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들어가기 전에 ¶
언제나 그렇듯이 까라면 까라는 것이 대한민국 사회요, 거기에 따르는 것이 미풍양속인 우리네 모습에서 내가 아무리 좀 튀는 글을 써제낀다 한들 어찌 거기서 벗어날 수 있으리요? 오늘도 편집장이 쓰라고 해서 평생 책 한번 읽지 못한 이라크 역사기사를 또 짜집게 하게 되었으니 독자여러분들에게, 그리고 전 세계에 계신 해외교포 여러분들에게 죄송할 따름이다(이거 K모 방송 가요무대 멘트다. ㅎㅎ).
이라크 역사... 내가 '이거 써보면 어떻겠냐?' 라고만 했다. 나도 좀 궁금했으니 말이다. 그런데 암튼 써보라고 하니 딱 암담하더라. 일단 인류문명사에서 거대한 족적을 남긴 수메르 문명을 이라크 국가의 역사로 넣어야 할지, 또한 지금 현재 일어나고 있는 이라크 사태와 전쟁들의 배경이나 원인을 파악해야 하는데, 그것에 대해서 정확한 자료를 수집하고 기사로 풀어낼 수 있을것인가? 아무튼 여러가지 걱정을 안고 늘 그랬듯이 내 맘대로 기사를 써제낀다. 이해해주기 바란다.
2. 영광의 시대 ¶
지금의 이라크는 전쟁, 테러, 혼돈, 독재 등으로 인해서 피와 눈물이 마를 날이 없는 우울한 나라이다. 그러나 우리에게도 한 때 영광의 시절이 있었듯이 이 이라크에서도 영광의 시절이 어찌 없었겠느뇨? 한번 보자.
이라크의 영광이라고 하면 여러분들은 쉽게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수메르 문명이 바로 그것이다. 인류 4대 문명 중 하나인 수메르 문명을 이라크 땅에서 살던 머나먼 아주 졸라리~~~ 먼 선조들께서 이룩하셨다. 여기에 대해서 뭐라고 더 말하지 않겠다. 몇몇 독자들은 '아니 그럼 끝이잖아. ' 라고 말하고 싶겠지만 끝이 아니다. 이라크 국민들은 더욱 화려한 역사를 기억하고 있는 것이 있다.
바로 아바스 왕조였다.
'아바스 왕조' 이 이름을 들어나 보셨는가? 혹여 세계사 시간에 졸지 않으신 분들이나 고등학생 시절에 야간자율학습시간에 할짓이 없어서 역사부도나 펼치면서 놀던 친구들은 기억할 지도 모른다.
그럼 이 나라가 어떤 나라인가? 얼마나 대단하길래 영광이라는 단어를 붙이는가? 일단 우리나라 사람들은 뭐만한 땅덩이에 사는 것을 한으로 삼기 때문에 땅떵이 넓으면 대단한 줄로 안다. 그래서 일단 땅덩이 부터 보자.
이 나라의 땅덩이는 동으로 가면 당시 당나라와 접해 있으며, 인도 서북부를 걸쳐서 지금의 아프가니스탄, 파키스탄, 이란은 당근이고 조금 위로는 과거 소련의 남부영역까지 몽땅 이 나라 땅이다. 아직도 멀었다. 이제 중앙으로 가면 우리가 말하는 이라크와 사우디 아라비아와 그 반도, 시리아와 터키 남단, 그리고 서로 가면 이집트와 사하라 이북의 아프리카에서 인간이 산다는 땅은 몽땅이고, 더 서쪽으로 가면 포르투칼과 스페인이 있는 이베리아 반도까지, 옵션으로 하면 이탈리아 남부의 몇몇 섬과 지중해의 몇몇 섬들이 몽땅 이 나라의 땅이다.
씨바, 우리가 제일로 넓었다고 침튀기는 발해나 고구려의 영토의 10배는 더 될 것이고, 혹여 한단고기를 보신 분들이 열올려 말하는 동서 5만리, 남북 2만리의 한님국보다도 더크다. 암튼 그 광대한 나라의 수도가 바로 지금 한발짝 건너에 지뢰가 터지고, 폭탄이 터지는 바그다드이다.
그럼 골때리게 넓은 이 나라가 어떤 나라인가? 나도 잘은 모르니까 여기저기서 주워온 잡다한 것으로 한번 풀어보겠다.
이 나라는 이슬람의 3번째 왕조이다. 이슬람 역사학자들은 뭐라고 하는지 모르겠지만 나는 3번째 왕조라고 하겠다. 왜 3번째 왕조인가? 마호메트가 득도를 하고 이제 세상에서 굿바이 하고 난 뒤부터 그의 후계자들을 '칼리프'라고 하였다. 4번째 칼리프까지 마호메트의 정통계열이 그 뒤를 잇는다. 이를 '정통 칼리프 왕조' 라고 한다. 이들은 선거에 의해서 선출되었으며 포교를 위해서 끊임없이 전쟁을 해서 영토를 넓혔다. 참, 포교를 위해서 전쟁을 했다고 하는데, 물론 그 내면에 깔린 사회경제적인 무슨 이유가 있었을 것이지만 거기에 대한 자료는 구하지 못했다. 또한 우리가 흔히 알다시피 '한 손엔 코란, 한 손엔 칼' 이라고 해서 코란을 따르지 않으면 무조건 죽인다고 들었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코란을 안 믿는다고 해서 무슨 해꼬지를 하고 그러진 않았다. 다만 세금을 좀 내라는 것 뿐이었다. 성 하나 점령하면 거기에 이교도가 산다고 해서 모든 이들을 다 죽여버리는 잔혹한 십자군보다야 백만배는 얌전하게 영역을 넓혀갔다.
그런데 역시나 땅덩이가 커지고 배가 부르면 딴 마음이 생기는 법. 서기 661년 시리아 총독 무아위야는 마지막 정통 칼리프인 '알리'를 암살하고 자신이 그 자리에 오른다. 그리고 이제까지 선거에 의해서 선출되던 칼리프의 자리를 자신의 아들들이 세습할 수 있는 세습군주제를 택했다. 이를 옴미아드 왕조라고 부른다.
이들은 세습군주제를 유지하기 위해서 강력한 전제군주를 표방한다. 그리고 그 무거운 체제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많은 세금과 흉폭한 억압이 필요한 것이다. 또한 도량형이나 화폐의 통일로 인해서 국가관리도 편해져야 한다. 한 마디로 딱 진시황 같은 인물들이었다. 그러니 나라의 영토를 넓어지고 하겠지만 어찌 속이 편하리요? 결국 불만이 쌓이다 못해서 여기저기서 반란이 일어나고 이 때를 틈타서 아바스 가문이 칼리프 자리를 쟁취한다. 이것을 아바스 혁명이라고 부르는데, 단순한 정치적 지배자의 교체를 왜 혁명이라고 하는가 하면 당시까지만 하더라도 아랍계의 무슬림들과 비 아랍계의 무슬림들은 그 차별이 꽤나 있었다. 그렇지만 전 무슬림들은 평등해야 한다는 사상이 바람을 일으키고 그것이 하나의 정치적 운동으로 진행되어 가는 와중에 드디어 아바스 왕조가 탄생했다는 것이었다. 특히 아바스 가문의 시조인 아바스는 마호메트의 숙부로써 마호메트와 그리 멀지 않은 친척뻘이 되는 가문이었다. 이는 정서적으로도 아바스 가문에게 유리한 측면이 없지 않았다.
결국 750년에 아바스 왕조가 탄생하고 그 후로 1258년에 몽고의 침입에 의해서 파괴될 때까지 바그다드는 이슬람 제국의 수도로써 그 위상을 천하에 알렸다. 당시에 아바스 왕조에 비해서는 한 줌도 안되는 유럽에서는 즈그들끼리 수십개의 나라, 그보다 더 작은 수백개의 분국으로 나뉘어져서 혼란의 상황이었고, 유일하게 아바스 왕조 견줄 수 있는 세력은 중국의 당 나라와 겉보기엔 매우 쇠약했지만 그래도 유럽의 든든한 방파제인 비잔틴 제국 말고는 없었다. (참고로 비잔틴 제국은 1000년간 유럽을 지켜주는 방파제였다. 아바스 왕조도, 셀주크 투르크도, 몽고도, 이 나라를 넘지는 못했다. 결국 1453년 오스만 투르크 제국에 이르러서야 1000년을 버틴 노쇄한 방파제는 무너지고 말았다. 역사에 만약이라는 단어는 좀 그렇지만 이 나라가 없었다면 유럽의 역사는 존재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당대 최강의 대국과 그 핵심인 당대 최고의 도시 바그다드에 관해서는 얘기를 하다 보면 끝이 없을 것이다. 다만 여러분들이 아는 아라비안 나이트 같은 이야기들은 전부 이때의 영광아래 탄생한 이야기들이라는 것만 짐작해 두길 바란다. 이 아바스 왕조의 영광은 쉽게 몰락하지 않았다. 10세기 후반이 되면 칼리프의 정치적 실권이 상실되고 셀주크투르크의 압박도 있었지만 1258년 몽고가 침략하기 전까지 이 왕조는 500년을 버텨왔다.
음....이라크 국민들이 그렇게 자부심을 느낄 만하지 않는가?
3. 독립 이라크 그러나... ¶
그러나 영화의 시절이 있었으면, 우울한 시절이 있는 것은 굳이 역사의 순리니 뭐니 거창한 소리를 하지 않더라도 너무나 당연한 소리이다.
1258년 몽고의 침략은 고대 수메르 문명 이후 약 5000년간 이 지역의 문화의 중심이자, 교통, 상업의 중심인 바그다드를 파괴하고 말았다. 그리고 나서 티무르 제국, 오스만 투르크 제국에게 넘어가면서 서서히 영화는 잊혀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후의 우울한 역사는 두산대백과사전에서 아래와 같이 전한다.
1258년 몽고의 침략은 고대 수메르 문명 이후 약 5000년간 이 지역의 문화의 중심이자, 교통, 상업의 중심인 바그다드를 파괴하고 말았다. 그리고 나서 티무르 제국, 오스만 투르크 제국에게 넘어가면서 서서히 영화는 잊혀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후의 우울한 역사는 두산대백과사전에서 아래와 같이 전한다.
이라크는 16세기에 오스만 투르크제국(현재의 터키)에게 넘어가 1917년까지 여러 세기 동안 지배를 받았는데, 이 기간에 내부적인 반란과 이란을 비롯한 외부의 침략이 끊이지 않았다. 1899년 오스만투크르인들이 독일인들에게 내준 철도부설권에 자극받은 영국인들이 제1차 세계대전중 이라크를 점령했다. 1921년 영국의 보호를 받는 군주국이 세워졌고, 1925년 헌법이 승인되었으며, 1932년에 완전한 독립이 이루어졌다. 2차 세계대전중 친(親)독일정책을 고수해 1941년 영국에 재점령되었으며, 대전 후에 재차 독립하였지만 정치적 소요가 끊이질 않았다. -두산대백과사전
이렇게 우울하게 이라크는 현대사를 맞이한다.
4. 이란·이라크 전쟁 ¶
1958년 혁명으로 인해서 군주제가 무너지고, 그 뒤로 쿠데타가 계속 일어나고 난리도 아니었다. 이 나라가 간신히 정신을 차린 것은 우리 후세인이 속해 있는 사회주의 '바트당'의 집권이 1968년부터 시작되면서 기나긴 혼돈의 시간을 마감했다. 일단 한번 이 난장판을 찬찬히 살펴보자.
아랍은 왠만하면 아직도 왕이 전권을 쥐고 있는 군주제이다. 그러나 2차세계대전 이후 급속하게 성장하던 진보혁신세력들은 반 제국주의를 주장하는 군부혁신세력과 결탁하여 위에서 말한 1958년 군주제가 폐지되는 혁명을 단행하였다. 그러나 그 새로운 정권은 친 소련 정책과 군부내에서의 온건파의 반발로 1963년 바트당 장교단에 의한 쿠데타로 무너지고 신 정권이 아르프 대통령의 지도하에 탄생되었으나 또다시 바그다드 대학생들의 반정부시위, 시아파 이슬람교도들의 시위, 북부 쿠르드족과의 충돌로 다시금 혼란에 휩싸이다가 드디어 1968년 후세인이 소속되어 있는 바트당 내에서 온건 세력이 쿠데타를 일으켜서 정권을 엎은 후 그제서야 정치적인 안정을 되찾기 시작했다. (니기미....내가 기사 쓰면서 단일 문장으로는 최장의 문장이었다. 수다맨 어딨냐? 함 읊어봐라)
아랍은 왠만하면 아직도 왕이 전권을 쥐고 있는 군주제이다. 그러나 2차세계대전 이후 급속하게 성장하던 진보혁신세력들은 반 제국주의를 주장하는 군부혁신세력과 결탁하여 위에서 말한 1958년 군주제가 폐지되는 혁명을 단행하였다. 그러나 그 새로운 정권은 친 소련 정책과 군부내에서의 온건파의 반발로 1963년 바트당 장교단에 의한 쿠데타로 무너지고 신 정권이 아르프 대통령의 지도하에 탄생되었으나 또다시 바그다드 대학생들의 반정부시위, 시아파 이슬람교도들의 시위, 북부 쿠르드족과의 충돌로 다시금 혼란에 휩싸이다가 드디어 1968년 후세인이 소속되어 있는 바트당 내에서 온건 세력이 쿠데타를 일으켜서 정권을 엎은 후 그제서야 정치적인 안정을 되찾기 시작했다. (니기미....내가 기사 쓰면서 단일 문장으로는 최장의 문장이었다. 수다맨 어딨냐? 함 읊어봐라)
우리가 쉽게 생각하기로 바트당은 후세인이 속해 있는 나쁜놈이라고 생각하기 쉬우나 아주 좋은 친구들이다. 이들은 소련과 친교를 맺음으로써 정치적 안정을 꾀하고, 더 중요한 것은 이라크 석유회사를 국유화시킨 것이다. 이게 뭐 그리 중요한 것이냐구? 매우 중요한 것이다.
과거 제국주의 국가들은 침략해서 총을 들이밀면서 "씨바, 우리가 다른 제국주의 놈들로부터 널 보호해줄께 근데 뭐 없냐?" 이런다. 그래서 우리나라도 무슨 철도 부설권이니 광산 채굴권이니 준다. 이 권한을 준다는 것은 그냥 제국주의 침략자들이 권한을 받은 곳의 모든 것을 다 가지고 그 나라에게는 세금으로 쥐꼬리만큼 주는 것이다. 즉 니네 집에 강도가 기어 들어와서 니네 집에 있는 통장이나 돌반지 다 주고 '고마워 세금이야'라면서 백만원 던져놓고 가져가는 것과 다를 바 없다. 그렇게 제국주의 침략자들은 약소국들을 침략했다. 이라크에게서도 똑같았다. 이라크에서 가져갈게 뭐 있겠는가? 석유밖에 없질 않은가? 그래서 석유채굴권을 받아서 지네들 맘대로 펑펑 가져갔다. 그러나 바트당 정권은 이 시기에 강력한 정치력을 발휘해서(또한 이때 산유국들은 석유채굴권을 자국으로 돌리기 위해서 OPEC를 만든다.) 석유회사를 국유로 만들어 버린다. 결국 석유 팔아서 남는 모든 이익은 이라크의 것이 된다. 집권 바트당과 당시 2인자였던 후세인은 여기서 남는 이익을 지네들 쪼금 가지고 많은 액수를 국민들의 복지와 군대양성으로 돌렸다. 국민복지에 돌렸다고 하니까 좀 이상하지? 하지만 실제로 이라크는 198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아랍에서 가장 복지와 교육수준이 높은 아랍의 최선진국이었다. 후세인도 한때는 좋은 인물이었다. 그러니까 국민들에게 그만큼의 지지를 받고 정권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1979년 후세인은 정권을 물려받는다. 이때 어떤 자료는 당시 바르크 대통령을 후세인이 암살했다고 그러던데, 또한 몇몇 자료에서는 '물려받았다' 라고 적혀져 있다. 무엇이 진실인지는 모르겠다.
아무튼 후세인은 대통령질 하자마자 1980년 전쟁질을 하기 시작한다. 바로 8년 간에 걸친 이란, 이라크 전쟁이었다. 이 전쟁의 배경에는 두어가지 정도가 있다. 이라크와 이란 모두 물이 귀한 나라다 보니 유프라테스강에 대해서 티격태격하다가 결국 1975년 두 나라는 '공동소유'라고 선언함으로써 적당히 그냥저냥 사는가 싶었지만 둘 다 솔직히 '함 엎어서 내가 좀 더 차지하면 안될까?' 라는 욕심이 있었다. 또한 1979년 이라크에 후세인과 마찬가지로 이란에도 호메이니라는 사람이 혁명을 일으켜서 이란을 먹어버리고 만다. 이 사람은 지가 알라의 대리자라고 선전하는 사람인데, 제국주의를 싫어하고 약간 진보적인 것이 있었는지 몰라도 공화제 국가를 성립해버렸다. 또 이라크는 이 전쟁으로 인해서 아주 짧은 해안선(항구가 아시다시피 바스라항 하나 뿐이다. 그만큼 해안선이 짧다.)도 넓혀서 밖으로 좀 수월하게 나가고 싶은 마음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결정적으로 이란이 이 꼴이 되자 사방에서 착한 후세인을 찝적대기 시작한다.
왜냐면 미국은 지독한 반미주의자인 호메이니가 아랍의 핵심국가인 이란을 쥐고 있으면 골때리게 될 뿐더러, 다른 아랍국가들은 아랍의 강국인 이란과 공화정이 사방으로 전파되면 지네들도 쫓겨날까봐(나폴레옹이 온 유럽을 정복하면서 자유주의를 퍼뜨리자 온 유럽의 군주들이 이것을 막기 위해서 대 프랑스 전쟁을 일으켰듯이) 이란과 맞멎는 이라크가 한판 붙어서 이 혁명의 전파를 막아보고 싶었을 것이다. 이렇게 해서 두 나라는 8년간 정말 지랄 같은 전쟁을 하기 시작했는데, 이라크는 아랍과 미국의 지원아래 당시로서는 매우 우수한 무기를 들고 싸웠으며, 이란은 남는 건 쪽수라고 인해전술로 밀어붙였다. 결국 용호상박, 듀스에 듀스까지 가는 접전 끝에 두 나라가 지쳐 떨어졌다. 둘이 지랄같이 싸워서 얻은 대가는 서로 아무것도 없었다. 이라크가 약간 땅을 넓혀서 딴에는 '승리선언'을 하기는 했지만 남는 건 전쟁의 참화뿐이었다.
이제 서서히 이라크의 비극이 시작되려고 한다.
5. 쿠웨이트 침략과 1차 걸프 전쟁 ¶
우리가 후세인을 나쁘게 생각하게 된 결정적인 계기가 바로 존만한 나라인 쿠웨이트를 개떼 같은 군대로 달랑 8시간만에 꿀꺽한 1990년 8월 2일에 벌어진 쿠웨이트 침공일 것이다. 물론 이 침공의 내면에는 이라크의 사정이 있었다.
일단 이라크는 이 전쟁으로 인해서 엄청난 대가를 치뤘지만 전쟁이 끝난 후에는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았다. 전쟁 전에는 300억불이 넘는 외환보유고를 갖고 있었지만 이제는 거꾸로 1000억불이 넘는 빚을 지게 되었다. 또한 전쟁을 8년간이나 해서 늘은 것은 쌈 실력이라고 외형적으로는 세계 4위의 엄청난 군사강국이 되어버렸다. 그러니 아랍애들이 피할 수밖에. 암튼 국가 이미지도 제고하고 전후 복구를 하려면 돈이 있어야지. 이라크에는 돈이 될게 석유뿐이지 않는가? 물론 주변국들도 마찬가지지만. 그래서 석유를 팔아먹으려고 하니까, 씨바 석유 가격이 또 껌값이네. 그래서 OPEC애들이랑 주변에 조금 힘을 넣었지. "석유 그만 좀 퍼라. 가격이 올라야. 우리도 먹고 살거 아냐. 알았지?"
그런데 씨바, 뭐만한 아랍에미레이트(UAE)와 쿠웨이트 이 두 나라가 이 말을 쌩까버렸다는 말이지. 누구를 위해서 이라크가 조빠지게 싸웠는데... 그래서 석유가격은 안 오르고. 다른 나라에게서 원조를 받을려고 해도 아무도 원조 안 해주고(쿠웨이트는 차비 하라고 5억달러 주고 쌩깠다.). 후세인 미치고 팔짝 뛸 것 같은 거야. 그래서 생각한 것이 쿠웨이트를 잡아먹으면 해안선도 넓어지고, 그 여세를 몰아서 바로 사우디아라비아까지 먹으면 자기는 순식간에 세계 세계석유시장은 이라크의 것이 된다! 그렇게 해서 열 받은 후세인은 밀어버린 것이었다.
물론 어느 전쟁도 침략이 정당화 될 수는 없지만 이런 사정이 있었다는 것은 좀 알아두길 바란다.
전쟁이 나고 나서 세계가 뒤집어졌다. 특히 미국은 '올게 왔구나' 하면서 대책에 바빴다. 쿠웨이트 침공 이후 겁이 난 사우디는 바로 미국을 불렀다. 100만이 넘는 군대를 가진 이라크와 10만 밖에 안 되는 사우디는 질적으로도, 양적으로도 압도적인 차이였다. 결국 사우디에 미군이 주둔하게 되었는데, 중요한 것은 이런 사우디가 있었기에 걸프전쟁이 가능한 것이었다.
이게 뭐냐면 아무리 미국이 미사일이나 공군으로 폭격을 해도 후세인을 무너뜨리려면 육군이 있어야 하는데, 이라크가 100만이 넘게 있으니 아무리 질 좋은 군대라고 해도 20만은 넘게 미군이 있어야 하거든. 근데 이 군대를 먹여 살릴 만한 나라가 있어야 한다. 그게 바로 사우디다. 땅도 졸라 넓고, 돈도 졸라 많고, 거기에다가 매년 백만이 넘게 성지순례자를 받아들이는 나라이기 때문에 군대 한 25만 정도는 그럭저럭 수용이 가능하다는 것이었다. 결국 사우디가 없었다면 미국은 감히 이라크를 때릴 수도 없었을 것이다.
당시 미군의 군수책임자의 말을 들어보자.
"만약 우리의 파트너가 빈곤했거나, 적대적이었거나, 혹은 이 양자의 경우에 다 해당되었다면... 우리는 매우 어려운 상황에 처했을 것이다."
"만약 우리의 파트너가 빈곤했거나, 적대적이었거나, 혹은 이 양자의 경우에 다 해당되었다면... 우리는 매우 어려운 상황에 처했을 것이다."
암튼 그렇다고 바로 전쟁을 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미군(다국적군이라고 말은 붙였지만) 25만명이 사우디까지 가는데 시간이 무지 걸린다. 그 사이에 미국은 이라크에 경제제재를 해놓고, 배 쫄쫄 굶으면서 혹시나 또 후세인이 바로 사우디까지 내려올까봐 겁이 무지 났다. 그래서 마구마구 언론에 구라를 날리기 시작한다. "우리 사우디에 니들은 모르지만 짱박아 놓은 병력들이 있어. 감히 사우디는 넘보지마" 이런 식으로 말이다.
지금도 미스테리 하지만 왜 그때 후세인이 사우디로 내려오지 않았는지 알길이 없다. 하지만 어쨌던 후세인이 쿠웨이트 먹고 어물어물하는 사이에 시간은 흘렀고, 만반의 준비가 된 미국과 그 동맹국들은 연습게임 하듯이 이라크를 초토화시켜버렸다. 이것이 바로 1991년 1차 걸프전쟁이었다.
6. 10년간의 고통과 2차 걸프전쟁 ¶
1991년 2월 26일 이라크가 항복을 했다. 그리고 이라크는 정말 너무나도 참혹한 암울한 시기에 다다르게 되었다. 일단 석유를 퍼서 팔 수 조차 없었다. 또 만약에 짱박아 놓은 돈으로 필요물자를 수입하려고 해도 대부분 금지품목으로 걸려든다. 의약품들을 수입하면 그것으로 화학무기를 만들기 때문에 안 된다고 하니 그 제재가 얼마나 심했는지 짐작하지 않아도 알 것이다. 결국 이라크는 완전히 원시국가로 돌아가게 되었다.
그렇다고 전쟁이 끝났다고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니다. 미국과 영국은 1998년 후세인이 무기사찰단을 추방한 것을 빌미 삼아 '사막의 여우작전' 이라고 해서 올해 2차 걸프전까지 끊임없이 공습을 일삼았다. 그 횟수나 규모가 사실상 전쟁이나 다를바 없었다. 이렇게 끊임없이 두드려 맞다가 미국의 부시 정권은 자신을 지원해준 자국의 석유회사들의 이익과 불황의 타개를 위해서 다시금 이라크와 전쟁을 시작하였다.
이라크는 최선을 다해서 시간을 벌었지만(나시라야에 있는 사단이 항복한 척 했다가 미군이 안심하고 바그다드로 올라가자 다시 총을 잡고 후방을 때리는 소위 '뒷다마 후리기' 꽁수는 압권이었다.) 너무나 압도적인 무력 앞에서 별 수가 없었다.
그리고 이라크 민중은 미국에 대항하여 무차별 테러를 가하는 등 이라크는 다시금 대 혼란의 소용돌이에 빠져들게 되었다. 그리고 미국은 이러한 반발을 막기 위해서 민족감정을 부추기고 종교문제를 부추겨서 '이라크 분할정책'을 펴고 있다. 나라가 3개로 갈라지면 지네들끼리 싸운다고 정신이 없을 테니 굳이 미국이 감시하지 않아도 위협을 없을 거라는 것이다. 과연 이라크가 어떻게 역사의 수레바퀴를 굴려갈지 본인 매우 궁금하다.
7. 나가는 글 ¶
우리는 이라크는 '무식한 나라' 라고 생각하기 쉽다. 다분히 그것은 언론과 미국과 같은 강자가 스스로를 합리화시키기 위해서 교묘히 우리에게 주입한 것이었다. 기승전결이 완전히 짤려진 상태에서 사실만 본다면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다. 그래서 한번 이라크 역사를 조금이나마 알고 싶었고, 그 과정들 속에서 나는 이라크에 대한 일방적인 시각을 조금이나마 버릴 수 있었다.
물론 위에서 말한 것들이 완전히 객관적일 수도, 또 아직까지 학자들 사이에서 정리되지 못한 것들이 많다. 그야말로 '임종금의 이라크 역사' 이다.
우리가 그냥 '후세인 씨박새끼, 이라크 국민들 등신'이라고 생각하면 쉬운 일이다. 편한 일이다. 그렇게 생각한다고 우리에게 피해 올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러나 딱 한번만 생각해보자. 이라크가 스스로 판단한 것이 몇이나 되는가(내가 보기엔 쿠웨이트 침공뿐이다)? 결국 외세에서 벗어나지 못했기에 저렇게 된 것은 아닌가?
우리가 그냥 '후세인 씨박새끼, 이라크 국민들 등신'이라고 생각하면 쉬운 일이다. 편한 일이다. 그렇게 생각한다고 우리에게 피해 올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러나 딱 한번만 생각해보자. 이라크가 스스로 판단한 것이 몇이나 되는가(내가 보기엔 쿠웨이트 침공뿐이다)? 결국 외세에서 벗어나지 못했기에 저렇게 된 것은 아닌가?
우리도 꼭 생각해야 한다. 이라크의 근현대사를. 외세에게 처절하게 당하다가 종국엔 파멸에 길에 이르렀다는 것을. 그래서 그토록이나 이라크 국민들이 이렇게 난리를 피우는 것이 아닌가 싶다.
'한국 군대 오지마라. 오면 한국군대도 죽인다. 미군 옆에 서있지 마라. 언제 너를 미군의 친구로 알고 죽일지 모른다. 우리에게 파병하는 나라는 무서운 대가를 치를 것이다.'
외세에게 처절하게 당한 그들의 한이 지금 저렇게 나타나고 있는 것이 아닌지.
작성자 : netzza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