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자원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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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융의, 융학파의 용어로 쓰이면, 그림자원형심혼을 이루는 일부이며, 누구에게나 존재하는 보편적인 원형(archtype)이다. 자신의 무의식을 이해하는 첫번째 관문.

그림자에 대한 약간의 인용


{{|그림자원형무의식의 이미지이다. 자아(나)는 자신이 어떤 그림자를 가지고 있는지 모른다. 그것은 자아에게는 보이지 않는 무의식의 그늘에 속하는 인격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오히려 자아의식으로서는 결코 있을 수 없는 성격, 가장 싫어하기 때문에 절대로 그렇게 되지 않으려고 노력해온 바로 그 성격이다. -- 이부영 (융학파의 분석심리학자, 의사)|}}

{{|만일 당신의 친구 중 한 사람이 당신의 결점을 비난할 때 마음 속에 심한 분노가 끓어오르는 것을 느낀다면 바로 그 순간 당신은 자기가 의식하지 못하고 있는 당신 그림자원형의 일부를 발견한 것이다. -- 마리 루이제 폰 프란츠 (융의 제자, 집필자)|}}

{{|우리가 대인관계에서 버럭 화부터 내는 것은 우리 무의식의 '아픈 곳'이 건드려졌기 때문이며 '아픈 곳'이란 곧 격한 감정을 내포하고 있는 무의식의 컴플렉스인 것이다. 사람들은 누구나 그런 반응을 일으킨다. 다만 무엇에 의해서 마음 속의 어떤 부분이 자극을 받느냐가 다를 뿐이다.

어떤 사람에게 '나도 모르게' '공연히' '알 수 없는' 거북한 느낌, 불편한 감정, 혐오감, 경멸하는 마음이 일어난다면 분명 그곳에는 무의식의 투사가 일어나고 있고 대개 그 내용은 '자아'의 그림자에 해당된다. -- 이부영|}}

{{|그림자는 무엇인가. 일차적으로 개인적 무의식에 억압된, 앞으로 의식화되기를 기다리고 있는 열등한 인격의 한 측면이다. 그러나 그 가장 밑바닥 단계는 동물의 충동성과 더 이상 구별할 수 없는 것이다. -- 칼융|}}

{{|뻔뻔스럽게 우리 자신의 그림자를 남에게 투사하지 않도록 우리는 각별히 조심해야 한다. 그런데도 우리는 아직도 투사된 착각 속에 있다. 만약 우리가 이 투사를 모조리 되돌려올 만큼 용감한 사람을 상상한다면 그는 그림자의 상당 부분을 의식한 사람이다. 그런 사람은 새로운 문제와 갈등의 짐을 지게 된다. 그 자신이 그의 진지한 과제가 된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이제는 더 이상 다른 사람이 이런저런 일을 한다고, 그들이야말로 잘못을 하고 있다고, 그래서 그들과 싸워야 한다고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는 이제 '자기성찰의 집', 내적인 참사속에 살게 된다.
그러한 사람은 이 세계에서 잘못된 것은 또한 자신 속에서도 잘못되어 있는 것임을 알고 있다. 그리고 이제 자기 그림자를 완전히 끝내는 법을 배우기만 한다면 그는 이 세계를 위해서 진정한 어떤 일을 한 셈이다. 그리되면 그는 해결되지 못한 오늘날의 엄청난 문제에 대해 최소한 극히 적은 일부분이나마 해답을 찾는데 성공할 것이다. -- 칼융|}}

타인에 대한 비난, 투사의문제그림자원형


우리가 타인을 탓하거나 다툴 때, 거의 대부분은 우리들 자신의 그림자와 융합된 것이다. 자신의 성향, 자신의 방향과 반대되는 것들은 그림자에 가 있고 이 그림자가 자신 아닌 다른 대상에 투사된다. 이 그림자 투사는 특히 '동성간'에 더 쉽게 일어난다. 예외도 있지만 성적으로 이성으로 느껴질때는 좀체로 그림자 투사가 이루어지지 않는다.(그런 경우에는 아니마/니무스 투사가 일어나기 더 쉬운 탓)

그림자와의 대결은 언제나 나와 그림자, 나와 타인에게 비추어진 무엇간의 대결이고 이것은 자아와그림자의대결의 연장선상에 놓여 있다. 이 대결은 결코 끝나지 않는다. 타인을 이해할 수 없는 많은 경우들에 당신이 접하고 있는 것은 실재의 타인이 아니라 자신의 그림자와 융합된 투사의문제, 타인에게 드리워진 자신의 그림자원형일 확률이 높다. 이 투사는 또한 마음의나침반에서 반대되는 성향에 대해 이루어지는 경향이 높다. 이성이 감성에 대해 이해할 수 없어하는 것과, 감성이 이성에 대해서 너무나 차갑고 심하다고 생각하는 경우 등은, 그림자원형의 문제가 나타나기 더 쉽게 만든다. 심혼은균형을찾는다. 그리하여 그림자원형자아에 대한 대극, 보완의 기능을 지니고 있다. 그림자 속에는 자아가 지니지 못한 부분들, 약한 부분들이 더 강하게 드러나 있다. 내향적인 자아에 대한 외향적인 그림자, 논리적인 자아에 대한 감성적인 그림자 등은 일상적인 것이다.

그림자의 투사의문제는, 나쁜 것은 남에게 있다고 생각하는 자기 방어의 형태로도 일어나지만, 자신 속에 숨어 있는 다른 분신을 찾아오는 기회로서도 일어난다. 이런 투사는 자신을 돌이켜보고 다른 대상으로 떨어져나간 자기의 분식을 되찾아올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될 수 있다. 다르게 말하자면, 당신이 감정적으로 다른 누구에게 불편함을 느끼고 있다면, 그것은 당신속에 아직 나타나지 않은 심혼 속의 당신을 찾아올 기회이기도 하다. 그것이 자신이 아니라고, 자신의 그림자원형이 아니며 타인의 무엇이라고 우기지만 않는다면.

그림자의 인식


그림자를 인식하는 것은 대결의 시대, 냉전의 시대에 있어서 가장 시급한 문제였다. 그림자에 대한 인식을 하고, 그래서 그 너머의 아니마니무스를 통해 자신의 무의식과 소통할 수 있게 되는 것은, 자기원형의 완성에 깊이 관련되어 있다.
그림자의 인식은 세계의 외적인 평화를 위해서도 굉장히 중요한 문제이다. 체제의 다툼, 민족의 다툼,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에 대한 적대, 기독교와 이슬람교의 적대, 그 모두가 우리의 그림자원형과 연관되어 있다.

그렇다고 해서 세상의 갈등이 그림자원형의 문제와만 연관된 것은 아니다. 이성과의 관계, 결혼, 연애, 애정 및 사랑의 문제에 있어서는 자아아니마/니무스 문제가 더 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림자의 문제가 가장 큰 심리적 과제임을 부인할 수 없다. 아와그림자의화합이 필요하다. 칼융의 심리적 접근에서, 이것은 가장 중요한 개체화과정 중 하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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