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굴암원형논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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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문화유산답사기석굴암원형논쟁에 관한 부분을 나름대로 정리해보고자 본 페이지를 만들었습니다. --sweetaby

석굴암원형논쟁의 내용은 크게 2가지로 정리된다.
1.전실의 4개의 신장상이 모두 일렬로 배치되었는가 아니면 4번째 아수라상은 직각으로 굴곡되어 있었는가?
1.석굴암 전실앞에는 현재와 같은 목조건물이 들어서 있었는가? 없었는가?

60년대 문화재관리국이 황수영 전 국립중앙박물관장의 지휘 아래 복원된 석굴암의 현재상태는 4개의 신장상이 일렬로 배치되어 있고, 전실에는 목조건물이 들어서 있다.

하지만 최근의 학계는 <조선미술대관>에 실린 석굴암의 1909년 전실 촬영사진에 입각하여, 현재 복원된 전실배치와 달리, 마지막 팔부신장상이 다른 신장상 3개와 일렬로 놓이지 않고 전실 안쪽이 꺽인 채 배치되어 있음을 강조하고 있다.
또한
  • <조선미술대관>에 실린 사진과 일제의 보수공사가 있기 전 사진
  • <해동지도>, <산중일기>, <불국사 사적기> 등 석굴암과 관련된 서적들에 석굴암과 관련도니 목조건물에 대한 언급이 없는 점
  • 일제가 석굴암 복원 전에 기록한 <재래기초평면도>에 목조기둥이 표시되어 있지 않은점
을 들어 석굴암의 전실에는 목조건물이 존재하지 않았었다는 주장을 펴고 있다.

반대로 일부학자들은 석굴 주위에서 출토된 기와파편과 쇠못을 근거로 지금과 같이 목조건물이 있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유홍준 교수의 책과 KBS역사스페셜에서 방영한 내용은 전실이 꺽이고 목조건물은 없었다는 건축계와 미술사학계의 주론에 입각한 주장에 따르고 있다.

반대의 의견은 소설가 성낙주씨가 쓴 <석굴암, 그 이념과 미학>에 나오는 의견으로 그는 석굴암 내 조각상의 보호를 위해서내 예배처라는 석굴암의 성격을 고려해볼때 목조전실이 필수적이라고 강조하며, 오히려 목조 지붕 양식의 원형을 탐구하는 노력을 해야한다고 주장한다. 또한 1909년의 사진은 이미 석굴암이 통일신라시대에 건립된 후 많은 중수와 중창을 거쳤을 것임으로 큰 의미를 둘 수 없다고 주장한다.

sweetaby는 개인적으로 전실이 꺽여 있었으며, 목조건물은 없었다는 주장의 근거가 더 타당해 보인다. 우선 석굴암은 목조건물이 아닌 화강석으로 지어진 건축물이기 때문에 중수시에도 변형을 거의 거치지 않은 원형의 상태로 일제가 발견하기까지 전해졌을 것이라고 생각하며, 목조건물이 있었다면 그 기둥의 흔적이나 초석의 흔적 등이 발견되었을 터인데 그런 언급이 없었다는 것은 목조건물이 없었다는 주장에 타당성을 더해준다고 생각한다. 중수에 관한 기록은 <불국사 고금창기>의 "1703년 종열이 석굴암을 다시 짓고 또 석굴 앞에 돌계단을 쌓았다."와 <석굴암 중수상동문>의 석굴암 중수기록이 있는데, 내용이 빈약하여 자세한 내용은 알 수 없다한다.
또한 성낙주씨를 위시하는 주장설은 주로 불교신문 등에 많이 기재되는 경향이 있는데 이는 불국사를 위시한 조계종이 원형논란을 그다지 달갑지 않게 여기는 듯한 느낌을 풍기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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