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필가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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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필가루


중학교 다닐 땐가, '그냥 집에 있어서' 우연히 읽은 소설 중에 한수산의 '거리의 악사'란 소설이 있었다. 분명히 재미있고 미문(美文)이기는 하지만 젊은 여성 독자층의 얄팍한 감상주의에 영합한 흔적이 역력한 그 소설에는, 여자 주인공 서하의 가장 친한 여자 친구이자 대학교수인 재희가, 분필가루 날리는 손을 흔들어 인사하는 동료 남자 교수에 속으로 질색하는 장면이 나온다. 아무리 섬세하고 분별있는 지성을 갖춘 호감가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손과 옷에 지저분하게 묻는 분필가루에 무신경한 사람은 신뢰할 수 없다던가 하면서 말이다.

칠판 가득 온갖 수식을 적어 넣고 지우고 하는 일의 반복인 수학과 수업에서 분필가루는 피해갈 수 없는 불청객이다. 물론 조금만 조심하면 분필가루를 손에만 묻히는 것은 가능하지만, 수업이 끝나고 바로 화장실에 가서 손을 닦아내는 수고를 하지 않는다면 손에 묻은 분필가루가 옷으로 옮겨지는 것을 피하기는 힘들다. 화장실이 강의실에서 멀다면, 또는 강의가 끝나고 급하게 어디로 가야할 필요가 있다면, '무신경하게도' 분필가루가 옷에 허옇게 묻어나는 일을 어느 정도 감수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물론 분필가루에 그렇게 신경을 쓰지 않는 사람들도 있다. 올해 내가 수업을 들은 두 분의 교수님들은 모두 예의 신뢰할 수 없는 무신경증 환자들이었다. 복소 해석학을 강의하신 이마가 넓고 머리가 하얀 교수님은 꼭 칠판 아랫단의 분필과 지우개를 올려 놓는 턱에 몸을 바싹 대고 글씨를 쓰다가 깨끗하게 차려입은 양복 저고리 밑단에 당신도 모르게 분필가루를 묻히곤 하셨다. 대수적 정수론을 강의한, 올해 갓 임용된 젊은 교수님도 사정은 마찬가지여서, 일쑤 전날 밤을 새고 면도도 안한 푸석한 얼굴에 분필가루 묻은 갈색 점퍼 차림으로 오전 강의를 하곤 하였다.

올해 처음으로 미적분학 연습조교를 하게 되면서, 드디어 강의 비슷한 것을 해본다는 설레임 못지 않게 내 마음을 움직였던 것은 내 소유의 분필통이 생긴다는 사실이었다. 과 사무실에서 받아 들고 온 분필통을 연구실 책상 서랍에 넣으며 나는 처음으로 내가 학생들을 가르치게 됐다는 사실을 실감할 수 있었다. 십 수년간의 학교 생활을 거치는 동안 나에게 분필이란 물건은 가르치는 행위 - 더 나아가서는 선생이란 위치와 동격으로 각인되었던 것이다. 그것은 말하자면 내가 익히 보아왔지만 직접 들어갈 수는 없었던 어떤 장소로 통하는 비밀의 열쇠와도 같았다.

일년 동안 분필을 써서 연습 수업을 하며 처음으로 분필가루를 가까이 하는 생활을 하였다. 하얀 분필로 써내려간 칠판 위의 단정함 뒤에는 허옇게 손과 옷으로 묻어나는 분필가루의 구질구질함과 고단함이 있다. 긍지를 내세우는 삶이란 기실 보잘 것 없이 남루한 자기 만족일 뿐이기 쉽겠으나, 나는 분필 가루의 남루와 무신경 뒤에 오히려 명정(明淨)과 탈격(脫格)의 뜻이 살아있을 지도 모른다고 억지를 부리고 싶어진다 - 그게 아무려면 어떻겠느냐만은 말이다. --Khakii

분필가루 많이 마시면 몸에 해롭습니다. 건강에 유의하시길 -- 야수

언제부턴가 분필가루가 좋아져서, 칠판을 지우면 가루가 날리지 않고 아래로 떨어지더군요. 지워지기도 잘 지워지고.. 예전에는 칠판을 지울라치면 흰구름이 뭉게뭉게 일어났었는데. --DaNew



현실적으로 분필은 분필 든 사람에겐 답답함을 풀어주는 표현의 도구이지만 표현받는 입장에선 여전히 상당히 답답합니다. 예를들어 수학문제라면 분필로 해답을 책에 있는 고대로 적거나 자신의 생각을 설명한다면 분필로 알아보지못할 낙서를 하죠. 아 분필~ 스승가 제자의 아름다운 매개체여~하는 감상적인 행동은 스승입장에서나 가능하지않나 하네요. 아니면 현실은 외면한체 이론만 파고드는 분이시든지..학생이 왜 딴짓하는지 모르면서... 가르치는 사람은 자신이 가르친다는 사실에 감동하고 몰입하여 배우는사람의 입장은 경시하는 경향이 있는거 같아요--영주(yjst79@dreamwiz.com)

배우고 싶어서 배우는게 아니라서 그러지 않나 싶습니다. -- 최종욱

분필가루의 위력을 새삼 느꼈습니다. 레포트를 작성하기 위하여 조원들이 모여서 토론을 했습니다. 입으로만 이야기하니 아무 것도 남는 것 없이 겉돌더군요. 빈 강의실의 분필을 들자마자 그런 부분은 곧바로 잡아내고, 한 걸음 더 나아간 이야기를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 기본적인 도구에 이렇게 상황이 바뀔 수 있다는 것에 크게 놀랐습니다. -- 최종욱

see also 필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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