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남병철(1817 - 1863), 남병길(1820 - 1869) ¶
조선조 말기의 최대의 과학적인 이 두 사람이 이른바 실학파와는 인연이 먼 당시의 파벌 정치의 파도를 타고 정부의 고위직을 누린 사대부였다는 것은 아리러니컬한 이야기이다.
남병철에게는 천문학서를 비롯하여 측량술에 관한 '해경세초해'가 있다. 이 책은 천원술의 창시자로 알려진 이야의 '측원해경'의 해설서이다. 여기서 2차방정식의 해법으로 천원술을 사용하면서, 이 방법은 서양의 소위 차근법과 같다는 말을 덧붙이고 있다. 그는 "총명하기 그지없고, 산술추보(수학과 역산)에 정통하였다."고 명성이 높았으나, 단명의 탓인지 저서는 많지 않다.
동생인 남병길도 장수하지는 못했으나 그가 남긴 천문학 및 수학에 관한 저술은 실로 방대하다. 천문학서를 제외한 측량술과 수학에 관한 것으로는 '양도의도설', '측량도해', '구고술도요해', '무이해', '산학정의', '구장술해', '집고연단', '옥감세초상해' 등이 있다.
이 중 '양도의도설'은 천문 계산과 항해, 측량술 등에서 쓰이는 구면삼각법의 공식을 푸는 복잡한 계산을 기계적으로 순쉽게 치루는 계산기에 관한 해설서이다. 이 계산기구는 구면삼각형의 두 면의 길이와 그 변들 사이의 각의 크기가 알려지면 나머지 한변의 길이를 기계적으로 측량할 수 있도록 되어 있다. 당시의 천문 계산은 종전에 비해 삼각법을 사용한다는 점에서 크게 발전하였으나, 각도의 크기에 따라 많은 도표를 일일이 대조해야 한다는 번거로움이 있었다.
'무이해'는 저서라기보다도 논문이다. 이 기발한 제목은 문자 그대로 표면상의 차이가 있을지언정 근본적인 해법은 똑같다는 뜻이다. 방정식의 연구로 유명한 이예(1773-1817)가 차근법(대수방정식의 해법)은 천원술에서 나온 것이긴 하지만 상소법에 있어서는 다르다고 한 주장을 논박한 것이다.
남병철에게는 천문학서를 비롯하여 측량술에 관한 '해경세초해'가 있다. 이 책은 천원술의 창시자로 알려진 이야의 '측원해경'의 해설서이다. 여기서 2차방정식의 해법으로 천원술을 사용하면서, 이 방법은 서양의 소위 차근법과 같다는 말을 덧붙이고 있다. 그는 "총명하기 그지없고, 산술추보(수학과 역산)에 정통하였다."고 명성이 높았으나, 단명의 탓인지 저서는 많지 않다.
동생인 남병길도 장수하지는 못했으나 그가 남긴 천문학 및 수학에 관한 저술은 실로 방대하다. 천문학서를 제외한 측량술과 수학에 관한 것으로는 '양도의도설', '측량도해', '구고술도요해', '무이해', '산학정의', '구장술해', '집고연단', '옥감세초상해' 등이 있다.
이 중 '양도의도설'은 천문 계산과 항해, 측량술 등에서 쓰이는 구면삼각법의 공식을 푸는 복잡한 계산을 기계적으로 순쉽게 치루는 계산기에 관한 해설서이다. 이 계산기구는 구면삼각형의 두 면의 길이와 그 변들 사이의 각의 크기가 알려지면 나머지 한변의 길이를 기계적으로 측량할 수 있도록 되어 있다. 당시의 천문 계산은 종전에 비해 삼각법을 사용한다는 점에서 크게 발전하였으나, 각도의 크기에 따라 많은 도표를 일일이 대조해야 한다는 번거로움이 있었다.
'무이해'는 저서라기보다도 논문이다. 이 기발한 제목은 문자 그대로 표면상의 차이가 있을지언정 근본적인 해법은 똑같다는 뜻이다. 방정식의 연구로 유명한 이예(1773-1817)가 차근법(대수방정식의 해법)은 천원술에서 나온 것이긴 하지만 상소법에 있어서는 다르다고 한 주장을 논박한 것이다.
1.2. 이상혁(1810 - ??) ¶
남병길의 수학상의 공동 연구자인 이상혁은 중인 출신의 산학자이다. 그에 대한 기록은 산학의 고시에 급제한 다음 서운정, 그러니까 역계산을 다루는 천문관리직에 있었고, 남병길보다는 10세 연상이었다는 정도의 인적 사항 밖에는 그에 대해서 알려진 것이 없다.
이상혁의 저서 가운데 현재까지 알려진 것으로는 천문학서 외에 수학서로 '익산', '차근방몽구', '산술관견' 등이 있다.
'산술관견'에서 펼쳐진 이상혁의 독자적인 연구는 한국 수학사를 그저 결과적으로 나타난 수학상의 업적만으로 평가하려고 했던 일본의 수학사가로 하여금 "모두가 중국 수학의 주해 뿐이었던 조선에 있어서 그야말로 전인미답의 경지를 개척하였다"고 감탄시키기까지 하고 있다.
이상혁이 전통적인 한국수학의 굴레를 벗어날 수 있었던 것은 사대부 출신의 남병길이 마지막까지 떨쳐버릴 수 없었던 형이상학적 수리사상과 교양주의적 수학관이 중인 산학자인 그에게는 결여되어 있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공동 연구자이면서 남병길과 이상혁의 수학이 그토록 큰 격차를 보이고 있는 이유는 수학적인 소질이나 능력의 문제에서보다 두 사람의 의식을 지배한 이데올로기의 강도의 차이에서 찾아야 옳을 것 같다.
이상혁의 저서 가운데 현재까지 알려진 것으로는 천문학서 외에 수학서로 '익산', '차근방몽구', '산술관견' 등이 있다.
'산술관견'에서 펼쳐진 이상혁의 독자적인 연구는 한국 수학사를 그저 결과적으로 나타난 수학상의 업적만으로 평가하려고 했던 일본의 수학사가로 하여금 "모두가 중국 수학의 주해 뿐이었던 조선에 있어서 그야말로 전인미답의 경지를 개척하였다"고 감탄시키기까지 하고 있다.
이상혁이 전통적인 한국수학의 굴레를 벗어날 수 있었던 것은 사대부 출신의 남병길이 마지막까지 떨쳐버릴 수 없었던 형이상학적 수리사상과 교양주의적 수학관이 중인 산학자인 그에게는 결여되어 있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공동 연구자이면서 남병길과 이상혁의 수학이 그토록 큰 격차를 보이고 있는 이유는 수학적인 소질이나 능력의 문제에서보다 두 사람의 의식을 지배한 이데올로기의 강도의 차이에서 찾아야 옳을 것 같다.
1.3. 이순지(1406 - 1465) ¶
대표저서 <칠정산 내,외편>
조선 세종조의 천문학자, 수학자. 본관 양성(陽城). 자 성보(誠甫). 시호 정평(靖平). 음보로 동궁행수(東宮行首)로 있다가 1427년(세종 9) 문과에 급제, 왕명으로 산법(算法)을 전공. 의상(儀象)을 교정하고 간의규표(簡儀圭表)·태평현주(太平懸珠)·앙부일구?(仰釜日晷)·자격루?(自擊漏) 등을 만들고, 칠정산(七政算), 천문유초(天文類抄)를 지었다. 1457년(세조 3) 예조참판에 올랐고, 1459년 한성부판사(漢城府判事)가 되었으며 성격이 치밀하여 산학(算學)·천문(天文)·음양(陰陽)·풍수(風水) 등에 밝았다. 2003년 4월. 과학의 달을 맞아 과학기술부와 한국과학문화재단이 대한민국 대표 과학자 14인에 선정했다.
1.4. 최석정(1645 - 1715) ¶
대표저서 <구수략>
영의정을 비롯하여 왕조의 고위직을 두로 걸쳤던 최석정은 당시의 사대부가 이상으로 삼은 교양을 고루 갖춘 조선조의 전형적인 대귀족학자 정치가였다. 최석정의 '구수략'은 중인산학자의 수학과는 일질적인 조선조 사대부층의 수학사상의 단면을 나타내고 있다는 점에서 특히 흥미가 있다. '구수략'은 동양에 있어서의 중세적 보에티우스 수학에 견줄 수 있을 만큼 그 서술이 유럽 중세의 사원 수학의 스타일과 비슷하며, 형이상학적인 역학사상에 의해서 수론을 전개하는 등 특이한 일면을 지니고 있다. 이 책에는 '양휘산법'에서 차용한 듯한 내용과 그 자신이 작성한 여러가지 마방진이 실려있다. 그러나 그의 마방진 연구는 중국이나 일본에서처럼 단순한 수학 퍼즐이었던 것이 아니고, 훨씬 심각한 신앙 고백이었다는 점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마지막으로 인용서적과 고래의 수학자를 소개하는 대목에서 보수적이고 반상업적이었던 사대부수학의 진면목을 보여주고 있다. 예를 들어, 인용한 책 중에는 주역, 주례, 예기, 논어 등이 들어가 있고, 수학자 명단에는 최치원, 황희, 서경덕, 이황, 이이 등 수학과는 전혀 상관없는 인물들이 포함되어 있다.
마지막으로 인용서적과 고래의 수학자를 소개하는 대목에서 보수적이고 반상업적이었던 사대부수학의 진면목을 보여주고 있다. 예를 들어, 인용한 책 중에는 주역, 주례, 예기, 논어 등이 들어가 있고, 수학자 명단에는 최치원, 황희, 서경덕, 이황, 이이 등 수학과는 전혀 상관없는 인물들이 포함되어 있다.
1.5. 황윤석(1719 - 1791) ¶
대표저서 <산학입문>, <산학본원>
조선조의 이름난 유학자이자 실학기의 대표적 계몽학자의 한 사람이기도 한 황윤석의 이 2부작은 그의 백과사전식 편저 '이수신편' 중의 일부이다.
'산학입문'의 서장 부분에서는 고금의 역사서, 역서, 수학서를 갖가지로 인용하면서 저자의 박식을 과시하고 있다. 전체적인 구성은, 가감승제에 관한 기초편은 '상명산법', 중 정도의 문제는 '양휘산법'과 '산학계몽', 그리고 고급의 것은 '산학계몽'에서 인용한다는 짜임새를 보이고 있다.
' 산학본원'의 내용은 주로 구고현, 즉 직각삼각형의 성질을 이용한 문제를 다루고 있다. '천원일술'의 항에서는 "'산학계몽' 중의 '천원술'과 '수리정온'의 '차근방'(유럽계의 방정식)은 명칭만 다를 뿐 내용은 동일하다"라는 글이 보인다. 이보다 훨씬 뒤에 저술된 남병길의 '산학정의'에도 같은 주장이 있지만 이 점에 관해서는 '이수신편'의 저자가 이미 선구적인 발언을 한 셈이다.
'산학입문'의 서장 부분에서는 고금의 역사서, 역서, 수학서를 갖가지로 인용하면서 저자의 박식을 과시하고 있다. 전체적인 구성은, 가감승제에 관한 기초편은 '상명산법', 중 정도의 문제는 '양휘산법'과 '산학계몽', 그리고 고급의 것은 '산학계몽'에서 인용한다는 짜임새를 보이고 있다.
' 산학본원'의 내용은 주로 구고현, 즉 직각삼각형의 성질을 이용한 문제를 다루고 있다. '천원일술'의 항에서는 "'산학계몽' 중의 '천원술'과 '수리정온'의 '차근방'(유럽계의 방정식)은 명칭만 다를 뿐 내용은 동일하다"라는 글이 보인다. 이보다 훨씬 뒤에 저술된 남병길의 '산학정의'에도 같은 주장이 있지만 이 점에 관해서는 '이수신편'의 저자가 이미 선구적인 발언을 한 셈이다.
1.6. 홍대용(1731 - 1783) ¶
대표저서 <주해수용>
홍대용의 호를 책명에 붙인 '담헌서' 외집 권4부터 권6에 걸쳐서 수학 및 천문학이 다루어지고 있다. 전통에 구애받지 않는 실증주의적인 대담한 사회 개혁가였다는 그도 적어도 수학의 사고에 있어서는 새로운 것이 없었다.
'주해수용'의 의의는 수학적인 내용이 있는 것이 아니고, 수학의 지식을 사회화하였다는 점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주해수용'의 의의는 수학적인 내용이 있는 것이 아니고, 수학의 지식을 사회화하였다는 점에 있다고 할 수 있다.
1.7. 홍정하(1684-??) ¶
대표저서 <구일집>
홍정하는 산학교수를 지냈다는 사실이 밝혀져 있다. '구일집'의 내용은 '산학계몽'을 골자로 하고, 일부를 '구장산술'이나 '상명산법' 등에서 문제를 추려내고, 당시의 사회적 실정에 알맞도록 수치를 약간씩 바꿔놓는 정도의 형태로 엮어지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이 수학책을 넘겨보아서는 안된다.
'구수략'으로부터 겨우 10여년이 지난 다음에 엮어진 이 책에는 전자에는 전혀 보이지도 않았던 천원술의 방법이, 그것도 '산학계몽'에서의 27개에 대하여, 그보다 엄청나게 많은 166개를 헤아리는 문제가 다루어지고 있다. 그동안 중국 본토에서는 완전히 잊혀지고 말았던 천원술의 전통이 한국의 중인 산학자 사회에서 이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구수략'으로부터 겨우 10여년이 지난 다음에 엮어진 이 책에는 전자에는 전혀 보이지도 않았던 천원술의 방법이, 그것도 '산학계몽'에서의 27개에 대하여, 그보다 엄청나게 많은 166개를 헤아리는 문제가 다루어지고 있다. 그동안 중국 본토에서는 완전히 잊혀지고 말았던 천원술의 전통이 한국의 중인 산학자 사회에서 이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2.1. 김기항 ¶
1935년 평남 문덕출신. Ph.D. in George Washington University.
Contributed to develop "Symbolic dynamics theory" and "Diophantine Equation"
Contributed to develop "Symbolic dynamics theory" and "Diophantine Equation"
2.2. 이임학(1922 - 2005) ¶
1922년 함경남도 함흥출신. 캐나다의 브리티시 컬럼비아 대학 재직.
리군(Ree group)을 발견하여 단순군 이론(simple group theory)에 크게 공헌.
리군(Ree group)을 발견하여 단순군 이론(simple group theory)에 크게 공헌.
이임학 박사 취재기 (from 밴쿠버 한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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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박사와 긴시간 몇번의 만남을 통해 그에게 여러번 들어야 했던 내용중 아직 의문점으로 남아 있는 것이 있다. 그가 연구활동을 연장하기를 원했을때 한국정부는 왜 그의 여권을 강제로 없애버렸나? 그래서 그는 카나다 정부의 적극적인 지원으로 바로 시민권자가 되었다고 한다. 왜 그 당시 정부는 이박사를 한국인이 아니라고 부정했는지, 세계 수학계 거목인 이임학 박사가 "조선은 나를 버렸지만 나는 조선말이 편하다"라는 고백을 해야 하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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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박사와 긴시간 몇번의 만남을 통해 그에게 여러번 들어야 했던 내용중 아직 의문점으로 남아 있는 것이 있다. 그가 연구활동을 연장하기를 원했을때 한국정부는 왜 그의 여권을 강제로 없애버렸나? 그래서 그는 카나다 정부의 적극적인 지원으로 바로 시민권자가 되었다고 한다. 왜 그 당시 정부는 이박사를 한국인이 아니라고 부정했는지, 세계 수학계 거목인 이임학 박사가 "조선은 나를 버렸지만 나는 조선말이 편하다"라는 고백을 해야 하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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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의로 '강점기 수학자'라는 딱지를 달아보았는데, 표현이 적절치 않은 것 같습니다. 좋은 표현 생각나시면 바꿔주세요. -- litconan
대한수학회의 명예회원이신 이임학 교수님께서 캐나다 현지시각 1월 9일 새벽 2시 타계하셨습니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 Puzzlis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