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과종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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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가난(빈곤)에 대한 종교적 이해와 접근

1.1. 기독교

1.1.1. 성경이 말하는 가난

/!\ 아래의 내용은 기존 기독교에 말하는 것과 다를 수 있습니다.

빈곤/가난에 관한 문제는 많은 종교적인 이슈를 가지고 있는데, 이에 관련된 토론 페이지가 없는 듯 해서 몇글자 끄적여 봅니다. 여기서 종교라는 단어에 굳이 얽매이지 않고 몇글자 적어보겠습니다.

아무개는 마태가 쓴 산상수훈의 다음 성경구절을 싫어합니다 마음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것임이요
이 구절에 대응하는 누가가 쓴 성경은 다음과 같습니다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것임이요 이 구절이 앞의 구절보다 좋다는 편애(?)를 합니다.

사실 종교라는 것은 특성상 토론이나 논쟁을 좋아하지 않고 믿음을 강요하기 때문에 과학을 전공하는 아무개는 그점을 지루해 하는 경우가 많지만, 가난이라는 단어를 들먹일 때 꼭 마음이 가난한이라는 식의 수식어를 다는 것에 대하여 매우 못마땅해 하며 흥분합니다. 20년을 넘게 교회를 다녔건만, 가난한자는 복이 있다는 식의 설교를 들어본 일이 거의 없다는 것은 매우 애석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구약성경에 가난이라는 단어는 110번 나오고, 빈곤이라는 단어는 한번만 나옵니다. 그런데, 재밌는 사실은, 가난한 자에 대하여 매우 긍정적인 표현이 계속 쓰인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자면, 내가 언제 가난한 자의 소원을 막았던가 과부의 눈으로 실망케 하였던가 가난한 자의 부르짖음을 잊지 아니하시도다 예외적으로 부자였던 솔로몬이 쓴 잠언에는 가난이 상당히 부정적으로 묘사되어 있습니다. 예를 들어 손을 게으르게 놀리는 자는 가난하게 되고 손이 부지런한 자는 부하게 되느니라, 가난한 자는 그 이웃에게도 미움을 받게 되나 부요한 자는 친구가 많으니라

또, 부자에 대한 구절을 찾아보면 부자라는 단어는 23번만 나옵니다. 재밌게도, 솔로몬의 잠언에만 8개의 구절이나 들어있으며 긍정적 표현이 많으며, 신약에 나오는 부자에 관련된 20개의 구절들은 약대가 바늘귀로 나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라는 말처럼 부정적인 면이 많이 부각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솔로몬이 부자였다는 것을 상기한다면 솔로몬의 잠언은 성경 전체의 가난에 대한 시각을 반영하고 있지 못하다는 것이 분명합니다.

1.1.2. 마음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것임이요에 대한 해석

잡종은 종교의 전문가가 아니여서 잘 알수 없지만 윗 구절에 대해 들은 이야기가 있어 몇자 적습니다. 김용옥선생의 견해에 따르면 마음이 가난한자는 내세울 가 없다는 것으로 해석합니다. 그래서 천국이 마음이 가난한자들의 것이라는 거지요.자세한 내용은 금강경 강해라는 김용옥선생의 책을 읽어 보시면 좋을듯합니다. 이와는 다른 견해를 하나 더 소개한다면 조철수씨가 쓴 [http]메소포타미아와히브리신화라는 책을 추천합니다. 이책을 보면 가난한자들이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가난한 사람이 아닌 종교 개혁운동을 하는 종교 집단을 지시하는 말이라는 견해가 수록 되어있습니다.
물론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책을 읽어보진 않았지만 아마도 나자렛파에 대한 이야기일 것 같군요. 학자적 전문가들이 간혹 저지르는 실수는 역사적 상황을 가끔 까먹는 다는 것에 있죠. 일반화오류는 어느 곳에나 도사려 있습니다. --아무개

Blessed are the poor in spirit,
for theirs is the kingdom of heaven.
마음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습니다. 천국이 저희 것이기 때문입니다.

the poor in spirit 은 바로 the humble, who rate themselves insignificant입니다. 겸손한 사람. 자신을 하찮은 존재로 여기는 사람이죠. 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 대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무엇에 대해 겸손하고, 무엇에 비해 하찮은 존재인가? 성경의 마태복음 16장에 나오는 '자기 부인'에 관한 예수의 말씀이 또한 결국 이 말씀과 일맥상통 하는 말씀입니다.

If anyone would come after me, he must deny himself and take up his cross and follow me.

deny himself 라는 것은 disregard, lose sight of, and forget himself and his own interests를 의미합니다. 결국, '마음이 가난한 사람' = '자기를 부인하는 사람'인 것입니다. 자기를 부인한다는 것은 regard, gain sight of, and remember God and his will을 의미합니다.

그냥 '가난한' 사람과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그런 의미에서 볼 때 많은 차이가 있지요. '마음이'라는 구절이 따라다니는 것을 싫어하시는 아무개님의 취향에 반기를 드는 의견입니다만....^^; 그래도, 성경의 이 곳, 저곳에는 사회적인 약자(고아, 과부, 빈곤층)를 더 소중하게 생각하는 하나님의 사랑이 많이 나와있습니다. 한가지 분명한 사실은 아무개님의 의견과 비슷한 생각을 가진 많은 분들이 남미의 해방신학이나 우리나라의 민중신학을 공부하면서, 사회에서의 종교의 역할에 대해 많이 고민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Crooner

성경 기록 연대로 본다면, 가장 짧은 복음서인 마가복음이 최초로 기록되었고 그 다음이 마태복음 그리고 누가복음 요한복음 순으로 기록되었다고 하지요. 마가복음에는 위의 기록이 없고,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만 위의 기록이 나와있습니다. 마태는 직업상 공무원(세금 걷는 사람)이고, 누가는 의사였습니다. 누가복음을 잘 보면 그 기록들이 더 다듬어져 있고 세밀하고 정확한 것에 반하여, 마태복음은 장황하다는 것을 알 수 있죠. 그런데, 더 나중에 기록된 누가복음에서는 마음이 가난한이라는 수식어가 없어졌습니다. 몇몇 신학자들이 말하는 그 이유중에 하나는, 이 수식어를 마태가 붙였다는 것이며, 누가는 원래의 전달되는 이미지에 충실하기 위해서 그 수식어를 뺐다는 것입니다.

마태는 마음이 가난한이라는 일반화 수식어를 집어넣음으로써 가난한 사람과 부자들 모두에게 심금을 울리게 하는 구절로 만드려는 일반화 충동을 느끼고 위의 수식어를 넣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일반화 시키려는 충동은 그 당시 예수가 가난한 소작인들이 모여 살던 기름진 갈릴리땅에 있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하였던 복음과 괴리가 있습니다. -- 아무개


예전에 이 구절을 이해해 보려고 하다가 그만 둔 적이 있는데, 사실 그때나 지금이나 '마음이 가난하다'의 의미를 잘 가늠하지 못하겠음으로 인해, 그렇다면 '마음이 부자이다'라는 말을 이해할 수 있으면 '마음의 가난'의 의미를 쉽게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했는데, 아쉽게도 '마음이 부자'인 것도 이해하기 쉽지 않았습니다. 그 때 저는 '마음이 부자'라는 말의 의미를 하나님 앞의 오만함으로 이해했었지요. 즉 두려울 것이 없는 마음, 신의 존재가 두렵지 않은 그런 마음쯤으로 이해했었고, 따라서 '마음의 가난'이라는 말은 상대적으로 '신앞에 작은 나' 정도로 이해했었지요. 그러나 저는 지금도 이 말의 의미가 다른 사람 혹은 상대방에 대한 겸손과는 전혀 거리가 먼 말이 아닌가 하는 의미로 생각만 하고 있습니다. by 열혈여아

사실 마음이 가난한 자이거나 그냥 가난한 자이거나 문자적으로 따지려 하지 않고 그 당시의 상황을 이해하려 한다면 이 구절은 보다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위에서도 적었지만, 기름진 갈릴래아땅은 소작민들이 일구고 있었고, 정작 그들은 땅 한조각 없었습니다. 즉, 홀로 자립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였다는 것이죠. 게다가 로마의 압제 하에 있었구요. 로마인이 이스라엘 사람에게 짐을 지우면 그대로 짐을 지고 로마인을 따라가야 했죠. 그들의 마음을 상상해 보세요. 내가 만일 그 사람이라면 그 마음으로 느끼게 되는 감정이 어떨까 하고요.. 게을러서 스스로 가난을 선택한것이 아닌, 처음에는 그러한 자신의 상황에 대하여 처참함과 분노를 느꼈겠지만 나중에는 체념하고 희망을 잃어버린 처연함.. --아무개
지금은 전혀 공부하지 않지만 성경이야기가 그냥 흥미로워서 이것저것 읽어보던 때가 있었지요. 그런데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라는 말은 누가와 마태가 다른 의미에서 이야기 한 것 같은 느낌을 지울 순 없어요. (물론 누가는 어떤 사람이었고 마태는 어떤 사람이었는지 정확하게 알 순 없고, 또 말이란게 여러가지로 의미를 확장하면 엎어치나 메치나 하는 부분이 있지만서도.. 그리고 마태복음, 누가복음이던 많은 제자들의 복음서는 사실 예전 구약에서처럼 하나님이 그의 팔을 붙들고 내리 썼다거나, 그들이 예수의 설파를 있는 그대로 전했다고 보여지진 않는 점이 강하니까...) 신앙심의 문제가 아니라 같은 예수의 제자이고 같은 설법을 설파하더라도 자신들의 기독관은 다를 수 있는 것 같고, 그 부분이 이 문장을 해석함에 있어 다르게 나타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있는데요.. 아무튼 누가의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라는 말과 마태의 '마음이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는 말의 의미가 좀 다르게 느껴지고 마태의 설교가 좀 더 구약관에 가깝고, 누가의 말은 신약관 혹은 대중적인 것에 더 가깝지 않은가 하는 생각을 한 적이 있어요. 물론 아무개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그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의 처지를 고려하는 면이 강하다면 누가의 말이나 행적이 더 강하게 고려될 수도 있겠고, 보다 근원적인 물음과 관련된 것은 아무래도.. '마음이 가난한...'을 말한 마태의 말이 가깝지 않은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by 열혈여아

마음이 가난한이라는 의미도 물론 중의적인 의미이겠으나, 이 페이지를 맨 처음 열었던 의도는, 예수와 관한 복음서의 해석이 지나치게 종교화 되었다는 점을 지적하려 했던 것입니다.

이것은 많은 신학자들이 지적하는 문제인데, 예수가 왜 하필 이스라엘에서 가장 기름진 땅 갈릴래아의 촌구석 나사렛에서 살았으며, 갈릴래아땅을 소유했던 지주들이 많은 예루살렘성은 예수의 공생애 기간에 왜 3번 (혹은 그 이하)밖에 가지 않았을까라는 문제, 예수가 가난한 사람이 득실거리던 그 갈릴래아 땅에서 산상수훈을 말씀할 때에 모여있던 사람들은 바로 가난하고 억압받던 사람이었다는 사실. 이러한 역사적 상황을 인식하고 예수의 말씀을 해석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의 일반적인 산상수훈에 대한 해석은, 당시의 역사적 상황을 쏙 빼어 버린 해석을 하고 말았습니다.

예수가 그 갈릴래아 소작농의 배고프고 억압받는 현실을 보며, 그들의 눈을 바라보며 해줄 수 있는 말은 어떤 말이였을까요. 그 어떤 고귀하고 지식층의 지식욕을 자극하거나 혹은 종교성으로 가득한 고귀한 말을 하려 했을까요 ?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과 더불어 가장 곡해되고 오해되는 말씀의 하가지가 바로 "마음이 가난한"이라는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무신

제가 이 페이지에 DeleteMe 를 붙인 이유는 이 페이지가 만들어지면서 그러면 구체적으로 몇몇 성경구절을 언급하고 가난에 대한 성경의 시각을 알아보겠습니다라는 단서가 붙고 오랜 시간동안 전혀 수정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제 전공상 이 주제에 대해 관심이 많습니다. 가난에 대한 종교적인(이 페이지에서는 기독교적인) 관심은 사회복지역사에서 아주 중요한 주제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단지 성경에 나온 내용으로 파악할 수는 없습니다. 구체적으로 어떤 실천과정이 있었는지가 더 중요합니다. 저는 이런 내용으로 페이지를 꾸며나갈 자신이 없구요..... 한국 사회복지계에는 신학대학이나 기독교계통의 대학원을 중심으로 "교회사회복지"라는 학과를 만들고 있습니다. 이곳에서 공부하는 분들이라면 알찬 내용을 담아줄 수 있을텐데요... 그리고 이 페이지가 여러 종교적 관점에서 가난빈곤에 대한 의견으로 채워지기를 바랍니다. --윤구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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