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곤문제에서의과학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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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factorMe 읽기 좋게 압축이 가능합니다. 논의는 사실 별것 아니었거든요.

빈부격차의존재이유토론Aragorn빈곤에 대한 접근 방식이 과학주의적이라는 의 의견에 따라 갈라져 나온 페이지입니다.

빈곤문제에서의 과학주의에 관하여

"인문사회학에서는 과학주의라는 어휘가 있는데 이 말은 다소 경멸적인 어의로 쓰이는 말입니다. 일상적으로 과학적 사고방식이란 말은 "합리적이고 계산적이며 정확한", 그러므로 이상적이고 완벽한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과학주의"란 말이 경멸적인 어휘로 쓰이는 것은 이해하기 어려울 수 있습니다. 과학적사고의 근간은 주체와 대상의 이분법에서 시작합니다. 신도 침범할 수 없는 사고의 주체를 설정하고, 대상은 주체에 영향을 미치지 못하는 것이라는 겁니다. 순수한 이성인 주체가 대상을 사고하여 결국에는 '진리'에 이를 수 있다는 믿음이 바로 과학입니다. 과학주의가 경멸적 어휘인 것은 진리는 반드시 존재한다라는 믿음과 주체와 대상의 이분법 때문입니다. "과학주의에 빠져 허우적대는" 사회학 저작들은 주로 서구의 18세기, 19세기에 걸쳐 있습니다. 널리 알려진 것은 맬더스의 <인구론> 같은 것입니다. 맬더스가 오류를 범한 이유는 '인구'라는 개념은 분명 변증법적 개념인데, 이 내적관계를 보지 못하고 과학주의에 사로잡혀 자연과학의 '숫자'로 치환시켰기 때문입니다. 빈부의 문제에 대해 엔트로피, 강자와 약자의 드라마 등으로 관찰하듯 서술하는 태도는 18세기, 19세기에 만연한 과학주의에 빠진 사회학의 표본과 같습니다. 과학주의에 대한 비판으로 우선 "만약 주체가 대상과 분리될 수 없다면?" 이라는 문제가 제기될 수 있습니다. 맑스는 "사람들의 의식이 그들의 존재를 규정하는 것이 아니고, 반대로 그들의 사회적 존재가 그들의 의식을 규정한다."라 말했습니다. 민중은 "그들의 사회적 존재가 그들의 과학주의적 사고를 규정한다"라고 바꾸어 말하겠습니다. 사유 주체는 순수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대혁명 당시 프랑스 왕비 마리 앙뜨와네뜨는 '빵을 달라'고 부르짖는 민중들의 구호를 보고, "빵이 없으면 고기를 먹으면 될 것 아닌가"라고 진지하게 말했습니다. 빈곤은 엔트로피 문제의 대상도, 최적화 문제의 과제도 아닙니다. 가난한 이들에게 빈곤은 게임도, TV 드라마도 아닌 현실이며 삶 그 자체입니다. 그것은 <사회적 문제>인 것입니다. 특히 빈곤에 관하여, 과학주의적 사회학은 반동적이고 관념적이며 또한 무엇보다도 인간의 삶에 대한 사랑이 결여된 것입니다."

"앙뜨와네뜨 일화를 든 것은 사회적 존재가 주체의 의식을 결정하는 예를 든 것입니다. 그녀 나름대로 "A 아니면 B"라는 "과학적" 논리로 말한 것이지만, 그 논리는 왕비라는 그녀의 사회적 존재가 결정하고 제한하였다는 것입니다. 빈곤과 계급 문제에 대한 "과학적 접근"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 "과학적 사고"를 하는 주체의 사회적 조건에 따라 이미 논의가 이데올로기적으로 편향된다는 것입니다. 앙뜨와네뜨가 그런 말을 했는지 안 했는지는 야사가들에게나 물어볼 일입니다. 제가 맑스주의적이라는 것은 인정하겠습니다. 그러나 맑스주의와 변증법적유물론은 어린 학생들의 단순한 몽상이 아닙니다. 그것은 역사적으로 노동자와 무산계급의 무기였습니다. 맑스주의는 단순히 사회적 분배의 배율을 문제삼는 식이 아니라, 자본주의 사회에서 가치를 생산하는 것은 무엇인가라고 질문한다는 점에서 근본적이며 여전히 유효한 측면이 있습니다. 몽상이란 맑스가 관념론이라 비판한 이상적 사회주의자, 그리고 과학주의에 빠진 사회학에 어울리는 단어입니다."

"과학주의적 접근으로 '전체적인 최적의 황금비율'을 말하기도 하는데 저는 이를 지적 욕구가 실천의식을 앞서는 것으로 간주하고 싶습니다. 이에 관해서 제 입장을 말하자면, 사회민주주의자적 관점에서는 '부층'과 '빈층'의 수입이 5:1 정도가 될 때, '최적의 빈부의 차'라는 분석이 있습니다. 북유럽 몇몇 국가가 이 '황금비율'에 근접했다고도 합니다. 그러나 '최적비율'의 답을 구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이론이 무기로 쓰일 수도 있지만, 지배 이데올로기로도 쓰일 수 있고, 심지어 그것은 지적 유희의 대상으로도 쓰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문제는 실천인 것입니다."

"'빈부 격차'란 사회적문제, 정확히 말해 이데올로기문제라는 것입니다. <과학주의적 접근방식>이 빈곤을 과학적으로 분석한다는 명목이지만, 빈곤문제에서의 핵심인 이데올로기 문제에서 가진 자의 논리로 빠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모든 토론자가 과학적 사고를 기본으로 시작하는 '푄현상의 존재이유토론'과는 달리, 빈곤 문제에 대한 토론은 결국 '당신은 어떤 정치적 이데올로기를 기본으로 하는가'라는 종착점으로 귀결됩니다. 특정한 정치적 이데올로기의 편이기 때문에 그에 따른 특정한 주장을 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물론 '푄현상'의 경우에도 나름의 이론이 있을 수 있지만 그것은 과학적 토론과 합의를 통해 dominant한 이론을 도출시킬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데올로기의 경우에는 자신의 소유물과 삶에 직결된 것이기 때문에 과학적 합의는 불가능합니다. 빈부의 차가 사회발전에 이바지하며 약육강식의 세계와 같다라고 주장한 사람들은 역사적으로 부르주아 지식인들이었습니다. 자신의 부를 합리화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한편 빈부의 차가 사유 재산과 상속제에서 기인하며 자본주의의 모순이다라고 주장한 사람들은 좌파 지식인들이었습니다. 사회적 조건이 달라진 현대 자본주의사회에서도 이 논리와 주장들은 변형 발전되어 계속되고 있습니다. 제가 실천이 중요하다라고 한 것은 이 이데올로기 문제에서 각자가 설 입장을 질문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 문제까지 발전시키면 새로운 페이지로 확장해야하기 때문에 일단 덧글로 붙인 것입니다." -



"저는 빈곤에 대한 근본적인 문제가 경제적 무능력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보다 근본적인 문제는 부의 재생산입니다. 사유재산과 상속제, 즉 자본주의 양식에 대한 문제제기가 구성원의 경제적 무능력이나 무지를 탓하는 것보다 더 근본적인 변화와 파급효과를 가져올 수 있습니다. 경제적 무능력과 무지를 문제 삼으면, 빈곤을 개인적 차원으로 한정시켜 구성원의 무기력과 자포자기를 낳을 뿐입니다. 사회 구성원의 무능력과 무지를 탓하려거든, 차라리 지적으로 우수한 사람으로 구성된 새로운 사회를 만들자라는 주장을 하는게 나을 것입니다. 사유재산을 없앨 수 있습니까,라고 현재의 사유재산양식은 당연히 인정할 수 밖에 없다고 할 수 있겠는데, 바로 이 질문이 핵심입니다. 사유재산제에 대한 관점과 운영 양식이 자본주의사회에 대한 이데올로기-다소 도식적으로 말하면, 자유민주주의, 사회민주주의, 민중민주주의 등-을 형성하기 때문입니다. 빈곤에 관한 과학주의적 접근은 근본적으로 현재의 사유재산제 운영양식이 변화하지 않는다라고 하부구조를 가정한 위에 <과학적 사유>를 시작하고 있으므로 이는 온전히 과학적일 수 없고 이데올로기적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제가 사유재산제를 없애자라고 주장하는 급진적 사회주의자라고 생각한다면 오해일 것입니다. 저는 제 소개 페이지에 미래학류의 분석이 아닌 미래의 자본주의 사회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고 했었습니다. 저는 우리 남한 사회에서의 대안은 무엇인가, 사회의 변화는 어떤 방식으로 올 것인가, 어떤 삶을 살아야하는가를 끊임없이 고민하고 있는 과정에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저는 아직 무지하고 어리며 배우는 단계에 있긴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구시대의 편협한 세계관'이라 매도할 사안이 아니며, '학교 안에서 백날 치고 받는 것'과 관계가 없습니다. 저는 사유재산을 부정하는 경제체제를 만들자라는 주장에 찬성하지 않습니다. 사회민주주의가 현상황에서는 가장 합리적인 선택이라고 보는데, 우리 현실에서는 그 선행조건조차 이루기 힘든 것 같습니다. 지금의 우리 현실에서 확보되어야 하는 것은 우선 정치적, 경제적으로 근대적인 사회라고 생각합니다. 분단에 따른 사회 전체의 우경화 보수적 경향, 자본주의라고 하지만 원칙이 무시되는 전근대적 자본주의, 정치 이념보다 선행하는 지역주의 등 사회의 여러가지 측면이 복합되어 있습니다. 다양한 이념을 소화할 수 있는 근대적 사회가 우선입니다. 사회민주주의는 그 기반으로 해야할 것입니다." --

과학주의에 대해 상당한 거부감을 가지고 계신듯 하여 몇가지 여쭙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특히 빈곤에 관하여, 과학주의적 사회학은 반동적이고 관념적이며 또한 무엇보다도 인간의 삶에 대한 사랑이 결여된 것입니다.

확신하실 수 있습니까? 과학적인 분석엔 시린 칼날 같은 한기가 느껴진다는 듯이 말씀하시는데, 과학적인 분석없이 맹목적인 사회학도 사람 잡을 수 있습니다. 페스트가 유행하던 시절에 집단으로 교회에 모여 기도를 하던 중세의 기독교인들처럼 말이죠. 그럼 분석과 실천의 기준을 단지 일개인의 지적판단으로 유보하자는 이야기가 됩니까? 어차피 주체와 대상을 나눌 수 없으니까요? 순수한 주체는 물론 존재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더 순수한 주체가 존재할 수는 있습니다.

과학주의에 빠져 허우적대는" 사회학 저작들은 주로 서구의 18세기, 19세기에 걸쳐 있습니다.

그럼 우린 18세기에 살고 있는 건가 봅니다. 어차피 사회과학입니다. 과학적 분석 없는 사회학 이론도 헛소리이고, 맹목적인 분석만으로 사회를 바라보는 것도 헛소리입니다. 어차피 둘은 나눌수도 없는 것이고, 대립구도로 나아가야 할 필요성도 없습니다. 과학주의에 대한 논의는 이 페이지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김우재

김우재님이 예전 페이지를 보셨는지 모르겠는데, 이 글은 새로 쓴 글이 아니고요, 빈부격차의존재이유토론페이지에 몇달전부터 있던 Aragorn의 긴 토론에서 부분만을 남겨놓은 것입니다. 둘 사이의 대화에서 한 사람말만을 나열하다보니 손뼉도 두 손이 친다고, 허공에 붕뜨는 글이 되고 말았습니다. 자리를 옮기는 수밖에 없군요.

p.s. '권위주의'와 '권위'가 다르듯이, 과학주의와 과학적 접근은 다른 개념입니다. 과학주의는 그것이 "우주를 지배하는 질서가 존재하므로 사회의 운동에도 진리가 있다. 우리는 진리에 도달한다."라는 식의, 과학으로써 모든 것을 알 수 있다라는 믿음이기 때문에 비판되는 것입니다. 사회과학은 과학적 접근을 도구로 인식한다는 점에서 과학주의와는 전혀 다릅니다.

뭔가 오해가 있으신듯 한데...전 처음부터 이 페이지의 논의를 하나도 빼지 않고 모두 봐왔던 사람입니다. 이전의 토론에 끼어들지 않았던 것은 너무 뜨거웠기 때문이기도 하구요. ^^;; 제 말의 알맹이는 빼고 답을 하셨는데...아라곤씨의 접근방법이 과학적이고 그런 이유로 과학주의를 언급하신 부분에 대해 전 오바다 라고 말씀드리고 있는 겁니다. 제가 지적하고자 하는 것은 빈곤에 대한 논의에서 과학주의다 아니다라는 문제를 빼고 빈곤이 정말 아라곤씨의 말처럼 사회발전의 원동력인가 아닌가를 논의하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느냐는 것이었습니다. 왜 무엇인가를 논의하는 데 있어서 과학적이다 인문학적이다 사회학적이다 라면서 방법론을 들먹여야 하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그런 이분법의 잣대를 들이대고 나누고 나서야 안심이 되는 것이라면 영원히 두문화는 대립구도로 나아가야 하는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방법론이 무엇이든간에 씨의 글이 남을 잘 설득할 수 있으면 그만입니다. 아라곤씨는 자신의 방법론으로 과학적 분석방법을 시도한 것 뿐이구요. 거기다가 대고 과학주의는 애정결핍이라느니 소리치시는 것이, 논의의 알맹이는 빼먹고 처음부터 토론을 격한 감정으로 끌고 가지 않는가 하는 우려에서 드리는 말씀입니다.

제가 문제 삼고 싶은 부분은 과학주의와 과학적 접근방식의 차이가 아닙니다. 권위와 권위주의의 차이도 아니구요. 대충의 차이는 알고 있지만 거기다가 딴지를 걸고 싶지도 않고, 이 논의에서 그리 중요한 부분도 아닙니다. 방법론의 문제로 한 개인의 의견을 애정이 부족한 사회학적 망언이다 라고 규정지으시게 되면 토론이 어떻게 흘러가겠느냐는 말씀을 드리는 겁니다. --김우재

빈곤문제에 대한 과학주의적 접근방식이 왜 '인간의 삶에 대한 사랑이 부족한 것'으로 받아들이게되기 쉬운지는, 저는 충분히 설명하였다고 생각하는데 그렇지 못했나봅니다. 빈곤문제는 근본적인 삶과 현실의 문제이기 때문에, 왜 이 문제가 순수한 과학적 논의가 되지 않고 서로가 가진 이데올로기문제일 수 밖에 없는지도 네번째 단락에서 설명했습니다. '사회발전의 원동력으로서 최적의 빈부격차'라고 '과학적으로' 주제를 논의하기 시작할 수 있는 것은 개인의 이데올로기적 입장을 발판으로 하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리고 다시 말하지만, 빈부의 차가 사회발전에 이바지하며 약육강식의 세계와 같다라고 주장한 사람들은 역사적으로 부르주아 지식인들이었습니다. 자신의 부를 합리화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한편 빈부의 차가 사유 재산과 상속제에서 기인하며 자본주의의 모순이다라고 주장한 사람들은 좌파 지식인들이었습니다. 사회적 조건이 달라진 현대 자본주의사회에서도 이 논리와 주장들은 변형 발전되어 계속되고 있습니다. 이 페이지뿐만 아니라 지금 빈곤페이지에서도, 사실은 이데올로기 논쟁을 계속하고 있는 것입니다. --

네 잘 알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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