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어가며 ¶
보수와 자유 어느쪽이 오류인가? 이러한 문제는 유사성과 다양성을 혼돈한데서 비롯한 질문이다. 또는 선택과 형성을 혼돈한데서 비롯한 질문이다.
유사성과 다양성<< 보수진영과 자유진영이 있을때 어느편에 설것인가? 하는 것은 유사성이나 오류의 문제가 아니라 다양성의 문제이다. 다시 말하면 보수와 자유는 동일평면에서 비교할 수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보수진영에서 '건전보수'라고 주장을 하지만 실상은 '수구'인 경우에 유사성 또는 오류의 문제가 제기된다. 처음부터 나는 수구다고 주장했다면 문제는 없다. 문제는 나는 보수다고 주장했는데 실상은 수구인 경우이다. 이것이 유사성의 문제이다. 보수가 보수다하고 자유가 자유이다고 주장하는 것은 다양성의 문제이므로 유사성이나 오류의 문제가 제기되지 않는다. 또한 자유진영의 경우에는 만일 '개혁'을 주장하는 사람이 실상은 '변혁(혁명)'이라면 이것도 오류의 문제가 제기된다. 개혁을 기대했는데 변혁이 오면 변화의 수준에 대비하거나 감당하지 못하기때문이다. 유사성이라는 오류유도를 통해 국민을 속였기 때문에 문제가 된다. 감당하지 못하면 역풍이 분다. 그러면 진보는 지체된다. 그래서 비윤리적이다.
선택과 형성<< 보수진영과 자유진영 어느쪽을 선택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그것은 사회성에 의해 규정되기 때문이다. 내가 선택하는 것이 아니다. 사회성의진보에서는 교환이나 분배와 같은 '형성'에 집중했다. 황금을 택하므로 기회적으로 문예를 상실한 것도 일종의 교환이다. 공공성의 장소는 크게 '국가'와 '시장' 등이 있는데 이곳에서는 형성이 일어난다. 공포와 갈망이 만나는 장소이다. 황금과 문예도 이곳에서 교환된다. 우리는 황금과 문예를 선택하지 않고 '사회성 내재적으로 형성'되는 것이다. 자유와 보수도 '사회성 내재적으로 형성'되는 것이다.
그러면 선택은 사회성 외재적이다. 선택은 선험적 사유영역에 속한다. 그러면 무엇을 선택한다는 것인가? 그것은 존재적(Be)으로 살 것이냐? 초월적(Not Be)으로 살 것이냐?를 선택하는 것이다. 즉 보수냐? 자유냐? 가 아니라 존재냐? 허구냐?의 선택이다. 선택은 행복과 불행을 선택하는 것이며 사회성자체의 전제이기 때문에 이곳에서 중요하게 다루고자 한다.
Super Man Or Spiritual Man ¶
선택은 양자택일이다. 흑백적이다. 하나는 선하고 하나는 악하다. To Be Or Not To Be이다.
우선 존재적과 초월적을 구별하자. 존재적은 다시 내재적과 외재적으로 나눌 수 있으며 이러한 존재적인 것을 '영적'이라고 하고 '초월적'이란 일종의 억견이다. 그래서 존재적 인간을 영적 인간(신인) 즉 Spiritual-Man이라하고 초월적 인간을 초월적 인간(초인) 즉 Super-Man이라고 하자.
초인에 대해서는 반대한다. 신인만이 외재적이면서 동시에 내재적일 수 있다. 초인은 내재적 한계를 넘어섰으며 외재적으로는 허구이다. 다시 말하면 초인은 안으로는 벗어났으며 밖으로는 비어있다. 하지만 신인은 안으로는 내재적 한계를 지키며 밖으로는 참되다.
우리는 선택을 한다면 신인이 될 것인가? 초인이 될 것인가?를 선택하는 것이다. 신인은 카리스마가 있고 초인은 허랑방탕하다. 신인은 첫째 외적으로는 자유하며 내적으로는 효과있는 학문을 가지고 있다. 신인은 외적으로는 성결하며 내적으로는 적법하다. 하지만 초인은 외적으로는 허랑이며 내적으로는 방탕하다. 신인은 외적으로 사랑하며 내적으로는 진보한다. 신인은 외적으로 행복을 선택했으며 내적으로는 최적하게 형성한다. 하지만 초인은 외적으로 불행을 선택했으며 사랑이 식어가고 내적으로 비윤리적이며 진보가 지체된다.
행복을 선택한다는 것은 '사회성을 유지하며 혁신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유지와 혁신속에 사회성은 지속적으로 그 시스템이 살아있다. 행복을 선택한다는 것은 사회성을 지속적으로 유지 보수 치유하며 사회성에 의미를 부여하고 지속적으로 사회활동을 하게 한다. 불행을 선택한다는 것은 의미를 상실함으로 결국 사회활동을 지속하지 못하고 사회성 자체가 파괴되는 것이다.
우리는 황금이냐 명예냐?를 선택하지는 않는다. 황금을 적게 가질 것이냐? 많이 가질 것이냐도 선택하지 않는다. 이것은 사회성 내재적인 문제이며 사회성에 내재하는 '최적성의 원리'에 의해 형성되기 때문이다. 우리가 선택하는 것은 행복이냐 불행이냐 또는 신인이냐 초인이냐이다.
초인의 말로는 비극이다. 초인은 바람에 나는 겨와같다. 초인은 물없는 웅덩이와 같다. 초인은 그냥 들떠서 아무 성과도 가져오지 못한다. 초인은 칸트가 비판을 통해 배격하고자하는 오류이다. 초인은 결과적으로 사회성 자체를 파괴한다. 판을 가는 것이 아니라 판자체를 깨는 것이다. 하지만 신인은 사회성 자체를 살린다. 진보과정에서 발생하는 흥분과 상처들을 자유와 사랑으로 평온하게 하며 치유한다. 하지만 초인은 진보를 가져오지 못할 뿐아니라 자연적 진보에서 발생하는 흥분과 상처들에 무방비해서 사회성은 점차 지치고 진보후유증(진보증후군)으로 망가져버리는 것이다. *진보후유증이란 적법한 진보에 따른 일종의 필요악이다. 외재적인 사랑과 자유가 이 진보증후군을 치유한다고 보며 외재적 가치의 필요성이 설명되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신인은 8평이냐 32평이냐늘 선택하지는 않는다. 그것은 최적성의 원리에 따라 '형성'되는 것이다. 이것은 주어지는 것이라고 할 수도 있다. 다만 신인은 최적성의 원리에 따라 열심히 장사(trade)하는 것이다. 이것이 착하고 충성됨이다. 신인은 2천이냐 1억이냐를 선택하지 않는다. 신인은 중등이냐 고등이냐를 선택하지 않는다. 신인은 자유냐 보수냐를 선택하지 않는다. 초인은 마치 그것을 선택할 수 있는 것처럼 떠들지만 그렇지 않다. 초인은 그러고는 전혀 최적성의 원리에 따르지도 않는다. 그러니 초인은 아무 열매도 맺지 못한다. 신인은 주어진 것으로 최적성의 원리, 비례성의 원리에 따라 >>>사회성의 진보<<<를 충성스럽게 이루어내는 것이다. 선택(자유)의 영역은 사회성의 지속적 진보의 전제이다. 선택의 영역에서 추구할 목적을 한마디로 한다면 틸리히의 Courage To Be이다.
적용하기 그 글을 읽을 것인가? ¶
1. 글은 문예의 사회성에 속한다. 그러면 그 글을 읽을 것인가?는 사회성 내재적 문제이다. 그러므로 선택의 문제는 아니다.
2. 그 글을 읽을 것인가?는 사회성 내재적인 '최적성의 원리'에 따라 형성된다. 사회성의 진보의 문제이다.
2.1. 그 글을 읽고 싶은 갈망과 시간이 사라진다는 공포가 만난다.
2.2. 그 글을 읽기로 한 '사건'이 발생했다. 이제 그것이 최적하게 형성되었는가? 그리고 다시 윤리적인가?하는 질문에 연결된다. 일단은 그 글을 읽기로 한 '사건'은 타당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하 생략.
3. 다시 말하면 그 글을 읽을 것인가? 말 것인가?는 선택의 문제가 아니고 '형성'의 문제이다. 자유의 문제가 아니고 '적자생존'의 문제인 것이다. 나는 문예를 빼앗거나 빼앗기는 것이다. 나는 대신 황금을 빼앗거나 빼앗기는 것이다. 무엇인가를 얻거나 잃고 있는 것이다. 원칙적으로 '적법추정'이 되므로 나중에 무엇인가를 빼앗긴 것에 대해 승복해야한다. 나는 이 '사건'에 대해서 반드시 '상이든 벌이든' 책임을 져야한다. 선택했으므로 책임을 져야한다가 아니라 '주어진 일'이지만 책임을 져야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나는 태어나는 것을 선택하지 않고 '주어졌지만' 나는 책임은 져야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선택과 상관없이 형성한 것에 책임은 지는 것이다. 선택은 그 글을 읽을 것인가?가 아니라 '나는 존재할 것인가?'이다. 존재하기를 선택했다면 이제 나는 진보하기 위해 읽을 것인가? 말 것인가?를 형성하는 것이다.
2. 그 글을 읽을 것인가?는 사회성 내재적인 '최적성의 원리'에 따라 형성된다. 사회성의 진보의 문제이다.
2.1. 그 글을 읽고 싶은 갈망과 시간이 사라진다는 공포가 만난다.
2.2. 그 글을 읽기로 한 '사건'이 발생했다. 이제 그것이 최적하게 형성되었는가? 그리고 다시 윤리적인가?하는 질문에 연결된다. 일단은 그 글을 읽기로 한 '사건'은 타당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하 생략.
3. 다시 말하면 그 글을 읽을 것인가? 말 것인가?는 선택의 문제가 아니고 '형성'의 문제이다. 자유의 문제가 아니고 '적자생존'의 문제인 것이다. 나는 문예를 빼앗거나 빼앗기는 것이다. 나는 대신 황금을 빼앗거나 빼앗기는 것이다. 무엇인가를 얻거나 잃고 있는 것이다. 원칙적으로 '적법추정'이 되므로 나중에 무엇인가를 빼앗긴 것에 대해 승복해야한다. 나는 이 '사건'에 대해서 반드시 '상이든 벌이든' 책임을 져야한다. 선택했으므로 책임을 져야한다가 아니라 '주어진 일'이지만 책임을 져야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나는 태어나는 것을 선택하지 않고 '주어졌지만' 나는 책임은 져야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선택과 상관없이 형성한 것에 책임은 지는 것이다. 선택은 그 글을 읽을 것인가?가 아니라 '나는 존재할 것인가?'이다. 존재하기를 선택했다면 이제 나는 진보하기 위해 읽을 것인가? 말 것인가?를 형성하는 것이다.
관련페이지 사회성의진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