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인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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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촬영을 위해 도미한지 사흘쯤 되던날, MGM 영화사의 케스팅 디렉터에게 연락이 왔습니다. 자신이 007 영화 제 20편의 케스팅 디렉터인데, 오디션을 볼수 있겠냐는 내용이었습니다.

가능하다는 답신을 했고, 곧 오디션을 위한 2 페이지 분량의 쪽지 대본이 왔습니다.

오디션을 하는 역은 문 대령이라는 북한 장교 역이었습니다. 며칠후 헐리웃에서 가장 유명한 제인 젠킨스라는 캐스팅 디렉터 앞에서 오디션과 카메라 테스트를 받았습니다. 제인 젠킨스는 옛날 영화 <아웃 사이더>에서 청춘스타들을 한꺼번에 캐스팅하는 바람에 능력을 인정받고, 현재까지 활동중인 사람이었고, 최근 에는 <히트>의 로버트 드니로, 알파치노, 발 킬머를 캐스팅하여 다시 한번 능력을 인정받은 유명한 할머니였습니다.

엘에이에서 제 운전을 해주고, 일을 도와주던 리차드라는 친구와 둘이 제인 젠킨스 사무실에 도착하여, 오디션을 보았습니다. 모든 동작 하나, 질문, 답 등은 카메라에 담겨졌고, 오디션이 끝난 후 바로 영국에 머물고 있는 바바라 브로클리(007 영화의 창시자 겸 제작자)와 리 타마호리 감독(007 20편의 감독)에게 보내질 거라고 했습니다. 제인젠킨스와 함께 오디션을 진행한 멕 윌리엄즈라는 캐스팅 관계자는 저 이외에 한국 배우들도 오디션을 할 계획인데 언어가 문제라면서, 개인적으로 제가 캐스팅이 되었으면 한다는 말을 했습니다.

오디션 중 저는 이번 영화가 북한을 소재로 한 영화이기 때문에 전체 대본을 본 뒤에야 출연결정을 할 수 있다고 했고, 제인은 당시 대본은 아직 완성이 안됐기 때문에, 그 누구도 대본을 가지고 있지 않다면서, 대신에 약 30분 가량에 걸쳐 줄거리를 이야기 해주었습니다. 줄거리만으로 확실히 알 수는 없었지만, 제인 젠킨스는 007 에 나오는 모든 인물은 특정 인물일뿐, 한반도의 상황과는 무관하다는 걸 강조했습니다.

오디션을 보고나서, 약 2주일후, 이번엔 이력서와 스틸사진, 그간 촬영한 데모 테입을 보내달라는 연락을 받았습니다. 데모테입은 준비된 것이 없어서, 아이언 팜 홍보용으로 찍은 사진 두장과 인터넷 까페에 가서 제가 만든 이력서를 보냈습니다.

그리고, 약 3주일 후, 바바라 브로클리에게로부터 이메일이 왔습니다. 리 타마호리 감독이 저를 007의 문 대령역으로 캐스팅 했다는 축하내용의 메일이었습니다. 연이어서, 이태리에 머물고 있는 007 의상팀으로부터, 전화 연락이 와 자세한 신체치수를 물어보았습니다. 그냥 가슴, 허리둘레 등을 재는 치수가 아닌, 손가락에서 손등까지의 길이, 손목 둘레, 빗장뼈 사이의 길이 등 약 100여군데의 치수를 재야 했습니다. 엘에이에 있는 한국 양복점에가서 10불을 주고 치수를 재어 보내주었습니다.

다음날, MGM 사로부터 계약을 해야 하니, 저의 에이젼트나 변호사를 만나게 해달라고 연락이 왔습니다. 문제였습니다. 미국 큰 영화의 계약서는 일반인들이 감당할 수 없을 만큼 방대하고, 자세한 내용을 다루고 있기에 에이젼트가 꼭 필요했습니다.

큰 영화의 출연계약서에서는 크게 세가지 문제를 다루게 됩니다. 첫째로, 샐러리 즉 출연료, 두번째로, 빌링 다시 말하면 영화 초기 자막이 올라갈때 나의 이름이 몇번째로 나오며, 단독으로 나올것인가, 아니면, 다른사람들과 묻혀서 나올 것인가 등의 크레딧 문제, 세번째로, 퍽스.. 이는 출연료 이외의 배우의 이름에 상응하는 대우문제. 예를 들면, 개인 트레일러의 크기는 얼마로 하며, 호텔은 무슨 호텔의 어떤 방으로 하고, 촬영기간 동안의 리무진, 개인 헬퍼, 비행기 항공권의 클래스, 가족들은 몇명까지 어떤 대우로 초청해줄 것인가 등의 문제.. 이렇게 세가지를 다루게 됩니다. 당연히 이곳 실정을 모르는 저로서는 혼자 감당할 수 없는 계약 내용이었습니다.

당시 크리스마스 시즌으로 접어 들어, 모든 큰 에이젼트 사들은 휴가를 떠났고, 저는 제 영화 아이언팜에 같이 출연 중인 찰리 천이라는 재미동포 배우에게 상의를 했습니다. 찰리는 기뻐하면서, 자신의 에이젼트인 토니 마르티네즈라는 사람을 소개해 주었습니다.

토니는 헐리웃에서 10년째 에이젼트를 하고 있었습니다만, 큰 영화사의 큰 배역을 두고는 아직 일을 해 본적이 없는 중간 레벨의 에이젼트였습니다. 찰리가 휴가 중인 토니에게 전화를 걸었을 때, 토니는 가족들과 함께 엘에이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 등산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007 영화에 주요배역으로 캐스팅 된 내 친구가 에이젼트를 찾고 있다고 찰리가 말을 하자, 바로 하산을 해서, 두시간을 달려 저를 만나러 왔습니다.

헐리웃의 관행에 따라 토니에게 출연료의 10 퍼센트를 지불하기로 약속을 하고, 구두로 에이젼트 계약을 했습니다.

일은 일사천리로 진행이 되었고, 이태리에서는 저의 의상 (군복과 잠수복등)을 제작하기 시작했습니다. 아이언팜 촬영중이던 어느날 오후, 토니에게서 연락이 왔습니다. 토니의 목소리는 상당히 들떠 있었습니다. 유럽에 머물고 있는 바바라 브로클리와 오전 내내 통화를 했고, 그들이 상당히 만족해 하고 있다는 것, 왠만한 요구조건을 모두 수용할테니 빨리 계약을 하자는 내용 등을 이야기했다고 합니다. 토니는 이 상황이라면 출연료로 50만불에서 많으면 100만불까지도 요구를 할수 있다면서 기뻐했습니다. 단 하나 마음에 걸렸던 점은 출연계약을 할 경우 1월중순부터 5월1일까지 석달 반동안 영국에 머물면서 풀 스케쥴을 그들에게 주어야 한다는 점이었습니다.

저는 토니에게 계약을 하기 전에 완성된 대본을 보아야만 결정할 수 있다는 이야기를 했고, 정확히 두 시간 후 제가 묵는 호텔에 007 20편의 대본이 도착을 했습니다.

대본은 고유번호를 가지고 있었고, 겉표지와 모든 페이지에 옅은 검정색으로 282 라는 숫자가 수도 없이 찍혀있었습니다. 이는 복사방지를 위한 것으로, 또한 대본의 내용이 경쟁사에 새나가는 걸 방지하기 위한 장치였습니다. 즉 제가 받은 대본은 007 20편의 대본 중 282번째에 해당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약 200 명이 넘는 스텝과 또 수많은 연기자들에 비해 대본을 상당히 적게 찍어낸다는 걸 알수 있었습니다. 그 역시 보안을 위한 장치인 것 같았습니다.

대본을 읽었습니다. 제가 맡은 문대령역은 007과 맡서 싸우는 북한의 (대본에 의하면) 멋있고, 잘생긴 유럽에서 교육을 받은, 그래서 영어를 유창하게 하는 엘리트 장교였습니다. 북한을 통치하고 있는 아버지 문장군이 평화를 사랑하는 반면, 아들 문대령은 힘으로 통일을 하고, 일본까지 점령하여 미국과 맡서 싸우겠다는 생각을 가진 인물이었습니다. 문대령의 부하들 중 한 사람으로 자오라는 인물이 있었고 , 이 역으로는 이미 릭윤씨가 캐스팅되었다는 이야기를 한국신문을 통해 알고 있었습니다.

역만 놓고 볼 때는 비록 악당이지만 비중있고, 매력있을 수 있는 역이었습니다. 영화 시작 약 20 여분과 끝 15분 정도에 007과 맡서 싸우는 만큼, 007을 제외하고는 가장 비중있는 역이었고, 문대령의 전투 장면도 스포츠카 전투, 비행물체를 이용한 공중전, 폭포에서 떨어지며 싸우는 수중전, 마지막에는 007과의 주먹싸움까지.. 다양한 볼거리를 제공하고 있었습니다.

여기까지만 놓고 보았을 때, 제 마음은 이미 영국으로 날아갔고, 전세계 스크린에 비춰질 저의 모습을 잠시나마 그리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대본을 한 장 한장 넘기면서, 한반도 상황과는 관계가 없다는 제인 젠킨스의 말은 거짓말이 되었고, 역시 헐리웃은 다시 한번 다른나라의 상황을 자신들의 오락거리로 이용하고 있었습니다. 특히 007 이 한국에 도착한 공항에, 또 비무장지대에.. 한국군의 모습은 하나도 보이질 않고, 미군들이 007을 맞아주었습니다. 대본상에서의 북한은 서방세계를 향해 테러를 일으킬 수 있는 가장 유력한 나라라는 점을 끊임없이 인식시켜주는 듯 했습니다.

그날 새벽 두시쯤 호텔방에서 출연포기를 결심했습니다. 여러가지 생각이 들더군요, 집사람이랑 정민이 생각, 홈식구들 생각, 그동안 살아오면서 저질렀던 실수들, 이런 저런 생각을 하다가 출연을 안하기로 결심을 했습니다.

다음날 아침, 토니에게 전화를 걸어 출연포기의사를 밝히고, 저 보고 미쳤다면서 펄펄 뛰는 토니의 목소리를 뒤로한 채, 전화를 끊었습니다.

대본이 싫어도, 제가 안해도 그들은 007 20편을 제작할 것입니다. 그리고, 20편의 주된 내용은 한반도를 소재로 한 가상상황이 될 것입니다. 007 대본의 문장군의 대사가 떠올랐습니다.

007 과 맞대면을 한 자리에서 "50년 전에 너네들이 멋대로 들어와서, 한반도를 두동강이로 잘라놓고, 지금에 와서 무엇을 우리에게 가르치려 하느냐"는 대사입니다. 007의 제작진들은 자신들의 대본에 써놓은 대사와 똑같은 상황을 만들고 있습니다.

결국 영화는 만들어지겠지만, 저는 그 영화를 안 볼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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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스모크덕에 신문과 방송에서 멀어진 윤구현은 소식을 너무 늦게 들었다. 인터넷을 뒤지면 사람들의 감상이 충분히 있으니 굳이 덧붙일 것은 없다. 이 소식을 듣고 눈물을 감추기 위해 비행기 창 밖을 바라보고 있었다는 한 정치인의 말이 가슴에 와 닿았다.
좋은 사람과 한 때를 같이 했다는 것만으로 기쁘다. see also 군대이야기

오늘 이 글을 다시 읽으니 어제 얘기들었던(장동건을 찍기 위해 영화관 두 곳을 사방팔방 뛰어다닌 친구가 있습니다 ^^;; 이 얘기는 스펙타클리얼리티대하극인데 -_-;; 끙..) 장동건, 나카무라 토오루의 '로스트 메모리즈' 생각이 납니다. 영화를 위해서, 재미있으려고,라는 목적 아래 역사나 정치상황에 대해서 한 나라나 민족을 맘대로 요리해놓고 '자의적 해석'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헐리웃만이 아니라 그 누구라도 가능합니다. - worry

착하고 건실한, 그러나 영화고르는 눈은 상당히 없는 듯한 배우 -- bloodlu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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