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사랑하고존경하는선생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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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사랑하고 존경하는 선생님들 열전

Pion


수영국민학교 6학년 담임, 배수철 선생님. 학생들을 진정으로 좋아하고 사랑하시던 분이다. 음악시간에는 음악 교과서 외에도 좋고 아름다운 노래를 많이 가르쳐 주셨고, 이 노래들을 인쇄한 책도 만들어 학생들에게 나누어 주셨다(물론 공짜로). 졸업하기 전에는 우리반 친구들의 이모저모를 적은 (학생번호, 이름, 좋아하는 것들, 등등 10문 10답 같은 형태였다) 책을 인쇄해서 (아마도 학교 시험 인쇄기를 사용하셨으리라) 나누어주셨고, 이 작은 책은 고등학교 때까지도 나의 보물 중 하나였다. 비록 나중에 이사 와중에 잃어버렸지만.

한번은 이런적이 있다. 2학기 중간고사 정도였던걸로 기억하는데, 시험 정답을 알려 주신 후, 학생들이 시끌 시끌 ('아- 2번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3번 써서 틀렸다-' 등등) 하자 이제 시험얘기는 그만하자고, 다음 쉬는 시간에 시험 얘기하는 사람이 있으면 10대 때리겠다고 농담반 진담반으로 말씀하셨다.

순진한 Pion은 반 친구 중 하나가 쉬는 시간에 또 시험얘기를 시작하자, '어, 너 또 시험얘기했다!' 하고는 그 다음 시간 시작할 때 쪼르르 선생님께 일러바쳤다. -_-; 선생님은 말씀하신 것도 있고해서, 그 친구를 벌하지 않을 수 없었다. 친구는 업드렸고, 선생님은 10대를 때린 후 '한대 더 맞아라' 하시고는 한대를 더 때렸다. 반 전체가 조용하고 아무 말이 없었다. 내 때문에 맞은 친구도 그 후 그에 대해 한번도 언급하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선생님께서 왜 그 친구를 10대를 때리지 않고 11대를 때렸는지 알 수 있었다. 쥐구멍에 들어가고싶은 기분이었다. 선생님의 그 교훈을 생각하면 지금도 얼굴이 붉혀진다.

그 선생님 덕분에, 국민학교 6학년 동기들은 내가 도미하기 직전까지도 서로 연락을 하고 지냈다 (우리에겐 훌륭한 연락처 - 선생님이 만들어 주신 그 책 - 가 있었다). 그리고 어떻게 어떻게 수소문을 해서 선생님까지 같이 만나뵐 수 있었다. 이제는 머리가 희끗희끗 해지고, 그렇게 키 크시던 분이 우리보다 키가 더 작아지셨다. 하지만 우리에 대한 선생님의 사랑은 여전했고, 우리의 이름들과 크고 작은 사건들을 아직도 기억하고 계셨다. 우리는 얘기 꽃을 피웠고, 반 친구들이 선생님의 애정어린 가르침을 받았던 (내가 미처 몰랐던) 에피소드는 그렇게 많았다.

사랑하고 존경합니다, 배수철 선생님!

비누

지금까지 기억에 남는 선생님은 많지만(전부 다지만), 정말 좋았다고 느끼는 선생님을 만난 건 불과 몇 년 전 대학에 들어와서의 일이다. 세기말이라는 돌림병이 한창이던 99년 가을, 나 역시 그 병을 시름시름 앓았던지 아무 의욕도 붙잡히지 않던 그런 즈음이었다. 비트겐슈타인이란 이름에 홀려 들어간 한 철학 수업 첫날, 나는 큰 기쁨 하나로 마구 들뜨기 시작했다. 그것은 수업의 주제라기 보다 학생 여섯 명과 두 분의 선생님이라는 수업 그 자체였다. 그때 만난 선생님 중 한 분이 개강파티 때 내게 처음 해주신 말씀은 아직 잊을 수가 없다. "아무개씨 여기서 뭐하십니까? 그냥 달려나가십시오." 정말 선생님은 처음 본 그 학생의 마음을 읽고 계셨던 걸까?

매 수업은 열린 토론으로 진행되었고 그런 토론은 강의실에 머물지 않고 쉬는 시간 복도에서, 학교에서 내려오는 길가에서도, 식당에서, 술집에서, 때론 서서 먹던 떡볶이 집에서도 계속되었다. 토론을 하는 동안만큼은 그 분은 선생님이고 나는 학생이란 걸 느낄 수 없었다고 한다면 과장일까? 그러나 대화가 끝난 후에는 이 분이야말로 진정한 선생님이라고 느끼게 하는 그런 토론을 나는 비로소 알게 되었다. 또한, 선생님은 과분한 칭찬으로 부끄러움을 알게 하는 분이셨다. 그리고 그런 선생님의 말씀들이 나에게는 유독 과분한 것이었다.

기타를 연주하고 연극을 하셨다는 선생님은 집시들과 함께 유랑 생활을 했을 만큼 자유분방하고 뜨거운 가슴을 지닌 분이었다. 그래서 자유의 우리말은 "나름"이라 생각하신다며 아들의 이름을 그렇게 지으셨다고도 한다. 언젠가 하루는, 쓰시던 노트북을 조심스레 내미시며 "저는 이게 필요 없어졌는데, 아무개씨가 이걸로 공부 하셨으면 좋겠어요. 여기에는 제가 그 동안 쓴 글이랑 모아둔 글들도 좀 있구요."라고 하실 만큼 따뜻함이 넘치는 분이기도 했다. 연하장을 띄우면 손수 지으신 시를 담아 답장을 보내시곤 하던 다정한 선생님이지만, 다른 한편으론 그 걸죽한 입담으로 거침없이 토해내던 비판과 독설이 영락없는 논리학자의 모습이었다. 몇 해 전엔 신학 대학에서 맡으신 강의 중에 몇몇의 대리출석을 문제삼아 학교측에 징계를 요구하시는 바람에 총장이 대신 사과하는 해프닝까지 있었고, 진지하지 않은 사람에겐 선배라고 해도 가차없이 일침을 주실 만큼 무섭도록 엄격한 분이었다.

아웃사이더란, 우리들 대화의 단골 메뉴였던 진중권이나 이명원 같은 사람들이 아니라, 도서관에 박혀서 하루에도 스무 권씩 책을 파대는 이름 모를 '형님들'이라는 걸 일깨워 주신 것도 그 분이었다. (이 '형님들' 얘기는 언제 들어도 재미있다. 수십 년을 한결같이 도서관을 지키며 빵 한 조각과 물만 먹는 '형님들'. 한 달 동안 씻지도 않는 사람부터 알콜로 책상부터 닦고 보는 결벽증인 사람까지, 시스템에 편입되지 않고 자신들만의 세계를 지켜가는 사람들.)

며칠 전, 다른 선생님으로부터 그 분이 인근 대학에 초빙교수로 가셨다는 전화를 받고 서둘러 메일로 인사를 전했다. 그리고 어제는 그 분이 부임하신 대학 근처로 가서 또 한번 조촐한 우리들만의 개강파티를 가졌다. 선생님은 전에 없던 방(교수실)이 생기신 것처럼 핸드폰을 처음 장만하셨고, 십 수 년 만에 처음으로 미장원에서 머리를 자르신 말끔한 모습이었고, 주머니의 돈을 탈탈 털어 내놓고 술을 먹는 집시들 식의 각출 대신, 신용카드를 내밀어 혼자 계산을 하셨다. 나 역시 집시의 즉흥곡 대신 사티의 피아노 곡을 선물했다. 그래도 나는 그런 선생님이 불안하지 않았다. 헤어지기 아쉬워 '딱 한 잔~'이 두 병이 되고 삼차가 될때까지 우리들의 대화는 예전과 다름없이 진지하고 유쾌했다. 내가 학생인 동안은 아마도 어김없이 선생님과 개강파티를 하게 되지 않을까 하는 기대로 돌아오던 골목길의 바람이 유난히 포근했다. 막 봄이 온 모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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