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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실학의 전개
- 신라의 신흥 지주계급은 불교와 비교할때 유교의 충효·윤리도덕이 봉건 통치 질서의 유지를 위한 봉건 등급제도의 합법화에 좀더 실용적인 학문
- 신라·고구려의 통치계급은 유교를 치국의 근본으로 삼고, 불교를 수신의 근본으로 삼아서 양자를 동시에 수용해서 유불 병흥 정책을 실시
- 조선 봉건 통치계급은 정주학을 실학으로 여기고 불교를 배척
- 16세기 초에도 정주학은 실학으로 인정 되었음
- 16세기 중엽에 이이는 정주학을 실학으로 여겼는데, 그 내용은 봉건 윤리 도덕 및 그것의 실행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정치·경제·군사 등 각 방면으로 확대된 것이다.
- 17세기 초 실학파는 실제 생활과 생산에 유리하거나 유용한 학문을 모두 실학연구의 대상과 내용으로 삼았음.
- 신라의 신흥 지주계급은 불교와 비교할때 유교의 충효·윤리도덕이 봉건 통치 질서의 유지를 위한 봉건 등급제도의 합법화에 좀더 실용적인 학문
- 신라·고구려의 통치계급은 유교를 치국의 근본으로 삼고, 불교를 수신의 근본으로 삼아서 양자를 동시에 수용해서 유불 병흥 정책을 실시
- 조선 봉건 통치계급은 정주학을 실학으로 여기고 불교를 배척
- 16세기 초에도 정주학은 실학으로 인정 되었음
- 16세기 중엽에 이이는 정주학을 실학으로 여겼는데, 그 내용은 봉건 윤리 도덕 및 그것의 실행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정치·경제·군사 등 각 방면으로 확대된 것이다.
- 17세기 초 실학파는 실제 생활과 생산에 유리하거나 유용한 학문을 모두 실학연구의 대상과 내용으로 삼았음.
♣ 실학의 형성과 발전
17세기를 전후로 하여 시작된 사회 체제의 변동은 중세로 부터 근대로의 이행의 조짐을 보이고 있었던 만큼, 유학의 갱신 역시 그에 상응하는 획기적인 것이 요청되고 있었는데, 이렇게 해서 나타난 것이 바로 실학이었다. 이러한 실학이 17세기 초 조선에서 대표적인 신사조이자 신학풍으로 형성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며, 나름대로 사회 역사·사회이론 및 과학 기술의 발전에 깊이 근거하고 있었다.
17세기를 전후로 하여 시작된 사회 체제의 변동은 중세로 부터 근대로의 이행의 조짐을 보이고 있었던 만큼, 유학의 갱신 역시 그에 상응하는 획기적인 것이 요청되고 있었는데, 이렇게 해서 나타난 것이 바로 실학이었다. 이러한 실학이 17세기 초 조선에서 대표적인 신사조이자 신학풍으로 형성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며, 나름대로 사회 역사·사회이론 및 과학 기술의 발전에 깊이 근거하고 있었다.
1) 실학 사상은 17세기 이후 조선사회 역사 발전의 필연적인 산물이었다.
2) 17세기 초 실학사상은 중국을 통해 전해진 서양 자연과학의 영향을 받고, 아울러 조선 자연과학의 성과에 기초하여 형성되었다.
3) 실학사상은 이전에 획득된 진보적 사회정치 사상을 이론적 전제로 하였다.
2) 17세기 초 실학사상은 중국을 통해 전해진 서양 자연과학의 영향을 받고, 아울러 조선 자연과학의 성과에 기초하여 형성되었다.
3) 실학사상은 이전에 획득된 진보적 사회정치 사상을 이론적 전제로 하였다.
♣ 실학사상의 특징
1) 실사구시의 학문
- 실학파의 실학 사상은 주자학의 실제를 벗어난 청담공론에 반대하고 학문을 사회적 생산과 생활에 응용할 것을 주장하였고, 경세치용과 이용후생을 목적으로 형성되었으며, 실학 사상가들은 모두 주자학의 공소·공론을 반대하고 생산과 생활에 실용적인 학문 연구를 강조하였다.
2) 민본적 민주사상
- 실학파의 민본적 민주 사상은 유교의 중민 사상이라는 테두리를 완전히 벗어나지는 못했다. 그러나 그들이 제기한 평등 사상은 객관적으로 상공업 자본가의 이익을 미약하게나마 반영했다는 점에서 진보적 의의를 갖는다고 할 수 있다.
3) 민족적 자주 정신
- 실학파는 사대주의에 반대하고 자주 정신을 강조 하였는데, 이는 조선이 진보적인 학자들이 발전한 서양 과학 문화를 받아들인 결과이고, 사대주의가 조선 봉건 사회에, 초래한 심각한 위기에 대한 반성이며, 부강한 나라를 건설하기 위한 새로운 시도였다.
1) 실사구시의 학문
- 실학파의 실학 사상은 주자학의 실제를 벗어난 청담공론에 반대하고 학문을 사회적 생산과 생활에 응용할 것을 주장하였고, 경세치용과 이용후생을 목적으로 형성되었으며, 실학 사상가들은 모두 주자학의 공소·공론을 반대하고 생산과 생활에 실용적인 학문 연구를 강조하였다.
2) 민본적 민주사상
- 실학파의 민본적 민주 사상은 유교의 중민 사상이라는 테두리를 완전히 벗어나지는 못했다. 그러나 그들이 제기한 평등 사상은 객관적으로 상공업 자본가의 이익을 미약하게나마 반영했다는 점에서 진보적 의의를 갖는다고 할 수 있다.
3) 민족적 자주 정신
- 실학파는 사대주의에 반대하고 자주 정신을 강조 하였는데, 이는 조선이 진보적인 학자들이 발전한 서양 과학 문화를 받아들인 결과이고, 사대주의가 조선 봉건 사회에, 초래한 심각한 위기에 대한 반성이며, 부강한 나라를 건설하기 위한 새로운 시도였다.
4) 탁고 개제의 개혁 정신
- 사회 개혁 사상의 특징은 옛날 사람의 도를 빌려 현실을 개혁하려는 탁고개제의 방법에 있다.
- 사회 개혁 사상의 특징은 옛날 사람의 도를 빌려 현실을 개혁하려는 탁고개제의 방법에 있다.
경제 개혁의 측면에서 보면 실학파는 전제 개혁을 매우 중시하여 그것을 부국강병의 중심 고리로
보았고, 정치 개혁의 측면에서 보면, 실학파는 주로 고대 사회의 왕도·인정에 대한 미화와 패도
·폭정에 대한 반대를 통하여 정치 개혁의 목적을 실현하고자 하였다.
보았고, 정치 개혁의 측면에서 보면, 실학파는 주로 고대 사회의 왕도·인정에 대한 미화와 패도
·폭정에 대한 반대를 통하여 정치 개혁의 목적을 실현하고자 하였다.
5) 기 일원론적 철학 사상
- 실학파의 철학 사상을 대충 살펴보면, 그 철학의 기본 경향은 리 일원론이 아니라, 기 일원론,
즉 유물론이라고 할 수 있다.
이수광은 세계의 기원을 물질적인 기, 즉 태극으로 보았고, 아울러
그것이 세계 만물을 창조한다고 하였다.
- 실학파의 철학 사상을 대충 살펴보면, 그 철학의 기본 경향은 리 일원론이 아니라, 기 일원론,
즉 유물론이라고 할 수 있다.
기 일원론=유물론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동양의 철학 자체가 유기체적 성격을 띄고 있고. 어느정도 유심주의라던가 이런 부분이 있는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흔히 서구철학의 유물론의 개념과는 사유의 전통이 다르니까. 오히려 형이하를 많이 다룬다던가. 적당한 말이 필요하지 않을까 생각해봅니다.
그것이 세계 만물을 창조한다고 하였다.
이것이 기 일원론적인 철학 사상이다.
형성의 배경과 요인
한국의 실학사상이 발생하게 된 배경과 요인은 조선 후기의 사회·경제적 여러 현상 및 정치·문화적 요소들이 종합적으로 작용하였다.
첫째, 임진왜란·병자호란의 2차례 전란을 겪으면서 가속화되었던 통치질서의 와해 현상과 신분제도의 변동을 들 수 있다.
통치질서의 변동 중에서도 농민분해에 대하여실학자들은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농촌의 안정이야말로 사회의 안위와 국가의 존립에 직결되는 문제였기 때문이다.
이 농민분해의 과정에서 실학사상이 태동, 형성되었고, 농민분해문제에 대한 진단에 따라 각기 다른 대책들이 제시되었다.
실학의 일부 계열에서는 농민분해의 과정에서 분출된 상업적 농민을 대변하거나 지주적 토지소유론을 부인하고 토지의 농민소유를 주장하였으며,
일부는 지주제를 인정하면서 소작농의 생활안정을 위해 소작조건의 개선방안을 모색하게 되었다.
한편, 조선 후기에 형성되었던 상품화폐경제도 실학사상의 대두와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으며,
사회계급면에서 중세적 신분체제의 급격한 붕괴는 정권에서 소외된 양반계급의 경제적 몰락과 민인층(民人層)의 신분상승과정으로 나타났다.
그리고 이러한 사회신분제도의 변동과정에서 실학자들은 몰락한 양반층의 생계대책과 서민층의 생존문제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둘째, 조선왕조의 지배원리였던 성리학이 사회적 기능을 다하지 못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성리학은 15세기 조선왕조 통치질서의 확립에 지대한 역할과 기능을 하였고 17∼18세기까지도 통치이념으로 작용하였으나, 후기로 오면서 교조주의적(敎條主義的)인 경향을 띠게 되었으며,
번쇄하고 지리(支離)한 성격으로 변질되었다. 즉, 학파의 분화과정에서 학설이 다양하고 정밀화하는 발전이 계속되었으나,
그리하여 17세기 이래 조선사회의 새로운 변화에 대응하는 본질적·합리적인 대안을 제시하지 못하였고,
따라서 성리학에 대한 반성과 비판이 일어나게 되었다.
한편 외래적 요인으로는 서학 및 청대 학술의 영향도 간과할 수 없다.
17세기 이래 조선에는 중국에서 간행된 각종 한역서학서(漢譯西學書)가 전래되어 실학자들에게 철학적 인식과 사유에 영향을 끼쳤으며,
동시에 들어온 과학기술서적은 실학자들에게 과학적이고 합리적인 사상을 갖게 하고, 천문학·지리학·기하학 등의 연구에 몰두하게 하였다.
또한 청대의 고증학도 실학사상 형성에 영향을 끼쳤는데, 고증학에서는 실사구시를 내세워 학문연구의 실증적 방법을 강조했다.
한국의 실학사상이 발생하게 된 배경과 요인은 조선 후기의 사회·경제적 여러 현상 및 정치·문화적 요소들이 종합적으로 작용하였다.
첫째, 임진왜란·병자호란의 2차례 전란을 겪으면서 가속화되었던 통치질서의 와해 현상과 신분제도의 변동을 들 수 있다.
통치질서의 변동 중에서도 농민분해에 대하여실학자들은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농촌의 안정이야말로 사회의 안위와 국가의 존립에 직결되는 문제였기 때문이다.
이 농민분해의 과정에서 실학사상이 태동, 형성되었고, 농민분해문제에 대한 진단에 따라 각기 다른 대책들이 제시되었다.
실학의 일부 계열에서는 농민분해의 과정에서 분출된 상업적 농민을 대변하거나 지주적 토지소유론을 부인하고 토지의 농민소유를 주장하였으며,
일부는 지주제를 인정하면서 소작농의 생활안정을 위해 소작조건의 개선방안을 모색하게 되었다.
한편, 조선 후기에 형성되었던 상품화폐경제도 실학사상의 대두와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으며,
사회계급면에서 중세적 신분체제의 급격한 붕괴는 정권에서 소외된 양반계급의 경제적 몰락과 민인층(民人層)의 신분상승과정으로 나타났다.
그리고 이러한 사회신분제도의 변동과정에서 실학자들은 몰락한 양반층의 생계대책과 서민층의 생존문제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둘째, 조선왕조의 지배원리였던 성리학이 사회적 기능을 다하지 못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성리학은 15세기 조선왕조 통치질서의 확립에 지대한 역할과 기능을 하였고 17∼18세기까지도 통치이념으로 작용하였으나, 후기로 오면서 교조주의적(敎條主義的)인 경향을 띠게 되었으며,
번쇄하고 지리(支離)한 성격으로 변질되었다. 즉, 학파의 분화과정에서 학설이 다양하고 정밀화하는 발전이 계속되었으나,
다른 한편으로는 학파의 분열과 대립이 객관적 합리성을 잃고 사변적(思辨的)인 관념체계에 사로잡히게 됨으로써,
현실사회와 유리된 채 폐쇄적이고 권위적인 공론을 일삼는 폐단에 빠져 있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17세기 이래 조선사회의 새로운 변화에 대응하는 본질적·합리적인 대안을 제시하지 못하였고,
따라서 성리학에 대한 반성과 비판이 일어나게 되었다.
한편 외래적 요인으로는 서학 및 청대 학술의 영향도 간과할 수 없다.
17세기 이래 조선에는 중국에서 간행된 각종 한역서학서(漢譯西學書)가 전래되어 실학자들에게 철학적 인식과 사유에 영향을 끼쳤으며,
동시에 들어온 과학기술서적은 실학자들에게 과학적이고 합리적인 사상을 갖게 하고, 천문학·지리학·기하학 등의 연구에 몰두하게 하였다.
또한 청대의 고증학도 실학사상 형성에 영향을 끼쳤는데, 고증학에서는 실사구시를 내세워 학문연구의 실증적 방법을 강조했다.
이러한 현실을 직접 체험함으로써 유형원은 현실을 개혁하고 부국강병을 실현해
야겠다는 염원을 더욱 강하게 품게 되었다.
야겠다는 염원을 더욱 강하게 품게 되었다.
유형원의 소박하고 평민적인 생활과 실사구시적 학
문연구의 태도는 애국주의적 사상과 높은 과학성, 인민성으로 일관된다.
문연구의 태도는 애국주의적 사상과 높은 과학성, 인민성으로 일관된다.
그러한 유형원의 사상은
당시 조선 사회의 요구를 비교적 정확히 반영한 것이었으며, 또 인민 대중의 뜻을 대변한 것이었
다.
당시 조선 사회의 요구를 비교적 정확히 반영한 것이었으며, 또 인민 대중의 뜻을 대변한 것이었
다.
2. 이익의 실학 사상
이익은 실학적 입장에서 부패하고 타락한 봉건 사회의 여러가지 모순을 적발하고 폭로
하였다.
이익은 실학적 입장에서 부패하고 타락한 봉건 사회의 여러가지 모순을 적발하고 폭로
하였다.
그는 여섯가지 좀, 즉 노비제도, 과거제도, 문벌제도, 잡술, 승려, 건달이 나라를
빈곤하게 하고 농사의 발전을 방해하는 주요한 원인이라고 단정하였다.
빈곤하게 하고 농사의 발전을 방해하는 주요한 원인이라고 단정하였다.
이익은 특히 봉건
제도의 핵심을 이루는 노비제도, 과거제도, 문벌제도와 그를 바탕으로 하는 반상차별, 적서
차별, 편당편습의 개혁에 역점을 두었다.
제도의 핵심을 이루는 노비제도, 과거제도, 문벌제도와 그를 바탕으로 하는 반상차별, 적서
차별, 편당편습의 개혁에 역점을 두었다.
이익의 사상은 18세기 조선의 사회, 역사적 조건
과 양반 계급내 진보적 계층의 요구를 반영한 것으로서 당시로는 획기적인 내용이었다.
과 양반 계급내 진보적 계층의 요구를 반영한 것으로서 당시로는 획기적인 내용이었다.
아울러 그것은 자연과학과 실학 사상이 발전하는데도 큰 역할을 하였다.
3. 정약용의 실학 사상
정약용의 실학 사상은 주로 사회 개혁과 경제 개혁 그리고 국방 개혁에 관한 사상으로
표현되었다.
정약용의 실학 사상은 주로 사회 개혁과 경제 개혁 그리고 국방 개혁에 관한 사상으로
표현되었다.
사회 개혁 사상은 고대 사회를 이상화함으로써 군주제를 반대하고 민주 정치를
부르짖었으며, 경제 개혁에서는 여전론을 주장 하였는데, 여전론은 한 마을을 단위로 하여
토지를 공동 소유, 공동 경작하고, 그 수학량을 노동량에 따라 분배하는 일종의 공동 농장
제도를 말하였다.
부르짖었으며, 경제 개혁에서는 여전론을 주장 하였는데, 여전론은 한 마을을 단위로 하여
토지를 공동 소유, 공동 경작하고, 그 수학량을 노동량에 따라 분배하는 일종의 공동 농장
제도를 말하였다.
마지막으로 국방 개혁은 여전제 실시와 결합시켜 병민 일치·''병농
일치''를 실현 하는 것이 효과적인 방도라고 보았다.
일치''를 실현 하는 것이 효과적인 방도라고 보았다.
4. 홍대용의 실학 사상
그의 사상에서 중요한 것은 전제를 개혁하고 놀고 먹는 자를 없애며 신분에 관계없이
재능에 따라 인재를 등용하는 등 통치 체제를 개편하고 국방력을 강화하여 나라를 부강하게
하고 백성의 생활을 안정시키고자 한 것이였다.
그의 사상에서 중요한 것은 전제를 개혁하고 놀고 먹는 자를 없애며 신분에 관계없이
재능에 따라 인재를 등용하는 등 통치 체제를 개편하고 국방력을 강화하여 나라를 부강하게
하고 백성의 생활을 안정시키고자 한 것이였다.
홍대용의 사회 개혁안은 토지 겸병이나
지주의 사적 토지 소유가 없고, 놀고 먹는 양반과 세승제가 없이 누구나 다 일하며, 학식과
재능있는 관리에 의해 부국강병이 실현되는 모습으로 알려진다.
지주의 사적 토지 소유가 없고, 놀고 먹는 양반과 세승제가 없이 누구나 다 일하며, 학식과
재능있는 관리에 의해 부국강병이 실현되는 모습으로 알려진다.
홍대용의 자연 과학 사상과
그에 기초한 기 일원론적 견해 그리고 진보적인 사회 정치 사상은 실학 발전에 중요한 의의를
갖는다고 하겠다.
그에 기초한 기 일원론적 견해 그리고 진보적인 사회 정치 사상은 실학 발전에 중요한 의의를
갖는다고 하겠다.
5. 박지원의 실학 사상
박지원은 옛것을 배우더라도 변화시킬 줄 알며 새것을 만들어 내더라도 근거한데가 있어
야 한다는 사상을 바탕으로 자신의 사회 개혁 사상을 피력하였다.
박지원은 옛것을 배우더라도 변화시킬 줄 알며 새것을 만들어 내더라도 근거한데가 있어
야 한다는 사상을 바탕으로 자신의 사회 개혁 사상을 피력하였다.
일찍이 그는, 과농소초
등을 통해 농업 생산력을 높이는 문제에 관심을 쏟은바 있었는데, 청나라에 건너가서 생산과
유통의 중요성을 실감한 다음부터는 상공업 진흥에 보다 관심을 기울였다.
등을 통해 농업 생산력을 높이는 문제에 관심을 쏟은바 있었는데, 청나라에 건너가서 생산과
유통의 중요성을 실감한 다음부터는 상공업 진흥에 보다 관심을 기울였다.
즉, 수레와 선박의
이용이나 화폐 유통의 필요성을 강조하였으며, 양반 특권을 폐지하여 도덕을 바로 잡는 것을
내용으로하는 사회 개혁 사상을 제시하였다.
이용이나 화폐 유통의 필요성을 강조하였으며, 양반 특권을 폐지하여 도덕을 바로 잡는 것을
내용으로하는 사회 개혁 사상을 제시하였다.
6. 박제가의 실학 사상
박제가는 박지원의 사상을 이어 받아 보다 더 확충시켰는데, 박제가가 이해한 실학의
구체적 내용은 상업·무역·화폐·유통·농업기술·수공업·교통 운수·국방 등이었다.
박제가는 박지원의 사상을 이어 받아 보다 더 확충시켰는데, 박제가가 이해한 실학의
구체적 내용은 상업·무역·화폐·유통·농업기술·수공업·교통 운수·국방 등이었다.
그는 이것들이 모두 이용후생에 필요한 것으로서 가장 먼저 해결해야 할 학문대상으로 보았다.
그리고 청나라를 다녀온 박제가는 상공업의 발달을 열렬히 희구하여, 그 방안으로서 청나라와
의 통상을 강화할 것과, 수레나 선박의 이용을 늘릴 것, 그리고 절검보다는 소비를 권장하여
생산을 자극시킬 필요가 있음을 지적하였다.
의 통상을 강화할 것과, 수레나 선박의 이용을 늘릴 것, 그리고 절검보다는 소비를 권장하여
생산을 자극시킬 필요가 있음을 지적하였다.
7. 이수광의 실학 사상
이수광은 우선 당시 고루한 유학자들이 경전이나 읽고 시나 지으면서, 허송세월을 하는데
비판의 화살을 겨누었다.
이수광은 우선 당시 고루한 유학자들이 경전이나 읽고 시나 지으면서, 허송세월을 하는데
비판의 화살을 겨누었다.
그러면서 그는 학문이란 마치 활쏘는 것과 같아서 목적을 뚜렷이
세우고 그 방향을 가져야 쓸모 있는 것이 될 수 있다고 하였다.
세우고 그 방향을 가져야 쓸모 있는 것이 될 수 있다고 하였다.
그는 조선 봉건 사회의 발전
을 가로막는 여러가지 폐단을 들추어 내었으며, 외국의 선진 문명을 받아들이고 해외 통상을
발전시켜 봉건 국가의 진흥을 꾀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을 가로막는 여러가지 폐단을 들추어 내었으며, 외국의 선진 문명을 받아들이고 해외 통상을
발전시켜 봉건 국가의 진흥을 꾀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렇듯 실학적 입장을 반영하는
그의 진보적 사상과 견해는 뒷날 실학사상 형성에 큰 영향을 주었다.
그의 진보적 사상과 견해는 뒷날 실학사상 형성에 큰 영향을 주었다.
8. 이규경의 실학 사상
이규경에게서 실학은 주로 자연 과학을 의미하며, 이규경은 그 당시 나라의 부강과 백성의 생
활에 쓸모 있는 학문이란 곧 자연 과학이라고 보았다.
이규경에게서 실학은 주로 자연 과학을 의미하며, 이규경은 그 당시 나라의 부강과 백성의 생
활에 쓸모 있는 학문이란 곧 자연 과학이라고 보았다.
따라서 일상 생활에 직접 이용후생 할
수 있는 것은 자연 과학이라 보고 이에 관한 연구에 더욱 박차를 가했다.
수 있는 것은 자연 과학이라 보고 이에 관한 연구에 더욱 박차를 가했다.
실학의 개념
조선 후기에 일어난 새로운 학풍을 지칭하는 말로 <실학>이라는 용어가 사용된 것은 1930년대 정인보(鄭寅普)·최남선(崔南善)·문일평(文一平) 등 민족주의 사가들이 <조선학(朝鮮學)>이라는 개념을 정립하면서 시도한 데서 비롯된다. 그러나 실학이란 말은 17세기 실학파가 등장하기 이전부터 유학자들 사이에서 수 없이 사용되어 왔다. 원래 그 말은 유학자들이 불교나 도교를 허(虛)·공(空)을 숭상하는 학문으로 규정하고 유교의 현실적 실천정신을 표방하여 스스로 실학이라 강조함으로써 제시된 것이었다. 그러므로 고려 말 조선 초의 성리학자들이 말하는 실학은 불교·도교를 배척하기 위한 성격이 강하다. 이에 반해 조선 후기 실학은 불교나 도교의 폐단뿐 아니라 주자학의 공리공담적(空理空談的) 폐단을 반대하고 나라를 부유하게 하고 백성을 넉넉하게 하는 부국유민을 목적으로 하는 실용학문이었으므로 사회·경제적인 성격이 짙었다. 유학은 원래 이론과 실천의 양면성을 동시에 갖고 있으므로, 철학적·이론적인 방면으로 전개될 수 있고 또한 실용주의적인 방면으로 발휘될 수도 있다. 그러므로 성리학이 유학사상을 철학적으로 전개시킨 것이라고 한다면, 조선 후기의 실학은 현실 중시적 입장에서 실용과 공리(功利)를 중시하는 경세치용의 유학이라고 할 수 있다. 이처럼 17세기에 발생·발전한 실학은 학문의 내용으로서 실용지학과 학문하는 방법으로서 실사구시를 의미하며, 이런 점에서 종래의 학파들과 구별된다. 그러나 실학사상이 단순히 물질위주의 실용주의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홍대용(洪大容)은 《담헌서(湛軒書)》 <오팽문답(吳彭問答)>에서 학문을 의리(義理)의 학문, 경제(經濟)의 학문, 사장(詞章)의 학문으로 구분하고 의리의 학문을 근본으로 삼으면서도 3가지가 모두 보완적인 관계에 있다고 하였다. 이로써 볼 때 청대 실학이 성리학에 대한 반발에서 출발했다고 한다면, 조선 후기의 실학은 무조건 성리학을 배척, 거부하였다기보다는 철학적으로 성리학의 체계를 계승하면서도 성리학의 한계성을 인식하고 이를 극복하려는 데서 출발하였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청대 실학이 경서(經書) 고증에 치중한 데 반해 조선 후기 실학은 성리학·양명학·고증학 등을 연구대상으로 하는 다양한 사상적 경향을 보이고 있는 점이 특색이다.
조선 후기에 일어난 새로운 학풍을 지칭하는 말로 <실학>이라는 용어가 사용된 것은 1930년대 정인보(鄭寅普)·최남선(崔南善)·문일평(文一平) 등 민족주의 사가들이 <조선학(朝鮮學)>이라는 개념을 정립하면서 시도한 데서 비롯된다. 그러나 실학이란 말은 17세기 실학파가 등장하기 이전부터 유학자들 사이에서 수 없이 사용되어 왔다. 원래 그 말은 유학자들이 불교나 도교를 허(虛)·공(空)을 숭상하는 학문으로 규정하고 유교의 현실적 실천정신을 표방하여 스스로 실학이라 강조함으로써 제시된 것이었다. 그러므로 고려 말 조선 초의 성리학자들이 말하는 실학은 불교·도교를 배척하기 위한 성격이 강하다. 이에 반해 조선 후기 실학은 불교나 도교의 폐단뿐 아니라 주자학의 공리공담적(空理空談的) 폐단을 반대하고 나라를 부유하게 하고 백성을 넉넉하게 하는 부국유민을 목적으로 하는 실용학문이었으므로 사회·경제적인 성격이 짙었다. 유학은 원래 이론과 실천의 양면성을 동시에 갖고 있으므로, 철학적·이론적인 방면으로 전개될 수 있고 또한 실용주의적인 방면으로 발휘될 수도 있다. 그러므로 성리학이 유학사상을 철학적으로 전개시킨 것이라고 한다면, 조선 후기의 실학은 현실 중시적 입장에서 실용과 공리(功利)를 중시하는 경세치용의 유학이라고 할 수 있다. 이처럼 17세기에 발생·발전한 실학은 학문의 내용으로서 실용지학과 학문하는 방법으로서 실사구시를 의미하며, 이런 점에서 종래의 학파들과 구별된다. 그러나 실학사상이 단순히 물질위주의 실용주의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홍대용(洪大容)은 《담헌서(湛軒書)》 <오팽문답(吳彭問答)>에서 학문을 의리(義理)의 학문, 경제(經濟)의 학문, 사장(詞章)의 학문으로 구분하고 의리의 학문을 근본으로 삼으면서도 3가지가 모두 보완적인 관계에 있다고 하였다. 이로써 볼 때 청대 실학이 성리학에 대한 반발에서 출발했다고 한다면, 조선 후기의 실학은 무조건 성리학을 배척, 거부하였다기보다는 철학적으로 성리학의 체계를 계승하면서도 성리학의 한계성을 인식하고 이를 극복하려는 데서 출발하였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청대 실학이 경서(經書) 고증에 치중한 데 반해 조선 후기 실학은 성리학·양명학·고증학 등을 연구대상으로 하는 다양한 사상적 경향을 보이고 있는 점이 특색이다.
사상의 유형과 특성
조선 후기 실학은 대체로 이이(李珥)로부터 서단(緖端)이 열렸고, 이어 한백겸(韓百謙)·이수광·김육(金堉) 등을 거쳐 유형원(柳馨遠)에 이르러 학(學)으로서의 성격을 이루었으며, 이익(李瀷)에 이르러 학파로서의 존재가 확인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18세기 중엽에 학풍이 형성되었고, 개항을 계기로 하여 개화사상으로 전환되었다는데 대체로 의견이 일치하고 있다. 실학의 유형을 구분하는 기준으로는 인적 계보(人的系譜) 중심의 분류법과 지역성(地域性)을 기준으로 한 분류법, 그리고 추구하는 바의 지표(指標)를 기준으로 한 분류법 등이 있는데, 이것을 종합하면 다음과 같이 3가지 시기로 구분해서 유형화할 수 있다. 즉, 조선 후기 실학은 18세기 이후의 사상으로서 제 1 기(18세기 전반) 경세치용학파, 제 2 기(18세기 후반) 이용후생학파(利用厚生學派), 제 3 기(19세기 전반) 실사구시학파로 나눌 수 있는데, 경세치용학파는 이익을 대종(大宗)으로 하여 토지제도 및 행정기구와 기타 제도상의 개혁에 치중하는 학파이고, 이용후생학파는 박지원(朴趾源)을 중심으로 하여 상공업의 유통 및 생산기술면의 혁신을 지표로 삼는 학파이며, 실사구시학파는 김정희(金正喜)에 이르러 일가를 이루고 경서 및 금석(金石)·전고(典故)의 고증을 위주로 하는 학파이다. 실학을 하나의 학문으로 정립시킨 유형원은 성리학에 대해서 확고한 견해를 가지고 있을 뿐 아니라 이를 토대로 《반계수록(磻溪隨錄)》을 저술하여 국가제도 전반에 걸쳐 개혁안을 제기하였는데 그의 개혁론은 이이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그러나 이이가 경장기(更張期)에 당면문제를 중심으로 시폐(時弊)의 개혁에 치중하였다면, 유형원은 국가체제의 전면적이고 근본적인 개혁을 주장하고 있다는 점에서 실학자로서의 뚜렷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실학을 학파로 성립시킨 이익은 근기학파(近畿學派) 또는 성호학파(星湖學派)의 개조로서, 성리학에 대한 깊은 조예를 보이고 있을 뿐 아니라 청나라를 통해서 들어온 서구의 자연과학 및 가톨릭 사상을 비판적으로 흡수하여 천문·지리·역사·제도·풍속·군사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한 문제를 다룬 《성호사설(星湖僿說)》을 저술, 그의 개혁론을 피력하였다. 한편 그의 서학에 대한 종교적 관심과 태도에 따라 그의 학파 내에서 공서파(攻西派;星湖右派)와 신서파(信西派;星湖左派)로 나누어지게 되었는데, 신후담(愼後聃)·안정복(安鼎福) 등 공서파는 서양의 과학사상은 대체로 수용하면서도 가톨릭 교리에 대해서는 비판적이었으며, 이에 반하여 권철신(權哲身)·이가환(李家煥)·이벽(李蘗) 등 신서파는 서양과학뿐 아니라 가톨릭 교리에 대해서도 수용하는 적극적인 입장을 취하였다. 북학파(北學派)라고도 불렸던 이용후생학파는, 성호학파가 주로 권력에서 소외된 남인(南人) 계층으로 농촌의 분위기에서 성장한 데 반해, 당시 지배계층인 노론(老論) 계열에 속하였으며 서울 주위의 도시적 분위기에서 성장하였다고 할 수 있다. 이들은 연행(燕行)을 통해 청조의 선진문물을 직접 눈으로 보고, 이를 적극적으로 도입하자는 북학을 주창하였다. 그리고 당시 도학파가 숭명배청(崇明排淸)과 춘추대의(春秋大義)에 입각, 북벌론(北伐論)을 주장한 데 대해 백성에게 아무런 실질적 이득이 없는 지배층의 공론이라고 비판하였다. 또한 이들은 상공업의 발달과 산업기술의 혁신을 중시하여, 이를 천시했던 양반층의 생리와 관념을 타파하고자 하였다. 이러한 실학사상은 19세기 초반 정약용(丁若鏞)에 의해서 집대성되었다. 정약용은 유형원·이익의 학풍을 계승하였으며, 북학파 인물들과 직접·간접으로 교유하면서 북학을 섭취하였다. 이와 아울러 청조의 고증학의 방법론을 비판적으로 수용하여 육경사서(六經四書)의 연구에 활용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조선 후기의 실학은 19세기에 접어들면서 세력이 크게 위축되었다. 이익의 후계자들이 가톨릭 신봉문제로 몇 차례에 걸쳐 제거당하고, 박지원 일계(一系)의 학파도 문체반정(文體反正)이라는 죄명 아래 탄압을 받게 됨으로써, 제 3 기에 접어들어 성격상 큰 변화를 나타냈다. 즉 경세치용과 이용후생의 주장이 퇴보하고 대신 금석·전고 등의 실증을 통해 경사(經史)의 진의를 밝히는 실사구시론이 등장하였던 것이다. 실사구시학파의 특색은 학문 그 자체를 목적으로 하고 엄격한 객관적 태도에 기초하여 사실을 밝히는 데 있었으므로, 자기의 이념이나 신념에 따라 경전을 주관적으로 해석한 이전의 실학자들과는 달리, 학문하는 방법에서는 근대적·과학적인 연구태도를 부식(扶植)하는 데 큰 공적을 남겼으며, 격조 높은 학문성을 보였다. 그러나 실사구시파의 거장(巨匠)인 김정희의 경학연구는 단편적인 부분에 머물러 체계화되지 못하였으며, 일부의 아류(亞流)들은 장전(長箋)·산고(散稿) 등 백과전서적 지식을 과시하며 잡다한 나열과 지리한 변증(辨證)으로 시종하기도 하였다. 따라서 실학의 사상성이나 사회개혁의 의지가 이전에 비해 쇠퇴하였다. 조선 후기에 와서 실학은 제각기 지표나 연구분야를 달리하였으나, 그 이념과 정신에서는 서로 공통점이 있었다. 첫째, 실용정신이다. 기존의 주자학파가 등한시하였던 이용·후생 문제에 관심을 보임으로써 현실사회와 유리되지 않는 학문관·현실관을 전개하였다. 둘째, 실증정신이다. 성리학의 형이상학적 관념론에서 벗어나 객관적인 현실문제를 실증을 통해 고찰하였으며, 경서고증뿐 아니라 역사·지리·제도 등에 이르기까지 학문하는 방법에서는 근대적·과학적인 연구 태도를 지녔다. 셋째, 비판정신이다. 주자학의 전통적인 권위에서 탈피하여 자유로운 학문탐구를 존중하고, 주자학파의 학문적 폐쇄성이나 현실사회의 모순에 대한 과감한 비판과 새로운 개혁론을 제기하였다. 넷째, 개방정신이다. 종래의 주자학 일변도에서 양명학·고증학뿐 아니라 불교·노장사상(老莊思想) 및 서학에 이르기까지 폭넓은 학문적 관심과 함께 선진문물을 적극 수용하고자 하였다.
조선 후기 실학은 대체로 이이(李珥)로부터 서단(緖端)이 열렸고, 이어 한백겸(韓百謙)·이수광·김육(金堉) 등을 거쳐 유형원(柳馨遠)에 이르러 학(學)으로서의 성격을 이루었으며, 이익(李瀷)에 이르러 학파로서의 존재가 확인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18세기 중엽에 학풍이 형성되었고, 개항을 계기로 하여 개화사상으로 전환되었다는데 대체로 의견이 일치하고 있다. 실학의 유형을 구분하는 기준으로는 인적 계보(人的系譜) 중심의 분류법과 지역성(地域性)을 기준으로 한 분류법, 그리고 추구하는 바의 지표(指標)를 기준으로 한 분류법 등이 있는데, 이것을 종합하면 다음과 같이 3가지 시기로 구분해서 유형화할 수 있다. 즉, 조선 후기 실학은 18세기 이후의 사상으로서 제 1 기(18세기 전반) 경세치용학파, 제 2 기(18세기 후반) 이용후생학파(利用厚生學派), 제 3 기(19세기 전반) 실사구시학파로 나눌 수 있는데, 경세치용학파는 이익을 대종(大宗)으로 하여 토지제도 및 행정기구와 기타 제도상의 개혁에 치중하는 학파이고, 이용후생학파는 박지원(朴趾源)을 중심으로 하여 상공업의 유통 및 생산기술면의 혁신을 지표로 삼는 학파이며, 실사구시학파는 김정희(金正喜)에 이르러 일가를 이루고 경서 및 금석(金石)·전고(典故)의 고증을 위주로 하는 학파이다. 실학을 하나의 학문으로 정립시킨 유형원은 성리학에 대해서 확고한 견해를 가지고 있을 뿐 아니라 이를 토대로 《반계수록(磻溪隨錄)》을 저술하여 국가제도 전반에 걸쳐 개혁안을 제기하였는데 그의 개혁론은 이이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그러나 이이가 경장기(更張期)에 당면문제를 중심으로 시폐(時弊)의 개혁에 치중하였다면, 유형원은 국가체제의 전면적이고 근본적인 개혁을 주장하고 있다는 점에서 실학자로서의 뚜렷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실학을 학파로 성립시킨 이익은 근기학파(近畿學派) 또는 성호학파(星湖學派)의 개조로서, 성리학에 대한 깊은 조예를 보이고 있을 뿐 아니라 청나라를 통해서 들어온 서구의 자연과학 및 가톨릭 사상을 비판적으로 흡수하여 천문·지리·역사·제도·풍속·군사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한 문제를 다룬 《성호사설(星湖僿說)》을 저술, 그의 개혁론을 피력하였다. 한편 그의 서학에 대한 종교적 관심과 태도에 따라 그의 학파 내에서 공서파(攻西派;星湖右派)와 신서파(信西派;星湖左派)로 나누어지게 되었는데, 신후담(愼後聃)·안정복(安鼎福) 등 공서파는 서양의 과학사상은 대체로 수용하면서도 가톨릭 교리에 대해서는 비판적이었으며, 이에 반하여 권철신(權哲身)·이가환(李家煥)·이벽(李蘗) 등 신서파는 서양과학뿐 아니라 가톨릭 교리에 대해서도 수용하는 적극적인 입장을 취하였다. 북학파(北學派)라고도 불렸던 이용후생학파는, 성호학파가 주로 권력에서 소외된 남인(南人) 계층으로 농촌의 분위기에서 성장한 데 반해, 당시 지배계층인 노론(老論) 계열에 속하였으며 서울 주위의 도시적 분위기에서 성장하였다고 할 수 있다. 이들은 연행(燕行)을 통해 청조의 선진문물을 직접 눈으로 보고, 이를 적극적으로 도입하자는 북학을 주창하였다. 그리고 당시 도학파가 숭명배청(崇明排淸)과 춘추대의(春秋大義)에 입각, 북벌론(北伐論)을 주장한 데 대해 백성에게 아무런 실질적 이득이 없는 지배층의 공론이라고 비판하였다. 또한 이들은 상공업의 발달과 산업기술의 혁신을 중시하여, 이를 천시했던 양반층의 생리와 관념을 타파하고자 하였다. 이러한 실학사상은 19세기 초반 정약용(丁若鏞)에 의해서 집대성되었다. 정약용은 유형원·이익의 학풍을 계승하였으며, 북학파 인물들과 직접·간접으로 교유하면서 북학을 섭취하였다. 이와 아울러 청조의 고증학의 방법론을 비판적으로 수용하여 육경사서(六經四書)의 연구에 활용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조선 후기의 실학은 19세기에 접어들면서 세력이 크게 위축되었다. 이익의 후계자들이 가톨릭 신봉문제로 몇 차례에 걸쳐 제거당하고, 박지원 일계(一系)의 학파도 문체반정(文體反正)이라는 죄명 아래 탄압을 받게 됨으로써, 제 3 기에 접어들어 성격상 큰 변화를 나타냈다. 즉 경세치용과 이용후생의 주장이 퇴보하고 대신 금석·전고 등의 실증을 통해 경사(經史)의 진의를 밝히는 실사구시론이 등장하였던 것이다. 실사구시학파의 특색은 학문 그 자체를 목적으로 하고 엄격한 객관적 태도에 기초하여 사실을 밝히는 데 있었으므로, 자기의 이념이나 신념에 따라 경전을 주관적으로 해석한 이전의 실학자들과는 달리, 학문하는 방법에서는 근대적·과학적인 연구태도를 부식(扶植)하는 데 큰 공적을 남겼으며, 격조 높은 학문성을 보였다. 그러나 실사구시파의 거장(巨匠)인 김정희의 경학연구는 단편적인 부분에 머물러 체계화되지 못하였으며, 일부의 아류(亞流)들은 장전(長箋)·산고(散稿) 등 백과전서적 지식을 과시하며 잡다한 나열과 지리한 변증(辨證)으로 시종하기도 하였다. 따라서 실학의 사상성이나 사회개혁의 의지가 이전에 비해 쇠퇴하였다. 조선 후기에 와서 실학은 제각기 지표나 연구분야를 달리하였으나, 그 이념과 정신에서는 서로 공통점이 있었다. 첫째, 실용정신이다. 기존의 주자학파가 등한시하였던 이용·후생 문제에 관심을 보임으로써 현실사회와 유리되지 않는 학문관·현실관을 전개하였다. 둘째, 실증정신이다. 성리학의 형이상학적 관념론에서 벗어나 객관적인 현실문제를 실증을 통해 고찰하였으며, 경서고증뿐 아니라 역사·지리·제도 등에 이르기까지 학문하는 방법에서는 근대적·과학적인 연구 태도를 지녔다. 셋째, 비판정신이다. 주자학의 전통적인 권위에서 탈피하여 자유로운 학문탐구를 존중하고, 주자학파의 학문적 폐쇄성이나 현실사회의 모순에 대한 과감한 비판과 새로운 개혁론을 제기하였다. 넷째, 개방정신이다. 종래의 주자학 일변도에서 양명학·고증학뿐 아니라 불교·노장사상(老莊思想) 및 서학에 이르기까지 폭넓은 학문적 관심과 함께 선진문물을 적극 수용하고자 하였다.
위의 학자들은 형이하학적인 측면에 힘쓴점에서 볼때 실학이라 할수는 있으나. 학맥과 사상간의 유사성이라는 면에서 보면 상당히 궤를 달리한다고 볼수 있다. 박지원과 홍대용이 친구고. 그 둘과 함께 박제가 이덕무 이수광과 함께 사상을 공유하였으며. 무예도보통지를 편찬한 백동수도 그들과 어울렸다. 반대로 정약용은 이익의 영향을 많이 받은 학자인데. 박제가나 이덕무 등과 같이 규장각에서 근무한것을 보면 사상적인 영향을 배제할수는 없으나, 정약용의 경우에는 그들보다 오히려 서학의 영향(신자가 아니라.)도 눈에 띈다. 흔히 정약용을 실학의 집대성자라고는 한다. 이익의 중농학파와 박제가 등의 중상학파의 주장을 수용하여 자신의 견해를 완성하였다. 정약용의 경우에는 최한기와는 다르게 경학을 중심으로 하여 기존의 주자학과는 다른 측면의 경학을 완성시켰다. 저기서 이규경은 최한기와 친구였다고 하며. 사상간의 유사성은 깊게 보이지는 않는것 같다. 그리고 최한기는 김정호와의 교분으로도 알려져있다. -가영
-보충할 부분이나 견해 있으면 수정해주시길 부탁드립니다. -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