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단한 요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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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대가야 사람된다." 이는 1960년대 초반까지의 이야기지, 대학교육이 일반화되어 고등학교 중퇴만 되어도 군대에 가지 않는 오늘의 현실에는 전혀 해당되지 않는 이야기다.
"군대가야 사람된다." 이는 1960년대 초반까지의 이야기지, 대학교육이 일반화되어 고등학교 중퇴만 되어도 군대에 가지 않는 오늘의 현실에는 전혀 해당되지 않는 이야기다.
민주사회의 표징의 중요한 하나는 국가나 정부가 국민들을 훈육의 대상으로 삼지 않는다는 것이다.
역사는 그렇게 발전해가는 것이다. 이루지 못할 것 같은 불온한 꿈을 이뤄가면서.
독재자들이 노린 것은 애국심 고취가 아니라 태극기와 애국가를 통해 사람들을 길들이려는 것이었다.
미국에서 성조기를 태우면 표현의 자유 우리가 태우면 국가보안법 위반 이었다.
우리의 정부에는 만주국 출신이 대거 포진하고 있었고 그로써 만주국의 어두운 그림자가 우리 국가에도 드리워진 것은 어찌보면 당연한 것일 듯하다.
<조선일보>의 초대 사주 방응모가 한국독립당의 재정부장을 지냈다는 것은 사실이다. 이는 백범 선생 역시 해방 뒤의 현실정치에서 정치자금 문제로 친일파들과 손을 잡았던 적이 있다는 사실이다. 나중에 스스로 자기 비판을 하였지만. 당시에도 인적 청산의 기준이 엄격하지 않았다. 백번 양보하더라도 조선/동아는 자신의 과오를 사과하기는 커녕 자칭 민족지라 하고 있으니 ...친일파를 비롯하여 우리의 부끄러운 역사를 하나도 가르치지 않으니....교과서 역사 왜곡 파동과 관련하여 일본의 우익들이 비웃을 일이다.
박헌영 발언에 대한 뉴욕타임스의 왜곡과 그로 인해서 사회주의 세력이 타격을 입었다. 사회주의자는 민족주의적 성격을 띠었기 때문에 인민에게 인기가 있었고 민족/반민족 구도를 좌익/우익으로 나누면서 친일파는 살아남았다.
연좌제 : 유교정치의 이상과는 배치되는 법가 사상과 관련되어 있음. 3족에 대한 정의는 목민심서, 경국대전, 대명률직해에서 언급됨. 또한 권력자들의 관계되었을 경우에는 연좌제 적용을 받지 않음. 박정희의 형 박상희 (대구 10월항쟁을 주도한 공산주의자), 김성곤, 박정희 정권 내무장관 엄민영들은 좌익활동에 깊이 간여했지만 적용받지 않음.
6.25동란시 한강다리는 끊고 간 이승만, 부통령은 다리가 폭파되기전 간신히, 건너던 피난민 1500명이 폭살당함. 그 뒤에 서울을 수복하고 남아있던 자들을 부역자라고 처단함. 진짜 부역자들은 이미 월북해있는 상태였음에도 불구하고...
김두한: 김두한은 회고록에서 여운형을 암살한 한지근에게 자신이 권총을 주었다고 하였으나, 여운형 암살이 일어난 1947년 7월은 김두한이 벌금형을 선고받았지만 풀려나지 못한 상태였던 것으로 보이니, 이 또한 사실과 다른 암살 영웅담이다.
1990년대 학생운동의 급격한 퇴조는 동구사회주의권 붕괴, 정치적 문제의 관심이 덜해진 것과 함께 학생들이 비정상적으로 대변자 역할을 할 수밖에 없었던 민중운동의 각 부문이 성장했기 때문이기도 함.
박정희의 베트남 파병에는 미군이 계획하는 한국군 감축을 피해보려는 것도 중요한 이유의 하나였다.
맥아더는 원자폭탄 투하 지점을 26곳이나 선정하여 보고하면서 즉각적인 투하를 요청했다.
소파는 형사재판권 외에도 여러가지 문제점을 가지고 있으며, 근거가 되는 한미상호방위조약도 여러 문제점을 내포하고 있다. 한미상호방위조약의 재검토 없는 부속협정인 소파의 개정은 근본적 한계를 지닌다.
단일민족 담론의 선구자들은 남의 땅에서 독립운동을 하면서 갖은 서러움을 겪어본 사람들이었다. 피부색과 말이 다르다고 이 땅에 살고자 하는 사람들을 박해하는 우리의 이지러진 모습은 과연 그들이 꿈꾸던 민족국가의 모습이었을까.
역사는 늘 더디 흐르는 것 같지만 우리가 종래의 과제를 해결하기 전에 새로운 문제를 불쑥불쑥 내던지곤 한다.
태극기 : 민족의 상징으로 내세우기가 힘들었다. 태극기의 한국화, 탈 중국화를 시도했다.
안두희: 사건 발생 48일 만에 2계급 특진.
일제의 간도 학살 전술 '비민분리' -> 한국전쟁전후 유격대 토벌시 -> 베트남전
양민학살(X) -> 민간인학살
양민학살은 학살자체의 부정이 아니라 학살 대상의 부정을 뜻한다. 가해자들의 논리가 갖는 부당성을 정면으로 부정하는 말이 아니다.
청산하지 못한 과거는 되풀이될 수 밖에 없다......과거청산은 과거의 문제가 아니라 현재와 미래를 위해 현실로 이어진 과거사를 직시하고 그것과 싸우는 것이다. 솔직히 우리는 친일잔재의 청산에 실패했다. 그리고 이 친일잔재는 군부독재권력에 의해 우리 사회에서 재생산되었다. 친일잔재의 청산은 이 어정쩡한 민주화 속에 살아 숨쉬고 있는 군부독재잔재의 청산으로 마무리돼야 한다. 그러지 못할 때 친일문제는 50년이 아니라 100년, 200년이 지나도 우리의 발목을 잡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p.120)열성적인(?) 조사로 죽은 경우 경찰이나 검찰을 처벌하면 사기에 문제가 되니 관대히 해야한다. 는 논리는 노덕술 사건, 김근태씨 고문사건, 부천서 성고문 사건, 박종철군 사건등 주요 고문 사건이 터질 때마다 경찰 수뇌부가 대공결찰의 사기 운운하던 것의 원형이 된다.
의병전쟁 기간에 척사의병장들은 발군의 전투력을 과시한 평민의병장들을 사소한 꼬투리를 잡아 양반능욕죄로 처형하기도 했으며, 의병군 내에 들어와 있던 동학 농민군 잔여세력을 색출하여 처형하기도 하였다.
이승만의 충복 윤치영: 헌법의 인민이란 단어를 국민으로 바꿈
시민혁명을 거치지 못하고 제국주의적 근대에 편입되었다는 것은 전근대의 부정적 요소들이 고스란히 다음 시대에 살아남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전근대의 부정적 요소를 척결하는 시민혁명을 거치지 못한 현실에서 근대/전근대의 이분법적 도식은 우리 사회를 설명하는 데 별로 도움이 안된다.............대한민국은 친일잔재를 청산하지 않은 채 건설되었다. 청산 못한 정도가 아니라 친일파를 척결하려던 반민특위가 오히려 친일경찰의 공격을 받아 해산당했고, 친일잔재 청산을 부르짖던 소장파 의원들은 남로당 프락치로 몰려 투옥되었다.
남의 나라에서 군대를 조직해야 했기 때문에 수치를 느끼며 작전지휘권을 중국에 넘긴 임시정부와 달리, 이승만 정권의 작전지휘권의 이양은 영광스러운 일이었다. 치욕과 영광 사이의 거리,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대한민국은 최소한 그만큼 떨어져 있다. (p.45)
더불어 사는 사회란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이나 나에게 맹목적으로 복종하는 사람들과 더불어 산다는 것이 아니다. 더불어 사는 사회는 내가 싫어하고 미워하는 사람들, 어딘가 부족하고 힘없는 사람들, 소수자들과 더불어 산다는 것이다......인류가 더불어 사는 사회를 이루려는 것은 실은 마음에 안 드는 것들을 모조리 쓸어버릴 수 없고, 또 슬어버릴 때는 엄청난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는 것을 배웠기 때문이다...........박멸의 기억을 스스로 벗어던지는 일은 우리 사회가 더불어 사는 사회로 가기 위해 반드시 거쳐야 할 관문이다. (p.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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