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물학대
"소가 웃는다." 이 말은 (웃기는 말좀 넣어 주세요)
동물들도 감각기관을 가지고 있어서 고통이나 즐거움을 알고 있다는 말이다.
동물들도 감각기관을 가지고 있어서 고통이나 즐거움을 알고 있다는 말이다.
우리나라 축산업의 근본 변화를 요구하는 경종이 울린다
축산업의 장래가 캄캄해 보이고, 앞으로 닥칠 무서운 재앙의 경종같이 들린다.
나는 농부의 아들로서, 1945년 해방 전후에 중·고교를 다녔다. 학교에서 돌아오면 으레 소를 끌고 들로 갔다. 소는 배가 터지게 풀을 뜯어먹었다. 소는 가족 구성원의 하나였다. 우리 소가 남의 집에 가서 논밭을 하루 갈면 그 집에서는 품앗이로 이틀 일을 해 주었다.
봄, 여름, 가을 전답을 갈고, 무거운 짐을 나르고, 우리 집 농사에 너무도 귀중한 생명이었다. 오래 먹이던 소를 팔고 오는 날에는 서운하여 눈물도 흘렸다. 10월 상달 시루떡을 하면 사람보다 먼저 소에게 먹이는 것이었다.
"꼬꼬댁 꼬꾜!" 암탉이 알을 낳았다고 소리친다. 집에서 기르는 닭이나 오리는 우리 안에 가두지 않았다. 종일 온 동네를 쏘다니며, 갖가지 풀이며 곤충, 제가 필요한 것을 다 잡아 먹었다.
집을 지키는 개도 목을 끈으로 매 놓지만, 가끔은 목사리를 풀어주어 자유롭게 싸다니며 똥을 누어 '개똥참외'도 열리는 것이다.
옛날 유목민들이 소나 양을 끌고 다니며, 풀과 맑은 물을 찾아다니며, 가축을 기를 때는 동물은 식물이 아니었다.
자급자족 농업, 친환경 유기 농업이 점차 농약과 비료 위주의 기업농화되면서, 땅은 죽어 가고, 가축들은 좁은 우리 안에서, 종신 징역살이하는 식물이 되었다. 인간과 가축의 관계는 완전히 착취와 피착취의 무서운 사이가 되었다.
감옥 같은 철망에 갇혀 죽을 때까지 알이나 낳으라는 닭, 비가 오면 똥오줌에 질퍽거리는 우사에서 우유나 많이 만들라는 소, 고봉 준령을 마구 뛰어 다녀야 할 사슴을 좁은 우리 안에 가두어서 값비싼 녹용이나 녹혈 만을 생각하는 것을 보면, 인간이 얼마나 이기적이고 어리석고 잔인한가 하는 한탄이 나온다.
가축에게도 감각이 있고, 감정이 있다. 지구 안에 사는 동물 중에서 인간과 가장 유사한 모습을 하고 있다. 좁은 감방에서 운동을 하지 못해서 생기는 갖가지 질병을 상상할 수 있다.
비만, 관절 이상, 골다공증, 피부병, 신경성 각종 질환 등 이런 질병을 예방, 치료하느라고 항생제를 과다하게 투입한다고 한다. 이런 것을 생각하면 우리나라의 모든 축산물은 근본적으로 문제가 큰 먹거리가 아닌가?
비단 축산 농가와 대중 음식점 만의 위기가 아니다. 전 국민의 건강을 너무도 위협하는 재앙이 닥치고 있다.
축산 농가에서는 가축들이 충분히 운동할 수 있는 목장에서 가축을 키워야 한다. 지금처럼 감옥에 가두어, 종신 징역살이를 시키는 것은 생명 학대의 범죄일 수도 있다.
결국은 가축을 잡아서 그 고기를 먹는 것이지만, 살아 있는 동안에는 동물들도 건강하게 살게 하는 것이 순리이다. 좁은 우리에 가두어 비정상적인 발육을 하면, 그 우유나 알이나 녹용, 녹혈이 정말 인체에 보신이 될까 생각해 볼일이다.
우리 국민이 빠진 보신 문화의 미신에서 깨어나야 한다. 경치가 수려한 산골짜기마다 수 백, 수 천 마리의 개를 기르고, 정력에 좋다고 개고기를 먹어대는 것도 반성할 때가 되었다.
나는 너무도 허약하게 태어나서, 평생 건강을 위하여 안 해 본 것이 없다. 72세에야 겨우 평균인의 건강을 찾았다. 결론은 현미, 잡곡, 야채, 맑은 물, 깨끗한 공기, 단전 호흡, 등산, 마음의 수련이지, 과다한 육류의 섭취나 보약이 아님을 깨달았다.
우리 국민은 식생활과 건강에 대한 의식의 대전환이 있어야 한다. 인간과 가축(동물)은 서로가 상생의 관계이지, 일방적으로 착취만 하는 대상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
조류 독감이나 광우병으로 닭이나 소가 죽는 것은 바로 우리 이웃이 죽는 것이다. 이웃이 죽으면 인간들도 살 수 없는 것이 자연의 법칙임을 명심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