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누군가를 때렸다면 나도 언젠가 누구에게 맞게 되어 있다. 이것이 인과의법칙이다. 하지만 내 왼손이 내 오른손을 때렸을 때의 인과는 어떻게 되는가? 여기에 인과가 있을까? 상식적으로 생각해 볼 때 이런데 인과가 있다면 정말 웃긴 일 아닌가? 내가 소홀히 한 내 몸의 일부분이 언젠가 나에게 복수하기 위해서 찾아온다고 생각해 보라. 여기에는 인과의 법칙이 적용되지 않는다고 보는 것이 더 논리적으로 적합할 것이다. 모두 "나"에 속하는 일부분이므로...
맹자 양혜왕장구 상에는 仁者는 無敵이란 말이 나온다.가장 강하기 때문이 아니라, 깨달은 자의 의식에서는 나와 내가 아닌 것의 구별이 없기 때문이다. 그의 자아는 아트만이 아니라 브라흐만이다. 그가 고기를 먹건 살인을 하건 karma 는 없다. 자연이 자연을 벌주는 법이 있는가?
좀 더 금기시되어 있는 대담한 질문이 준비되어 있다. 내가 나를 죽였을 때 인과가 있는가? 깨달은 자에게는 물론 인과가 없다. 실제로 깨달은 자들은 거의 "자살"한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몸을 버려야 할 때가 되면 스스로 몸을 버린다. 하지만 깨닫지 못한 사람에게는?
Q 실제로 깨달은 자들 중에 '자살'한 사람은 누군가요?
A 질문에 대한 답은 거의 모든 깨달은 자입니다.
A 질문에 대한 답은 거의 모든 깨달은 자입니다.
"요가난다 Autobiography of a Yogi" - 정신세계사 에 보면 파라마한사 요가난다의 스승인 스리 유크테스와 기리의 죽음에 대한 부분이 있습니다. 여기서는 우주와의 합일 의식 단계인 "니르비칼파" 사마디에 든 상태에서 죽지 않으면 "깨달은 영계"라는 뜻의 "히라냘로카" 라는 차원에 들어갈 수 없다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 이론에 따르면 인과의법칙에는 또 하나의 변수가 있는 셈입니다. 원인과 결과 뿐 아니라, 죽음이라는 상황에서의 의식의 단계에 따라 죽은 후에 가게 되는 차원이 불연속적으로 정해진다는 것입니다. 카르마 가 없어지는 건 아니지만 어떤 차원으로 가는가에 따라서 카르마를 어떻게 받는가 하는 것들은 많이 달라질 수 있을 겁니다. 죽을 때의 자세를 강조하는 건 모든 종교에서 동일한데, 같은 이유 때문이라고 생각됩니다. 심지어 기독교에서는 인과의법칙보다 죽을 때의 "회개"를 더 우선으로 놓고 있죠.
따라서 이 이론에 의하면, 깨달은 사람은 반드시 삼매에 든 상태에서 죽어야 합니다. 그렇지 못하면 "客死"가 되죠.
방한암 스님은 돌아가실 때 시자들에게 손가락을 꼽아 세며 말하기를 '오늘이 신묘(辛卯) 이월 십사 일이지?' 하시고 사시(巳時)에 좌탈하셨다고 합니다.
방한암 스님의 제자이신 탄허스님도 돌아가실 때 지금이 몇시냐고 주위 사람들에게 물으시고 대답을 듣고 나자 스스로 숨을 모으시더랍니다.
파라마한사 요가난다의 마하사마디에 들기 한시간 전에 촬영한 사진입니다.
방한암 스님의 제자이신 탄허스님도 돌아가실 때 지금이 몇시냐고 주위 사람들에게 물으시고 대답을 듣고 나자 스스로 숨을 모으시더랍니다.
파라마한사 요가난다의 마하사마디에 들기 한시간 전에 촬영한 사진입니다.
이런 예는 많이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앉아서 돌아가시거나, 스스로 숨을 참아서 (일반적으로 보면 질식사가 되겠죠. ^^) 돌아가시거나, 죽기 한시간 전에 저런 미소를 보일 수 있다는 건 모두 스스로 떠난 것이라고 밖에 생각하기 힘듭니다.
현재, 조선왕조의 종손께서는 밤무대가수를 하시고 계신답니다. 밤무대 가수가 나쁘다는 것은 아니고요. 조선왕조 500년동안 재인(才人:광대, 사당패등을 재인이라고 합니다)을 박대한 인과를 받는 것이겠지요. 인과와 응보의 법칙은 한치의 어긋남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누구를 무시하고 누구를 높히는 자체가 반대의 인과를 만드는 것이 아닐까요. 노자의 나서지 않음(不敢天下之先)은 이러한 인과의 관점에서 보면 쉬울것 같습니다. 전생의 대재벌이 현세의 쓰레기청소부로 태어나 인과를 받는 것도 얼마나 잔혹한 일인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