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소희의집으로평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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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으로…>의 감동, 그 인공성에 관하여 : 씨네21 350호(2002.5.2)

진정 당신의 집은 어디인가

<집으로…>(감독 이정향)는 올해 나온 영화 가운데 가장 의미있는 문제작이라고 생각된다. 텍스트 외적인 차원에서 이 영화가 끼치게 될 영향만 예상하더라도 범상치 않다.
산업적으로 이 영화는 <쉬리>(1999, 감독 강제규)의 역할에 필적하는 중요성을 갖지 않을까 싶다. <쉬리>가 주제나 형식상으로 적절한 흥행 코드를 배합할 경우 한국 시장에서도 600만명의 관객 동원이 가능하다는 사상 초유의 경험을 안겨줌으로써 영화산업의 규모를 급팽창시켰다면, <집으로…>는 통상 비상업적이라고 간주돼온 요소만으로도 대형 흥행을 끌어낼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줌으로써 기획과 제작의 다양성을 고무하는 기폭제가 될 것으로 보인다.

작가주의/여성/어린이, 가장 비주류적인 것이 얽어낸 성취

어떠한 제작자나 투자자라도 이른바 ‘예술영화’ ‘작가주의영화’에 손대고 싶다는 욕망을 피력한다. 속칭 블록버스터나 대형 장르영화에 비해 상대적으로 적은 예산을 들이면서도 합리적인 선의 자본 회수가 가능하리라는 기대야말로 그같은 욕망을 현실로 끌어내는 첩경이다(이 때문에 멀티플렉스를 중심으로 하는 주류 배급망과는 별도로, 공익성과 수익성을 절충한 대안적인 배급망을 설계할 필요성이 절실하다고 판단된다).

<집으로…>는 한국영화에서 가장 비주류적인 것으로 간주되어온 요소들을 가지고 이런 성취를 선도해냈다는 점이 돋보인다. 쉽게 말해 산골 오지에 사는 할머니와 7살 짜리 손자 이야기를 가지고 비평과 흥행의 두 마리 토끼를 잡는다면, ‘상업영화’로 만들지 못할 소재란 없다는 용기를 주는 셈이다.

특히 이 역할을 여성 감독이 해냈다는 것도 의미있다. 여성 감독의 작품은 어떤 의미로든 주변적인 성격을 띠는 경우가 많다. 여성으로서 감독을 하는 것은 심지어 할리우드에서도 쉽지 않은 일이기 때문에 소수자의 자의식이 강해지고 여성 문제를 비롯해서 소외된 이들의 현실을 천착하는 진정성을 강하게 보여준다. 아니면 ‘여성 특유의 섬세함’을 앞세워 특화된 시장에 호소하는 것을 생존전략으로 삼기도 한다. 이정향 감독은 ‘외할머니’라는 여성의 계보를 강조하고 여성적인 섬세함이라고 부를 만한 특성을 보여주면서도 이것을 주류 영화계 안에 안착시켰다는 점에서 여성 감독의 역할을 편견없이 활성화하는 데에 기여할 것으로 기대된다.

이 영화는 또한 사실상의 어린이영화, 성장영화로 분류할 수 있다는 점도 특기할 만하다. 1970년대까지는 <엄마 없는 하늘 아래>(1977, 이원세) 같은 일종의 새마을영화, 계몽영화의 범주 속에서 의미있는 어린이영화가 만들어지기도 하고, <로버트 태권브이>(김청기) 같은 어린이용 만화영화가 흥행에 성공하기도 했으나, 오늘날 한국영화계에서 디즈니 애니메이션을 제외한 어린이영화는 사실상 사각지대 중의 하나다. 이 글을 쓰기 위해 찾아간 극장에서는 까르르거리는 보이 소프라노의 웃음소리가 관객을 행복하게 만들었다. 또한 할머니와 꼬마의 관계 발전이 멜로드라마 속 주인공의 관계공식(순정파 여인과 이기적인 남자)을 차용하고 있다는 점에서 멜로드라마가 제공하는 풍부한 자양분을 재확인하게 된다.

이질적인 것의 충돌, 이정향 플롯

이제 <집으로…>라는 텍스트 안쪽으로 들어가는 문을 열어볼 차례다. 이 영화의 성공 요인은 ‘감동’이라고 말해진다. 코미디가 아니면서도 웃음을 지을 수 있고 결국에는 눈물을 흘리게 만든 감동은 풍부하게 발굴되어 있는 에피소드들의 효과와 밀접한 연관이 있다.

이정향 감독은 에피소드의 광맥을 캐어내는 자기만의 비법을 하나 갖고 있는 듯하다. 바로 이질적인 두 존재를 하나의 공간 안에 강제적으로 병치시키기라는 플롯 장치이다. 전작 <미술관 옆 동물원>에서는 ‘미술관’의 느낌을 주는 여성(우아하고 지적이지만 어딘가 폐쇄적이고 까탈스럽다)과 ‘동물원’의 느낌을 주는 남성(거칠지만 귀엽기도 하다)을 하나의 방 안에 밀어넣었고, <집으로…>는 첩첩산중을 벗어나본 적이 없는 칠순의 할머니와 도회지 물에 흠뻑 젖은 7살 소년을 오두막 안에 동거시켰다. 이질적인 것의 충돌은 당연히 많은 상황을 발생시킨다. 감독은 그것을 상상하고 관찰하면서 적절한 에피소드를 솜씨 좋게 걷어올렸을 것이다(이정향식 플롯 장치라는 개념은 한겨레문화센터 비평교실의 수강생 박순영씨로부터 얻은 통찰이다).

이 에피소드들은 매우 강력한 이야기성을 가진 메인 플롯 위에 실려 운반된다. 그 ‘이야기성’이야말로 <집으로…>의 성공을 떠받치는 가장 중요한 요인으로 보이는데, 이것을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지의 문제가 이 영화에 대한 작품적인 평가를 가름하는 또 하나의 기준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에 앞서 <집으로…>의 영화적 스타일과 대상에 대한 태도에 관해 말하자면, 이란 감독 압바스 키아로스타미의 영향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1987년작 <내 친구의 집은 어디인가?>를 필두로 그의 영화가 유럽에 소개되었을 때 그쪽의 일부 언론은 “키아로스타미가 세계 영화를 구원할 것이다”라는 찬사를 바쳤다. 필자 역시 1995년 한국에서 개봉되었을 때 느꼈던 기이한 전율감을 기억한다.

키아로스타미가 세계 영화를 정말로 구원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다큐멘터리처럼 보이는 소박한 접근법, 로케이션 위주의 촬영, 현지에서 발견한 비직업 배우, 무심한 듯 보이는 에피소드를 통해 사회적인 컨텍스트 드러내기, 오래되고 낡아보이는 대상에 대한 작가의 경외를 통해 현대 사회에서 소외된 전통의 문제를 우회적으로 재부각하기 같은 전략이 아름다운 페르시안 양탄자처럼 뒤섞인 키아로스타미적인 스타일이 최근 유럽의 국제영화제에서 접하게 되는 아시아영화들 가운데 하나의 흐름으로 관찰되는 것은 사실이다. 이것을 1940년대의 이탈리아 네오 리얼리즘에 비견할 만한 영향력이라고 평가한다면 지나친 속단일까?

<집으로…> 역시 이러한 형식적 특징과 태도를 공유하고 있다. 물론 이 영화가 특정 대가의 영향권 안에 있다는 진단이 곧 이 영화의 미덕을 폄하하는 것은 아니다. 청출어람은 세상 모든 신예들의 권리이자 책임이고, 좀더 적극적으로 말하자면 한국영화 비평 혹은 한국영화사 연구에서 외국 영화와의 지속적인 접촉과 상호작용이라는 이슈가 진지하게 부각될 필요도 있는 것 같다.

현대 도시인의 기대를 충족시킨 인공성의 승리

영화 <집으로…>의 감동의 원천이 무엇이냐고 물었을 때 다양한 세대에게 폭넓게 호소할 수 있는 이야기라고 답한다면 그것은 동어반복이거나 모순적이다. <집으로…>의 극장 관객 역시 여느 상업영화들과 마찬가지로 20대의 젊은 층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어린이나 좀더 나이 든 세대가 단지 ‘섞여’ 있을 뿐이다.

할머니와 어린이라는 마이너 주인공을 가진 이 영화가 모든 세대를 만족시킬 수 있는 비결은 바로 대상에 대해 한국인들이 공유하는 집단적인 이미지를 솜씨 좋게 건드리며 하나의 이야기로 재구축한 데 있다고 생각된다. 그 대상은 모성과 농촌이다.

여기서 할머니는 모성 혹은 모성의 변형이다. 이 나이든 어머니는 시골에 산다. <집으로…>는 우리 안에 내장된 모성과 농촌 이미지를 정확히 반복한다. 듣기만 할 뿐 말하지 못하는 할머니라는 설정은 매우 상징적이다. 어머니와 시골은 그들이 낳은 자식을 도시/현대 사회/문명 사회로 내보내는 데 필요한 모든 요구들을 다 들어주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 옷이 낡고 고무신이 떨어지고 지붕이 내려앉는 절대 빈곤을 감내했다. 그러면서도 도시와 자식들을 향해서는 거의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았다. 그들은 입을 닫았고 자식들은 어머니와 시골의 관용에 대해 한편으로는 미안해하면서 한편으로는 그들이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안도했다.

이 같은 모성과 농촌을 개발독재시대의 권력자와 부르주아들은 역사적으로 오랫동안 악용해왔다. 도시로 나간 자식들은 농촌의 부모에게 절대 착취자들이며 개발독재의 공범자다. 오늘날에는 도시의 자동차족이 되어 농촌을 급기야 휴식과 소생의 이미지를 가진 관광상품으로 재활용한다. 이같은 원죄의식은 일년에 한두번씩 벌이는 발작적인 귀향 행렬과 효도의 세리머니로 표출되고 부모가 싸주는 촌스러운 선물꾸러미를 죄 사함의 증표로 받아들고 되돌아온다.

<집으로…>에서 죄의식은 아이에게 전이되고 투사되었다. 아이가 할 수 있는 못된 짓은 고작 요강을 발로 차서 깨뜨리거나 밥숫가락 위에 얹어주는 김치를 덜어내고 비녀를 뽑아가는 정도이기에, 혀를 끌끌 차거나 함께 눈물 흘리며 카타르시스를 얻는 정도로 소화할 수 있다. 만약 그것이 외양간을 비게 만들고 지붕을 무너뜨리고 논밭을 팔아먹은 성인 세대 자신의 것으로 표현되었다면 죄의식은 감당하기 어려워지고, 영화는 웃고 울며 즐기기에는 너무나 무거운 것이 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같은 성장의 역사를 직접적으로 경험하지 않은 젊은 세대가 <집으로…>에 함께 열광한다는 사실이 흥미롭다. 이것은 모성과 농촌의 이미지가 인공적이고 반복적으로 재생산되어 한국인의 집단의식 속에 주입되고 있지 않은가 의심케 하는 대목이다. <전원일기>를 20년이나 지속되는 국민드라마로 만들고, 개그맨이 진행하는 오락 프로그램에 나와 주름이 자글자글한 얼굴로 도시의 자식들에게 “난 잘 있다. 느그들 건강하고 가끔씩 전화해라”고 카메라를 향해 외치는 할머니 할아버지를 한동안 히트 상품으로 만든 비결도 이와 무관하지 않아 보인다. 텔레비전의 모니터는 달리는 자동차의 유리창만큼이나 안전거리를 유지시키면서 노스탤지어만을 취할 수 있게 만들어준다.

영화 <집으로…>는 현장에서 추출된 듯이 보이는 풍부한 에피소드와 이미지의 연속으로 이루어져 있지만 그것을 직조하는 이야기 자체는 집단적인 기억에 호소하는 매우 인공적인 것이며, 꼬마 상우는 어른의 조작된 기억을 모사하는 영특한 악동이다. 생각 여하에 따라서는 귀여운 것이 아니라 무섭다.

요컨대 <집으로…>는 영화형식상으로 다큐멘터리적인 진정성을 채용한 반면, 주제적으로는 모성과 농촌에 대한 현대 도시인들의 기대를 차용해서 감정을 끌어내고 그것을 확대재생산한다. 죄의식과 감동 그 자체가 꼭 나쁜 것은 아닐지라도, 그것이 불러일으키는 반응이 천편일률이라면 문제가 있지 않을까.

김소희/ 영화평론가 cwgod@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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