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바라 바인(Barbara Vine) - 치명적 반전(Fatal Inversion)
"다섯명의 젊은이들이 있었다. 그들은 어느 이상스러울만치 더운 한 여름날, 빅토리아 양식의 저택 와이비스 홀을 그들 코뮨(공동체)의 터전으로 만들었다. 그러나 그 아름다운 전원을 배경으로 한 생활은 오래전 이미 황폐화되었고, 그 다섯 사람들도 그곳에서 일어났던 일을 절대 발설하지 않겠다고 굳게 맹세한 뒤 각자의 길을 따라 뿔뿔이 흩어졌다. 그러나 그 약속도 와이비스 홀의 외딴 동물 묘지에서 묻혀져 있던 비밀이 모습을 드러낸 뒤 깨지기 시작한다. 그곳에서 발견된 작은 아기와 한 여자의 뼈가 그 오래전 무더웠던 여름날의 끝자락에 연이어 일어났던 파괴적인 사건들을 들추어내게 된다. 하지만 정말 그곳에서는 누구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누가 그 일을? 또 그 이유는? 미스테리의 거장 바바라 바인이 엮어내는 긴장과 기만의 그물이 자유와 방만, 환영과 복수, 자극과 정열의 위태로운 사잇길로 독자를 이끌며 인간 심리의 깊은 어두운 곳을 향해 나아간다."
에드가 수상작 선집을 읽어 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루스 렌델 여사에게 에드가 상을 안겨준 단편 "드리워진 커튼(Fallen Curtain)"은, 섬짓하다거나 아이러니컬하다거나 하지 않다. 조용한 독백같던 그 소설보다는 한길사 미스테리 선집에 실렸던 "희생자로 태어나다(Born Victim)"나 여성작가 미스테리 모음에 실린 "패트리셔에게 보내는 선물"이 훨씬 더 잔인하고 냉혹한 렌델 여사의 정통적인 소설의 이미지에 가깝고, 수상작에 선정되었던 단편집 "Fallen Curtain"에서도 마지막 순서로 실린 "흩어져야 산다(Divided We Stand)"가, 굳이 비교하자면, 온몸을 차갑게 훑고 내려가는 전율을 뿜어내는데 있어서는 "Fallen Curtain"을 수십배 압도한다.
그리고 여사에게 작지 않은 기쁨을 안겨주었을 여러 수상소식도, 렌델이라는 이름하에 쓰여진 냉혈적인 미스테리물이 아닌 바인(Vine) 명의로 발표한 미스테리 스릴러의 영역을 조금 비켜나 있는 듯한 몇안되는 소설에 더 많이 주어졌다. 렌델로서는 그 점이 좀 섭섭할지도 모르겠다. 그건 마치 많은 블록버스터를 만들고서도 컬러 퍼플을 찍은 후에야 비로소 수상과 인연이 있었던 스필버그가 느꼈을 약간의 서글픔...과도 비슷한 것이지 않을까 싶다.
그러나 좋은쪽으로 생각해보기로 한다. 번뜩이는 아이디어와 반전으로 독자를 사로잡는 소설을 쓸 수 있는 작가는 많아도 여러갈래로 종잡을수 없이 분열되어 가지를 치며, 또 다른 이들의 마음과 얽혀 시종 긴장감을 늦출수 없게 만드는 정신분열증적인 미스테리 스토리를 아름다운 문체로 표현해낼 수 있는 작가는 그다지 많지 않기에 그런 재능을 숨기듯 지니고 있는 렌델의 작품이 어쩌다 그런 모습을 한채 세상에 나올때 기쁜 '수상작'이라는 칭호를 붙여 주는 것이라고.
정태원씨가 "치명적 반전(Fatal Inversion)"이라고 제목만 번역한 적이 있는 이 소설은 제목만 놓고 보자면 추리소설 매니아들의 호기심을 한없이 자극하고 끌어당길 것이다. 그러나 제목이 암시하고 있는 것은 극적인 결말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으며, 과거의 한 시점을 향해 그 이전과 현재의 이야기들이 양쪽에서 수렴하듯이 다가가는 서사 구조를 가지고 있어 대단원에 찾아올 사건이 무엇일지 짐작하기 어렵지도 않다. '치명적 반전'이란 주인공들이 코뮨 생활을 결심하고 결국 파탄에 이르게 되는 몇달간의 삶을 지속한 별장 와이비스 홀(Wyvis Hall)의 별칭에서 연유한 것이다. 에칼페이모스(Ecalpemos). 별장에 붙여진 이 이국적인 이름은 마치 그들을 찾아올 비극을 예감하여 만들어진 것 같다고 주인공인 루퍼스와 아담은 후일 생각한다.
소설을 보면서 나는 내내, 약 5년 뒤에 쓰여진 도나 타트의 걸작 "비밀의 계절(Secret History)"의 틀과 치명적 반전이 어딘가 유사한 구석을 지니고 있음을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다. 외부와의 교류를 중단하다시피 한 폐쇄적인 그룹의 사람들이 내부적으로 지니고 있는 붕괴의 요소를 원하지 않게 키워나가는 광경이 그렇달까. 렌델이 타트의 소설에 극찬을 아끼지 않은 것은 치명적 반전이 매우 조심스럽고 미묘하게만 표현하였던 사건들을 좀더 능숙하고 화려하게, 등장인물들의 개성을 더 뚜렷이 살려 가면서 완성한데 대한 찬사의 메시지가 아니었을까 생각해 본다. 비밀의 계절에서는 리차드의 1인칭 시점을 통해 클래스메이트들의 모습을 차분히 보아나가지만 치명적 반전은 그와 다르게 여러 화자의 입을 통해 한겹한겹 꺼풀을 벗겨내듯 에칼페이모스 최후의 날을 향해 조금씩 다가간다.
치명적 반전은 사람과 사건에 대한 선악의 구별을 일찌감치 포기하고 냉정한 묘사만으로 하나하나의 말과 행동을 그려내고 있다. 살아남는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들이 나눠지는 기준도 모호하다. 그리고 결국 죄의 댓가를 치르는 이와 그 이유도 명확하지 않다. 바인에게 묻는다면 아마도 여사는, 악한 의도가 없는 이들이 자의와 무관하게 저지르게 되는 죄악은 그 죄악이 행해진 당시나 이후 그들이 받는 정신적 고통만으로도 충분히 그 댓가를 치르게 되기 때문이라고 대답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결국 법적인, 물리적인 고통은 상처받고 괴로움에 시달렸던 영혼에게 그다지 큰 의미를 지니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 고통은 마음먹는다고 해서 없앨수도, 타인에게 떠넘길수도 없는 끝을 모르는 형벌이기 때문이다. 마지막까지 살아남은 사람들도 자신을 구속하는 사회적 제재가 더이상 없을 것임을 알면서도 마음에 드리워진 어둠의 그늘을 걷어내버리지 못한다.
바바라 바인은 마지막 한 챕터를, 다섯명 가운데 유일하게 그 후일담이 언급되지 않아 시종 궁금함을 참지 못하게 하던 인물을 위해 남겨두어서, 마치 인부들이 떠난후 해가 지는 공사장의 바람처럼 쓸쓸하고 황량한 소설의 마무리를 긴 여운과 함께 인상깊게 처리한다.
풍부한 상상력과 논리, 추리력을 동원하여 독자들을 몰입시키는 추리소설과는 거리가 먼, 비밀의 계절과 함께 과거의 한 시절, 젊음과 겁없음, 무법의 광기가 여과없이 표출될수 있었던 청년기의 아픈 과거를 섬세히 그려낸, 어떤 면에서는 이문열의 젊은날의 초상을 떠올리게도 하는 소설이다. 독이든 초콜렛이나 트렌트 최후의 사건과 같은 탁월한 Who-dunnit류의 추리소설과, 치명적반전과 같은 추리소설이 내게 같은 장르의 문학으로 굳이 인식되지는 않는다 하더라도 양쪽 모두 즐겁게 향유할수 있음이 기쁘다. 그와 함께 폭넓은 장르의 스펙트럼을 형성하고 있는 영국추리문학계의 오랜 역사와 두터운 기반이 부럽게 느껴지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