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rshall Mc Luh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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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샬 맥루한(MarshallMcLuhan)

마샬 맥루한은 1960년대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던 캐나다의 커뮤니케이션 이론가이자 문명 비평가이다. "미디어는 메시지다"라는 명제를 걸고, 미디어가 전달하려는 내용(메시지)보다는 미디어 자체가 인간의 사고 방식과 행동 방식에 커다란 영향을 준다고 주장하였다.


핫미디어와 쿨미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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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re is a basic principle that distinguishes a hot medium like radio from a cool one like the telephone, or a hot medium like the movie from a cool one like TV. A hot medium is one that extends one single sense in "high definition." High definition is the state of being well filled with data. A photograph is, visually, "high definition." A cartoon is "low definition," simply because very little visual information is provided. Telephone is a cool medium, or one of low definition, because the ear is given a meager amount of information. And speech is a cool medium of low definition, because so little is given and so much has to be filled in by the listener. On the other hand, hot media do not leave so much to be filled in or completed by the audience. Hot media are, therefore, low in participation, and cool media are high in participation or completion by the audience. Naturally, therefore, a hot medium like radio has very different effects on the user from a cool medium like the telepho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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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y hot medium allows of less participation than a cool one, as a lecture makes for less participation than a seminar, and a book for less than dialogue.

&From ''Understanding Media'' 2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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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대중이 많이 오해하기도 하고, 또 그의 사상 중에서 모호하다고 -- 사실 MarshallMcLuhan에겐 안그런 것이 드물다 -- 자주 비판을 받기도 하는 개념이다. 핫미디어는 정보의 밀도가 높고, 따라서 전달되는 정보량이 높으며, 이로 인해 수신자의 참여도는 떨어지게 된다. 쿨미디어는 반대라고 보면 된다. 책과 TV 중 어느 것이 핫이고 어느 것이 쿨일까? 책이 핫미디어이고 TV가 쿨미디어이다. 왜 (기술적으로는 비슷한 정세도의 정보를 전달하는) 라디오와 전화기를 각각 핫/쿨로 구분을 할까? 또 어떤 면에서 강연(lecture)과, 세미나(seminar) 혹은 일상대화를 각각 핫/쿨로 구분을 할까?


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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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루한의 핫미디어/쿨미디어 구분에 있어서는 두 가지를 염두에 두어야한다: 하나는 그가 적용하는 "중요기준"이 무엇인가하는 개념적인 측면, 다른 하나는 그 구분은 매체마다 고유한 특성의 고정불변적인 구분이라기보다는 대비되는 매체의 쌍에 따라서 달라질 수도 있는 상대적인 기준이라는 점.

맥루한은 수신자의 소위 "채워넣기"의 측면을 염두에 두는 "참여"(participation)라는 것을 이야기했는데, 이때 그가 말하는 "수신자의 참여"란 메시지의 내용에 대한 "해석"(수신자의 상상력이나 사고작용의 개입)이라는 측면과는 무관하게, "메시지 자체의 완성"에 있어서 수신자의 "참여," 즉 무의식적이며 반사적인 인지성과 감각(sense)적인 차원에서의 "메시지 완성에의 참여"를 말하는 것이었고 그는 이것을 핫/쿨미디어 구분의 핵심적인 기준으로 삼았다.

이 부분은 기존의 상식적인 설명틀과 많이 다르기 때문에 맥루한의 주장을 어느 정도 안다고 하는 사람들도 매우 많이 혼동하는 부분이므로 확실하게 그 기준을 구분해서 인식해두지않으면 스스로 "이젠 알듯하다" 생각이 되다가도 구체적인 예시에 가면 논리가 뒤섞이고 설명이 뒤죽박죽이 되는 경우가 흔하다. 그러한 위험을 피하기 위해 맥루한이 본래 설명했던 핫/쿨 미디어 구분의 구체적인 예시들을 통해 개념을 잡아보겠다. 다시한번 말하지만 그에게 핵심적인 기준은 "메시지 자체의 완성"에 수신자가 참여하는 정도였다. 이것이 어떻게 구체적으로 적용되는지 살펴보자.

Q1> 왜 책이 핫미디어이고 텔레비전이 쿨미디어인가? 핫미디어와 쿨미디어 구분의 기본적인 기준이 무엇인가?

이는 영상매체와 인쇄매체와의 고유한 특성에 대한 그의 입장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는 책과 같은 인쇄매체는 메시지가 확고하게 프린트된 채 완성되어 나오므로 수신자가 그것을 고대로 받아들이는 수 밖에 없고 또한 시각이라는 한 가지 감각만을 사용하는 식으로 그 메시지 자체를 완성시키는 데에 수신자가 참여할 여지가 적은 반면, 텔레비전과 같은 영상매체는 책에 비해서 시각, 청각 등 여러가지 감각을 이용하여 메시지를 조합해야하는 등 메시지의 완성에 수신자의 참여가 더 많다는 것이다.

비슷한 맥락에서 라디오는 핫미디어이고 같은 청각매체이지만 전화는 그에 비해 청각에 주어지는 정보량이 너무 적어 많은 것이 수신자에 의해 채워져야하기 때문에 쿨미디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앞서도 언급했듯이 이 비교가 상대적인 것이기 때문에 재미있는 점은, 전화가 인쇄매체나 라디오에 비해서는 쿨미디어이지만 면대면 대화에 비해서는 핫미디어라는 것이다. 강연(lecture)이나 연설(speech), 그리고 면대면 대화(face-to-face dialogue)와 같은 oral communication 상황은 송신자의 언어적인 메시지 뿐만 아니라 몸짓이나 표정 등의 비언어적(nonverbal)인 신호들까지 함께 수신자가 조합함으로써 비로소 메시지가 완성되는 것이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Q2> 그렇다면 왜 같은 영상매체인 영화는 핫미디어이고 텔레비전은 쿨미디어인가?

앞서의 책과의 비교보다도 이 부분이 그의 주장에서 더 핵심적이라고(혹은 더 이상하다고도..-_-) 할 수 있는데, 그에 따르면 영화는 일련의 스틸사진들이그는 스틸사진을 "완전한 즉 더 보충되거나 완성될 것이 없는 이미지"라고 보았다 하얀 스크린에 연속적으로 투사된 것이어서 그 사진들이 high data로 가득찬 것들이므로 정보량이 풍부하고 수신자가 그 사진에 개입하여 보충해 완성할 부분이 적다고 본 것이다. (참고로 만화는 단지 시각적인 정보의 양이 다른 영상매체들에 비해 너무나 부족하다는 이유만으로 쿨미디어라고 하였다.)

반면에 텔레비전은 그 기술적인 특성을 살펴보면 영상 자체가 높은 정세도의 사진들을 연속적으로 이어놓은 게 아니라 일초에 수백만개(몇 개더라?)의 "화소(pixel)"들과 수백개(이것두 정확히 몇 개더라?)의 "주사선"들이 쏘아보내는 일련의 점들이 모여서 화면을 이루기 때문에 그 점들을 하나의 완성된 사진과 같은 영상으로 우리가 인식을 하는 데에는 우리의 "시각"이 그 수많은 주사선과 화소들 사이사이의 빈 틈새들을 눈으로 훑어 부드럽게 이어내는 작업을 무의식적으로 반사적으로 함으로써 메시지의 완성에 참여하게 된다는 주장이다.

(다른 한편으로는 영화를 보는 "환경"컴컴한 장소에서 집중해서 보는 환경과, 집에서 소파에서 가족들과 함께 약간은 부산하게 집중하지않고 소음도 만들어가며 보게 되는 텔레비전의 시청환경이 다르다는 점도 부수적으로 지적하기도 했다.)

맥루한의 이론에서 가장 유명하고도 가장 중요한 부분은 다른 논의들 전부 차치하고 뭐니뭐니해도 "텔레비전"에 관한 이 신기한 주장이었는데, 그는 텔레비전의 이러한 기술적인 특성 때문에 텔레비전의 이미지는 영화나 사진과는 달리 그 자체로서만은 "결코 완전한 것이 될 수 없는" 것이어서 수신자의 감각적, 인지적 참여에 의해서만 보완될 수 있는 것으로 보았으며, 이런 의미에서 텔레비전을 매우 참여적이고 해방적인 매체라고까지 주장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의 이러한 개념들과 주장은 너무나 직관적이고 상상에 의존한 논리이므로, 이 직관적이고 문학적인 설명이 주는 통찰력이 있다는 점을 인정한다하더라도(가령 Global Village), 그래도 암튼 상당히 허무맹랑한 측면이 많이 있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또한 위의 설명에서 알 수 있듯이 그는 메시지의 내용적 측면에는 전혀 관심을 기울이지않았으며 결과적으로 내용을 받아들이는, 즉 메시지의 내용에 대해 생각하고 상상하는 주체로서의 수신자, 즉 능동적이고 참여적인 "해석적 주체"로서의 수신자의 역할은 완전히 간과한 채 순전히 "기술적이고 감각적인 측면에서의 메시지 완성"에의 '참여'만을 논의하는 식으로 파격적인 "기술결정론"에 기반했다는 점도, 그의 비과학적이고 정치하지못한 개념화와 더불어, 비판의 대상이 되어왔다.

--우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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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샬 맥루한은 학문으로서의 논리의 부족 때문에 많은 비판을 받았다. 그러나 그는 신기할 정도로 미래를 예리하게 예측하였다. 그는 인간의 신체의 확장으로서의 매체의 역할을 강조하며, 장래에는 TV 등의 영상 매체가 세상을 휘어잡는 날이 올것이라고 하였고, 정말 그런 날이 왔다. 사실 그의 학문은 논리적이라기보다는 직관에 가까웠고, 그의 저서는 이론서라기보다는 그의 주장을 기록한 것에 가까울 수도 있지만. 어쨌든 그의 예언은 꽤나 예리한 면이 있었다고도 하겠다. 결국 텔레비전에 의해 그의 "지구촌(Global Village)" 이론이 완성되었다고도 할 수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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