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북친의 삶과 기본 입장
머레이 북친(Murray Bookchin)이 우리 나라에 소개된 지는 얼마 되지 않았다. 문순홍의 『생태위기와 녹색의 대안』(나라사랑, 1992)과 구승회의 『에코 필로소피』(새길, 1996)를 통해서 북친이라는 이름이 간헐적으로 언급되었고, 그 후 북친의 저작인 『사회생태론의 철학』(문순홍 역, 솔, 1997)과 『사회생태주의란 무엇인가』(박홍규 역, 민음사, 1998)가 번역되면서 북친에 대한 논의가 시작되고 있다.
북친의 사상을 한마디로 정의하자면 ‘아나키즘적 사회생태주의’라고 할 수 있다. 자본주의의 문제점이 여전히 존재하면서, 사회주의의 거대 실험이 실패로 확인되어 ‘제 3의 길’이 논의되는 지금, 그리고 환경문제가 인류 최대의 화두로 등장한 지금, 북친은 많은 사람들에게 각별한 매력으로 다가오고 있다. 그의 입장은 자본주의와 사회주의에 대한 대안으로, 그리고 환경문제에 대한 유력한 대안으로 많은 운동가나 학자들의 입에 오르내리고 있다.
북친은 1921년 뉴욕의 맨해튼에서 가난한 러시아계 이민자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부모는 러시아 혁명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사람이었고, 그 역시 풍부한 노동운동의 경험을 가졌다. 그는 이미 10대부터 주물공장과 자동차 공장의 노동자로 일하면서 노동운동에 가담한다. 그러면서 그는 사회주의 운동의 권위주의적 성격에 환멸을 느끼게 된다. 그는 1937년 스페인 내전을 보면서 아나키즘으로 기울었고, 아나키즘이 지배적이었던 노조활동에 깊이 관여하였다.
그의 이력에서 보듯 그는 정규교육을 받은 사람이 아니다. 하지만 그는 누구보다 시대를 앞서가는 예민한 감각의 소유자이다. 그는 ‘음식물에 포함된 화학첨가제의 문제점’이란 글을 이미 1952년에 발표하면서 환경운동에 관심을 보였다. 그는 핵발전소 반대 운동에 열성적이었고, 녹색당 창립에도 영향을 미쳤다. 그는 거의 매년 새로운 저작을 낼 정도로 왕성한 작품 활동을 하고 있는데, 우리말로 번역된 위의 두 저작 이외에 『도시의 위기』(1965), 『생태사회를 향해서』(1981), 『자유의 생태주의-위계의 발생과 소멸』(1982), 『현대의 위기』(1986), 『인간의 재마술화』(1996) 등이 주요 저작이라고 할 수 있다. 1960년대 말부터 대학강단에 서기 시작해 1974년 미국 뉴저지 주의 라마포 대학 환경학부에서 강의했다. 그리고 사회생태주의 연구소를 설립해, 지금은 연구소의 명예소장과 명예교수로 활동하고 있다. 현재 78세로 노구임에도 불구하고 비교적 활발한 저술활동을 펴고 있다.
2. 근본생태주의 비판
그의 사상은 철학, 사회학, 경제학, 생태학, 정치학, 문화 등 안 다루는 것이 없을 정도로 광범위하다. 또한 그의 사상은 숱한 경쟁 이론들과의 논쟁을 거치면서 발전해왔다. 따라서 그의 사상을 이해하는 좋은 방법은 그의 주요 논적, 근본생태주의 및 마르크스주의와의 대비를 통해서 이해하는 길이다.
북친의 첫 번째 논적은 근본생태주의이다. 동물에 대한 연구 방법을 인간에 대한 연구에 적용시키려는 윌슨의 사회생물학, 환경위기의 원인을 인구증가에서 보는 하딘의 신맬더스주의, 지구 자체를 하나의 생명체로 보는 러브록의 가이아 이론들이 다 북친의 비판 대상이긴 하지만, 가장 핵심적인 논적은 근본생태주의라고 할 수 있다. 근본생태주의는 노르웨이의 철학자 네스에 의해 주창되어 세션즈, 드볼, 짐머만, 카프라 등 많은 추종자를 거느리고 있다. 근본생태주의는 야생지 보전에 관심이 많은 나라들, 구체적으로는 미국과 캐나다, 호주에서 영향력이 크다. 네스는 지금까지의 환경운동이 공해방지 등 오로지 인간만을 위한 ‘피상적’인 생태주의였다고 말하면서 이제는 근본적인 입장에서 접근해야 한다고 제안한다. 그가 말하는 근본적인 입장이란 인간만을 위한 사고에서 벗어나 자연과 함께 공존하려는 일종의 ‘의식의 전환’을 의미한다. 북친은 근본생태주의의 공적을 인정하면서도 다음 두 가지 점에서 특히 비판적이다.
우선 근본생태주의는 동양의 신비주의에 경도되어 있다. 근본생태주의는 과학과 이성이 자연에 대한 체계적인 착취를 낳았다는 이유에서 거부하고, 대신 자연과 인간을 하나로 느끼게끔 해 주는 직관이나, 체험, 명상을 선호한다. 그래서 동양의 세계관, 특히 도교와 선불교, 힌두교 등을 찬미한다. 북친이 보기에 이것은 인간을 ‘재마술화’한다. 그가 보기에 이성과 과학을 거부하는 것은 마치 목욕통 안에 있는 아기를 멀리 던져버리는 것과 같다. 그에 따르면, 과학과 이성은 파괴의 능력을 갖고 있지만, 동시에 새로운 문화를 건설할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는데 이 점을 근본생태주의자들은 무시한다. 물론 북친이 염두에 둔 과학과 이성은 자연의 지배를 낳았던 실증주의적인 도구화된 과학이나 합리성은 아니다. 그가 바라는 이성은 지배와 위계로부터 해방된 본래적인 의미의 이성이다. 그는 이런 자신의 사상을 ‘변증법적 자연주의’라고 부르면서 이성이 생태적으로 바람직한 사회와 자연을 건설하는데 중심 역할을 해야 한다고 역설한다.
또한 근본생태주의자들은 환경위기가 ‘자연과 인간의 대립’에서 발생한 것으로 보고, 인간중심주의를 벗어나야 한다고 주장한다. 앞서 말한 동양의 도교와 선불교, 힌두교 등이 찬미되는 것에는 이런 이유가 크게 작용한다. 북친이 보기에 이런 접근은 의식개혁만을 강조하고, 사회구조의 변혁에 대해서는 둔감하다. 하지만 사회구조의 변혁 없이는 환경문제의 해결은 불가능하다.
먼저 환경문제의 원인을 인간중심주의로 보는 것은 환경문제를 낳은 사회 내부의 지배구조를 간과하는 결과를 낳는다. 그런 시각은 소외계층과 지배계층이 갖는 책임의 차이를 무시하는 것이고, 할렘의 흑인 아이나 오염물질을 배출하는 대기업의 사장에 똑같은 책임을 묻는 것이다. 즉 죄인은 올가미에서 풀어 주고, 엉뚱한 사람에게 죄를 뒤집어씌우는 꼴이다. 또한 이런 시각은 인간을 환경문제의 원흉으로 봄으로써 ‘인간혐오주의’로 빠질 위험이 크다고 북친은 본다. 그래서 몇몇 극단적인 근본생태주의자들은 기아나 에이즈를 인구과잉과 생태파괴에 대한 자연의 복수라고 주장하면서 에티오피아나 소말리아에서 굶어 죽고 있는 아이들을 생태계 보호라는 명목 아래 굶어 죽도록 내버려둬야 한다는 데까지 나간다고 북친은 비판한다.
마르크스의 목표는 계급의 철폐였다. 그는 그것을 통해 인간의 해방을 달성할 수 있다고 믿었다. 현대의 생태마르크스주의자들, 대표적으로는 제임스 오코너 및 알트파터 등은 마르크스가 간과했던 자연의 유한성을 고려하긴 하지만, 어떻게 든 마르크스주의의 틀 내에서 문제를 바라보려 한다는 점에서 북친과는 거리가 있다.
북친의 관심은 애초부터 마르크스주의의 틀을 벗어난다. 그의 목표는 단순히 계급의 철폐가 아니다. 북친이 목표로 하는 사회는 일체의 위계와 지배로부터의 해방, 즉 자유로운 사회이다. 북친에 따르면, 위계와 지배는 우월한 집단이 열등한 집단에게 복종을 명령하는 것으로, ‘자본가에 의한 노동자의 지배’뿐만 아니라, ‘남성에 의한 여성의 지배’, ‘늙은이에 의한 젊은이의 지배’, ‘특정 인종에 의한 다른 인종의 지배’, ‘관료들에 의한 대중의 지배’ ‘도시에 의한 농촌의 지배’, ‘정신에 의한 육체의 지배’ 등 사회 전역에 광범위하게 존재한다. 그리고 사회에 존재하는 ‘인간에 의한 인간의 지배’가 ‘인간에 의한 자연의 지배’를 낳았고, 이것이 환경파괴를 결과했다는 것이 북친의 핵심 사상이다. 북친은 『자유의 생태주의-위계의 발생과 소멸』에서 구석기 시대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사회에 존재했던 다양한 위계와 지배 형태의 역사를 분석한다.
환경파괴, 즉 인간에 의한 자연의 지배를 막기 위해서는 먼저 사회의 지배를 막아야 하는데, 이것은 계급의 철폐만으로는 해소될 수 없는 성질이다. 계급의 지배가 철폐되어도 다른 지배는 잔존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가 해결책으로 내세우는 사회는 ‘유기적 사회’이다. 유기적 사회는 인간의 의식적이고, 자결적인 활동으로 충만한 사회이다. 자결적인 활동은 육체적 억압뿐만 아니라, 사회적, 법적, 심리적, 지적, 감정적 억압 등 일체의 억압과 지배로부터 자유로울 때에만 가능하다. 이런 사회가 북친이 말하는 자유주의적 아나키즘이 목표로 하는 사회이다. 이런 사회는 의사결정이 중앙에 몰려 있지 않고, 지역이 있는 개인들이 서로 보완하고, 협력하는 사회일 것이다. 이런 사회에서는 인간은 참된 자유를 누릴 것이고, 자연환경과도 조화롭게 살 수 있을 것이다.
정치형태로 보면, 그것은 ‘지역자치주의’에 해당된다. 그것은 풀뿌리 민주주의로 의회나 정당정치에 기초한 간접 민주주의와 다르다. 그것은 생태계의 요구에 맞게 지역민들이 합심하여 새로운 윤리를 발전시키는 사회이다. 이는 그리스의 폴리스와 같이 사람들이 모여 직접 얼굴을 맞대고 공공정책을 수립하고, 상보성과 연대의 윤리에 근거하여 공동체를 운영하는 참여민주주의가 지배하는 사회이다.
WTO 등 신자유주의와 시장의 공세가 기승을 떨치는 지금, 북친의 사상이 현실과 동떨어진 이념일 뿐이라고 느끼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환경문제와 관련해 그간 나타난 ‘시장의 실패’ 및 ‘국가의 실패’ 현상을 보면서, 우리는 북친이 말한 지역자치에 기대를 걸고 싶어진다. 또한 핵무기 경쟁에서 보이듯 국가팽창주의는 인류의 생존에 커다란 위협이 되고 있다. 이런 측면에서 우리는 북친의 주장을 신중히 검토해 볼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