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동사적타동사적

FrontPage|FindPage|TitleIndex|RecentChanges| UserPreferences P RSS
롤랑 바르트는 작가를 두 부류로 나누어 하나는 타동사적 작가, 다른 하나는 자동사적 작가로 설명한 바 있다.

타동사적 작가(글쓰기를 하는 사람)는 위대한 사상이나 진실을 전달하는 데 역점을 둔다. 이들의 글은 명료하며 논리 정연하고 문화적으로 타당하다. 타동사적 작가의 글은 문화적 쾌락을 안겨준다. 잘 정돈되어 있을 뿐 아니라 정답과 질서로 충만한 글이기 때문이다. 이데올로기를 전파하고자 하는 사상가의 글이나 고전이 대표적으로 이에 속한다.

자동사적 작가는 사상이나 진실을 전달하려 애쓰지 않으며 글쓰기의 목적을 글쓰기 자체에 둔다. 이들은 도대체 "결론"이란 것을 갖고 있지 않다. 그들의 메세지는 문화적 정도(正道)를 떠나 있으며 모호하거나 결핍된 것으로 받아들여지곤 한다. 독자는 문화적 나침반을 상실하고 표류하기 십상이다. 프루스트나 조이스, 베케트 등이 그렇게 글을 썼다.

헌데, 여기 바르트가 제시한 재미난 비유가 있다. 순종하는 어린이는 칭찬과 과자를 얻지만, 반기를 드는 어린이는 회초리와 환희를 얻는다. 한편, 부모님의 권고에 따라 장래성 있는 남자에게 시집가는 여자는 문화적 정도(正道)의 즐거움을 경험하지만, 부모의 반대를 물리치고 사랑하는 사람을 따라 집을 뛰쳐나가는 처녀는 아픔과 환희를 만끽한다. 물론 후자의 경험을 허락하는 것은 자동사적 작가들이다.

사실 바르트는 고전을 지나치게 경멸했고 (수적으로 희귀했던)자동사적 작가에게는 크게 열광하였다. 그에게 있어 decoding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자동사적 작가뿐이고 타동사적 작가는 언제나 우리에게 re-coding을 주입한다고 불평했다. 물론 이런 입장에 대해서는 얼마든지 반론이 가능하지만 자동사적인 것과 타동사적인 것의 기본틀은 얼마든지 우리 주변으로 확장시켜 다시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가령, 몇 가지 예를 보자. 선생님의 경우, 타동사적 선생님이 지식을 주입하고 암기하도록 강요하는 데 비해 자동사적 선생님은 학생 스스로가 다양한 문제해결의 가능성을 찾도록 독려할 것이다. 타동사적 기자는 구성된 내용을 유일한 진실인 양 강요하며 독자를 현혹시키지만 자동사적 기자는 냉정한 사실만을 전해줄 뿐 어떤 선택도 독자 자신의 몫으로 남겨둔다.

See Also 양서의해악



"; if (isset($options[timer])) print $menu.$banner."
".$options[timer]->Write()."
"; else print $menu.$banner."
".$timer;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