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영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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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성공회대 사회과학부 교수.

1968년에 통일혁명당 사건으로 구속되어 무기 징역형을 선고받고 20년 20일을 복역. 1988년 8월 15일 특별 가석방으로 출소.

나무야 나무야, 감옥으로부터의 사색 등의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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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뜻한 가슴과 연대만이 희망이다"

70년대에 민주화운동을 한 서울대 출신자 모임 관악민주포럼(회장.박석운)은 지난 4월19일 창립 1주년 기념강연회를 열었다. 강사는 성공회대 사회과학부 신영복 교수. 신 교수는 이날 강연에서 관계론적 사고의 중요성과 사회운동의 올바른 방향, 지식인의 사명에 대한 평소의 생각을 다양하고 풍부한 사례를 통해 설득력있게 풀어놓았다. 녹취 후 정리한 것을 신 교수의 감수를 거쳐 게재한다.…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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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대성의 이론적 기반은 서구 근대사회의 존재론이 아니라 동양학의 관계론입니다. 물질의 궁극적 존재가 입자(粒子)가 아니라는 것이지요. 쿼크나 소립자(素粒子)는 자기 혼자서는 존재할 수 없습니다. 파동도 아니고 입자도 아닌, 파동이면서 동시에 입자인, 이를테면 점입자(點粒子)로 규정하지요. 점은 길이와 부피가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현대물리학이 입증하려는 가설체계입니다. 물질의 궁극적 존재는 일종의 ‘확률(確率)’로 존재한다는 것이지요.

생명도 마찬가지입니다. 생명 역시 신진대사에서 보듯 외부의 물질과 에너지와 연결되어 있는 열린 시스템으로 파악되어야 합니다. 물질과 생명은 그 근본에서 ‘관계성의 총화’로 존재하는 것이지요.

제가 붓글씨를 좀 씁니다. 붓글씨는 서양에는 없는 것입니다. 여기서도 동서양 간 패러다임 차이를 느끼게 돼요. 예를 들어 붓으로 첫 획(劃)을 잘못 그었다고 합시다. 각도가 삐뚤어졌거나 생각보다 획이 굵게 그어졌다면, 그때부터 비상체제에 돌입합니다. 이런 경우에는 지우고 다시 쓸 수는 없으니까 어떻게 하는가 하면, 그 다음 획으로 첫 획의 잘못을 커버하는 거예요. 그래도 안 되면 그 다음 글자로 결함을 커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한 글자의 결함은 그 다음 글자, 또는 그 다음다음 글자, 또는 그 옆의 글자를 통해 보완하게 됩니다. 한 행(行)의 결함은 그 양 옆에 있는 행으로서 보완해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글씨 쓸 때는 굉장히 긴장하게 돼요. 한 획을 그으면서도 전체를 다 봐야 하니까요. 그러면서도 전체적으로는 흑과 백, 즉 묵과 종이의 조화를 고려해야 합니다.

제 경우는 붓이 지나가는 까만 부분은 별로 보지 않고 남아 있는 종이의 여백을 주로 바라보고 쓰는 편입니다. 절에 있는 대웅전 현판을 볼 때도 글씨의 획보다는 남아 있는 획과 획사이의 여백을 봅니다. 네거티브 스페이스(negative space)를 보는 것이지요. 왜냐하면 가장 중요한 것은 흑백의 조화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관계성이 가장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어쨌든 모든 획과 획이 서로 기대는 것, 모든 글자와 글자가 서로 돕는 상태. 방서(傍書)나 낙관(落款)까지도 전체의 균형에 참여하는 그런 한 폭의 글씨를 격조가 높은 서도작품이라고 합니다.

반면에 한 자 한 자 또박또박 쓴 글씨는 서도의 경지로 보지 않습니다. 예술과 철학으로서의 서도는 굉장한 관계성의 총체인 것이에요. 한 글자만 빠지면 전체의 균형이 와르르 무너질 것 같은 관계와 조화, 그것이 서도의 철학이고 서도의 미학입니다. 그런 까닭에 저는 한 자 한 자 또박또박 쓴 글씨를 보면 착잡한 생각에 잠기게 됩니다. 옆 글자한테 기댈 것도 없이 저 혼자 독립적 존재로 집합하고 있는 글씨를 볼 때면 ‘시민적 질서’가 잘 잡혀 있는 글씨구나, 그런 생각을 하지요. 서구의 시민사회라는 것도 그런 게 아니겠는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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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om ''[http]복상가족 나눔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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Zer0가 접한 신영복은 "나는 펜도 쓰고 붓도 쓰지만 펜보다 붓이 좋다."이다. 이것밖에 생각이 안난다.
현대에 이르러 동도서기라는 말을 생각나게 하는 드문 사람들 중 하나이다. 그는 서양발 대중사회와 시민윤리를 너무 믿지 못한다는 느낌이 든다. 분명 고답적 진리 탐구가 낳은 어려움, 따뜻한 가슴이 낳은 오류들이 얼마나 많은지도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하지만 그의 중용론은 대단히 매력적이다. 우리는 다름을 다름으로서 인정하지만, 그것이 우리 사유의 최우선 정점에 놓여서는 안되며, 호불호를 분명히 해야 한다는 것이다. 무엇인가를 향한 사랑도 세상을 바람직하게 바꿀 수 있는 불확실한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Zer0 또한 그를 따라가야 할 지 고민하고 있다. 아니, 이미 따라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누구든지 무언가를 좋아하는 감정은 있게 마련이다. 그것을 이성적으로 설명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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