합리성에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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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합리성은 정의가 없다

라고 말하고 싶을 정도로 합리성은 이런 저런 Context에서 쓰인다. 철학적으로는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 잘 모르겠지만 경제학의 Context에서 합리성이란 말은 분명하다. 합리성=최적화니깐. 무엇을 위한 최적화인가? 자신의 효용도 될 수 있고 기업가라면 이익도 될 수 있다. 따라서 최적화 시켜주는 함수가 존재하고 그에 따라 최적화된 선택을 한다면 이를 두고 합리적이라고 한다.
왜 이렇게 합리서의 정의를 난데없이 꺼내는가?
어떤 사람의 글을 읽으면서 경제학의 입장에서 쓰여진 것을 난데없이 왜곡하는 듯한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의 글인데 복거일씨의 생각을 반박한 글이다. 솔직히 난 복거일씨의 글을 읽어본 적이 없기 때문에 위 글을 쓴 사람의 생각을 그대로 받아들일 수 밖에 없다. 그러나 그러는데도 불구하고 잘못된 생각인 것이 있는 것이다.

합리성을 손해와 이익 혹은 합당한 이유가 있다로 인식하는 관점은 상당히 보편적인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러나 경제학적인 합리성을 단순히 그 두가지 부면으로만 인식하려는 것은 또한 잘못된 인식이라고 볼 수 있다. 서두에서도 말했지만 어떤 함수를 최적화시켜주면 합리적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 함수가 '선택'에 관련된 것이라면. 그렇다면 합당한 이유를 가지고 소비를 한 것은 합리적 선택이며 기업가가 손해와 이익을 잘 따져서 선택한 것도 합리적 선택이고 투표권자가 자신에게 주어진 정보에 따라 - 대부분이 TV에서 보고 들은 것들- 투표를 하는 것도 합리적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복거일씨의 글에서 사용된 합리성은 저자가 생각하듯이 그다지 틀린 것이 아닐 수도 있다. 물론 복거일 씨가 이런 합리성의 정의를 생각하고 있다면.

이왕 말이 나온 김에 더 해보자. 계속 죽 내려가다보면 무노동 부분임금에 대하여 내린 판결이 맑스의 이론에 의한 것이 아니라는 주장이 나온다.그러나 내가 보기에는 저자의 주장은 잘못되었다. 저자는 경제학에서 노동 가치설이 갖는 의미를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 단순히 노동은 가치있다란는 의미로서 파악하는 것은 아마 철학적으로도 잘못된 관점일 것이다. 임금을 보는 관점은 전통 고전주의 경제학과 마르크스의 경제학이 완전히 다른 견해를 가지고 있다. 전통 고전주의는 임금이란 그야말로 생산성의 대가로 파악하고 있다. 즉 일해서 그게 돈이 되니까 돈을 받는다. 이런 개념이다. 그러나 마르크스는 다른 관점으로 보고 있다. 그는 임금이란 자본가들이 노동에 의한 생산물중에서 노동자들에게 살아갈 수 있을 만큼만 주는 것으로 보고 있다. 따라서 판사가 만일 그처럼 임금이 교환적 가치와 생활보장적 가치로 파악했다면 이는 마르크스의 관점을 택했다고 할 수 있는 충분한 이유가 있다. 물론 첨언하지만 현대 경제학의 노동이론에서는 기본적으로 전통 고전주의적 관점을 따르면서 여러 차별 그리고 비대칭적 정보하의 선택이라는 관점에서 보고 있으며 임금의 요소를 그러한 가치로 구분하고 있지는 않는다.어떤 판결인지 모르지만 현대 주류 경제학의 관점을 따르지 않고 있음은 확실하다.

또 죽 내려가다보면 보수주의자의 정부의 역할 즉 공공재에 관한 이야기가 나온다. 여기서 그는 보수주의자라면 공공재등을 제외하고는 정부가 시장에 개입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한다는 전제를 깔고 이야기하고 있다. 그런가? 경제학에서 정통 극 보수라면 시카고 스쿨을 들 수 있다. 그런데 그 사람들에게 물어보지 않아서 모르긴 해도 거래비용의 절감에 관한 정부의 역할은 인정한다. 시장에 정부가 개입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은 시장을 형성시키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저런 이야기를 죽 쓴 것 같다. 그러나 하나의 과점에서 쓰여진 글을 다른 관점에서 이해하려 하는 것은 상당히 위험한 일이다. 물론 성공하는 경우 상당히 새로운 접근을 이룰 수 있으며 새로운 길을 열수 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잘못 쓰여지는 경우 이 경우는 정말로 사기가 될 수 있다. 그래서 아마 수학이 가장 보편적인 학문의 베이스로 작용하는 것 같다. 왜냐하면 수학인 경우 못이해하는 경우는 있어도 잘못 이해하는 겨우는 드물기 때문이다.


복거일씨의 글을 비판한 분은 아마도 합리성과 이성의 개념을 혼용한데서 실수을 한듯 하다. 합리성이 대체로 경제학에서 사용되고 있는 의미의 개념이라면 이성은 도덕적, 심미적 판단을 포함하는 개념이다. 복거일씨는 단지 합리성을 주장하는데 그 개념이 '이성'개념과 다르다고 비판한 건 제대로된 비판이라고 보기 힘들다.

하지만 이미지에 근거를 둔 투표마저 합리적이라고 부를 수는 없다고 본다. 유권자들은 이미지에 근거한 선택은 자신에게 별 효용이 없음을 알고 있다. 그들(우리들)은 더 많은 정보를 찾아볼 수 있고 주어진 정보 중에서도 단지 호감을 사기위해 만들어진 이미지들은 버릴 수 있다. 비슷비슷한 후보들이라고 흔히들 비난하는데 그래도 충분히 식별할만한 차이가 있었다(정말 권영길과 이회창사이에 차이가 없었는가). 단지 자신의 능력을 쓰지 않았을 뿐이다. 활용할 수 있는 능력을 제대로 활용하지 못한 선택을 어떻게 합리적인 선택이라고 부를 수 있겠는가 물론 이놈이 되든 저놈이 되든 나하고는 별 상관이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사진발 잘 받는 사람을 선택할 수도 있겠지만, 그 경우에도 기권으로 자신의 반감을 표시하는 것이 더 합리적이지 않을까?
그렇지요, 이미지에 근거해서 투표하는 것은 비합리적인 행태의 전형으로 간주되고 있으며 학문적으로도 오랫동안 검증되어온 바 있습니다.

그리고 노동가치설의 경우 고전 경제학과 맑스는 많은 차이가 있지만 노동에서 가치가 형성된다는 동일한 인식을 공유하고 있었다. 부르주아 정치경제학자로서 아담 스미스는 그들이 보기엔 놀고먹는 귀족계급을 노동가치설로 공격한 것이다. 푸코를 따라 말하자면 그들은 노동 인식에 관한한 같은 에피스테메 위에 있다. 이 부분에 있어 선은 고전 경제학과 '현대 주류경제학'사이에 그어지는 것이 아닐까?
--그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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