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 구스타프 융의 회상록 회상꿈그리고사상 의 프롤로그는 이렇게 시작된다.
나의 생애는 무의식이 그 자신을 실현한 역사이다.
융의 사상들의 색다른 점 중의 하나는 어떠한 특별한 계시같은 꿈이나 사건을 배경으로 탄생된 것이 많다는 것이다. 대표적인 하나의 예는 <죽은 자를 향한 일곱가지 설법> http://www.theology.co.kr/article/sermon.html 이다.
내 속에서 하나의 변화가 무척 느리게 그 윤곽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중략... 그렇게 하여 <죽은 자를 향한 일곱가지 설법> 이 특이한 언어를 지니고 나오게 된 것이다.
이런 작업은 마음의 불안정을 동반했다. 그 불안은 내 마음속에 있었으나 나는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알지 못했다. 혹은 사람들이 나에게 무엇을 원하는지를 몰랐다. 나의 주변에는 이상하게 긴장된 분위기가 감돌았다. 그리고 나는 마치 공기가 유령 같은 실체로 가득찬 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러자 집안에 유령이 나오기 시작했다... 중략 ... 온집안이 많은 무리들로 가득차 있었다. 빽빽히 귀신들로 차 있었다. 그들은 문 아래까지 서 있어서 우린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물론 화급한 의문이 내 속에서 생겼다. '도대체 이게 웬일인가?' 그러자 그들은 합창으로 크게 외쳤다. "우리는 우리가 찾던 것을 거기서 못 찾은채 예루살렘에서 돌아왔다." 이 말은 <죽은 자를 향한 일곱가지 설법>의 첫 구절에 해당된다.
그러자 내 마음 속에서 상념들이 솟아나오기 시작했다. 사흘 저녁 동안에 나는 그것을 모두 적어내렸다. 내가 펜대를 쥐자마자 모든 귀신의 무리는 사라지고 말았다. 유령 사건은 끝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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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앗으로서의 인간 ¶
칼 구스타프 융은, 어떤 의미에서 과학자라기보다는 문학가나, 신비주의 사상가에 더 가까운 면모가 있다. 다르게 말하자면 융은 심혼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분석적인 방법으로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미리 인식하고 있었던 것에 가깝다.
융은, '우리의 미래가 우리의 현재를' 결정하는 경우도 있다고 말한다. 일견 신비주의처럼 들리는 이 발언은, 그러나 현실적인 인식의전환이다. 다른 정신분석학자들, 이를 테면 프로이트는 우리의 과거(경험)가 우리를 결정한다는 것에 초점이 가 있다. 과거의 경험, 과거의 발언 등이 사라지지 않고 남아 있다가 우리의 현재를 규정하거나, 영향을 미치는 것이다. 따라서 그것들을 분석하고 변화시키면 현재를 이해하고 변화시킬수 있다. 이것이 마음(과 무의식)에 대한 프로이드적인 견해이라면. 융에게 있어서 사람의 심혼은 하나의 씨앗과 같은 존재이다.
씨앗속에는 나무가 되려는 모든 모습이 들어 있다. 마찬가지로 인간의 심혼 역시 무엇인가 되려고 하고 무엇인가로 나아가고 있다. 따라서 현재의 현상(마음, 병리적 현상, 바램 등)은 우리의 미래를 위한, 미래에서 유래된 것들 또한 존재하고 있다. 이 차이점은 곧 결정론적 대상으로서 인간을 보느냐, 그렇지 않은 어떤 존재로 보느냐의 문제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융에 있어서 심혼은 단순한 분석의 대상이 아니다. 심혼은 어디론가 성장하고 있는 마음이나 자아 이상의 위대한 존재이다. 융은 귀를 열고 심혼으로 부터 들려오는 소리를 들으려고 한다. 그 소리를 듣고, 자라나고, 심혼이 자기(self)를 이루어가게, 현재의 인간에게 필요한 것을 배우고, 더 성장하게 하려는 것이 융과 융 학파의 방법들이다. 따라서 그들은 분석과 이해, 과정의 설명을 목적으로 하는 정신분석학의 범주를 넘어서, 어떤 의미에서 종교적인 세계로 떠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