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에 따라 할일과 할수 있는 일이 딱 사회적으로 갈려버리는것...그러면서도 우리들 자신은 그것에 대해 별 불만없이 살아가고 있는것, 분명히 뭔가가 이상한 일이기는 한데...nonfic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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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특집 2002년04월17일 제405호 한겨례21
머리에 피도 안 마른 것이…
“너 몇살이야?”로 상징되는 한국의 ‘나이주의’, 개개인에 내면화된 그 이중성
뉴질랜드로 이민간 한국인 아무개씨가 골프장에 갔다가 현지인과 다툼이 일어났다. 영어실력이 달려 싸움에서 밀리던 아무개씨는 영어로 소리를 버럭 질렀다. “How Old Are You?” 믿거나 말거나의 우스갯소리지만 실제 이런 일이 벌어졌다면 다투던 외국인은 황당해서 더 이상의 전투의욕을 잃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 이 같은 상황이 벌어지면, 다시 말해 “너 몇살이야?”라는 ‘결정적’인 말이 나오면 다툼은 2라운드로 돌입한다. 그때부터 사건의 본말과 잘잘못의 책임공방은 깨끗하게 지워지고 “머리에 피도 안 마른 것이”, “나잇값도 못하는 노인네가”, “애미, 애비도 못 알아볼 후레자식” 따위의 말이 나오면서 끝나지 않을 감정전으로 치닫는다.
피해자이면서 가해자의 얼굴
나이차별은 취업 등의 제도나 규율 안에서만 존재하지 않는다. 술자리 같은 놀이문화에서조차 주민등록증을 ‘까’봐야 안심하고 대화를 시작할 수 있을 정도로 일상의 영역에서 강력한 힘을 발휘한다. 성차별이나 인종차별 역시 일상적인 폭력을 휘두른다. 그러나 ‘나이주의’가 여느 차별과 다른 것은 한 사람이 피해자이면서 동시에 가해자의 얼굴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선배가 잘 안 될 게 뻔한 일이나 시시콜콜한 잡무를 떠맡기면 나이가 조폭이라는 생각이 들지만 후배가 양해도 없이 말을 놓거나 똑바로 쳐다보면서 내 지시를 거부할 때 솔직히 불쾌감을 드는 것도 어쩔 수 없다.” 직장생활 8년차인 차아무개(32)씨가 느끼는 양가의 감정은 매우 일반적인 것이다. 그만큼 개개인에게 내면화되어 의식하기나 인지하기도 힘든, 일종의 문화로 자리잡고 있는 것이 나이주의다.
지난 2월 제주 인권학술회의에서 발표된 ‘우리 사회에 나이차별은 있는가’라는 제목의 논문은 이와 관련된 재미있는 분석결과를 보여준다. ‘사례(인터뷰 대상자)10은 노무사로서 각종 차별에 대해 민감하고, 채용시 나이제한에 대한 사례를 여러 번 접해본 경험이 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속한 노무법인의 대표를 정할 때 자연스럽게 연배가 고려될 수밖에 없다고 이야기한다. 사례13의 경우는 자신이 나이제한에 걸려 입사원서를 넣을 때마다 떨어진다는 위축감과 나이차별의 부당함을 토로하면서도 젊은 사람이 그래도 뭔가 낫지 않겠는가, 그래서 회사들이 젊은 사람을 선호하는 것이 아니냐는 모순된 발언을 한다.’ 이 논문은 “이성과 감정, 경험이 충돌할 때 나타나는 복잡미묘한 감정, 심증은 가지만 물증이 없는 상황”이 현재 우리 사회에서 나이차별이 존재하고 있는 모습이라고 진단한다.
우려할 점은 이 문제가 부림당하면서도 거느릴 만한 특정연배에 국한되는 게 아니라는 것이다. 한양대 사학과 임지현 교수가 <우리안의 파시즘>에서 소개한 한 사례는 권위적인 기성세대에 반발하는 젊은이들의 자가당착적 모습을 잘 보여준다. 99년 한 대학 노천극장 공연에서 만난 한 젊은 가수는 “아저씨, 닥쳐봐”라고 기성세대를 향해 직격탄을 날리는 랩으로 관객들의 열광적인 반응을 얻었다. 그러나 자신의 멤버들을 소개하는 순서에 이르러서는 “어른들에게 ‘닥쳐봐’ 하던 기세는 온데간데없고, ‘형님들’을 소개하고 대하는 태도가 ‘조직의 쓴맛’을 본 사람처럼 정중하기 짝이 없”었다.
초등학교 취학유예신청이 폭증한 이유
YMCA 청소년쉼터의 박금혜 실장도 현장에서 청소년들을 만나면서 비슷한 현상을 엿본다. “새로 들어온 아이들의 나이에 대해 다른 아이들이 매우 민감하게 반응한다. 일단 나이부터 확인하고 언니인가, 동생인가를 결정한 다음, 연장자를 매우 깎듯하게 대접한다. 선생님한테는 반말을 써도, 언니들에게는 꼬박꼬박 존댓말을 쓴다. 일선학교에 나가봐도 상황은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다.” 최근 초등학교 취학유예신청 아동 수가 사상 최고치를 기록한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유예신청을 한 학부모들은 “덩치가 작거나 생일이 뒤처지면 다른 아이들이 형(언니)이라 부르라면서 따돌리는 것”을 염려하기 때문이다.
박 실장은 “나이차별이란 결국 예우의 외피를 쓴 힘의 논리”라고 지적한다. “선배들에게 90도로 인사를 하는 아이들이지만 나이가 많아도 힘이 없거나 약해보이는 연장자는 무시한다. 힘세고 무서운 선생님한테는 대들지 못하는 것과 비슷한 이치다.” 아이들뿐 아니라 사회 전반적으로 나이차별은 더욱 세분화되면서 노인에 대한 공경이 사라지는 것은 노인은 힘의 논리에서 약자이기 때문이다. 최근 발표된 <대중문화연구와 문화비평>에서 청소년 하위문화를 분석한 문화연대의 이동연 사무차장은 “아이들 사회가 권력화, 위계화되는 것은 어떤 점에서 생태적 먹이사슬과도 관련이 있고, 권력의지란 사회화 과정에서 자연스러운 현상으로 볼 수 있다”는 전제를 하면서도 “우리나라에서 ‘아이들의 작은 어른화’가 유독 두드러지는 것은 학력, 재산, 직위 등 모든 것에 서열화를 조장하는 어른들의 사회를 가정이나 학교에서 일상적으로 배우기 때문”이라고 덧붙였다.
근대 이전부터 ‘장유유서’ 문화 속에서 세대를 거듭해온 우리에게 나이주의는 매우 유구한 역사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봉건사회의 나이주의와 현대의 나이주의는 명백히 다른 의미”라고 상지대 교양과 홍성태 교수는 지적한다. “옛날의 나이구별은 차별의 의미가 아니었다. 위아래 10년 차는 접고 들어가는 게 전제로 깔리는, 일종의 경로우대 문화였다. 그러나 근대 이후 사회가 빠르게 변화하고 점점 더 혹독한 경쟁화가 진척되면서 나이가 경쟁의 도구로 변질됐다”고 설명했다. 앞서 지적한 ‘힘의 논리’와 유사한 맥락이다. 나이보다 엄격하고, 강한 힘을 발휘하는 대학의 학번이나 직장 입사기수도 변종의 나이차별인 셈이다.
생각은…바뀐다!
나이차별은 깨질 수 있을까? 고치라고 말하기는 쉽지만 고치기는 대단히 어려운 게 나이차별이다. 단순히 제도의 문제가 아니라 개개인의 내면화된 이중성으로, 문화의 형태를 띤 이데올로기로 자리잡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우리의 나이주의는 다른 나라와 달리 존댓말과 반말이라는 언어관습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어릴 적부터 무의식적으로 형성되기 때문에 더욱 고치기 어렵다. 그러나 18세기만 해도 여성이란 남녀 할 것 없이 애 낳고 일하는 동물 정도로 생각했던 통념이, 20세기 중반까지만 해도 흑인이란 하등하고 더러운 짐승이라고 받아들였던 문화가 불과 한 세기와 반세기 만에 상당부분 바뀐 것처럼 나이차별 역시 중요한 건 ‘인식의 전환’이다. 나이 한살이 많다는 이유로 입사원서를 돌려받을 때, 나이가 어리다는 이유로 아랫사람의 비판을 무시하고 싶을 때 한번씩 생각해볼 일이다. 우주(태양계)의 중심을 지구에서 태양으로 바꾼 것은 거대한 지렛대가 아니라 코페르니쿠스의 머릿속이었다는 것을.
김은형 기자 dmsgud@hani.co.kr |}}
see also 나이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