까리용의 종씨(宗氏 !)인 박노자 씨가 쓴 책. 민족주의와 애국이 절대 선이라 생각하는 분이라면 반드시 읽어볼 것. 자신이 진보적이라 생각하는 사람도 꼭 읽어볼 것. 평가: -- 까리용
잡종에게 보편적 역사관이란 이런 것이다라는 느낌을 확실하게 전달하여 주는 좋은 책. 민족과 국가에 대한 맹목적 추종이 얼마나 무서운지 이책을 읽고 깨달 았습니다. 나를 만든 책중에 하나로 될 것 같습니다.
우리 사회의 폭력성을 역사와 사회, 그리고 생활에서 밝혀낸 한국인의 한국인 비판서. 극단적 우측으로, 기득권 세력에게로 경도된 사회에서 살아온 나에겐 미쳐 모르고 지내왔던 진실을 알게 해준 책. 알기만 하면 무엇하랴. 이제 차츰 실천해야할 때가 오지 않았는지... 평가 : -- 홍차중독
군사 독재부터 교수 심부름꾼으로 전락한 대학원생까지 풀어나가는 흐름은 가슴을 쓸어내린다. 다른 나라 상황을 보기로 자주 든다고 해서 단순한 논리로 치부하지 말 것. 책을 덮고 조각을 다 맞추면 그 해석이 박노자씨가 아니면 꺼내기 힘들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평가: -- 까비
가슴 속에 한국을 품고 서양인의 눈으로 대한민국을 보고 쓴 글 -_-)=b -- RedPain
최근에 박노자씨가 책 한권을 더 내셨는데, 좌우는있어도위아래는없다 라고.. 읽어보고 있는데 재미있군요. 오슬로 대학에 재직하면서 느낀 노르웨이 사회외 한국 사회에 대한 느낌이랄까나... 이 책을 읽게되면 노르웨이를 비롯한 유럽 복지국가에 대한 무조건적인 동경이 생긴다는...-_-a. 2003년 겨울 다함께 변혁인가 야만인가 에서 박노자씨가 강연하신다고 합니다. - radiohead4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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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근대적이고 극단적인 '우상숭배'
전근대적이고 극단적인 '우상숭배'
보통 박정희를 변호하려는 사람들은 두 가지 논거를 이용한다. 하나는 '조국 근대화 또는 현대화의 성공'이고, 다른 하나는 '체제의 경제적 우월성의 획득'이다........생략.....물론 고통을 받아 죽은 희생자의 유족을 비롯한 '고통 담당층'이 지금 현대적으로 잘살 확률보다 계속 고통을 당할 확률이 훨씬 높다는 점에서 이 논리는 치명적인 허점을 드러내고 있지만, 이 문제는 여기에서 논외로 한다. 다만, 이 논리의 두 가지 재미있는 특징을 지적하고 싶다. 하나는, 이 논리가 1970년대 초반 북한 정권이 체제를 변호하던 논리와 너무나 유사하다는 점이다. 천리마 운동 등 고통스러운 대중동원 운동을 통해서 초기 공업화와 강군 건설에 성공했다고 생각한 김일성은, 고통을 대가로 '남쪽의 파쇼 괴뢰도당'을 앞질러 조국의 현대화를 이루었다고 빈번히 자부했다....생략.....그러나 절대선으로 인식하는 '조국 현대화'의 이름으로 박정희에게 면죄부뿐만 아니라 기념관이라는 형태의 '포상' 까지 주려는 사람들은 두 가지 측면에서 너무나 단순한 이분법에 걸려든다......생략....그리고 또 하나는 전근대와 근, 현대라는 이분법의 함정에 빠져 박정희의 근, 현대화 모델이 얼마나 많은 전근대적인 요소를 유기적으로 내포하는지, 또 전근대적인 요소와의 상호작용이나 전근대적 요소의 재해석과 의미 재부여, 재확인에 얼마나 의존하는 지 망각하는 오류다...(p.37~p.39)
사대주의와 멸시가 공존하는 사회
옛날에 풍류의 맛을 즐기면서 친구의 한마디 말에 깨달음도 얻고 인생에 중요한 가르침도 얻었다는 것을 이 사람들은 상상도 하기 어려울 것이다. 왜냐하면 남에게 정신적인 가르침을 줄 수 있으려면 그 남과 일단 생각의 범위가 달라야 하고, 자신만의 독보적인 정신생활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p.59)
우리가 일제시대에 일제와 타협해 가면서 산 유산층을 비판하는 것처럼, 어쩌면 물질적인 안락함과 잘사는 데만 매달려 살아가는 우리 역시 정직한 후손들에게 비판의 대상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p.60)
"귀한 외빈들이 오니 소음공해를 줄여야 한다"며 자기 나라 노동자를 탄압하는 정부와 경찰 당국의 추태를 지켜보면서 맨 먼저 생각난 것은 외화벌이와 종주국의 눈치를 자기 민족의 피보다 훨씬 더 중시하는 베트남 파병 당시의 사고방식이 조금 변형된 형태로 아직까지 한국 정부의 '행동강령'으로 남아있다는 것이다. (p.60 ~ p.61)
서구의 비영어권 국가 주민들이 영어 구사력 분야에서 표준적으로 한국인들을 어느 정도 능가한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이 점에서 영어공용화론자들은 원인과 결과를 혼동한다. 유럽인들의 영어 실력은 높은 경제적 수준과 여가문화의 발전에 따른 심화된 외국어 교육의 산물이지, 경제적 발전의 원인이나 원동력은 전혀 아니었다. 서구의 복지국가에서처럼 여기에서도 교사가 국비로 현지 어학연수를 정기적으로 다녀올 수 있고 한 반의 학생수가 15 ~ 20명에 불과하면, 영어의 공용화 없이도 졸업자의 외국어 실력은 당연히 지금보다 나을 것이다. (p.63 ~ p.64)
한국의 종교와 패거리문화
올바른 종교를 위해서라면 타종교인과 무신론자를 동등한 인격체가 아니라 '선교의 대상'으로 삼는 강요의 악습과 '우리 모두 다 같이'식의 '집단 동질성'만 강조하는 전근대적 패거리주의는 하루빨리 청산해야 하지 않을 까 한다. (p.88)
승려들도 의무적으로 군대에 끌려가는, 일제시대의 일본을 제외하고 어느 불교국가에도 없는 '승려 징집제'부터 헨릭 씨는 납득할 수 없었다. 생사를 벗어나려는 수행자들에게 살생의 업무를 덮어씌우려는 국가라니...... 이것이야 말로 깨달음을 방해하는 마왕의 국가가 아니겠는가.(p.91)
아직도 폭력이 충만한 사회
군대에서 민간인에 대한 만행을 일종의 '전략'으로 인식한다는 것은, '민족'과 '신성한 국방'을 들먹이는 군대가 사실상 폭력단체에 불과하다는 나의 평소 신념을 뒷받침해주었다. (p.107)
역사 속의 교훈들
해방 아닌 해방 이후 계속된 미국의 내정간섭, 6.25때 미국의 초토화 위주 전쟁방식으로 입은 한국인의 피해를 이제서야 '은혜'가 아닌 피해로 보기 시작한 국민의식 전환에까지 미국 언론이 앞장서고 국내 언론이 뒤따르기만 한다는 사실은 역설 중의 역설이 아닌가? 몸에 밴 사대주의의 웃지 못할 결과라고밖에 말할 수 없을 것이다. (p.128)
슬픈 아이러니지만, 한국 정보구 고려인과 관련하여 취한 조치는 그들을 재외교포법에 의거한 한국 국적 취득 대상자에서 제외시킨 것뿐이었다. (p.129)
힘과 정의, 물리력과 도덕은 보통 함께 가질 수 없는 것이다. (p.130)
남한 사회를 대표하는 대부분의 언론들이 이 땅에서 사람이 국가의 명령에 따라 다른 사람을 죽인다는 사실, 한국인의 총탄에 동족이 죽는다는 사실을 아주 가볍게 여겼다는 것이다. 첨단 무기를 가진 '우리'가 낡은 무기를 가진 '그들'을 '성공적으로'물리쳤다는 것에 보도의 주안점을 두었고, 군대에 끌려가서 이제 바닷속에서 무덤도 없는 원귀가 된 북녘 젊은이들의 어머니들이 밤새도록 가슴이 미어지는 고통에 울고 있으리라는 것은 관심 밖이었다. 한마디로, 정치인이나 언론인에게는 북쪽 어디에선가 엄마가 애써 키운 귀한 아기의 몸과 마음은 장기의 한 개 사나 졸에 지나지 않는다. 동족이 동족을 다시 한 번 죽인 것은 그들에게 아군이 북괴에게 성공적으로 손실을 입힌 일에 지나지 않는다. (p.139)
나아가 중국 사형수들의 몸(장기)이 미국과 서구에 고가로 팔려나가고 있는데도 한국 언론이 이를 한번이라도 제대로 보도한 적이 있는지도 묻지 않을 수 없다. 중국이라는 나라는 '백성'의 생사를 결정하고 그 신체를 이용할 권리, 곧 자기 신체에 대한 인간의 기본적인 인권을 전적으로 부정하는 '권리'까지도 가진다. 그러나 정작 당하고도 정부의 국제적 이해관계를 우선적으로 고려하는 한국 언론이 이런 언급들을 자제했다는 것은 외교상의 망신보다 더 큰 인권의식상의 망신이라고 해야 한다. (p.140)
'진보' 꺼풀 속에 숨은 전근대성
인간의 의식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것 중 하나가 언어다. 원칙적으로 불평등한 호칭법은 평등과 상호 존중의 의식을 낳을 수 없다. 그 결과, 거의 본능화한 불평등의식으로 말미암아 개개인의 창조성이나 진취성은 메마르지 않을 수 없다. 어릴 때부터 '선생님'과 '선배님'의 세계에서 살아온 사람이 크고 나서 감히 지도해 주시는 '교수님'을 거역하기가 쉽겠는가? '님'들의 세상에서 자란 사람에게는 자신도 '님'으로 모셔지기까지 '몸보신', '복지부동'하는 것이 당연한 행동양식이다. (p.155)
가끔 국내외 사회학자들이 한국 사회를 가리켜 '소용돌이형 사회(vortex society)'라고 지칭하는 경우가 있다. 소용돌이 모양처럼 일체 구성원이 사회의 중심을 향해서 발버둥치며 진출하려고 한다는 뜻이다. 신분 상승의 욕망이야 없는 사회가 없겠지만, 그 욕망을 억제하는 법률적, 도덕적 장치가 부재한 것이 바로 '소용돌이형 사회'의 특징이라는 논리다. (p.159 ~ p.160)
서울의 이방인
현재 <조선일보>의 일부 국수주의자들이 한민족을 '몽골계 기마민족의 후손'으로 보려고 하고 몽골인의 '야성'과 '필승의 정신'을 한민족의 본래적 민족성으로 설정하려고 한다. 그러나 그 설이 학술적으로 성립되지 않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몽골인들을 오리엔탈리즘의 스테레오타입대로 '야성적이고 무서운 존재'로 보는 것도 너무나 큰 무식과 무지다. 서울에서 사는 몽골인들에게 특징이 있다면, 상대를 따듯하게 배려하는 것이다. 약자의 무기는 배부른 <조선일보> 관계자들이 말하는 '야성미'가 아니고 상생이다. (p.259)
일그러진 증오와 멸시의 논리
구한말의 '개화 담론'이 주로 <독립신문>의 논설을 통해 형성되었다는 것은 다 아는 사실이다. 그러나 우리가 기억하고 싶지 않아도 기억해야 할 사실은, <독립신문>의 '개화 담론'의 한 맨을 이루는 것이 바로 노골적인 인종주의 사상이었다는 점이다. 이 측면에서 <독립신문>의 논설들과 외신 보도 칼럼은, 윤치호와 서재필이 여과 없이 받아들인 미국의 인종주의 사상의 '대중적 교과서'였다........중략.....<독립신문>의 제작에 많이 관여한 서양 선교사들의 편견대로, 서재필과 윤치호는 중국인들의 '인종적 열등성'을 수시로 강조하기도 하였다.......중략.....현재와 같은 한국인들의 '백인 콤플렉스'와 '동남아시아 검둥이'에 대한 차별의 뿌리를, 세계 자본주의 체제의 핵심부에 대한 '인종적'동경과 주변부 희생자에 대한 '인종적' 멸시에 찬 개화기 지식인들의 숭미 사대주의적 사유구조에서 찾아봐야 하지 않을까? (p.286 ~ p.287)
장지연처럼 합방 이후에 친일로 돌아선 많은 과거의 '자강파'들이 '인종'의 논리를 자신의 행각을 합리화는 방법으로 자주 이용하기도 했다. 가령 1914년부터 일제의 어용신문 <매일신보>에서 글을 쓰기 시작한 장지연은 게르만 인종과 슬라브 인종 간의 전쟁인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기만 하면 전 백인종이 황인종에 대한 대대적인 침략을 벌일 터이니 일체 황인종이 '맹주 일본'의 지도하에 미래에 인종 전쟁에 대비해야 한다는 주장을 늘 펴곤 했다.(p.289)
조금더 구체적인 차원에서, 과학적 역사 이해나 사회 분석의 훈련을 받지 못한 일반인들이 한 사람의 '성공'과 '신분'을 그 '천품이나 능력'과 연결시키듯이 현재의 여러 나라, 여러 민족의 경제적, 정치적 우열을 그 '민족성'과 무조건 연결시키려는 경향이 강하다는 것은 오래 전부터 지적돼 온 것이다. '성공'의 신화를 믿고 '성공열'에 불타는, 아직까지 사회과학적인 안목이 일반화되지 못한 사회로서는 '실패'로 생각되는 아프리카나 동남아시아의 빈곤의 탓을 그 '민족성'에서 찾으려는 것이 너무나 손쉽고 당연해 보이는 논리다.(p.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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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태양에게 보내는 편지
{{|박노자 오태양님에게
안녕하십니까?
님이 구속됐다는 안타까운 소식을 들었습니다. 과거 청산의 목소리도 높은데, 일제의 잔재를 청산하자는 이들은 제국주의가 남긴 가장 흉악한 유산이 일체 남성은 병사가, 일체 여성은 현모양처가 돼야 된다는 강제적 성별 정체성이라는 사실을 어찌 깨닫지 못하겠습니까? 여러 사람들의 노력으로 “현모양처가 되어 나라를 위해서 아이를 낳아 훌륭하게 키워라” 같은 소리들은 이제 지상명령으로 들리지는 않는 듯합니다. 그럼에도 일부 남성들에게는 일제말기 조선의 ‘황민화’를 주도했던 ‘반도의 히틀러’ 시오바라 토키자부로(총독부의 학무국장)의 “가장 빛나는 국민의 영예는 바로 국가의 위대성으로 살며 국운을 위해 몸과 마음을 바치는 신성한 병역”이란 말이 진리로 들릴지도 모릅니다. 일제의 ‘전통’을 이은 세뇌 체제의 탓도 있지만, ‘신성한’ 의무를 다했기에 여성·장애인 등 ‘나라에 충성할’ 기회가 없는 사람들을 만만한 존재로 대해도 된다는 왜곡된 특권 의식도 문제일 것입니다. 한국적 파시즘의 기본 구조가 유교적 가부장주의와 일제의 남성 우월주의적 국가주의의 결합인 만큼, 파시즘의 해체 작업에 있어서 우리 남성들의 집단의식이야말로 큰 문제로 부상되는 것입니다.
님이 구속됐다는 안타까운 소식을 들었습니다. 과거 청산의 목소리도 높은데, 일제의 잔재를 청산하자는 이들은 제국주의가 남긴 가장 흉악한 유산이 일체 남성은 병사가, 일체 여성은 현모양처가 돼야 된다는 강제적 성별 정체성이라는 사실을 어찌 깨닫지 못하겠습니까? 여러 사람들의 노력으로 “현모양처가 되어 나라를 위해서 아이를 낳아 훌륭하게 키워라” 같은 소리들은 이제 지상명령으로 들리지는 않는 듯합니다. 그럼에도 일부 남성들에게는 일제말기 조선의 ‘황민화’를 주도했던 ‘반도의 히틀러’ 시오바라 토키자부로(총독부의 학무국장)의 “가장 빛나는 국민의 영예는 바로 국가의 위대성으로 살며 국운을 위해 몸과 마음을 바치는 신성한 병역”이란 말이 진리로 들릴지도 모릅니다. 일제의 ‘전통’을 이은 세뇌 체제의 탓도 있지만, ‘신성한’ 의무를 다했기에 여성·장애인 등 ‘나라에 충성할’ 기회가 없는 사람들을 만만한 존재로 대해도 된다는 왜곡된 특권 의식도 문제일 것입니다. 한국적 파시즘의 기본 구조가 유교적 가부장주의와 일제의 남성 우월주의적 국가주의의 결합인 만큼, 파시즘의 해체 작업에 있어서 우리 남성들의 집단의식이야말로 큰 문제로 부상되는 것입니다.
제가 병역거부를 논할 때마다 듣는 질문은 “아무나 다 거부할 수 있으면 나라를 누가 지키겠는가?”라는 말입니다. 그러한 질문을 하시는 분들께 저는, 평화주의의 전통이 깊고 대체복무 경력자에 대한 차별이 없는 북유럽에서조차 대체 복무 신청자의 수가 전체 징집대상자의 10~15% 정도밖에 안된다, 한국과 전통이 가까운 대만에서는 대체복무를 선택하는 사람의 수가 수천 명을 넘지 않는다, 한국처럼 군사주의가 강하고 예비역들을 선호하는 사회분위기에서라면 개인적 신념이 강한 극소수만이 ‘평화주의자’의 낙인을 감수할 것이라는 이야기를 합니다만 제 말이 받아들여지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사실, 그들의 질문 속에는 “한 사람이라도 병역을 합법적으로 거부하면 징병제의 신성함이 없어져 나라를 보전할 수 없다”, 즉 “모두들 몸과 마음을 국가에 바치는” 국가가 아니면 결코 그 국가가 지켜질 수 없으리라는 두려움이 있는 것입니다. 예외를 모르는 국가적 전체성은, 그들에게는 국가의 ‘신성성’의 전제조건이 되는 것입니다. 가시적인 ‘다름’을 ‘망국병’으로 생각하고 인권이 아닌 국가와 무력을 신성 불가침한 존재로 여기는 황국신민 수준의 사고야말로 청산해야 할 과거 유산이 아니겠습니까?
이 왜곡된 ‘상식’에 앞장서서 반기를 들어야 할 집단은 다름 아닌 종교계입니다. 특히 일제 말기에 군국주의적 굴절이 태심했던 한국 종교계의 경우에는 자기 반성의 의미로라도 군사주의 근절에 적극적으로 나설 의무가 있습니다. 예컨대 불교계의 경우 “미·영 귀신들을 죽이면 죄가 되기는커녕 오히려 보살도를 실천하게 된다”고 시국 강연하는 등 일제 말기의 전쟁 협력이나 베트남 파병 때의 박 정권에의 협력도 커다란 오점으로 남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요 종교 단체들은 양심적 병역거부 문제에 있어서 일제시절을 방불케 하는 논리로 반대하거나 아예 관심을 보이지 않습니다. 현재 속에서 살면서도 미래를 대표해야 할 종교계마저 과거의 망상에 사로잡혀 있다고 한다면 과거 청산이 쉽겠습니까?
지금 수감 중인 병역거부자들은 인간이 국가·자본의 부품이 돼버린 사회에서 인간을 결코 부속품으로 만들 수 없다는 진리를 온몸으로 실천하고 있는 것입니다. 고초가 이만저만한 것이 아니시겠지만 용기를 가지시기를 바랍니다. 해방이 오고 나서 ‘불령선인’들이 독립운동가인 줄 밝혀졌듯이, 파시즘의 주술이 풀린 뒤에는 인간의 존엄성을 지키기 위해서 자신의 몸을 아끼지 않는 사람들에 대한 역사의 평가가 이루어질 것입니다.
구름 낀 하늘을 바라보며 박노자 드림|}}
see also 총균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