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철 앞에서 '그'는, 두 여자들을 본다.
바로 앞에 자리가 하나 비었다. 그가 아무 생각없이 앉으려는데 어디선가 가방이 하나 휙 날아왔다. 그는 가방이 날아온 쪽으로 잠깐 눈을 돌렸다. 한 아줌마가 이쪽으로 뛰어오고 있었다. 그는 태연히 가방을 치우고 자리에 앉아 자신을 뛰어오는 아줌마는 아랑곳하지 않고 가방을 들고는 나직히 입을 열어 이렇게 말했다.
"이 가방, 누구꺼지."
아줌마는 아무 말도 없이 가방을 뺏듯이 나꿔채고는 무슨 말을 하려는지 잠시 그를 응시했다. 그녀와 눈이 마주친 그는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여느 아줌마 같지 않은 느낌. 그녀는 이내 고개를 돌려 싸늘한 표정이 되었다. 아줌마라고는 했지만, 그 표정은 삶에 뻔뻔해진 그런 표정은 아니었다. 단지, 꾸불꾸불한 파마머리에 펑퍼짐한 바지차림. 그게 전부였다. 그는 잠깐 동안 그 아줌마가 그 옆에 서있는 여자처럼 꾸미고 있으면 어떨까를 상상해보았다. 그리고 동시에 언젠가 지하철에서 본 어떤 두 여자의 대화가 떠올랐다. 한 여자는 갓 결혼한 아가씨처럼 보였고, 또 한 여자는 50은 되보이는 아줌마였다.
"...그래서 그게 효과를 봤어?"
"어. 거기 실력있어. 나 정말 괜찮지?"
"진짜 어려보인다..처녀같은 걸.."
"어. 거기 실력있어. 나 정말 괜찮지?"
"진짜 어려보인다..처녀같은 걸.."
그 둘은 친구였던 것 같다. 그 때 그 갓결혼한 아가씨같이 생긴 여자가 그 옆의 50은 되보이는 아줌마와 친구라는 것이다. 생글생글 웃는 그 여자의 웃음이 어쩐지 기억에 남았었다. 그리고 그 기억이 오늘 다시 되살아난 것이다. 뭘까. 그에게 있어 누군가를 판단하는, 아니 여자를 바라보는 기준은 무엇인가 하는 물음이 그의 머릿 속에서 자꾸 반복되어 그를 괴롭혔다. 그 때 그 여자의 웃음과 오늘 이 아줌마의 모습이 그에게 끊임없이 무언가 말하고 있었던 것이다.
벌써 종로다. 그는 지하철에서 내려 계단을 오르며 두 여자에 대한 생각을 접어두려고 애썼다.
그녀'는 죽음을 생각하며, '그'를 기다린다.'''
죽으려고 결심한 그 날, 한 남자가 그녀에게 다가왔다. 어쩐지 어두운 구석이 있어보이는데도 자신을 만나면 줄곧 웃었고, 자신의 풀죽은 한마디면, 뭐든지 다 해줄거 같은 그 남자때문에, 그녀는 잠시 그녀의 죽음을 보류해두고 있었다. 그는 무척이나 예민한것 같았고, 그녀의 그런 결심마저 모두 아는 듯한 그런 남자였다.
그를 만나는 날이면, 약간은 설레임이 있는 거 같았다. 그녀는 그런 것이 언제까지가 될지 그냥 지켜보기로 했다. 그리고 그것마저 없어지는 날. 그녀는 더 이상의 미련이 없었다. 삶에 대한 애착의 근거는 이미 없어진지 오래였다. 그녀에게 있어 인생은 반드시 행복의 크기가 고통의 크기보다는 커야만 했다. 그리고 '그'로 인한 약간의 설레임은 삶의 이유에 대한 경계를 살짝 +로 올려주는 것이라고.. 그녀는 그렇게 생각했다. 어쩐지 그를 만나면 행복했다. 그다지 잘 생기지도 않았고, 그다지 돈이 많은 것도 아닌... 그가 좋은 이유는 그의 웃음이었다. 다른 고민이 있으면서도 자신을 위해 웃어주는 듯한 그 웃음이 그녀를 행복하게 했다.
'베니스에서 죽다'...영화 제목이기도 하지만, 영화는 보지 않았다. 물론, 약간은 두려워서였다. 영상으로 보는 것은 분명히 보다 더한 자극을 줄 것이 뻔하다 생각해서였다. 그에게도 아름다운 시절이 있었다. 인생이 온통 빛으로 뒤덮히고, 꿈과 희망으로 가득한 눈빛이 언제나 반짝이며, 자신에 대한 과도한 망상으로 풍선처럼 부풀어 오르던 시간이 있었다. 거울안엔...지금은 뿌옇게 된 기억이지만, 나르시스가 물에 빠져죽은 이유를 너무도 잘 아는 듯한 그런 모습의 자신이 있었다.
초등학교 시절, 그도 학급의 가장 예쁘고, 부유한 옷차림에 공부잘하는 여학생을 가장 좋아했었다. 마음이 설레이고, 손 한번 닿은 것만으로도, 부풀어 터질듯한 토마토가 되었던...'자신이 온전한 남자로 자라리라고 믿었다.' 평범한 가정, 그리고 그 안에는 행복의 기운이 가득하였다. 달콤한 향수 냄새와 폭신한 침대 위의 이불과 그윽한 나무향이 나는 가구, 그리고 반질거리며, 미끄럽기 그지 없는 거실과 방의 바닥. 킹콩 장난감, 레고블럭, 빽빽히 서가를 장식했던 아버지의 장서만큼이나 많았던 동화책들. 한달에 한번은 꼭 갔었던 어린이 대공원, 꼿꼿이 칼과 포크를 세우고 말캉말캉한 고기 조각을 겨냥하러 가곤 했던, 근사한 레스토랑...들.
그 풍경이 벼락을 맞아 새카맣게 타버린, 나무둥치 마냥되었을 때, 그 때는 이른 봄날, 중학교 입학식 무렵. 부모는 아이 앞에서 아무 말 없이 다른 차를 타고 다른 방향으로 사라져갔고, 매끄러움 같은 것은 다 날아가버린 곳에 거(居)하게 되었다. 그 기억은 단절된다... 눈 앞에서, 점프 컷으로 사라져 버린다. 말끔히 지웠을까? 눈감고 잠시 고개를 양쪽으로 돌려본다.
계단을 다 올라섰을 때, 그의 시야에 그녀의 파리한 얼굴이 들어와 박혔다. 왠지, 어제와도 다를바없이, 오늘이 지나면 다시 볼 일이 없으리라고 외치는 듯한 그녀의 얼굴이 들어온다. 그런 얼굴을 가진 여자는 참으로 드물다. '신기하다'라고 되뇌여 본다. 그녀의 가뭄 이후 메말라버린 나뭇가지같이 푸석한 느낌을 지닌 팔이 자신의 팔을 감싸온다. 그 순간, 자신이 무척 따뜻한 봄날의 햇살이 되어 나무가지에 엉기고 있는 영상이 떠올라버린다. 그녀...'이 여자는 나를 따사로운 존재로 만든다...'
"오늘은 왠지 날씨가 좋아." 평범한 한마디를 그녀가 던져온다. "세상이 무너져 앉는다고 해도, 두려워할게 없을 듯이 좋군." 소설책에 나오는 문체를 흉내내서 말을 해본다. 우리는 골목길이 잔뜩 엉켜 있는 종로 3가 안쪽을 돌아가고 있다. 수많은 사람들의 얼굴이 스치고 수많은 잡담이 머리카락과 목덜미를 파고들어온다. 그 대사들은 어디선가 항상 많이 들었던 느낌으로 울려들어온다. 어쩌면, 그가 했던 말이고, 어쩌면, 그녀가 했던 말들이었다. 그녀는 지루한 듯이 그 대사들에 염증을 느끼고 있는 듯하다. 그는 그녀의 표정들을 쫓으면서, 그표정이 반응하는 대사들을 하나하나 주워담는다. 그리고 그 말들과는 조금은 다른 말들을 던져야, 그녀가 기뻐할거란 생각들을 해본다. 그녀는 뭔가에 대해서 지속적으로 권태감을 느끼고 있다. 그리고 그것은 슬픔과는 뭔가 다른 것이다라는 기분을 준다.
'생각해보자면, 이곳에서 그녀와 나는 수많은 연인들과 스친다. 그 연인들의 연애 상태는, 우리가 현재 겪고 있는 상태와 비슷할 수도 있고, 아니면 이전의 우리가 가졌던 관계와 같을 수도 있다. 어쩌면, 저 모든 사람들의 관계들을 끊임없이 주시하고 있어 본다면, 나는 그녀에게 권태감없는 상태를 만들어줄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는 그녀를 사랑할 준비를 항상 다시 새롭게 해본다. 어떤 일이 있어도, 그녀만큼은 잃어버리고 싶지 않다. 너무도, 너무도 많은 이별을 경험했다. 마치 개찰구의 기계처럼, 다가와서 표를 집어넣고, 뒤로 빠져나가는 것처럼 사랑하는건, 싫다. 차라리 기계의 오작동이라도, 그 기계 안에 끼여져서 살고 싶다... 그순간, 누군가가 눈 앞으로 다가왔다. 빳빳하고 질이 하나도 먹지 않은 가죽옷을 입은, 약간 각진 턱을 가진, 벙거지 모자를 눌러쓴 남자 하나가, 그와 그녀의 앞에 불쑥 끼어들었다. 그것은 그에게는 머리를 흔들어 잃어버리고 싶은 기억과 다시 만나는 뒷걸음질의 시작이었고, 그녀에게는 일상 속의 새로운 흥분을 만나는 첫걸음이었다.
세 갈레의 길 앞에 선 그녀를 사람들은 '소라'라고 부른다.
그의 친구의 눈은 약간 갈색빛을 띄고 있다. 그것은 언젠가 보았던 소설, "티보가의 사람들"중에서 나왔던, 제롬이라는 남자의 눈빛, 그 위선적이고, 그 악랄한 인간의 유형, 그러나 달콤함을 사탕처럼 가득히 머금은 사람의 눈빛이다. 순수한 눈빛에서 느낄 수 있는 안심감과는 너무 다름으로써, 오히려 그런 달콤함이라면, 조금 위험하더라도 상관은 없는게 아니냐고 유혹하듯이 쳐다보는 시선이 뻗어나오고 있다. 그의 콧대는 유별나게 부드러운 곡선을 이룬다. 약간 들창코여서 이기적이다라는 관상학적 판단을 불러 일으키지만, 그 부드러운 곡선을 보는 순간, 역시나, 좀 이기적이라도, 부드러움을 주고 있는데 어떠하냐라는 느낌을 준다.
턱은 자세히 보면 볼수록, 잔인한 육식동물의 발달된 식성을 예감케 하듯이 각지고 약간 튀어나와있다. 키는 별로 크지 않다. 그러나 몸매는 조금만 확대율을 높혀본다면, 완벽한 헐리우드 배우의 모습을 갖고 있다. 그 자체를 하나의 개체, 어딘가에도 속해있지 않은 완전히 동떨어진 인간으로 바라볼 때는, 그는 분명히 매력적인 면모를 잔뜩 지닌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가, 나와, 나의 여자와 그리고 이 사회에 속해있는 사람이라는 인식으로 가는 순간에는 속이 뒤집힐 정도의 분노가 치밀어 들어왔다. 그런 분노따위 게의치 않는 언제나 자신만만한 그의 표정과 몸놀림. 그리고, 거침없이 파고드는 현란한 언어들은 그 때도, 그리고 지금도, 나를 두렵게 만들면서도, 그에게 귀기울이게 만든다.
'그래...또, 어김없이 걸려들었군, 그래 말씀이야.' 낭패감어린 내 표정을 알아보기라도 하는 듯이, 그는 그 때와 다름없이 엉뚱한 말부터 시작한다. "좀 전에 머리라도 빗은 것처럼, 말끔하군 너.", '제기랄, 매일 들었던 저 표현, 그리고 처음 만났을 때의 그 인사, 녀석은 분명히 처음의 기억부터, 이순간까지 나와 맞물린 것이라면 뭐든 빈틈없이 생각해두고 있었을 것이고, 준비라도 했듯이, 할 말도 이모저모로 갖고 있었음에 틀림없다. 저 역겨운 치밀함, 저 역겨운 타이밍, 저 역겨운 입놀림. 하지만, 지금 난 무언가를 대답해 주어야 한다. 어떻게든...
언제나와 같이 따뜻하고 배려로 가득해 보이는 눈빛으로 나와 만나고, 종로 3가의 거리를 걸으며, 뭔가 내게 자꾸 말하려고 했던, 그가 갑작스레 거리에서 멈춰버렸을 때, 난 뭔가 감동적인 대사나 몸짓으로, 그가 나를 또 한번 죽음을 생각하는 이 마음속의 어두운 구석으로부터 조금 떼어놓는 일을 하리라는 짧은 기대를 했었다. 왠지, 그런 느낌이 내게로 왔다. 말로도 설명할 수 없고, 하지만 이루어지지 않을리 없는 무언가를 그가 할 때가 왔다라는 그런 예감이 들었다. 하지만 그가 멈춘 것은, 우리 앞으로 다가온 한 남자 때문이었다.
전체적인 인상은 뭐랄까, 딱히 말하자면, 섹시하다라는 기분이 들면서도, 평소에 언제나 아무말없이 지나치는 그런 타입의 평범한 호남 정도의 인상을 주는 남자였다. 머리에 쓴 모자는 조화롭게 그의 머리를 머리카락과 맞물리게하면서, 자연스럽게 씌어져 있었고, 갈색 빛이 약간 도는 눈은 왠지 모르게 이국적인 느낌을 주었다. 산지 이틀도 안되어 보이는 가죽 자켓은, 만지면 뽀드득 소리라도 날 것처럼, 반질반질해 보였다.
그 남자는 아주 자연스럽게 좀 전에라도 그를 만났던 것처럼 자연스레히 그에게 말을 걸었다. "좀 전에 머리라도 빗은 것처럼, 말끔하군. 너.", 이 소릴 듣은 그는 잠시 아무말도 없이, 미동의 당황스러움을 억지로 감추면서 태연하게 웃고 있는 것 같다. 왜일까? 별로 맘에 안드는 사람을 만난걸까? 하지만, 그가 설사 그가 그 남자를 맘에 안들어하더라도, 난 그런대로 그와 함께 그남자와 이야기를 잘 나눌 수 있을거란 기분이 들었다. 그냥, 그건 기분일 따름이지만...
그의 눈꼬리는 살짝 아래를 향해 쳐져있어 순한 인상을 준다. 짙은 눈섭과 매끄러운 얼굴 곡선의 진한 부조화. 꼭 다문 작고 빨간 입술. 알 수 없이 괴롭혀 주고 싶게 생긴 얼굴이다. 그는 늘 그랬듯 이전까지 화사하고 해맑던 미소 대신에, 우울한 두려움을 얼굴 전면에 피워 올린다. "좀 전에 머리라도 빗은 것처럼, 말끔하군 너.", 이 한마디 이후라면 그는 이미 그가 만든 덫에 걸려 헤어나오지 못할 지경이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매일 가던 길에 이상한 낌새를 느끼던 쥐가 결국엔 돌아가지 못하고 그 길로 가다가 꼼짝없이 붙잡혀 버리듯이. 그의 목덜미에 푸르스름한 손자국이 나타나는 것만 같다. "오랜만." 그의 외마디 비명과도 같은 소리가 버겁게 목구멍을 통과한다.
시간은 많다. 그 동안 참아왔던 심심함 때문에라도 충분히 즐겨줘야겠지. 부드러운 미소를 입가에 살짝 걸치고 천천히 다가가 한쪽 어깨를 잡는다. 키 차이에도 불구하고 그는 올려다 보는 듯한 느낌을 갖는다. 갈색 빛의 눈 깊이에서 번득이는 노린내를 맡고는 구역질할 듯한 표정을 짓는다. 호랑이는 최선을 다하지만 절대 서두르지 않는다. 호랑이는 아닐지라도 나는 녀석을 이제부터 천천히, 발끝부터 건드려줘야겠다. 기분은 썩 나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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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말하는 친구의 과거사'''
그'가 말하는 친구의 과거사'''
"학교 다닐때 말야, 전교 1등으로 학교에 들어온 아이가 뭔 이유때문인지 공부따위와는 전혀 거리가 멀어져서, 뒤로 헤매이고, 이런저런 친구들과 어울려 맨날 이상한 짓만 하고 다니는 아이가 되었다는 그런 이야기는 한번쯤은 들어보았을 거야. 녀석은 그런 놈이었지. 말을 들어보자면, 전교 1등 따위는 하고 싶었던 적이 한번도 없었고, 되는대로 노는게 좋았던 자기에게, 전교 1등은 대단한 영광, 뭐 그런 것도 아니었다는 으슥거리는 말이 있었는데, 녀석을 만나서 제대로 이야기를 하게 된 시점은, 그러니까, 녀석이 아침 조회 시간이나, 시험끝나고 상장 받는 아이들 속에서 전혀 보이지 않게된 중학교 2학년쯤의 시점이었어. 교장 선생은 훈화시간만 되면, 전교 1등으로 들어왔던 우수한 학생이 지금은 반에서 10등 안에도 들지 않는다며, 삶의 가변성과 성실함과 성공적인 인생의 관계를 늘어놓곤 했었는데, 녀석은 그런 말을 들어도 이미, 깊숙이에서 자존심이 상하는 그런 단계 따위는 지나가 있었던 것이지. 그러니까, 그다지 공부도 잘하지 못하고, 단순히 이 생각 저 생각에 골몰하고, 학교 공부 이외에도 뭔가 다른 더 중요한 것이 있다 따위의 생각을 하는 나와 친구가 되었던 것이고."
소라는 이 얘기를 듣자마자, 다시 물어봤다. "근데, 그 친구 외모가 좀 특이한 듯 하던데, 그 말야, 쌈빡하다라고나 할지... 원래 그때부터 그렇게 생겼었던 거야?"
'그'는 소라가 벌써 많은 관심을 그놈에게 빼앗기고 있다는 사실을 느낄 수 있었다. 술자리에서 잔뜩 당하던 시점에서부터 확실히 자신이 몇단계 떨어져내렸다는 점은 느끼고 있었다. 하지만, 그에게 판세를 돌릴 카드는 아직 남아 있었다. '그놈 이야기를 잔뜩 늘어놓다보면, 아마도, 질리기 시작할테니까.' "튀기라고 불리기도 했었지, 약간은 조롱섞인 별명으로 '영국신사'같다고 말을 한 적도 있었어. 길을 가다보면, 난 혹시 내가 잘나서 누가 쳐다보고 있는건 아닐까 생각했었는데, 역시나 시선이 기운쪽은 언제나 그 녀석 쪽이었지. 지나가던 여자가 다시 한번 얼굴을 한번 쳐다보려고 고개를 돌리는 걸 경험한 것도, 오로지, 그녀석 옆에 있었을 때뿐이었어. 잘생기고도, 특이하기 이를데 없었으니까 자연 시선이 몰리는 거지. 마치 새 패스트 푸드 상품이 세일 가격으로 카운터 앞에 놓여진마냥 시선을 끌었어."
"그럼, 여자친구들도 많았었겠네?" 소라는 흥미진진해진 얼굴로 깊이 이야기에 몰두하기 시작했다. 식탁위의 식어버린 삼겹살은 굳어버린 기름에 딱붙어 고약한 냄새만을 퍼올리고 있다.
"문제는, 녀석은 여자와 전혀 대화할 줄 모르는 사람이었다는 거였어. 약 6년간 녀석의 집에 출근부 도장을 찍듯이 찾아가서 놀곤 했었는데, 오로지, 책을 보고, 영화를 비디오로 빌려보고, 정신분석학 책을 좀 읽었다고, 계속해서 내 머리 속과 감정을 체크하는 것이 녀석이 주로 한 일이었지. 사람들의 심리를 깊이 꿰뚫고 있다고 자신만만하게 살고 있었지만, 왠걸, 정작 자신의 욕구를 위해서 여자를 사귀는것 따위는 전혀 할 수가 없는 타입이었어. 아니 사귄다는게 아니라, 말 한마디 주고받는 것도 본 적이 없었어. 그녀석의 인생 속에서 제대로 말을 주고받았던 여자는 오로지, 여동생과 어머니뿐이었어. 다만, 한가지, 초등학교 시절에 이미 나이트클럽을 다녔었고, 비교적 일찍 큰 키와 어른스러워보이는 인상 때문에, 그곳에서 여자를 만나 할짓 안할짓 다해봤다고 자랑하는 일이 자주 있었는데, 한가지 정말로 이해가 안되는 것은, 그 어린 시절에도 겁없이 여자와 놀았던 녀석이 왜 나이가 들어서 에너지가 넘칠데로 넘치는 시기에는 완전히 여자들로부터 자신을 스스로 격리 시켰는가야. 어린 시절 스토리가 뭔가 좀 이상한 스토리이던지, 아니면, 나이 든 이후에 뭔가 충격적인 경험을 했던가이지..."
"공부를 다시 열심히 하기로 마음을 먹었든지, 뭔가 대단한 꿈을 가졌던 것은 아니었어?" 그의 눈에 소라는 다시금, 변호하듯이 그놈을 비호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공부는 확실히 아니었어. 그래, 녀석과 나는 꿈을 공유하고 있었지... 뭔가 대단한 것, 잡힐 수 없는 것, 그리고 세상을 바꿀 수 있는 무엇, 또는 뜬구름잡는 이야기, 또는 위대한 예술가가 되는 것, 뭐 그런 것 있잖아. 자아가 성장하면서 겪는 세상과 자신의 부조화와 불일치를 겪어가는 과정... 그걸 고립되게 혼자 겪어가는 사람이 있는가하면, 여럿이서 나눠가며 겪는 사람들이 있고, 때로, 나와 녀석처럼, 둘이서 머리 싸매고 겪어가는 그런거... 근데 문제는 녀석은 같이 머리를 싸매는 동등한 관계를 나와 나누길 원했던게 아니었어. 말그대로, 녀석이 앞장 서서 찌르면, 내가 뛰어가는 그런거... 돈키호테와 산쵸같은 관계였었지."
"그래서 아까 그렇게 말했던거구나, 네가 매져키스트라면서, '원래 넌 놀림받고, 옆에서 괴롭히고, 의지를 밟아 뭉게고, 처참하게 비참한 너자신을 느껴야 비로서 삶에의 기쁨과 의미를 재발견하고, 맹렬한 열정과 더불어, 날 더욱 사랑하게 될 거라고...'" 실눈이 되어 소라가 묻는다.
"그딴 분석따위 이젠 아무런 필요가 없다고, 어쨌든 녀석이 재미있게 무료한 나날들을 보내지 않을 정도로, 내가 당하는게 자연스럽다는 것만 당연시되면 되었으니까. 다시 말해서 평소 생활 속에서 내가 정상적인 남자다운 모습으로 활동할 수 있는 모습을 보이거나 그러한 사유를 보이면, 녀석은 그것은 일련의 예외적 상황일뿐이라고 말하고, 정 매져키스트로서의 징후가 지속적으로 나타나지 않으면, 새도우 매져키스트라고 말하지. 그것마저도 설득력이 엷여지면, 이번엔, 인격파탄자라고 이야기하고, 그다음에 책에서 본 내용을 고스란히 잘 정리해서, 잘 들어맞게 설명하면, 별다른 방해없이 녀석은 정신분석의로서 누려야할 권력을 지속적으로 누릴 수 있었던 거야. 환자로 분류되거나 이상으로 분류된 이상 이를 치료하는 사람에겐 권력이 생기기 마련이지." 정색을 하고 그는 이모저모로 정리해두었던 메모리들을 머리속에서 꺼내어 자신을 방어하려 해본다.
"너에게 아무런 이상이 전혀 없었다고, 아직까지 없다고 자부하니...?" 소라가 의심에 가득찬 눈으로 그를 바라보며 이 얘기를 하자, 그는 곧 이야기를 잘못 끌어갔음을 깨닫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