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성대법관퇴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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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원을 떠나면서
대법관 徐晟 |}}


1. 머리말

이제 내일이면 6년의 대법관 임기를 마치고 지난 35년간 몸담았던 법원을 떠납니다. 보잘 것 없는 저를 위하여 이 자리를 마련하여 주신 법원장님 이하 관계자 여러분 그리고 이 자리에 참석하여 주신 동료 법관과 직원 여러분에게 진심으로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이 자리에 선 것이 개인적으로는 매우 영광스럽지만 여러분들의 귀중한 시간을 빼앗는 것이 아닌지 두려움이 앞섭니다.

오늘의 주제로 "법원을 떠나면서"라는 제목이 주어졌지만 추상적인 일반론은 되도록 피하고 저의 법관생활을 솔직하게 회고하면서 저의 체험과 느낌을 전달하는 형식으로 이 강의를 진행하려고 합니다.

2. 사법시험 합격의 뜻

저는 1963년 서울법대 4학년에 진학하여 제1회 사법시험에 합격하였습니다. 제일 먼저 사법시험 합격 이야기를 꺼내는 것은 그때도 지금과 마찬가지로, 아니면 더 이상으로, "머리만 좋아서 철학도 양식도 지니지 못한 채 법조문과 교과서만 달달 외워서 사법시험에 합격하였고 이를 밑천으로 하여 출세가 보장되게 되었다"는 사회적 비난과 질시가 많았다는 것을 기억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법시험에 합격하여 순탄하게 보이는 법관의 길을 가고 있는 우리 모두 진지하게 경청하고 겸허하게 받아들여야 할 비판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내가 여기서 강조하고자 하는 것은 이러한 비판이 아니라 "사법시험에 합격하기 위하여 비록 1-2년의 짧은 기간이었지만 사람으로서 할 수 있는, 가능한 모든 노력을 다하였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체력의 한계 내에서 총기와 인내로써 지혜롭게 승리할 수 있었던, 육체적·정신적으로 인간으로서 할 수 있는 가능한 노력을 다한, 그 과정의 열정과 추진력, 바로 이것이 시험 합격 자체를 떠나서 우리가 터득하고 자랑할 수 있는 우리들만의 자산입니다. 사법시험 합격자, 나아가 예비법조인에 대한 세간의 비판은 겸허하게 받아들이되 합격에 이르는 과정에서의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우리의 노력과 정열을 항상 간직하고 법조의 길을 당당하고 자신 있게 걸어야 합니다.

3. 사법대학원 시절의 두 가지 일화

사법시험에 합격한 뒤 사법대학원에 입학하였습니다. 사법대학원 시절에 겪었던 두 가지 일화를 소개하고자 합니다.

첫 번째 이야기
예전에는 고등고시 사법과에 합격한 뒤 사법관시보로 1년간 수습을 받아야 법조인이 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1962년에 서울대학교에 사법대학원이 설치되면서 사법관시보제도가 폐지되었습니다. 사법대학원은 지금 논의되고 있는 law school과 유사한 교육기관으로 볼 수 있습니다. 과거 1년간 실무교육만 실시하던 사법관시보제도를 보완하여, 처음 1년은 법률 및 교양강좌를 실시하고, 나머지 1년은 실무교육을 실시하는 좋은 제도였다고 생각됩니다.

그러나 사법대학원 설립 초기에 입학한 사람들은 종전 1년의 수습기간이 2년으로 늘어난 데 대하여 몹시 불만을 가지고 있었고, 사법대학원에 입학하자마자 수습기간 단축 투쟁을 벌였습니다. 우리가 5기인데 4기까지는 1년 6개월만에 대학원 과정을 마쳤습니다. 우리 동기생 44명도 사법대학원에 입학하자마자 단축 투쟁을 전개하였는데 저는 이에 반대하였습니다. 당시 험악한 분위기 속에서 단축 투쟁에 대한 찬반 비밀투표가 있었고 44명이 투표한 결과 42명이 단축 투쟁에 찬성하였습니다. 우리들은 4월 20일경 입학하였는데 6월초에 6·3 사태가 발생하여 계엄 및 휴교조치가 내려졌습니다. 입학한 지 2개월도 안 되어 1학기가 종강되었고 9월 2학기에 나오라는 통지를 받았습니다. 저를 포함한 동기생 몇 명이 학교 당국에 사법대학원의 특수성을 고려하여 계속 등교하게 하여 줄 것을 요구하였지만, 일언지하에 거절당하였습니다.

이를 계기로 저는 사법대학원 폐교 내지 수습기간 단축 운동의 선봉에 나서게 되었습니다. 이 때문에 저를 포함하여 3명이 징계위원회에 회부되어 한 사람은 무기정학, 저와 또 한 사람은 견책처분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그 과정에서 처음부터 단축 투쟁에 참석하였던 적지 않은 친구들이 徐晟이 나이 많은 동급생의 사주를 받아 단축 투쟁 및 원장 퇴출운동에 앞장섰다고 원장에게 모함하는 일이 있었습니다. 당시의 그 대학원장은 애초 저와 또 한 사람만이 동료들의 따가운 질책에도 불구하고 단축 투쟁에 반대하였다는 것을 끝까지 몰랐고 얼마 전 작고하셨습니다.
법조인이 되기 위한 첫 발을 내딛던 무렵에 겪었던 이 일로 저는 많은 느낌을 받았습니다. 친구들 간에 사회생활을 이렇게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지금도 그때 저의 처신이 옳았다고 생각하고 평생 그런 마음가짐으로 살아왔습니다.

두 번째 이야기
제가 사법대학원에 다닐 때에도 지금과 마찬가지로 성적이 무척 중요하였습니다. 그러나 사법시험 합격자 수가 많지 않고 모두가 희망대로 판사나 검사로 임용될 수 있었으므로 지금처럼 분위기가 삭막하지는 않았습니다.

사법대학원을 졸업하려면 35학점을 취득하여야 하였는데, 졸업을 한 달 앞두고 34학점의 성적이 나왔고 변호사실무 1학점만 남겨 두었을 때의 일입니다. 당시 변호사회에서는 모의기록을 주고 소장을 작성하여 제출하는 것으로 시험에 갈음하겠다고 하였습니다. 소장을 제출하여야 하는 날에 동기생들이 전부 모였는데, 졸업을 눈앞에 두고 들뜬 상태였을 뿐만 아니라 34학점의 성적이 다 나와 졸업등수까지 이미 알려져 있었기 때문에 아무도 소장을 작성하지 않은 채 회의실에 나왔습니다.

전원이 회의를 한 결과 이미 성적도 나왔고 1학점짜리 소장을 아무도 안 써왔으니 1페이지 정도로 모두 똑같이 작성하여 제출하자고 만장일치로 의결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때까지 1등 졸업이 예정되어 있던 본인이 앞에 나와 소장을 쓰면서 그 내용을 읽으면 모두들 가필 없이 그대로 작성하여 변호사회에 제출하자고 의결하였습니다. 이러한 결의에 따라 제가 앞에 나가 소장을 쓰면서 그 내용을 읽었습니다.

그런데 그날 모인 44명의 동기생 중 13명이 소장을 제출하지 아니하였습니다. 하는 수 없이 31명의 소장만 걷어서 변호사회에 전달하였는데, 나중에 확인하여 보니 13명은 그 자리에 남아서 소장을 새로 작성해서 제출하였다고 하였습니다. 며칠 뒤 성적이 나왔는데 변호사실무 성적이 떨어진 결과 본인의 졸업등수가 4등으로 밀린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변호사실무에서 좋은 성적을 얻어 본인 앞으로 된 3명은 그 뒤 모두 판사가 되었습니다. 일괄해서 동일한 답안지를 제출하기로 한 것이 잘한 일은 아니지만 지금도 그때 일을 후회하지 않고 있습니다. 이 작은 일화도 나에게 많은 교훈을 주었고, 그 뒤로도 같은 태도로 살려고 평생 노력하였습니다.

4. 개선을 위한 노력과 자신감

사법대학원을 졸업하고 군 복무를 마친 뒤 1969년에 판사로 임용되었습니다. 그 뒤 오늘까지 판사로서 항상 자신감을 가지고 일을 처리하여 왔고 잘못된 제도나 관행은 고치려고 노력하여 왔습니다.

초임판사 시절
초임판사 시절 판결문을 작성하면서 그 문장과 관련하여 재판장과 의견이 맞지 않는 경우가 있었습니다. 예컨대 명도소송의 경우 그 부동산이 원고의 소유이고 피고가 이를 점유하고 있다는 것만 설시하면 충분하므로 판결문에 그러한 요건사실만 기재하였는데, 당시 재판장은 항상 그 뒤에 "피고가 점거를 유지함에 족한 권원에 관하여 주장·입증이 없다"는 문장을 가필하였습니다. 본인이 그러한 문장은 필요 없는 것이라고 주장하여도, 재판장이 관행이라며 양보를 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본인이 절충안을 제시하였는데, 그러한 취지를 판시하되 "점거"나 "족한"과 같은 표현은 쓰지 말고 "점유를 유지할 수 있는 권원"이라는 표현을 쓰자고 하였고, 재판장도 본인의 이 주장은 받아들여 주었습니다.

사소한 문제이고 두세 달 된 풋내기 판사로서는 당돌한 도전이었다고 생각합니다만, 초임판사 시절부터 이런 자세를 가져야 한다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법관으로서 이러한 자세를 가지고 재판에 임하는 것이야말로 정권이 바뀔 때마다 너도 나도 떠드는 개혁과 개선의 시발점입니다.

재판연구관 시절
1978년 대법원의 재판연구관이 되었습니다. 그때는 판결문이 많이 한글화되었고 표현이 부드러워졌지만 그래도 한자표현이 많고 문장도 길고 쓸 데 없이 멋을 부리는 문투가 많았습니다. 당시 판사 경력 10년 정도 된 자만심에 모시던 대법관에게 과감하게 "판결의 틀을 고치자"는 과감한 제안을 하였습니다. 대법원 판결에 상투적으로 사용되고 있는 "상고이유 제1점·제2점, 논지, 소론, 있다고 할 수 없다, 라고 할 것입니다"와 같은 표현은 사용하지 않는 것이 좋겠다고 말씀 드렸습니다.

당시 대법관께서 흔쾌하지는 않았지만 저의 이러한 제안을 수락하셨습니다. 그래서 그러한 표현을 쓰지 않는 형태로 판결문이 작성되었습니다. 그런데 몇 달이 지나도 다른 대법관들이 이러한 시도에 따라오지 않으니까 제가 모시던 대법관께서 불안해 하셨습니다. 대법관이 불편하게 여기시고 내 판결도 아니었으므로 대법관께 예전대로 하시는 게 좋겠다고 다시 건의를 드렸고, 대법원 판결의 틀을 고쳐보려고 하던 시도는 불발로 그쳤습니다.

5. 대법관 시절

그 뒤 20년이 지나 제가 대법관이 되었습니다. 그 동안 하급심 판결은 많이 개선되었지만 대법원 판결에는 큰 변화가 없었습니다. 저는 늘 생각해 오던 대로 종래의 관행에서 벗어나 새롭게 대법원 판결을 작성하였습니다. 이처럼 개선을 시도하는 본인에게 확립된 관행에 어긋난다는 지적이 있었고 반발도 심했지만, 저는 제 생각대로 표현을 고쳐 나갔습니다.

대법원 판결에 지금도 사용되고 있는 관행적인 표현 중에는 없애야 할 것들이 아직도 많이 있습니다. 예컨대, 위에서 지적한 표현들 이외에도 "상고이유를 본다", "관여 법관의 일치된 의견으로 주문과 같이 판결한다"와 같은 표현들은 불필요한 것들이고, "보충상고이유서는 보충하는 범위 내에서 본다"와 같은 표현은, 뒤늦게 제출한 상고이유서를 대법관이 읽어보았다는 것을 확인하여 주는 취지의, 전관예우의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도 있는 부적절한 표현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제는 대법원 판결도 많이 개선되어 가고 있지만 아직도 미흡한 상태입니다. 개인적으로는 판결의 순화와 간략화에 평생 힘써 왔고 어느 정도 기여하였다고 자부하고 있습니다.

판결문 작성과 관련하여 예를 들어보았지만, 개선과 개혁은 작은 데서부터 시작하여야 합니다. 그래야 더 큰 개혁도 할 수 있습니다.

6. 초임과 단독시절

배석판사시절은 배우고 공부하는 시간입니다. 소송법적으로 부장판사와 배석판사는 대등한 법관이지만 대륙법계 소송구조하에서의 현실적인 제약은 부정할 수 없습니다. 배석판사는 훌륭한 부장판사를 만나 실력을 넓히고 법관으로서의 자세도 배워야 합니다. 초임판사시절 몇 년을 열심히 하느냐 안 하느냐에 따라서 법관으로서의 앞길이 정하여집니다. "세살 버릇 여든 간다"는 속담처럼 초임판사시절의 평가가 그 판사를 평생 따라다니게 됩니다. 우수한 선배들의 판결문 작성과 소송지휘능력을 열심히 배워야 합니다. 반대로 부장판사가 되면 후배인 배석판사들을 열심히 지도하여야 합니다.

단독판사는 배석판사들의 꿈입니다. 우리 시절에는 서울형사지방법원 단독판사 3명이면 서울시장보다 더 세다는 농담까지 있었습니다. 그러나 혼자 내린 결론에는 냉엄한 평가가 뒤따릅니다. 단독 시절의 평판이 훗날까지 그 법관의 인격과 지휘력의 척도가 된다는 것을 잊지 말고 항상 긴장하여야 합니다.

7. 판사와 취미생활

판사도 일반인과 마찬가지로 여가를 즐기고 휴식을 취하여야 합니다. 판사가 여러 가지 일에 잡다하게 신경을 쓰면 자질과 자세에 흠이 갈 수 있지만, 남을 판단하는 직업인만큼 가급적 남의 사정도 많이 알아야 합니다. 그러나 항상 품위를 유지하고 절제할 줄 알아야 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전제입니다.

제가 젊었던 시절에는 법원에서 마작을 즐기는 풍토가 있었습니다. 마작은 일종의 노름이지만 유용하게 즐긴다면 좋은 취미가 될 수 있고, 좀 과장되게 말하면 그 과정에서 인생의 모습을 바라보며 배울 수 있습니다. 무조건 배척할 것만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절제를 지켜 지나치게 탐닉하지 않고, 밤새워 놀지 않으며, 알맞게 승부한다면 좋은 놀이가 되고 친교에 큰 도움이 되며 세상살이를 배울 수 있습니다. 이겼을 때 오만하지 않고 진 사람에게 관대하며, 졌을 때 의기소침하지 아니하고 이긴 사람을 불안하게 하지 않는 모습을 갖추는 등 지켜야 할 예절과 품위도 배울 수 있습니다. 젊은 시절에는 어느 정도 자주 하였지만 근무에 지장을 주거나 품위에 손상이 가지 않게끔 몹시 노력하였습니다. 지금도 두어 달에 한 번 정도 가까운 친구들과 서너 시간씩 즐거운 시간을 가지곤 합니다.

화투는 거의 평생 하지 않았고, 포커는 배석시절까지 조금 하였지만 그 뒤 손을 끊고 한번도 하지 않았습니다. 포커는 도박성이 너무 강하고, 어느 면으로는 방법이 야비하고 냉정하며 도발적이고, 분수에 넘어야 재미가 있는 등 단점이 많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판사들이 즐기기에는 적절한 오락이 아닌 것 같습니다.

골프가 이제는 많이 보편화되었고 많은 판사들이 골프를 칩니다. 그러나 예나 지금이나 골프는 무척 비싼 운동입니다. 우리 시절에도 대개 단독판사가 되면 골프를 배우기 시작했습니다. 그렇지만 당시 그 연령층에서 함께 골프를 즐길 수 있는 상대는 변호사밖에 없었습니다. 변호사 이외의 다른 친구들은 아직 그 비용을 감당할 만한 여력이 없는 연배이었기 때문입니다. 골프는 참 재미있고 장점도 많은 운동입니다. 그래서 치고 싶은 유혹에서 벗어나기가 쉽지 않습니다. 더구나 지금부터 30년 전에는 판사가 자기 돈으로 골프를 친다는 것은 쉽지 않았습니다. 자연히 변호사들이 판사를 유혹하기 마련이었습니다. 특히 형사단독판사의 경우에는 더하였습니다.

저는 재판연구관이 될 때까지 골프를 배우지 않기로 굳게 마음먹고 그대로 실천하였습니다. 당시에도 재판연구관에게 골프를 치자고 유혹하는 변호사는 없었습니다. 변호사가 아닌 친구들과 골프를 쳐도 사업을 하거나 회사 임원인 친구들은 판사인 친구를 대접하려고 합니다. 물론 선의에서 그러는 것이고, 많지 않은 봉급을 받으며 격무에 시달리지만 존경받는 직업에 종사하는 친구를 배려하겠다는 순수한 우정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그런데 판사도 공무원인지라 판사생활을 오래하면 남에게 대접받는 것을 당연한 것처럼 여기는 타성에 빠질 수가 있습니다. 판사인 친구를 대접하며 즐거워하였던 친구가, 그 판사가 대접받는 것을 당연한 권리처럼 느끼면 심한 배신감을 느끼고 "이 놈도 역시 공무원 근성을 보이는 구나"하며 불쾌한 감정을 가지게 됩니다.

판사는 취미생활을 함에 있어서도 삶의 지혜를 가지고 품위를 지켜야 합니다. 제가 동료 특히 후배 판사들에게 누누이 강조하는 것이 있습니다. 저는 친구의 초대를 받아 함께 골프를 치게 되는 경우, 제가 먼저 골프장에 도착하면 그린피를 모두 제가 지급합니다. 당시는 그린피를 선불로 치르는 것이 보통이었습니다. 그 친구와는 일생에 한두 번 있을 수 있는 기회이지만, 이러한 사소한 배려로 그 친구는 평생 고마워하고 존경하며 친구인 저를 자랑스러워합니다.

초임시절에는 재판부에서 함께 술을 마실 기회가 무척 많았습니다. 재판 날은 으레 저녁을 했고 또 검증 등을 핑계 삼아 자주 술자리가 생겼습니다. 술의 장단점에 대해서는 논의가 많지만, 나는 그런대로 술을 다소 즐겨하며 살아왔습니다. 배석시절에는 재판장이 하는 대로 따라다녔지만 단독시절 이후로는 나름대로의 음주습관을 지켜왔습니다. 대원칙은 불고기와 소주 수준으로 하되 1차로 끝낸다는 것입니다. 방석집도 있고 살롱과 같은 고급술집도 있지만, 내가 부담할 수는 없고 또 친한 사람이 부담하면 내 돈 같이 아까워서 갈 수 없고, 친하지 않은 사람이 부담한다고 하면 재미가 없어 가고 싶지 않습니다. 항상 저나 친한 친구가 부담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술을 즐겼습니다. 그리고 다음날 근무에 지장이 없는 정도로만 술을 마신다는 원칙을 정하였고, 오늘에 이르기까지 수십 년간 이 원칙을 지켜왔습니다. 너무 재미없이 술을 마신다고 구박을 많이 들었지만, 이제는 모두 저의 장점으로 이해하여 주고 주위 친구들도 같은 패턴으로 술을 마시며 함께 즐기고 있습니다.

8. 미국 유학

판사생활을 몇 년 하다보니 짜증이 나기 시작하였습니다. 매일 같은 일이고 하는 일도 사무적이고 소극적인 뒤치다꺼리로 생각되었습니다. 보다 적극적인 일에 관여하며 활력 있는 조직 속에서 상급자를 모시고 부하도 거느리는 역동적인 직업이 없을까 하고 막연히 그려 보기도 하였습니다.

그런데 당시 외국에 유학 갔던 친구들이 돌아와서 서로 "김 박사, 강 박사"하면서 우쭐대는 것이 꼴사나워 보였습니다. 그때만 해도 판사가 현직에서 유학 가는 것이 극히 이례적인 일이었지만, 답답한 현실에서 해방되고 싶었고 또 우쭐대는 친구들이 무엇을 얼마나 배워왔으며 영어는 얼마나 늘었을까 하는 호기심에서 유학을 결심하였습니다.

당시는 국비로 유학하는 길도 없고 자비 부담은 생각도 못할 때라 풀브라이트 장학생 지원을 하여 선발되었습니다. 가족은 남겨 두고 단신으로 미국에 가서 1년간 수학하고 석사학위를 받았습니다. 무척 열심히 공부하였는데 몇 차례 국제회의에 참석한 것 말고는 그때 공부한 것을 법관생활에서 거의 활용할 수 없었던 것이 약간 아쉽습니다. 아무튼 미국 유학을 계기로 영미법에 대한 입문은 마친 셈이고, 법학은 문과학문으로서 뜻만 있으면 국내에서 충분히 공부할 수 있으며, 영어는 외국에서 몇 년 공부한다고 느는 것이 아니라는 것도 알게 되어, 유학파들에 대한 일종의 열등감은 없어졌습니다.

근자 법률시장의 개방을 앞두고 우리 법조인의 외국법 공부도 필수적이 되었습니다. 그 동안 법관 등 우리나라의 많은 법조인들이 외국에서 공부한 것이 우리 법조의 큰 자산이 된 것으로 생각합니다. 저 개인적으로는 미국 유학이 큰 자산이 되지 못하였지만, 뒤에 법원행정처 법정국장·기획관리실장직을 맡으면서 법관 해외연수제도를 창설하고 확대 발전시킨 점을 뜻 깊게 생각합니다. 후배 법관 여러분들의 계속적인 정진을 기대합니다.

제가 유학을 갈 시절만 해도 미국에서 법학을 공부한 사람이 매우 적어 미국의 사정을 너무 모르고 갔습니다. 공부를 마치고 돌아온 친구들이 친절히 설명하여 주었으면 유학생활에 많은 도움이 되었을 텐데 쓸 데 없는 피상적인 이야기만 들었을 뿐입니다. 미국에 갔다 온 자체를 자랑으로 여기던 때라 속 이야기를 하기가 싫었던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미국에서 석사학위를 따면 변호사시험을 치를 수 있다는 것도 귀국하기 진전에서야 알았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 뒤 미국에 유학 간다는 후배들에게 실제적으로 도움이 되는 이야기만 해 주었고 뒤에 고맙다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습니다.

9. 우리의 질서의식 판사라고 질서 잘 지키나?

우리는 우리 모두가 법과 질서를 잘 지키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고 특히 법관인 우리들은 질서와 규칙을 모범적으로 지킨다고 자부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민주주의가 우리 경험의 산물이 아닌 것처럼 우리의 질서의식도 우리 몸에 완전히 배어들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른바 빨리빨리 문화에 우리 모두가 젖어 있습니다. 하루빨리 이러한 잘못된 습관을 버리고 법과 질서 자체가 우리 생활이 되어야 합니다. 제가 겪은 몇 가지 사례를 소개하고자 합니다.

사례 1
서양 사람들은 절대 서두르지 않고 질서와 순서를 지킵니다. 일반 시민들의 질서의식이 우리 법조인의 수준을 무척 앞지릅니다.

미국에 유학중이던 1972년 겨울방학 시카고에서 로스앤젤레스 행 비행기를 타려는데 길게 늘어선 줄이 줄어들지 않았습니다. 연신 시계를 들여다보다가 앞줄에 서서 한가롭게 이야기하는 미국사람들을 보면서 조바심이 생겼습니다. 바로 내 앞에서는 가족 대여섯 명이 너무나 여유작작한 모습이었습니다. 그 가족의 양보만 받으면 시간이 될 것 같아서 겸손한 자세로 실례를 구하였습니다. 00시 발 LA행 비행기 시간이 급해서 그러니 양보해 줄 수 없겠느냐고 말하였습니다. 그러자 그 중 한 명이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우리도 그 비행기를 타려는데 무엇이 문제라서 그러냐고" 물었습니다. 당시 저는 질서를 지키는 것이 무엇인지 몰랐으니, 대한민국의 판사가 이 수준인가 하고 너무도 부끄러웠습니다.

사례 2
동료법관의 영국 유학 시절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보통 다른 일을 보고 있는 사람에게 아무렇지도 않게 말을 겁니다. 순서도 안 지키고 상대방이 말을 받을 상태인지도 개의치 않는 것이 보통입니다.

영국에서 유학중이던 동료 법관이 기차역에서 표를 사려고 하는데 담당직원이 그를 쳐다보지 않고 다른 일을 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동료 법관은 평소 하던 대로 "00행 1장"하고 말하였습니다. 그런데도 그 직원이 아무 대답을 하지 않자 다시 "00행 1장" 이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래도 그 직원이 모른 척 하여 다시 한 번 말하였습니다. 그랬더니 그 점원이 고개를 들고 노려보더니 표 3장을 던져 주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1장을 주문했는데 왜 3장을 주느냐고 하였더니 "그러면 왜 세 번씩 외쳐 대냐"고 되묻더라는 것입니다. 그 친구는 지금도 저를 만나면 그때 일이 너무도 부끄러웠다고 이야기합니다.

사례 3
같은 동양 사람이지만 일본 사람들의 질서의식은 세계 제일입니다. 일본 사람들은 작은 동네 외길의 신호등도 딱하리만치 고지식하게 지킵니다. 1977년 동경에서 연수를 받던 시절의 이야기입니다. 택시를 타려고 길에 나섰다가 빈 택시가 지나가기에 서울에서의 버릇대로 손을 들었습니다. 그랬더니 택시 운전수가 속도를 줄이고 손짓하며 100여 미터 앞 택시 정류장에 가서 정차한 뒤 기다리는 것이었습니다. 놀라고 부끄러웠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10. 법관의 자세 최선을 다하자 : 내가 나를 보아 부끄러워서는 안 된다.

모름지기 법관이라면 우선 법률지식에 해박하여야 합니다. 항상 공부하고 연구하여야 합니다. 새로운 판례와 법률이론을 신속하게 습득하여 그릇된 법리 판단을 하지 않도록 항상 자신을 연마하여야 합니다.

공정성을 의심받을 수 있는 행동을 하여서는 안 되지만 세상물정을 알아야 합니다. 변호사와 함부로 어울리지 아니하고 오해의 소지가 있는 사람들과의 친분관계는 피하여야 합니다. 하지만 교우관계를 넓히고 돈독히 하여야 합니다. 판사가 세속에 때 묻어서는 안 되지만, 세상물정을 몰라서도 안 됩니다. 저는, 법관으로 있다가 변호사 개업을 한 사람들이 "판사시절에는 몰랐는데 개업하고 보니까 이러하더라"고 하는 말을 몹시 싫어합니다. 그러한 사람들은 법관으로서 최선을 다하지 아니하였다고 생각됩니다.

사건의 처리를 신속히 그리고 열심히 하여야 합니다. 저는 하급심 재판장으로 일할 때, 민사사건의 경우 소환 가능한 신건은 모두 기일을 지정하였고, 형사사건은 구속 불구속을 가리지 않고 기일을 정하였습니다. 부득이한 사정이 없는 한 추후지정을 하지 아니하였고, 구속적부심과 보석 청구사건은 기록이 올라오면 캐비닛에 넣지 않고 당일 검토하였습니다.

저의 법관생활을 통하여 신속한 재판만은 자부하고 싶습니다. 졸속으로 흐르지 않았을까 우려하는 바도 있지만 항상 최선을 다한다는 자세로 재판에 임하였습니다. 배석시절과 단독시절에 열심히 일한 판사들이 나중에 부장판사가 되고, 또 고등부장이 되고 심지어 대법관이 된 뒤에도 열심히 일하고 사건을 신속히 처리하는 것을 보아왔습니다.

민사부 재판장 시절에는 당시로는 드물게 시차제 운영을 하며 평균 오후 8시 이후까지 재판을 하였습니다. 당시 변호사가 없는 사건은 당사자들을 오후 6시에 소환하였습니다. 배석판사들이 작성한 판결문 초고를 고치느라고 이틀에 하루는 집에 가서 새벽 두세 시까지 일하였습니다. 지금은 대학교수가 된 당시 초임 배석판사 한 사람이 "이처럼 힘들면 그만두어야지"하고 고민하였다는 고백을 나중에 듣기도 하였습니다. 저는 대법관이 된 이후에도 열심히 일하였습니다. 미제 사건이 언제나 제일 적었습니다. 자화자찬인지 모르지만, 그래도 徐晟이가 기록도 잘 안 보고 사건만 빨리 뗀다는 이야기는 듣지 않은 것 같습니다.

또 법관은 용기를 가지고 정의의 편에 서야 합니다. 군사정권이 끝날 때까지 우리 법원에도 암울한 시절이 있었습니다. 이른바 시국사건이라는 이름 아래 독재에 항거한 사람들에 대한 재판이 있었습니다. 물론 실정법 위반을 이유로 하였지만 그것은 구색에 불과한 경우가 많았습니다.

제5공화국 시절 서울형사지방법원에서 3년간 부장판사로 근무하였습니다. 적지 않은 수의 국가보안법위반 및 집회및시위에관한법률위반 사건들을 처리하였습니다. 당시 구체적인 압력은 없었지만 항상 흉흉한 분위기였습니다. 법정난동과 재판부에 대한 기피가 예사처럼 되어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저는 항상 약자의 편에 서야 한다는 신념하에 재판을 진행하고 또 결론을 내렸습니다. 최후의 판단기준은 자신의 양심뿐이라고 확신하였고, 지금도 그 판단이 옳았다고 생각합니다. 동료나 후배들이 상의할 때에도 그렇게 대답하였습니다. 저로부터 불이익한 재판을 받았다고 말할 사람들도 다수 있겠지만, 최선을 다하였다는 자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당시 서울형사지방법원에서 장기간 근무하고도 기피신청을 당하지 아니한 판사는 제가 거의 유일한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1세대 인권변호사들도 애쓰는 저를 더 이상 괴롭게 만들고 싶지는 않았던 것 같습니다.

아울러 법관은 청렴하여야 합니다. 그러면서도 돈을 쓸 줄 알아야 합니다. 물의를 빚은 법관들이 과거에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거의 모든 법관들은 청렴합니다. 과거 관행으로 존재하였던 폐습도 이제는 사라졌다고 봅니다. 청렴은 법관의 기본이고 청렴성에 대한 의심은 법관의 사망선고와 다름이 없습니다.

그러나 소극적인 청렴에 그쳐서는 안 됩니다. 사회생활은 상부상조하는 것입니다. 재물에 대한 욕심을 자제하고 남을 위해 베풀 줄 알아야 합니다. 금전 문제에 인색하거나 지저분한 사람은 자신의 업무뿐만 아니라 사회생활 전반에 걸쳐 문제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돈 문제만 빼놓고는 괜찮은 사람이라는 말을 저는 인정하지 않습니다.

법관을 포함하여 공무원들은 돈을 안 쓰려고 하는 것이 일반적인 경향입니다. 아직도 관존민비의 구습이 남아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판사는 경제적으로 크게 여유는 없지만 그렇다고 궁한 형편도 아닙니다. 남들이 쓰는 만큼, 아니 남들보다 더 대접받는 만큼, 써야 합니다.

동창회비도 앞장서 내고, 친구나 동료들 간의 모임에서도 먼저 지갑을 꺼내고, 후배나 아랫사람에 대해서는 무조건 자기가 지불하여야 합니다. 부장판사는 출장비가 남으면 자기 몫을 챙기지 말고 배석판사들로 하여금 나누어 갖게 하여야 합니다. 법원장은 국과장으로부터 대접받지 말고, 지원 순시는 본원의 부담으로 하며, 주말에 서울에 올 때 출장비를 타지 아니하고, 판공비는 모두 소속 법관과 직원을 위하여 써야 합니다. 법원장 공관은 법관과 직원의 대화의 장으로 공개되어야 합니다.

청렴하여야 함은 물론이고, 낭비는 자제하되 쓸 줄 알아야 훌륭한 법관이 될 수 있습니다.

11. 법관과 청탁

사회생활을 하다보면 법관이라 하여 청탁이 없을 수 없습니다. 어떻게 보면 재판이라는 업무는 청탁이 따르기 쉬운 일입니다. 민사사건의 승패나 형사사건의 유무죄 판단에 관하여는 재량이 없으므로 청탁의 여지가 없지만, 재량이 있는 영역에서는 법관도 청탁을 하거나 청탁을 받을 수 있습니다. 물론 하지도 않고 받지도 않는 것이 제일 바람직하지만 법관도 현실 속에 살고 있는 생활인인 이상 어쩔 수 없는 일입니다.

청탁을 하는 경우
법관도 가족이나 가까운 친인척 또는 친구들 때문에 부득이 동료 법관에게 부탁하는 경우가 있을 수 있습니다. 이때에는 청탁을 받는 동료 법관의 입장에서 재량을 가질 수 있다고 판단되는 범위 안에서만 부탁을 하여야 합니다. 또 부득이 청탁을 하게 되는 경우에도 절대로 무리하게 떼를 써서는 안 됩니다.

청탁을 받는 경우
법관이 청탁을 받더라도 재판의 결론이 달라질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청탁을 받고 이에 대하여 대답을 하는 형식은 청탁하는 사람에 따라 차등을 둘 수밖에 없습니다. 물론 변호사가 청탁하는 것은 돈을 받고 사건 당사자를 대리하여 하는 것이므로 원칙적으로 고려할 수 없습니다.
존경하고 신뢰하는 동료나 친구가 청탁을 하는 경우에는 결론을 너무 솔직하게 이야기할 수는 없지만 명쾌한 태도를 취하여야 합니다. 서로 가까울수록 예의와 신뢰를 지키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렇지 아니한 사람들이 청탁을 하는 경우에는 원론적인 답변으로 충분합니다만, 상대방이 서운하지는 않도록 배려할 필요가 있습니다.

청탁을 하거나 받게 되는 경우 법관으로서 처신하기 어려운 것이 사실이지만, 이때에도 품위와 자세를 잃지 않도록 유념하여야 합니다. 어떤 경우에도 법관으로서의 자세를 지키면서 상대방을 배려하는 태도를 가지는 것이 법관으로서 살아가는 중요한 모습입니다.

12. 법관의 사명감과 자긍심

대륙법계 국가이면서도 우리나라에서 법관의 지위는 아주 높습니다. 법관수가 이제 약 2천 명에 이르러 희소가치가 많이 줄고 다양한 사고를 가진 각양각색의 사람들이 법관으로 근무하여 상황이 다소 달라졌지만, 미국과 영국 다음으로 법관이 대우받는 나라가 우리나라입니다.

법관은 聖職은 아니지만 그에 버금가는 고귀하고 성스러운 직업입니다. 아직도 우리 사회는 법관을 존경하고 신뢰하고 싶어 합니다. 실제로 사회적으로 대접받고 있고 같은 연령층에 비하여 경제적으로도 우대받고 있습니다. 외국의 법관을 부러워하는 경향이 있지만 자세히 알고 보면 우리나라 법관이 제일입니다.

법관은 국민의 사랑과 세금으로 우대받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개인생활을 희생하자는 것은 아니지만 남다른 사명감과 자긍심을 가지고 근무하여야 합니다. 후배 법관들에게 가끔 하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미래의 장·차관을 꿈꾸는 과천 정부청사의 패기만만한 사무관과 서기관을 봐라. 출퇴근 시간과 휴일이 따로 없다. 20일 연가도 없다."고 말입니다.

물론 우리 법관들도 그 이상 열심히 일하고 있지만 후배들을 사랑하기 때문에 다시 한 번 강조하는 것입니다.

13. 법관인사제도

13.1. 사법시험과 연수원의 폐지

최근까지 사법개혁 특히 법조인력 양성방법의 개선방안을 둘러싼 논의가 계속되고 있고, 그 결과 사법시험 합격자 수가 연 1천 명으로 늘었습니다. 하지만 이처럼 사법시험 합격자 수를 늘리는 것보다는 law school 제도로 전환하여 그 졸업생에게 원칙적으로 변호사 자격을 주는 것이 더 적극적인 해결방법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일단 자격을 준 뒤 판사·검사·변호사 각 영역별로 수습과정을 거치게 하여야 할 것입니다. 김영삼 대통령 시절 이 문제가 세계화추진위원회와 대법원 사이의 타협으로 해결될 수도 있었는데, 당시 청와대와 법무부가 꼴사납게 나오는 바람에 타협이 이루어지지 아니하였습니다.

현재와 같은 제도와 운영 아래에서 예비판사제도는 필요 없다고 생각합니다. 오히려 현재 예비판사제도는 그 제도 도입의 취지와는 달리 운영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이 제도는 폐지하거나 아니면 현실에 맞게 제도를 개선한 뒤 시행하여야 할 것입니다.

13.2. 판사의 임용

변호사 중에서 판사를 임용하여 법조일원화를 실시하자는 논의가 활발하게 전개되고 있습니다. 경청하여야 할 주장이지만 현재의 제도도 많은 장점을 가지고 있고 법조일원화를 당장 실시하기에는 여러 가지 현실적인 문제들이 있습니다. 최근 많은 사법시험 합격자가 배출되기 전까지는 판사로 임용될 수 있는 변호사 인적자원이 거의 없었습니다. 종전에는 사법시험 합격자의 거의 전부가 판사나 검사로 임용되었고, 변호사는 자의반·타의반으로 퇴직한 사람이 대부분이었습니다. 근자에 변호사가 많이 배출됨으로써 판사로 충원될 수 있는 인적 자원은 많아졌습니다. 변호사로서 다양한 경험을 쌓은 사람들이 훌륭한 판사가 될 소양을 갖추고 있다고 생각되지만, 실력과 인품에 대한 평가가 쉽지 않고 또 자격을 갖춘 유능한 변호사가 보수가 상대적으로 적은 법원으로 올 지도 의문입니다. 변호사로부터 판사를 충원하는 법조일원화는 단계적으로 확충하여 나가는 것이 바람직할 것입니다.

참고로, 상설시군법원의 판사 중 일부가 변호사 중에서 임용되었는데, 그 실용성과 효용성에는 의문이 드는 점도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평가가 이를지 모르지만 성공적으로 정착되지는 못하고 있는 것 같고, 대법원도 이러한 판사 임용방식을 확장할 의사는 없는 것으로 보입니다. 앞으로 신중하게 연구하고 검토해 보아야 할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13.3. 법관의 서열

조직사회에는 서열과 위계질서가 있게 마련입니다. 법원에서도 서열이 필요한 것은 물론입니다. 판사는 법률적으로 대등하지만 경륜과 연령 등에 많은 차이가 있고, 모든 판사가 매사 동등한 위치에 있을 수는 없습니다. 판사의 서열이 문제가 되는 것은 동기생 상호간에 사법시험 합격점수 및 연수원 성적에 의하여 서열이 정하여지고 그것이 법관생활 전체에 영향을 미친다는 데 있습니다.

그러나 많은 지원자 가운데 적정한 수의 법관을 선정함에 있어서는 일정한 기준에 의하여 선별할 수밖에 없고 가장 객관적이고 합리적인 기준은 성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물론 성적이 절대적인 것은 아니지만 상대적으로 더 이상의 묘책이 없어 보이는 것이 현실입니다. 과거 1980년대 초까지는 연령에 의하여 서열을 정하였는데 불합리하고 단점이 많다고 하여 지금과 같이 고친 것으로 압니다. 고등법원 부장판사가 될 때까지 또 그 뒤에도 임관 시의 서열이 따라다니는 것은 사실이지만, 실제 인사운영에서는 동기생 상호간의 성적순 서열은 큰 의미가 없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임관 후의 실적과 평가가 더 중요하다고 봅니다. 동기생 중 꼴지 서열에서 고등법원 부장판사로 승진이 된 예도 있습니다.

모든 것이 서열대로 된다면 대법관 대부분이 동기생 중 성적이 앞섰던 사람이어야 할 텐데, 임관성적이 좋아서 초임이 서울인 대법관은 1997년 내가 대법관이 되기 직전에는 대법원장을 포함한 판사 출신 13명 중 1명뿐이었고, 현재는 4명이며, 내가 나가면 3명이 됩니다. 참고로 초임이 서울 등 재경지역인 법관은 전체의 약 50% 정도입니다. 이것을 보더라도 법관인사가 서열대로 되는 것이 아닌 것은 확실합니다.

그렇지만 법원 내의 일상생활에서 쓸 데 없이 서열을 중시하는 풍토는 개선되어야 하고 인사운영에 있어서도 서열에 집착하는 잘못은 고쳐야 합니다. 개선되어야 할 점이 많은 것은 사실이라고 생각합니다.

13.4. 법관승진제도

현재 판사로 임용되어 지방법원 부장판사가 될 때까지는 아무런 문제가 없고 고등법원 부장판사로의 승진이 문제가 되고 있습니다. 이 문제는 현재의 피라미드 구조하에서는 어쩔 수 없는 현실로 보입니다. 법관 승진제도의 장·단점은 논외로 하고 어쨌든 현재의 분위기는 승진제도를 없애자는 것이 다수의견으로 보입니다.

대법원 당국에서는 단일호봉제를 실시하여 승진의 개념을 축소하려고 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 추진하고 있는 단일호봉제는 명목상의 보수만을 같게 하자는 것이지 실질적인 계급 타파는 아닌 것으로 보입니다. 이왕 고치려면 같은 호봉에서는 똑같은 처우를 받고 보직에 따라 업무를 수행하는 형식으로 완전히 바꾸는 것이 더 바람직하다고 생각됩니다. 물론 운영상 어려움이 많을 것이고 보직에 따라 승진의 개념이 새로 생길 여지도 다분히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고등법원 부장판사 선발에서 탈락한 20년 이상 경력의 중견 법관이 법원을 떠나는 것은 가슴 아픈 일이고 법원으로서도 큰 손실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단일호봉제가 되든 안 되든 모든 법관이 고등법원의 재판장이 될 수는 없는 것이 현실이고, 또 직업법관제를 채택하고 있는 우리 제도 아래서는 매년 상당수의 경력 법관이 물러나고 이에 맞추어 신임법관들이 충원되어야 법원이 살아 움직이며 돌아갈 수 있는 것 또한 현실입니다. 경력법관의 퇴직이 바람직하지는 않지만 현실적으로 필요한 것은 사실입니다. 누구나 정년까지 근무한다면 조직은 정체하고 노화하기 마련입니다. 누구나 평생법관으로 근무할 수 있는 법원이 되어야 한다는 것, 일견 그럴 듯해 보이지만, 냉철하게 보면 무조건 바람직한 것은 아니고 또 현실적으로 가능하지도 않습니다.

법관재임명제도도 같은 관점에서 이해되어야 합니다. 상당수의 법관이 법관재임명제도를 없애야 한다고 주장하지만, 현실적으로 재임명에서 탈락하는 수가 얼마나 되는지에 관계없이, 현행 법관인사제도 아래에서 법관재임명제도는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법관으로서의 임기 내 신분은 확실하게 보장하지만 10년마다 적임 여부를 다시 심사한다는 것이 우리 헌법이 마련한 제도적 장치입니다. 과거 독재정권하에서 제도의 남용이 있었지만 이제는 그럴 우려가 없고 현실적으로 재임명에서 탈락되는 예가 아주 미미한 실정입니다. 합리적인 운영이 문제일 뿐입니다.

13.5. 법원의 2원적 구조

어떤 조직이건 그 조직과 기구가 활발하게 움직이려면 조직원 상호간의 인화와 융합이 중요합니다. 법원의 경우 재판의 속성상 각 재판부가 단독으로 움직이고 조직적인 연결고리가 약하지만, 재판부 각자가 법원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뭉친다면 법원은 그 만큼 더 활력을 발휘할 수 있습니다. 안팎의 부당한 간섭과 여론으로부터 독립을 지킬 수 있고 국법질서의 유지와 국민의 권리구제를 위하여 더 큰 소리를 낼 수 있습니다. 법원 구성원 모두가 법원을 사랑하고 서로 끈끈하게 뭉쳐야 합니다. 검사는 재직 시 불만스러운 일이 있어도 퇴임 때는 "정든 검찰"을 떠난다는 표현을 거의 모두가 쓰고 있습니다. 그런데 판사들은 조금 다른 것 같습니다. 법관들이 현재의 위치를 유지하고 있는 것은 자기 개인의 능력이나 힘 때문이 아니고 "법원"에 소속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법원은 법관과 일반직원의 2중적 구조로 되어 있습니다. 법관이 양지에 있다면 직원은 음지에서 도와주고 있습니다. 이 두 구성원이 유기적 일체로서 능력을 발휘하여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양지에 있는 법관이 선도하고 양보하는 아량을 보여야 합니다. 일반직의 도움 없이 법관만으로 법원을 운영할 수는 없습니다. 직원들도 법관과 마찬가지로 동료라는 의식 속에서 화목하게 지내고 서로 존중하여야 합니다.

사법행정업무에 종사하거나 법원장이 되면 법관과 직원의 융화가 얼마나 중요한지 깨닫게 됩니다. 하지만 재판부에 있으면서도 같은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저는 사법행정업무에 비교적 오래 종사한 관계로 일반직의 어려움과 애로를 더욱 많이 느꼈고 그들의 존재를 인정하고 존중하려고 부단히 노력하였습니다. 법관과 직원은 서로 사랑하고 서로 도와야 합니다.

14. 나라에 대한 사랑

"전체의 이익" 또는 "국가의 이익"이라는 표현은 자칫 자유민주주의제도와 어울리지 않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리고 한때 어용학자나 일부 관료들이 부르짖던 말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말을 경계하여 왔습니다. 우리는 민주주의를 경험으로서가 아니라 책을 통하여 배웠습니다. 그래서 형식적·관념적 사고에 빠지기 쉽습니다.

미국의 법원은 자유민주주의의 상징이고, 미국의 판사는 그 수호자이며 국민의 권리구제와 신장을 위한 첨병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보여주는 애국심은 우리를 놀라게 합니다. 국가가 있어야 비로소 개인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이 그들의 철학입니다. 사정이 다를지는 모르지만 우리 법관도 충분히 음미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대내적으로 여러 가지 어려움에 시달리고 있는 우리의 현실에서 더욱 미국 법관들의 애국심을 돌이켜 보게 됩니다.

두 가지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 국가의 불법행위책임에 관한 미국 연방대법원의 판례
미 연방불법행위법(Federal Torts Claims Act)상 국가의 불법행위책임에 관한 조문은 우리의 구 국가배상법 조문과 같습니다. 국가는 공무원의 직무에 관하여 고의 또는 과실로 "타인"에게 손해를 가한 때에 이를 배상할 책임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미국 대법원은 일관되게 그 "타인"에 군인 등은 포함되지 아니한다고 판시해 오고 있습니다.

이에 반해서 우리나라에서는 제3공화국 시절 군인들은 국가배상을 청구할 수 없다고 국가배상법을 고쳤는데 대법원에서 그 규정이 위헌이라고 판결하였습니다. 그래서 아예 헌법을 개정하여 현재는 헌법에 그 규정이 들어 있습니다.

우리와 같은 헌법조문도 없이 국가가 불법행위에 따른 손해배상책임을 지는 "타인"에 군인 등이 포함되지 아니한다고 해석하는 미국 법원의 태도는 어떻게 이해하여야 할까요? 과연 미국 판사들의 생각은 무엇일까요? 여러 가지 법률상의 이유를 대고 있지만, 국가가 배상책임을 지는 "타인"의 범위에 군인 등이 포함된다면 국가가 그 부담을 감당할 수 없다는 것이 가장 본질적이고 실질적인 이유입니다. 결국 군인 등의 권익을 보호함으로써 얻어지는 이익보다 그로 인하여 국가가 입는 피해가 너무 크다는 것입니다.

유학시절 미국의 이러한 판례를 비판·공격하면서 우리 법원은 미국 대법원의 해석과 같이 고쳐진 법률도 위헌이라고 판결했다고 으스댔더니, 미국 교수가 한심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미국의 자본주의와 자유주의가 아직 그만큼은 성숙하지 못하였다"고 말하였습니다. 물론 우리나라와 미국은 그 역사적·사회적 배경이 다르지만 이 한 예가 우리에게도 시사하는 바는 크다고 생각합니다. 당시 미국 교수의 말을 듣고 크게 부끄러웠습니다.

* 상속세에 관한 주 대법원의 판례
연방국가인 미국에서는 망인의 주소가 있는 주가 그 망인의 상속인들에게 상속세를 부과할 수 있는 권한이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사람의 주소는 복수가 가능하지만 상속의 준거가 되는 주소는 하나이어야 함이 원칙입니다.
갑부인 甲은 A, B 두 주에 주소로 볼 수 있는 주택 등 연고를 가지고 있었는데 실제로는 A주에 연결요소가 더 많았습니다. 그러나 A주의 상속세가 무거웠던 관계로 항상 자기는 A주의 시민이 아니고 B주의 주소를 가진 B주의 시민이라고 주장하며 살았습니다. 그런데 甲이 사망하자 A, B 두 주가 모두 자기 주에 주소가 있는 시민이라며 상속세를 부과하였습니다. 甲의 상속인들이 A, B 두 주를 상대로 각 주법원에 상속세 부과가 부당하다는 소송을 제기하였는데 두 주의 대법원에서 모두 패소하였습니다. A, B 두 주 법원이 채택한 법리는 동일합니다. 즉, "주소 = 정주의 의사 + 정주의 사실"이라는 기준에 따라 주소가 결정되고, 이 기준에 따르면 A, B주 모두 甲이 자기 주의 시민이라는 것입니다.
이 판례에 대하여 당시 미국 교수는 "다른 주에 양보하기에는 세금 액수가 너무 컸다"는 평석을 해 주었습니다. 연방국가에서의 특이한 예이고 우리로서는 이해하기 힘든 판단이지만, 한 번 음미해 볼 만한 사안이라고 생각합니다.

15. 사법개혁

대통령이 바뀔 때마다 사법부는 동네북이 됩니다. 여기저기서 너도나도 사법개혁을 외쳐댑니다. 모두가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에서 나온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또 이러한 공격을 받는 데는 사법부의 책임도 클 것입니다. 사법부 스스로 개혁의 의지를 보이지 않으니 여론의 힘으로 밀어붙인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사법개혁은 대부분 법원인사제도를 그 주된 대상으로 하고 있고, 이번에는 대법원의 구성이 핵심 쟁점으로 제기되었습니다. 몇 일간 각 신문의 1면 머리기사를 장식하며 온 나라가 떠들썩했지만 막상 후임 대법관 제청은 1단 기사로 끝이 났습니다. 왜 그렇게 떠들었는지 이상한 느낌이 들 정도입니다. 대법원장 인사도 머리기사로 다루어 주지 않는 것이 현실입니다.
우리나라는 최고법원인 대법원 이외에 헌법재판소를 별도로 두고 있습니다. 여러 가지 이유와 연혁에서 헌법재판소가 탄생하였지만 앞으로 헌법이 개정된다면 이 두 기구는 통합되어야 합니다. 이 자리에서 이 문제에 관한 자세한 언급은 피하겠습니다. 여하튼 현재의 대법원은 구체적인 재판업무를 실무적으로 처리하는 재판기구임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수많은 사건을 처리하여야 하는 것이 우리의 대법원입니다. 또 대법원 밑에는 전국적으로 수많은 하급법원이 있고 약 2천 명의 하급법원 판사가 있습니다.
헌법재판소가 있어도 대법원이 법률심으로서의 기능만 한다면 대법원의 운영과 구성을 지금과 다르게 할 충분한 이유와 타당성이 있습니다. 그런데 아이러니컬하게도 우리 국민들은 대법원의 개혁을, 구성원의 변화 및 다양화를 강하게 요구하면서도, 대법원의 운영방식의 현재의 방식을 유지할 것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저는 대법관이 되기 이전까지 대법원은 법률심으로서만 기능하여야 하고 제가 대법관이 되면 사실문제는 절대 건드리지 않고 법률상의 쟁점에 대하여만 판단하겠다고 굳게 마음먹고 있었습니다. 지금도 그 생각에는 변화가 없습니다. 즉, 사실인정은 사실심 법원의 전권에 속하고 채증법칙 위배는 상고이유가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6년의 대법관 생활을 마치면서 채증법칙 위배는 상고이유가 아니라는 평소의 신념을 이루지 못하였습니다. 나의 신념은 변함이 없지만 신념을 펴지 못한 이유는, "모두"가 원하지 않는데 나 혼자 고집을 부리는 것 또한 순리가 아니라고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모두"가 누구이겠습니까? 우선 거의 전 대법관이 채증법칙 위반을 상고이유로서 판단하기를 원하고 그것이 대법원의 큰 권한으로 알고 있으며 대부분의 하급심 법관들도 이를 수용하고 있습니다. 또 거의 모든 변호사가 이를 지지하고 있고, 사건의 당사자인 국민들도 사실문제까지도 다시 대법원에서 판단 받고 싶어 합니다. 그래서 저는 뜻을 굽혔습니다. 민주국가에서 국민이 원하지 않는 것을 고집할 권리는 없다고 스스로 인정하였습니다. 대법관이 되고 1년쯤 지나 본인 주심의 전원합의부 판결을 쓰면서 전원합의 쟁점이 아닌 채증법칙 위배의 상고이유 주장에 관하여 적법한 상고이유가 아니라고 판시함으로써 첫 시도를 하였지만 그 판결마저 주목받지 못하고 묻혀버렸습니다.
말이 나온 김에 사실인정에 관하여 부연하여 한 마디 하고자 합니다. 현재의 운영상 채증법칙 위배가 상고이유가 될지라도 항소심의 사실인정은 거의 절대적이라고 보아야 합니다. 항소심의 사실인정이 신뢰를 받아야 대법원이 법률심으로 기능할 수 있는 길이 열립니다. 대법원도 앞으로 하급심의 사실인정을 더 존중하는 방향으로 갈 것으로 기대합니다. 대법관 사이에 개인편차가 너무 크지만, 앞으로 논의되고 시정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습니다. 저는 심리미진만을 이유로 원심판결을 파기한 적이 없고, 사실인정 문제는 채증법칙을 위배하였으니 결론을 바꾸라고 못 박아서 파기하였습니다.
이러한 대법원의 운영체제에서 실무에 능한 사람이 우선 대법관으로 와야 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한 가지를 보면 열 가지를 안다고 실무에 능하지만 대법관으로서의 인품과 덕성은 모자란다고 할 사람은 거의 없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우선 현직 법관 중에서 대법관 후보를 물색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대법관 후보가 될 수 있는 연령층의 변호사는 거의 모두가 판사나 검사가 하기 싫어서 법원이나 검찰을 떠난 사람들입니다. 실력과 인격 면에서 견주어도 현직 법관들이 변호사에 뒤질 이유가 없습니다. 대법관의 절반은 변호사이어야 한다는 주장에는 전혀 찬성할 수 없습니다. 그렇게 된다면 누가 평생 법원을 지키며 법관의 길만을 고집하겠습니까? 결코 직역 이기주의적인 발상에서 하는 이야기가 아니라는 것을 믿어 주십시오.
대법원 구성의 다양성은 물론 필요합니다. 대법원이 이에 소홀하였던 것도 사실입니다. 대법관들도 책임이 있겠지만 현실적으로 대법관들은 사법행정에 관한 한 아무런 힘이 없습니다. 모든 것이 대법원장의 철학과 능력에 달려 있습니다. 대법원의 구성은 법관 출신을 주로 하여 변호사·교수·검사 등 다른 직역으로 확대하고, 법관 중에서의 선발은 종전의 기계적인 서열 중심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즉 대법관이 되어야만 할 사람이 대법관이 되어야 합니다.
이 기회에 이 번 본인의 후임 대법관 선임에 관하여 언급하고자 합니다. 종전에 사법시험 10회로서 사법대학원 마지막 기수까지 대법관이 되었고, 이번에는 사법시험 11회로서 사법연수원 1기생들이 후보군에 오를 차례였습니다. 대법원 구성에 있어 사법대학원 시대가 끝나고 사법연수원 시대가 열린다는 상징적인 의미가 부각되는 시점이었습니다. 그리고 대법원장이 천거한 후보들은 서열을 떠나 어느 누구와 견주어도 자격이 있는 훌륭한 분들이었습니다. 단지 서열이 되었다는 이유만으로 후보군에 오른 것이 아니라고 절대 다수의 법관이 믿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파동이 생겼습니다. 부추기는 세력이 있었고 내부에서도 흠집을 내는 법관들도 있었습니다. 결과적으로 잘 수습이 되어 다행이지만, 다음에는 이번처럼 서열에 따른 인사를 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이 대법원의 방침인 것처럼 보도된 것이 안타깝습니다. 다양하게 문호를 개방하여 중지를 모으되 대법관이 되어야 할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대법원장도 더 노력하고 법관들도 현명하게 판단하고 행동하여야 할 것입니다.
모든 분야에서 개혁과 변화는 추구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대의에 따라야 하고 명분이 있어야 합니다. 억지를 부려 순리에 어긋나는 짓을 하여서는 안 됩니다. 목소리가 크다고 소수가 다수를 지배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우리 법원은 법과 질서를 지키고 정의를 수호하여 국민을 편안하게 하고 국가의 발전에 이바지하여야 할 권리와 의무를 가지고 있습니다. 법조인 대통령의 탄생으로 국민들과 더불어 우리는 큰 기대에 차 있었으나 현실은 기대가 실망으로 변하고 있습니다. 정부가 우왕좌왕하고 있고 정치권도 무기력하기 짝이 없습니다. 우리 사회의 중심이 흔들리고 있습니다. 이제는 법원이 흔들리고 있는 나라의 중심을 잡는 역할을 하며 나라를 지켜야 합니다. 법원이 바로 서야 나라가 바로 선다는 것을 명심하여야 합니다.

16. 대법원에서 본 하급심 판결

자기의 판결이 대법원에 상고되면 우선 달갑지 않고 뭐 잘못된 게 없을까 우려하는 마음이 앞서게 됩니다. 그러면서 잘 몰랐거나 좀 애매한 문제는 대법원에서 잘 처리하여 주겠지 하는 의타심을 가지게 되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대법관도 하급심 판사나 똑같은 법관일 뿐입니다. 하급심에서 알 수 없으면 대법원에서도 알기 어렵습니다. 단지 마지막 재판이니까 그대로 끝날 뿐입니다. 이 말은 하급심의 판결이 그만큼 중요하다는 뜻입니다. 앞서 이야기했듯이 사실인정은 하급심 법원의 전권사항이고 입증책임의 원칙에 따라 자신 있게 판결하면 됩니다.
대법원에서 보면 대체적으로 하급심의 판결은 완벽에 가깝습니다. 그 많은 사건을 처리하면서도 그와 같이 심리하고 판단할 수 있는 것은 우리 법관들이 우수하고 열심이기 때문입니다. 상급심에서 파기되는 것은 누구에게나 있을 수 있는 실수가 대부분이고 또 인생관이 다르기 때문인 것도 상당수 있습니다. 그런데 고의건 과실이건 실수를 저지르는 법관이 실수를 반복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이는 열심히 하지 않거나 독선적이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극히 소수의 법관이지만 좀더 성찰하고 노력하여야 할 것입니다.

판단을 함에 있어서는 주장·입증책임에 따라 판단한 뒤 불필요한 사실인정과 법률판단은 삼가야 합니다. "오히려" 운운하며 필요 없는 사실을 인정한 것이 화근이 되는 수가 있고 결론이 맞아도 법률 판단을 길게 하다 보면 틀리거나 어울리지 않는 이론일 수도 있어 시빗거리가 될 수 있습니다.
한편 형사사건의 양형처럼 중요한 것도 없습니다. 우리와 같은 대륙법계 국가의 법관들에게는 양형에 있어 상당한 재량이 부여되어 있습니다. 현행법상 10년 미만 형이 선고된 사건에서는 양형부당이 상고이유가 아니므로 양형문제가 사실심의 그야말로 전권에 속합니다. 10년 이상의 형이 선고된 경우에도 재판부마다 양형 편차가 상당히 큰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기록만에 의하여 양형부당을 이유로 원심판결을 파기한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입니다. 양형의 형평에 관하여 모든 법관들이 좀더 노력하여 주기 바랍니다.
얼마 전 대법원 전원합의부에서 선고유예의 요건이 상고이유가 되는지 여부를 논의한 것도 하급심에 경종을 주자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었습니다. 또 하나 지적하고 싶은 것은 정치인 관련 사건에서, 물론 대다수의 판결은 그렇지 아니하지만, 승패나 유 무죄 판단 또 양형에 있어 법관의 성향과 출신지역에 따라 편차가 크게 나는 것을 가끔 발견할 수 있습니다. 있을 수 없는 일이고 잘못 보았겠지 하고 생각하겠지만 현실입니다. 다른 사람을 판단하는 우리 법관만은 망국적인 연고주의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선고유예의 요건이 쟁점이 되어 전원합의부에서 논의한 사건도 국회의원에 대한 공직선거법위반 사건이었습니다. 예가 많지는 않겠지만 귀담아 들어주기 바랍니다.

17. 법조인이라는 직업

우리나라에서는 가장 우수하다는 사람들이 법과대학에 입학하여 사법시험에 합격한 뒤 판사나 검사 또는 변호사가 되고 있습니다. 이제 시대가 바뀌면서 재질 있는 여러 인재들이 각 분야로 많이 진출하고 있지만 아직도 법조인이 매력적인 직업으로 꼽히는 것 같습니다. 안정적인 위치에서 고상한 업무를 처리하고 사회적으로 존경받으며 경제적으로 어렵지 않기 때문인가 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법관의 길에서 방황했던 적이 두 차례 있었습니다. 단독판사 시절 법원이라는 좁은 울타리와 소극적인 업무에 실증이 나 변호사로의 전직을 심각히 고려해 본 적이 있었습니다. 그 뒤 법원장으로 일하던 시절 동기생이 먼저 대법관이 되는 것을 보고 법원을 떠나려고 생각한 적도 있었습니다. 첫 번째는 나의 결단으로 주저앉았고, 두 번째는 법원 당국을 포함한 주위의 만류로 주저앉았습니다. 그리고 또 10년 가까이 지나 35년 평생을 법관으로 근무하고 임기를 마치게 되었습니다.
직업으로서의 법관에 만족하고 인생을 살펴보는 여유가 생긴 것은 법관으로 임용되어 근 20년이 지난 고등법원 부장판사 시절부터였던 것으로 생각됩니다. 온종일 혼자 기록을 보고 생각하고 판결을 쓰는 것이 참으로 편안하였고 즐거웠습니다. 어떤 직업도 이처럼 자유스러울 수 없다고 생각되었습니다.

저는 어렸을 적에는 변호사가 되는 것이 꿈이었습니다. 소설이나 영화 속의 멋진 변호사처럼 약자의 편에 서서 정의롭게 변론하는 변호사가 되고 싶었습니다. 현실적으로는 법관의 길을 걸어왔지만 이제 법원을 떠나면 법조인의 시작이고 마지막인 변호사가 됩니다.
오늘날 우리 법조인 특히 변호사에 대한 시각이 무척 곱지 않습니다. 약자를 도와주는 척하며 돈이나 벌고 특수계층으로 군림하는 집단 정도로 과소평가하려는 의도가 여기저기서 보입니다. 그렇게 된 데에는 변호사 스스로의 책임이 크지만 변호사라는 직업을 매도하려는 일부 계층의 시각도 우려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대법관을 비롯한 고위직 법관이 법원을 떠나 변호사가 되면 마치 부도덕한 것처럼 떠들고 글을 쓰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교수도 있고 시민단체 회원도 있고 심지어 판사들도 있습니다. 특히 대형 법무법인에 근무하면 팔려갔다거나 새로 취직하였다고 하기도 하고, 또 우리나라에서만 볼 수 있는 꼴사나운 일이라고 하는 등 심한 말들을 서슴지 않습니다.
이러한 공격에 대해 법원 당국이나 변호사가 된 고위직 법관이 아무도 반박하지 않았습니다. 판사는 판결로만 말한다고 하지만 누군가는 답을 하였어야 합니다.
이 자리에서 묻고 싶습니다. 과연 변호사는 부도덕하고 비난받아야 하는 직업입니까? 돈을 벌기 위한 목적으로만 변호사를 하는 것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1차적으로 법률적 구호를 기다리는 시민에게 봉사하여 정의 실현에 기여하는 직업이 바로 변호사입니다. 퇴직한 고위직 법관이 강단에 서면 고상하고 변호사가 되면 품위를 잃는 것입니까? 남의 일이라고 함부로 말하면 안 됩니다. 이지적이지 못하고 합리적이니 못한 사람들이 외친다고 부화뇌동하여서는 더 더욱 안 됩니다.
품위를 지키며 우아한 자세로 법률서비스를 제공하고 후배 법조인들을 지도하여야 하는 것이 선배 법조인들의 마지막 책무라고 생각합니다. 절대 비난받을 일이 아닙니다. 종신직이 아닌 우리나라의 법관은 퇴직한 뒤에도 평생 터득한 지식과 경험을 법적 봉사에 활용하여 사회에 이바지하여야 하고 후배 법조인에게 전수하여야 합니다. 우려하는 목소리는 잘 하라는 고언으로 받아들이겠습니다. 법조인의 귀감이 되도록 노력함은 물론, 모든 사람과 국가를 위한 헌신에도 앞장서 나가겠습니다.

18. 맺는 말

언제까지나 머무를 것 같았던 정든 법원을 이제는 떠납니다. 앞으로 변호사로서의 법조생활이 남아 있지만, 이제 지나간 법관시절이 다시 돌아올 수는 없습니다. 긴 세월이었지만 남긴 것이 무엇인지 허전함이 느껴지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저는 행복한 판사였고 보람찬 법원생활을 하였습니다.
제가 오늘의 이 자리까지 올 수 있었던 것은 그 동안 저를 도와주신 선후배 동료 여러분과 주위 모든 분들의 덕분입니다. 이 자리를 빌려 여러분 모두에게 충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끝으로 법원의 무궁한 발전을 기원하고 여기 모이신 여러분 모두의 건강과 행복을 기원합니다.
감사합니다. 2003. 9.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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