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자 출판이 인쇄물과 책의 보급/제작에 혁명을 불러온 이 시대에, 나는 지난달 출간된 "아름다운 지상의 책 한권(이광주, 한길아트)"을 읽고서, 중세의 수많은 제본 공방이 심혈을 기울여 제작했던 수제 양장본들의 아름다운 모습들을 머릿속에 가득 채우며, 예전부터 어렴풋하게 꿈꾸었던, 필사본을 소유하고 싶다는 시대착오적인 욕구에 사로잡힌다.
글씨체만으로도 쓰여 있는 문장을 읽고 싶게 만드는 그런 사람의 손에 의해 한쪽 한쪽이 정성스레 쓰여진 책을, 이 세상에 단 한권만이 존재하는 그런 책을 가질 수 있다면 정말 행복하지 않을까.
"아름다운 지상의 책 한권"은 신문의 서평만큼 감동적이진 못했다. 달리 말하자면, 그 지면에 소개된 줄거리가 내 호기심을 자극한 전부였다. 제목과 어울리게 예쁘게 만들어지긴 했지만 그 책에 실린 글들이 그 예쁜 책 하나를 완성하기 위해 일관되게 쓰여진게 아니라 출판잡지에 연재되었던 이런저런 수필을 모아놓은 것이라는 사실을 미리 알았다면 나는 아마 책을 구입해 보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책을 사랑하는 노교수의 자극적이지 않고 평이하게 흘러가는 이야기들이 조금 지루하게 다가오기도 했다. 같은 서치류 인간으로서 공감하는 바가 많을 그런 자기고백적인 또는 자신과 타인의 기행에 대한 글들을 기대하고 있었던 터라 그랬나 보다.
오히려 그 책에 소개된 여러 다른 책들, 베스베인스의 "온화한 광기 - 애서가, 장서광 및 서적에의 끝없는 정열"이라든지, 마샬 맥루언의 "구텐베르그 은하계" - 이 책은 몇주전 번역출간되었다 - 와 같은, 책과 미디어에 관련되어 언급한 책들이 더 관심을 끈다(베스베인스의 책은 다행히 아직 온라인 서점에서 하드커버 에디션을 싼값에 살수 있는것 같아 주문해 놓았다). 예전에 알지 못했던, 몇가지 책에 대한 관심을 촉발시키는 일종의 메타북이라는 점에 더 높은 점수를 주고 싶다.
그래서 그 가운데 나를 가장 강하게 사로잡은 것은 한참동안 감탄하여 넋을 잃고 쳐다본, 책에 실린 아름다운 수제 양장본들의 사진과 그에 얽힌 이야기였다. 이렇게 아름다운 책들이 있다니... // 그 중세의 책들도 구텐베르크 이후 활자/활판을 써서 본문이 인쇄되었을테니 필사본을 가지고 싶다는 내 바람은 더 오랜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는 어리석음을 담고 있는것인가?
내겐 글씨를 참 예쁘게 쓰는 여자 후배가 하나 있었다. 이름을 민정이라고 부르자. 민정이는 마음씨도 얼굴도 곱고 또 똑똑한, 나무랄데 없는 사람이었는데, 나는 다른 어떤 민정이의 아름다움보다도 그애가 펜을 움직여 또박또박 써내려가는 글씨에 가장 매료되었었다. (정신적 발육이 좀 더뎌서...
남자 글씨치고는 제법 가지런한 필체를 가진 나는 전부터 남의 글씨체에 매우 관심이 갔고, 정연하고 아름다운 글씨체를 보면 나도 그런 글씨를 쓸수 있었으면 하는 바람을 품기도 했던터라 민정이의 글씨가 몹시 탐났고 어이없게 질투 비슷한 감정도 품었던 듯하다. 만일 그 글씨를 훔칠수 있다면, 훔쳐서 내것으로 만들수 있었다면, 그리고 내가 조금만 덜 이성적이었다면... 향기에 반해 소녀를 살해한 그르누이와 같은 기행을 서슴지 않았을 것이다.
(민정이에게는) 다행히도, 그 아름다움은 누구에게 나눠줄수도 빼앗길수도 없는 그애만의 것이었으므로 나의 비이성적인 시샘은 잘 추스려서 속으로 삭여야 할 것이었고, 그래서 내가 할수 있는 최선의 방법은 민정이가 써놓은 글씨의 자취만이라도 내것으로 만드는 일이었다. 그때는 마이크로소프트 윈도 3.0이 3.1로 업그레이드되면서 트루타입Truetype 이라는, 출판업계에 많이 쓰이는 매킨토시 기종의 어도브 타입1 에 맞먹는 품질을 가진 훌륭한 글꼴 생성기를 내장하여 인기를 모으고 있던 참이었다.
착한 민정이는 내 염치없이 간곡한 부탁을 선뜻 들어주었다. KS5601 완성형 글자 2350자 두벌을 A4용지 몇십장에 가지런히 써서 내게 준 것이다. 나는 그 당시 가지고 있던 글꼴 편집 소프트웨어인 폰토그래퍼Fontographer 를 써서, 스캔하여 비트맵 이미지로 만들어진 민정이의 글씨를 트루타입 글꼴로 변환하여 내가 작성한 문서들을 그 글꼴로 찍어내려는 야심찬? 각오로 가득차 있었다.
스캐너도 가지고 있지 못했던 터라(요즘이야 플랫베드 스캐너도 대중화되어 있는 상태지만 그때는 핸드헬드 스캐너도 비싸서 아무나 사갖는 제품이 아니었다) 한 후배 집에 쳐들어 가서 몇십장에 걸쳐 쓰여진 민정이의 글씨를 다 스캔해서 플로피 몇박스에 담아 넣고, 집의 PC를 괴롭혀 가며 며칠동안 작업에 골몰했다.
하지만 스캔한 글꼴 수천자의 윤곽선을 따내서 윈도가 인식하는 트루타입 글꼴 정보로 변환하는 일은 엄청난 시간과, 쉽게 식지 않는 열정을 필요로 하는 일이었다. 글꼴 디자인 전용 소프트웨어 폰토그래퍼의 외곽선 추출 알고리즘은 그다지 정교한 편이 아니어서, 나는 일단 자동으로 추출된 외곽선을, 확대 축소에도 민정이의 글씨와 유사하게 되도록 다듬는 일을 끊임없이 되풀이해야 했다. 지쳐버린 나는 고종석씨가 사전 편찬의 꿈을 조용히 접듯 민정이의 예쁜 글씨를 트루타입 글꼴로 변환하는 일을 결국 쓸쓸히 포기해야 했다.
지금은 레지던트가 되어 집에도 자주 가지 못하며 바쁘게 살고 있을 민정이를 다시 보기도, 예전처럼 그녀석에게 글씨를 써달라고 조르지도 못할 것임은 분명하다.
지금 생각해보면 나는 결국, 민정이의 글씨로 쓰여진 "아름다운 지상의 책 한권"을 가지고 싶었던게 아닌가 한다. 당시엔 민정이의 글씨로 담아 놓고 싶은 텍스트를 선뜻 꼽아 내세울수 없었고, 또 결국은 포기해야 했던 무리한 그 욕심만 채우면 아름다운 글씨가 내것이 될거라는 생각에 눈이 어두워 결국 지금은 민정이의 어느것도 남아 있지 않게 되어 버렸다.
98년 인물과 사장 8권에 처음 실려, 내게 온몸을 저릿하게 관통하는 듯한 감동을 안겨 주었던 고종석씨의 소논문 형식의 글 "우리는 모두 그리스인이다"는 앞으로 아름다운 글씨를 쓰는 마음착한 사람을 만난다면 꼭 함께 필사본을 만들어서 소장하고 싶은, 손으로 쓰면 약 400페이지 정도의 분량이 될 좋은 글이다. 이제 글감은 정해진 셈이고, 수작업으로 책을 만드는 기술도 조금씩 익힌 나는 항상 준비가 되어 있다.
하지만 그런 아름다운 글씨를 쓰는 사람을 만날 기회는, 손으로 글씨를 쓸 기회가 줄어드는 세상이다 보니, 그와 함께 점점 줄어드는 듯하다. 안타깝게도... (2001/6/18) -- Jindo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