쩌면 필수불가결하게) 구원 개념을 포 함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 종교, 누가 믿겠습니까..;) )

그러한 이유로, 기독교에서 의미하는 구원은 기독교에만 존재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기독교의 세 계관을 따르지 않거나, 현재의 생에 만족하는 이들에게 현생 이후의 무언가를 구하거나 어떠한 절대자에 대한 믿음으로 구원을 바라는 것은 필요치 않다라는 것이 저의 정리된 견해입니다. 또한 musiki님의 원죄는 인간들이 스스로 만들어낸 족쇄에 불과하다는 것이 musiki의 개인적 의견입니다. 가톨릭 교회로 한명이라도 더 끌어들이기 위한 올가미 말입니다라는 발언에 대해서 아 마도 대부분의 비기독교인들은 원죄 개념을 카톨릭 교회의 올가미가 아닌, 기독교 세계관 그 자체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즉, 원죄와 예수에 의한 대속 그리고 구원은 기독교의 핵심 사상이며, 결코 후대에 변질된 것이 아니라고 봅니다.


기독교측에서 주장하는 대로라면 구원을 받으면 "새 사람"이 된다고 합니다. 그러나, 제가 24년을 교회생활을 하면서 단 한사람도 성경에 나온 "새 사람"을 본적이 없습니다. 혹시 보신분 계십니까? --안지성

본 적이 없는 듯 합니다. 그리고 그것이 교회를 나오게되는 가장 중요한 이유같습니다. 인간의 인성이나 덕성, 그리고 능력 자체를 변화시키는 것은 그 인간 자체의 노력이 차지하는 비중이 높은 것이지, 종교가 차지하는 비중이 나, 그 종교의 신이 선사하는 기복신앙 차원에서의 변화는 큰 요소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자를 돕는다'이라 는 말이 가장 삶에 있어서 중요한 주제인 듯 합니다.--Roman

저는 거울을 볼 때 마다 봅니다.--june8th

그런 경우도 드물지만 있다고 들었고, 오늘 또 확인하였습니다. :) 그리고 그것은 좋은 일입니다. 신앙이 필요없다라고는 말하지 않습니다.--Roman
어디까지가 Roman님의 글인지 알기 어렵네요 ^^;; 그냥 적겠습니다. 아, 글의 대상이 Roman님은 아닙니다. 그저 기독교인들에게 묻고 싶은 것일 뿐입니다.
만약 성경을 그대로 믿는다면, 믿는 자에게는 표식이 나타납니다. 그리고 "새 사람"이 됩니 다. 다시 말해 표식이 없거나 성경대로의 "새 사람"이 되지 못한 사람은 믿지 않거나 구원받지 못한 사람이지 않을까요? 그렇게 생 각할때, 최소한 제가 경험한 범위 내에서의 모든 기독교인은 사실 믿지 않는 사람이 아닐까요?
또 "이는 약속있는 첫 계명이니"라며 공언한 "부모를 잘 섬기면 네가 땅에서 잘 되리라 ". 기독교인이면서 땅에서 잘 않된 사람은 최소한 부모를 잘 섬기지 않은 것인가요? 아니면 구원을 받지 못했거나 믿지 않는 사람이 란 의미인가요?
질문을 정리하면, 성경에 "믿는 사람" (또는 "새 사람")에 대한 묘사 및 그에 대한 약 속이 있는데, 그 묘사대로의 사람을 본적이 없을 뿐더러, 계명을 지켜도 약속이 깨지는 것을 많이 보았습니다. 그럼 성경이 잘못 된 것인가요? 아니면 제 주변의 무수한 기독교인들이 "믿는 사람"이 아니거나 "구원 받지 못한 옛 사람"인것인가요? 아,구원은 이미 주어졌고 그것을 받아 들이냐 아니냐의 차이입니다 라는 의견은 이 질문과는 별개의 문제이니 나중에 제시해 주시기 바랍니 다. . --안지성

한가지만 지적합니다. '이땅에서 잘 된다'는 문장이 성서에 없습니다. '명이 길리라' 정도로 해석하심이 옳습니다. 효도하면 오래사는지에 대한 통계자료는 없으므로 비유인지 사실관계인지 설명드리기 곤란합니다. - -musiki
에베소서 6장 2~3절에 있는 문장인데 (2.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이것 이 약속 있는 첫계명이니 3.이는 네가 잘 되고 땅에서 장수하리라) 제가 조금 잘못 전재하기는 했습니다만, 독실한 기독교인에 부모님께 그렇게 잘 할수 없을정도로 효도하는것처럼 보이던 사람이 28살에 암으로 죽더군요. 분명 약속 있는 계명이라 했습니다만, 약속은 몇몇에게만 지켜지는 것일까요? 아니면 그 사람이 사실은 독실한 기독교인이 아니였던 것일까요? 아니면 부모님을 공경하지 않 았던 것일까요? 아니면 그 사람은 28이 장수한 것이였던것일까요? --안지성


자기가 새사람이 되었다고 생각하는 사람에 대해서 제대로 판단할 수 없는 것은 자기가 사랑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에 대해서 완벽하게 객관적으로 판단할 수 없는 것과 여러의미에서 비슷하다고 생각할 따름입니다.--Roman
하지만 성경은 믿는 자에게 표식이 있을 것이라 했고(있을지도 모른다가 아니고요), "새 사람"이 되면 어떻게 된다고 기술해 놓았습니다.게다가 "남"이 새사람을 볼때 어떻게 보인다고 까지 기술해 놓았습니다. --안지성

기독교인들이 경험하는 은총받았다 또는 구원받았다라는 것은, 타인에게는 정확히 설명할 수 없는 내적이고도 아주 주관적인 어떤 현상으로 존재합니다. 적어도 Roman은 그렇게 생각합니다. 하지만, 새사람이 되었다고 하 는 사람이 있다고만 들었을뿐 본 적은 30 평생 한번도 없었습니다. 자기자신이 '새사람'이 되었다고 말하는 사람은 보았어도, 그것 이 '새사람'일거란 확신을 그사람과 대면하였을 때 해본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자기 자신에게 그렇게 온 오로지 자기자신만의 것이고, 주변 교인들에게도 납득이 가게 설명할 수 없는 그 상태는 누가 없다라고 이야기 하기에도 정확하지 않고, 누가 있다라고 주장하기에 도 정확하지 않은 상태입니다.
그렇다면 성경에 나온 묘사에 부합하지 않거나 표식이 없는 기독교인은 믿는 사람이 아닌게 아닐까요? 그저 자기 혼자 "구원 받았다"라던가 "믿는다"라고 자아 도취에 빠진게 아닐까요? 분명 성경에는 믿는 사람에게 표식이 있을 것이라 선언했고, "새 사람"이 어떤 사람이고 남에게 어떻게 보여야 한다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 안지성
june8th씨에게 모욕을 가하고 싶거나, 싸움을 걸고 싶으면, 그 페이지에 가 서. "자아 도취에 빠진 것 같다"고 쓰면 될 겁니다. 위의 OneLiner는 사교적인 의미에서 'june8th님하고는 사이좋 게 지내고 싶으니까 믿어드릴께요'의 표현입니다. 그런데, Roman은 일단은 싸움을 잠시 쉬고 싶습니다. 분노는 페이지 에서 있는대로 터뜨렸고, 갈라드리엔, musiki, Roman페이지 등에서 논쟁 많이 했습니다. 혹시 싸움이 필요하다면, roman at dahmmi dot com입니다. 싸움은이메일로 입니다. Merry Christmas!
싸움을 거는 것은 절대 아닙니다. 저도 24년간 기독교인으로 살았고 한때 제가 "새 사람"이라 믿었던 종교적 환의의 순간이 있었습니다. 그리나 중간과정이야 어쨌든 이제는 모든 고대 종교에 대해 불신하는 입장에서, 혹시 제가 기독교에 대해 가졌던 그리고 신학이든 카톨릭이든, 목사님이나 신부님들과의 장시간의 토론을 통해서도 답을 얻지못한 의문 에 대해 답을 알고 있는 사람이 있을까해서 질문을 하는 것입니다. 메리 크리스마스~~~ (저는 25일도 회사 나가서 이삿짐 싸야합 니다 -_-;;) --안지성

세상의 거의 모든 종교를 접하고 연구했다는 토인비라는 학자가 죽기 전에 남긴 마지 막 종교에 대한 자신의 견해가 있는데 그것은 이렇게 전해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사랑을 느낄 때, 그 순간 우리는 신의 발톱이 자기자신을 쓰다듬는 것을 느끼는 때일 수 있다."(용어 선택이 적절하지 않거나 해석이 명확하지 않으면 문의 요망). 보이 지 않는 것, 객관화하기 힘든 것에 대해서 단정을 내릴 수 있는 자격은 Roman의 생각에는 신도가 되었다고 하는 사람들에게나 신도가 아니라고 하는 사람들에게나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Roman은 없다라고 이야기 한다기보다는 우리 '안다고 말할 수 없는' 무언가가 있다라고 단지, 비유적으로 이야기할 수 있을 뿐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구원론에 대한 개념은 그 글을 이전에 썼던 사람이 그 구원에 대해서 객관화해보기 위해서 비지땀을 흘렸던 노력의 일부라고 생각하며, 제대로 짚었는지에 대해서는 역시, 알 수 없다라는 답변만을 드릴 수 있을 뿐입니다.

만약, 그 새사람의 표식이라는 것이 있는가 없는가를 알고자 한다면, june8th님에게 사진을 찍어서 띄워주던가, 한번 만나보자고 이야기하는 수 밖에는 정확한 판단을 내릴 수 있는 여지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Roman의 생각에는 '표식'이라는 것은 일종의 비유적인 의미가 아니었을까싶습니다. 마치, 노스모키안이라면 남과 다른 표식 이 있을 것이다라는 정도. june8th님이 거짓말을 한 것이 아니고 실제로 믿고 있다면 그 상태만큼 그 개인에게 삶을 행복하 게 살아가는 믿음은 또한 드물 것이라 생각하기에 Roman의 개인적인 판단으로는 믿어주고 싶습니다. 아, 물론, 확인하였 습니다는 사교적인 글로 생각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사실, 자기 자신 새사람된 사람은 교회 안에서도 자기자신이 새사람이 되었 다라고 광고하듯이 이야기하는 사람들은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다만, 그 사람의 생활이, 그 사람의 생각과 말이 그 이전과 다른 사 람이 되었다는 것이 그 새사람의 상태라는 정도가 현실적인 해석에 가깝죠. 그렇지만, 그런 사람을 유감스럽게도 Roman의 눈으 로는 보질 못했습니다. 듣기만 했을 뿐이고 읽기만 했을 뿐입니다. 나머지 답변은 성경의 축자적 해석에 익숙한 다른 수쟁이분들 의 답변을 기다려보겠습니다.

안지성님, 부탁이지만, 글이 길다고 아래쪽은 읽지 않고 위부터 이야기하면 그글과 글 쓰는 사람에 대해서 별관심이 없는 것으로 보일 수가 있습니다. 제발 끝까지 보고서 질문을 해주십시요. :) --Roman

안지성씨는 성경의 어느 부분을 언급하시는지요? 구체적으로 "표식", "새 사람이 되면 어떻게 되어야 하는지", "남이 볼때 어떻게 보이는지"등에 대해 일러주세요.
고전 5장 17절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 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새 사람을 언급하는 구절중 하나입니다. 저는 그리스도 밖에 살았었는데, 현재는 안에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현재 시점에서 "고백"하건데, 저는 새 사람입니다. --june8th

새사람이 돼도 그 성질 어디 안갑니다. 베드로는 끝까지 성격 급했고 요한은 소심했습니다. :) 그래도 새사람은 존재합니다마는 안지성님이 기대하는 만큼의 새사람이 아닐 수는 있습니다. musiki--
괴물눈깔이 인식하는 구원에는 크게 두가지 개념이 있습니다.

먼저 기독교적 구원 개념이 musiki님께서 설명해주신대로 남에 의해 죄를 용서받는 것이 라면, 역시 그 구원 개념은 절대적으로 기독교 신자들에게만 적용될 수 밖에 없습니다. 먼저 기독교적인 정의의 죄를 지었음을 인정해 야하니까요. 결국 기독교 교리를 받아들이느냐 받아들이지 않느냐에 따라 결정되겠군요.

그렇게 구원을 정의하자면, 자신들의 교리에 따라 죄인이었던 기독교인들을 제외한 나머지 사람들에게 구원은 필요가 없다는 결론을 내려도 되겠습니다.

괴물눈깔이 이해하는 소승불교의 해탈 개념에 따르면, 해탈의 궁극적인 목표는 살아가는데 따 르는 정신적, 육체적 고통을 줄이거나 아예 없애는 것입니다. 행복해지려는 것이지요. 어떤 교리에 대한 믿음을 필요로 하지 않기 때 문에, 이는 고통을 가지고 있고, 그 고통에서 벗어나고픈 사람이라면 누구에게나, 다른 종교인들, 무신론자들, 그리고 불가지론자 들에게도 적용될 수 있는 구원의 개념입니다.

그런 개념에서의 구원이라면, 그 필요성은 개개인이 원하는 것이 무엇이냐에 따라 그 필요성이 결정됩니다. 고통을 삶의 일부로 받아들이고 그냥 살아가기를 원하는 사람에게는 그런 구원이 별로 필요하지 않겠습니다.

기독교의 구원 문제와 원죄 문제는 여러가지 심리적 문제가 복합되서 나타나는 문제 같습니다. 기독교의 구원 개념은 다른 어떤 것보다 ConfessionEffect가 (고백효과) 강하게 나타나는게 아닐까 생각 해봅니다. 다른 존재가 나를 용서 해준다 라는 것과 용서를 받았기 때문에 괜찮다 라는 일종의 자위가 이 구원 개념의 핵심이 아닐까요? (이 이야기는 다른 관점에서 본다면 구원이란 것은 사실상 의미 없는 것 이라는 의미도 됩니다. 저는 차라리 이것이 노스모크 종교문제에서 말하는 소위 기독교b의 문제였으면 합니다.)

그리고 기독교를 보는 시각 또한 그런 심리적 문제와 상당한 관련이 있어 보입니다. (여기서 원인을 이야기 하기보단 결과를 보고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특히 기독교에 대한 부분은 NegativityEffect(부정성 효과)로 인하여 밉게 보기 시작하면 한없이 밉게 보이는 것이지요. 게다가 musiki님의 토론참여의 경우는 상당부분에서 DiscrepancyEffect가 나타납니다. (상당 부분에서 설득력이 약하다 라는 말이 됩니다. 노스모크의 유저의 상당수는 NT기질을 가진분들인 경우가 많습니다.)
musiki도 NT구요 :)

이것은 그저 몇가지 단어로 끼워맞춘 이야기 입니다. 종교 라는 부분을 인간의 기준으로 해석하 는 것인지 모르겠군요. 하지만 개인적으로 기독교에 대한 생각은 사실상 NegativityEffect에서 벗어나기 힘듭니다. (집안이 불교지만, 불교 라는 한국의 종교도 그다지 좋게 보진 않습니다.) - ziozza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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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lzamusik아무개님의 구원 개념과 관련하여 조금 다른 이야기를 부연 하자면, 모든 종교라고 부를 수 있을만한 것은 기복신앙에 기반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구원이 왜 기복신앙의 일부가 아닌지, 왜 기복을 현세의 것에만 한정해야 하는 지에 대해 (위의 이 논의에 대해서는 진행을 위해 개입을 피하고 말없이지켜보기를 하였 습니다만) 납득할 수 없으며, 오히려 그러한 분리가 '기독교의 우월한 종교성'이라는 기독교의 한 배타적인 특성을 표현하고 있는 것 은 아닐까..생각합니다.

예정론이란? Extracted From 기복신앙

ChatMate가 잘 모르는 '예정론'이라는게, '애초에 천국 갈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 람은 정해져 있으니까 내세에 집착하지 말고 현생을 열심히 살아라'라고 가르친다고 국민윤리인가 세계사 시간에 배웠던 기억이 납니다. 막연한 기억일 뿐이니 잘못된 지식이라면 좀더 자세한 설명을 부탁드립니다. --ChatMate

예정론이라는 것은 musiki예수천국불신지옥에서 논했던 "구원"에 대한 논리가 바 로 예정론을 설명하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정해져 있다"가 아니라 "구원받을 사람은 구원하는 사람이 정한다" 라는 사실인 겁니 다. 예정론이란 "100% 신의 은혜로 구원받는 것이지 기독교인들이 머가 잘나서 구원받는게 아니다." 라는 의미입니다. -- musiki

예, 그러니까 '주님이 이미 정해놓으셨다'는 것이 아닌가요? 아무개 씨가 '주님 은 나의 행동을 보고 사랑하시는 것이 아니다'말씀하신 적이 있는 것 같은데 이것이 핵심이고, musiki 씨의 기독교인들이 머가 잘나서 구원받는게 아니다라는 말씀과도 다르지 않은 것 같습니다. 조금 비약이 될지 모르겠습니다만, 남에게 폐를 끼쳤 느냐 아니냐는 그런 것은 구원 대상 선별 기준에 포함되어있지 않다는 것과 연결되지 않을까요. 주님의 뜻은 인간의 가치기준으로 잴 수 없고, 주님이 어떻게 행하실지는 주님만이 결정하시는 것이니까요. 아니면 인간에게 주여, 이것은 공평하지 않사옵니다라 고 말할 권리가 허락되어 있는 것인가요? 궁금해서 여쭙습니다. --ChatMate

ChatMate님의 판단과 표현은 전부 정확합니다. 남에게 폐를 끼쳤든 아니든 구원의 선 별 기준이 아닙니다. 그러나 신은 누구누구를 선별해 구원한게 아니라 모두를 구원했습니다. ChatMate님도 이미 구원받았습니 다. :) 말그대로 믿기만 하면 됩니다. 그런데 문제는 인간들은 그 구원의 끈을 스스로 끊는 것입니다. 믿지 않는다는 말이죠. 이 것을 억지로 신께서 구원하셔야 옳지 않습니까? 라고 따진다면? 글쎄요. 물론 모두 구원받았다니깐요. 그렇지만 이러한 구원을 ChatMate님께서 스스로 원치 않으시지 않습니까? (이점은 musiki의 추측일 뿐입니다마는) 여기에 한가지 절대명제를 내겁니다. 신은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주셨고 인간이 스스로 선택할 권한을 주셨으며 이러한 권한에 대해 태클을 걸지 않으십니다. 구 원을 해주대, 받아들이고 아니고는 인간이 맘대로 할 수 있도록 여지를 준겁니다. 인간 하나하나의 인격과 선택을 인정한겁니다. 신이 만약 공평하기만 한 신이라면 모두 공평하게 지옥에 보낼 겁니다마는, 신은 인정이 많으셔서 구원이란걸 해준거죠. 이걸갖고 불공평하 다고 말할 권리도 있습니다. 신은 인간의 모든 선택을 용납하거든요. ChatMate님께서 그렇게 말할 권리는 있습니다. 그렇지 만 그렇게 칭얼대기엔 musiki로서는 신께 미안해서 말이죠... 인간은 구원받기를 선택할 능력이 없습니다마는 구원을 안받기로 선택할 능력은 있습니다. --musiki

ChatMate는 만약 절대신이 있다 해도, '그 신이 공평하기를 바라는 것은 인간의 바 램이고 입장이지, 굳이 신이 공평해야할 이유같은게 있을까?'라고 생각하는 쪽입니다. 공평하건 말건 신 마음이지, 인간이 뭐라고 할 권리 같은게 있을까 라는거죠. 그리고 사실 ChatMate가 구원을 원하느냐 원치 않느냐는 건 토론 내용과는 관계 없다고 생 각합니다만, 설명을 위한 예라고 생각하겠습니다. 그래도 '믿음'이라는 것이 '자유의지'라기 보다는 '조건'을 거는 것 처럼 느껴지 는 건 어쩔 수 없군요. '말 잘 들으면 사탕 줄게' 하고 말이죠. 물론 '믿음의 대가'로 '구원'을 던져주는게 아니란 것은 들어 서 알고 있습니다. 납득과 공감 여부는 논외로 하고, 여태까지 ChatMate가 본 musiki 씨가 하셨던 말씀 가운데 말씀하시고자 하는 바를 가장 깔끔하게 잘 전달해주는 좋은 설명이었습니다. musiki 씨의 구원관, 혹은 이렇게 일반화 해도 될지 모르겠습니다만 기독교인의 구원관을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내가 기독교와 관련이 없는 사람이라 그런지 모르겠지만. 구원 이라는 것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고 있다. 애당초 이 토론이 왜 시작되었는지도 모르겠다는 이야기. 분명 기독교 라는 종교에서는 아주 중요한 개념이겠지만, 적어도 나의 관점하에서는 나라는 존재의 중요성과 가치, 그리고 사회적 역할에 관심이 있을 따름.

그렇기 때문에 ziozzang은 한국에서 작금의 종교에 대한 -불교, 기독교, 개신교를 모두 포함한- 기복적이거나 차이를 인정하지 않는 광신, 맹신적 행위에 대해 어느 정도의 반감을 가지고 있다. 차라리, 원시 불교 처럼 종교가 SelfDevelopment를 위한 것이 되는 쪽이 낫다고 생각한다. --ziozzang

좀더 본론적인 질문을 하나 하고 싶습니다. 과연 기독교의 주신 야훼는 인간을 구원할 능력이 있나요? 인간이 어떤 상태여서 구원해야 하며, 또 왜 구원하려고 하나요? --안지성
첫번째 질문에 대해서는 기독교 신앙을 가졌느냐에 따라 답이 양분될 듯 합니다. 가졌다면 긍정하겠고, 가지지 않았다면 부정하겠지요. 저는 기독교 신앙을 가지지 않은 사람이라 (당연하게도) 부정합니다만.. 기독교의 관점에서도 구원은 신이 자격을 갖춘 이들에게 반드시 적극적으로 행하는 작위의 성격을 가지지 않는 듯 합니다. 조악한 비유를 시도해보자면, 기독교에서 칭하는 구원이란 마치 모든 이들이 반드시 하나의 필연적인 과정으로서 체를 통과하여 걸러지는 듯하며 그 과정에서 야훼의 개개인에 대한 개입은 없는 듯 합니다. --ilzamusik
비기독교인이신 ilzamusik님이 답변을 주셨네요^^; 기독교인이신 분들의 답변은 없는 것인가요? --안지성

이 페이지의 유지이유

{{|미래의 OnSider들에게 이 페이지들이 도움이 되리라 생각합니다. --벨로린|}}

CCMPic:CCMPic이나 IsdeWiki:IsdeWiki 중 하나로 기독교 토론 페이지들 옮겼으면 합니다. --musik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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