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상꿈그리고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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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BN-8930303730]

칼융의 회상록. 아니엘라 야훼 述, 이부영 譯.

이 책은 처음에 칼융의 전기를 쓰는 형태로 시작되었다가, 중간에 칼융 자신이 말을 하는 "자서전" 의 형태로 변경되었다. 더욱 결정적 전기는 칼융과 아니엘라 야훼의 공동작업 중, 칼융이 자신의 어린 시절에 관해서 직접 집필하고자 하는 의사를 밝히면서부터이다. 칼융은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나에 관한 책은 언제나 하나의 숙명적인 사건이다. 거기에는 무언가 예기치 않은 것이 있다. 나는 아무것도 나에게 어떻게 쓰도록 지시하거나 미리 계획할 수가 없다. 자서전은 이미 내가 처음 예상한 것과는 다른 길을 취하고 있다. 내가 나의 어린 시절의 추억을 적어내려가는 것은 나에게는 필요 불가결의 것이 되었다. 하루라도 내가 그것을 중단하면 금세 불쾌한 신체증상이 생긴다. 내가 그것에 관해 일하기 시작하자마자 그런 증상은 없어지고 머리가 맑아진다.

융은 <소년시절>, <학창시절>, <대학시절>에 관한 세 개의 장을 썼으며, <만년의 사상>이란 장도 직접 썼다.

제1장 프롤로그


나의 생애는 무의식이 그 자신을 실현한 역사이다. 무의식에 있는 모든 것은 사건이 되고 밖의 현상으로 나타나며, 인격 또한 그 무의식적인 여러 조건에 근거하여 발전하며 스스로를 전체로서 체험하게 된다. 이러한 형성의 과정을 묘사함에 있어 나는 과학적인 언어를 사용할 수 없다. 왜냐하면 나는 나 자신의 과학의 문제로서 경험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내적인 견지에서 본 우리들의 존재, 인간이 그 영원히 본질적인 성질에서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 그것은 오직 신화로써 묘사될 수 있다. 신화는 보다 개성적이며, 과학보다도 더욱 정확하게 삶을 묘사한다. 과학은 평균개념을 가지고 작업을 하는데, 이것은 너무 일반적이어서 한 개인의 특유한 인생이 지니고 있는 주관적인 다양성을 올바르게 파악하기 어렵다.

그리하여 나는 이제 여든 세 살의 나이에서 나의 인생의 신화를 이야기하기 위하여 이 작업을 맡았다. 그러나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다만 직접 확인한 바를 말하는 것, 다시 말해서 "지나온 이야기를 하는 것" 뿐이다. 그 이야기가 진실이냐 아니냐는 아무런 문제가 안된다. 문제는 다만 그것이 나의 "옛이야기"냐, 나의 진실이냐 하는 것이다.

자서전을 쓰는데 어려운 일은 판단할 근거가 되는 객관적인 평가기준을 갖지 못한다는 데 있다. 여기에는 적절하게 비교할 만한 것이 없다. 나는 내가 여러 가지로 남들과 다르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나는 내가 진실로 어떤 사람인지 모른다. 인간은 무엇으로도 비교가 안된다. 그는 원숭이도 아니고 젖소도 아니고 나무도 아니다. 나는 사람이다. 그러나 그것은 무엇인가? 다른 모든 존재와 마찬가지로 나도 끝없는 神性에서 떨어져 나온 존재이다. 그러나 나는 어떤 짐승과도, 어떤 식물과 어떤 돌과도 대질시킬 수가 없다. 오직 신화적 실재만이 인간을 넘어선다. 그러니 어떻게 사람이 자산에 관해 어떤 결정적인 의견을 가질 수 있겠는가.

인간은 하나의 정신적 과정이다. 인간은 그 과정을 지배하지 못한다. 지배한다고 하더라도 부분적으로 지배할 수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인간은 자신이나 자신의 인생에 대하여 아무런 최종적인 판단을 내릴 수가 없다. 그럴 수 있다면 우리는 우리에 관한 모든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사람은 고작해야 그런 종국적인 판단을 할 수 있다고 상상할 따름이다. 궁극적으로 우리는 어떻게 모든 것이 일어나게 되었는지 결코 알지 못한다. 한사람의 인생의 역사는 그 사람이 기억할 수 있는 바로 그 지점에서 시작되는데, 벌써 여기에 고도로 복잡한 문제가 얽혀 있다. 인생이 어떻게 되어 나갈 것인지 우리는 모른다. 그러므로 지나온 이야기는 시작이 없고 그 목표는 그저 막연하게 제시될 수 있을 뿐이다.

인생이란 하나의 어설픈 실험이다. 그것은 다만 숫자상으로만 거창한 현상이다. 그것은 너무나 일시적이고 불충분하며 무엇이 존재할 수 있고 발전할 수 잇다는 것만으로도 바로 기적이라고 할 것이다. 나는 이미 젊은 의학도일 때 이 사실을 절감하였다. 내가 조기에 파괴되지 않는 것만도 기적인 듯 싶다.

나는 인생이 자신의 뿌리를 통해서 살아가는 식물과 같다고 생각해 왔다. 식물 고유의 삶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 그것은 뿌리에 숨어있다. 땅위에서 보이는 것은 오직 여름동안만 지탱한다. 그리고는 말라 버린다. 하루살이 같은 현상이다. 우리가 우리의 삶과 문화의 끝없는 생성과 소멸을 생각하면 전적으로 공허한 인상을 얻게 된다. 그러나 나는 영원한 변환 속에서도 살아서 지속되는 어떤 것이 있다는 느낌을 한번도 잃은 적이 없다. 우리가 보는 것은 꽃이다. 꽃은 사라진다. 그러나 뿌리는 계속된다.

사실 내게 이야기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불멸의 무한한 세계가 유한한 세계 속으로 뛰어든 사건들 뿐이다. 그러므로 나는 여기서 주로 내적인 체험들을 이야기하고자 한다. 나의 꿈과 명상들이 이에 속한다. 그것은 동시에 나의 과학적인 작업의 원료를 이루고 있다. 그것은 마치 거기서 앞으로 형성될 연금술사의 돌이 응결될, 불을 뿜는 액체인 현무암과 같은 것이었다.

여행, 인간, 환경 같은 것에 관한 다른 추억들은 내적인 사건 앞에서 모두 빛을 잃고 만다. 시대적 역사는 많은 사람이 겪었고 그것에 관해 글을 썼다. 그런 서적을 읽든지 거기 관해 다른 사람에게 이야기하라고 하면 될 것이다. 나의 인생의 외부적인 사실들에 관한 추억은 대부분 퇴색했고 소멸되었다. 그러나 다른 현실과의 만남, 무의식과의 부딪힘은 나의 기억 속에 잊혀질 수 없는 인각을 남겼다. 거기 언제나 풍성함과 충족함이 있었다. 그리고 다른 모든 것은 그 뒤로 밀려나고 마는 것이었다.

이리하여 또한 많은 사람들이 오직 나의 운명의 목록 속에 이미 오래전부터 등록되어 있었다는 상황으로 인하여 잃어버릴 수 없는 추억이 되었고 그들과의 知面은 동시에 하나의 기억의 상기와 같은 것이었다.

또한 젊은 날에, 또는 그뒤에 밖에서부터 나에게 다가와 의미를 갖게 된 것들도 이미 나의 내적인 체험의 인각 속에 들어 있던 것이었다. 나는 상당히 일찍부터 삶의 복잡한 문제에 당면하여 안으로부터 아무런 해답이나 아무런 해결책이 나오지 않으면 결국 그런 문제들은 별 의미가 없는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밖의 상황이 안의 상황을 대치할 수 없다. 그러므로 내 인생은 외부 사건의 면에서는 빈곤하다. 나는 거기 관해 많이 이야기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그것만 말하면 공허하며 본질을 잃은 것 같이 느낄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오직 내적인 현상을 통해서 나 자신을 이해할 수 있을 뿐이다. 그것이 나의 인생의 특이성을 이루며 나의 <자서전> 은 그런 내적인 현상을 다루고 있다.


이 책을 읽지 않은 상황에서 칼융의 사상에 대해서 논한다는 것은 무의미하다. 같은 논리로 프로이드의 자서전을 읽지 않은 상황에서 프로이드의 사상을 논한다는 것도 무의미하다. 가능하면 프로이드의 자서전을 먼저 읽은 후 이 책을 읽는 것이 좋다고 본다.

프로이드와 칼융의 삶을 지상은는 다음과 같은 말로 요약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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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이드는 과학자였고, 칼융은 구도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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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서전을 안 보면, 이해할 수 없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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