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스웨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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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스웨터

언제나 마음 먹은 것보다 더 늦게 가을 스웨터를 마련하게 된다. 개학때문에 어쩔 수 없이 이것저것 바쁘게 준비하다보면 9월은 어느새 휙 지나가 버린다. 비가 다시 내리면, '가을이 왔구나'하고 문득 생각하게 된다. 우리는 비로소 모든 것이 가을이 오기전의 괄호에 불과하다는 것을 받아들이게 된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꼭 인정하지는 않지만, 사람들은 무엇인가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사람들은 10월을 기다린다. 10월의 밤은 서리가 내리는 진짜 밤이다. 낮에는 처음으로 물든 노란색 나뭇잎들위에 푸른하늘이 펼쳐진다. 10월, 이 뱅쇼(포도주)빛의 달콤한 부드러움, 오후 4시에만 태양이 반짝하는, 모든 것이 나무에서 떨어져구르는 배처럼 길죽하고 부드러운 계절.

그러면 새 스웨터가 한 벌 필요해진다. 밤나무와 큰 나무 아래에서 자라는 올망졸망한 나무들, 밤송이들, 분홍빛이 나는 빨간색 버섯을 몸위에 걸쳐 보는 것. 부드러운 양모의 색깔로 계절을 반영해 보는 것, 그런데 그 스웨터는 새로 장만한 것이어야 한다. 시나브로 꺼져 갈 계절에 새로운 불을 선택해야 하는 것이다.

초록색 계열로 할까? 아이리쉬 그린, 갈아놓은 완두콩 색깔, 안개가 낀 것처럼 뽀얀 초록색, 거친 위스키 빛깔, 키 작은 풀이 자라는 이탄 벌판처럼 외롭고 야생적인 초록. 적갈색 계통은 어떨까? 적갈색은 너무나 여러종류가 있다. 오필리어의 머리카락 빛깔, 어린시절 간식 시간에 맛있게 먹던, 가운데 버터를 바른 생강빵 빛깔, 무엇보다 숲의 색, 흙의 적갈색, 장터와 숲, 그리고 버섯과 물의 붙잡히지 않는 냄새의 빛깔. 청록색은 어떨까? 왜 안되겠는가? 가로세로를 숭숭 성글게 짠 스웨터. 마치 누군가 시간이 나면 당신을 위해 마저 새로 떠줄 것처럼 코가 큰 스웨터.

아주 헐렁한 스웨터라야 한다. 몸이 털실들 속에 푹 싸여 사라져버릴 만큼. 사람들은 그런 스웨터를 입으면 한 계절이 되어버린다. 어깨가 헐렁헐렁한 스웨터. 몸에 꼭 맞지않는, 무언가 기대치를 여분으로 남겨놓은 스웨터. 자기 자신을 위해서도 비슷비슷한 톤으로 사물들의 마지막을 즐긴다는 것은 좋은 일이다. 멜랑콜리의 안온함을 선택하는 일. 나날이 빛깔들 안에 잠기는 일. 새 가을 스웨터를 사는 일.

- 필립 들레름 <첫 맥주 한모금 그리고 다른 잔잔한 기쁨들> 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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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번역문체여서 명료한 문장은 아니지만, 가을냄새가 물씬나는 글이어서 퍼왔습니다. 이미 10월이 지나가버렸지만요...요즘같은 날씨에 생각나는 글이어서요.
  • 이 글을 옮기다 보니 트윈니트 가디건 한 벌이라도 장만하고 싶어지네요...
  • 저는 책 읽다가 '버터바른 생강 빵 빛깔 '운운...이런 종류의 대목이 나오면 흔들립니다.(침이 고여서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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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을때
나는 숨을 쉴 수도 없었지
꽁무니 빼기엔 너무 늦은 걸까?

우리는 슬쩍 빠져나갈수도 있었을 텐데, 그게 훨씬 나았을 텐데
나는 아무 말 없이, 넌 가을 스웨터를 입고서

난 숨어보려고 애썼지
방엔 사람이 가득했고, 난 거의 성공할 뻔 했었는데
나는 너를 기다렸지, 끈기있게

그래, 나는 너의 눈을 찾았고
파도가 네 눈에서 밀려나오고 있었어
나는 애썼지, 언제나 그랬듯이
그러나 그건 시간낭비였을뿐
내가 쉽사리 미소지을 수만 있었다면
처음에 그랬던 것처럼
처음에 그랬던 것처럼..

--yo la tengo, <autumn sweater> from I Can Hear Heart Beating As One(19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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