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곤과신자유주의

FrontPage|FindPage|TitleIndex|RecentChanges| UserPreferences P RSS

빈곤페이지의 신자유주의

신자유주의는 시장을 절대시하고 시장에서의 자유로운 경쟁이 사회를 발전시킨다고 말한다. 인간은 시장에서 치열하게 경쟁함으로써만 잘 살 수 있다고 주장한다. 또한 신자유주의는 시장에서 경쟁이 일어나기 위해선 빈곤이 있어야 하므로 빈곤은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생각해보자. 시장이 발전시키는 것이 무엇인가. 시장에서 이뤄지는 경쟁은 인간의 특정한 면만을 배타적으로 발전시킨다. 그러면서도 신자유주의자는 시장에서의 경쟁만이 발전의 유일한 길이라고 주장한다. 아니, 좀 다르게도 생각해보자. 우리는 왜 '경제성장'을 해야 하는가? 사실 하기 싫어도 자본주의 체제아래선 빈곤해지지 않기 위해서는 경제성장을 할 수 밖에 없다. 즉, 우리가 가난해지지 않기 위해 노력하는 과정-누군가를 빈곤하게 만드는 그 과정이며 우리의 삶을 시장에서 지정한 가치아래 종속시키는 과정을 우리는 계속 할 수밖에 없다. 왜 이렇게 살아야 하는가? 이건 인간에게 도움이 되는 과정이 아니다. 더구나 이 순환이 시작된 것은 길게 잡아도 16세기 서구부터이고 결코 인류의 숙명따위가 아니다. 그것은 근대국가와 결합하여 탄생한 역사적 구조물이다. 신자유주의적 주장들이 나쁘다면 그건 그 주장들이 이런 잘못된 과정들을 유지-강화시키고 있다는 점에서이다.

현재 빈곤 페이지의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아라고른님의 주장은 신자유주의적이라고 판단된다(아라고른님이 생각은 다를 수도 있겠죠..^^;;). 신자유주의를 제외한 입장은 그리 잘 나타나 있지 않다(이건 물론 저를 포함한 다른 생각의 가진 사람들이 좀 더 적극적으로 자신을 표현하지 않은 탓이죠. 그런 의미에서 존경스러운 카키님로 로만님이십니다. 사실 이 페이지의 논의는 좀 부담스러운데..) 그러므로 신자유주의만의 주장만으로 가득한 사상적으로 빈곤한 페이지이다 --그놈
패로디 :) 그러고보니 빈곤이라는 단어가 <철학의 빈곤>에 등장했던 단어였군요. --

Aragorn은 한번도 인간의 행복이 경제적 부를 쌓는 것에서 해결된다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경제적 부를 쌓는 것이 발전인가의 문제도 매우 의심스럽습니다.

그런데 사회가 평등해지고 순식간에 정보가 공유되는 현대 사회를 보면, 무한경쟁시스템이 인류의 숙명인 것 같다는 생각은 합니다. 적어도 상당기간 동안은. --Aragorn

그놈Aragorn의 토론

지금 우리가 경쟁을 거부할 수 있는 방법이 있습니까?

없겠죠. 개인이나 집단이 거부할려는 노력을 할 수는 있겠지만, 그가 시장속의 경쟁관계에 놓여있다는 건 부정할 수 없습니다.

경쟁을 거부하려는 노력은 수천년부터 계속되었습니다. 아웅다웅거리는 풍진의 세상 속에서 벗어나서 도를 닦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상의 큰 흐름이 몇차례 있었고, 대부분의 경우 소수의 사상으로 자리잡고 있습니다. 사회주의가 자본주의적 경쟁을 제거한다고 하지만, 어차피 빈곤에서 탈피하고, 경제적 발전을 추구한다면, 경쟁 혹은 끊임없는 경제가치 생산에의 노력은 피할 수 없습니다. 경쟁의 밑바탕에 깔린 인간의 근본적인 이기적 본성을 인정해야 하는 것 아닙니까?

인간의 근본적인 이기적 본성이란 것이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지만(사실 이런 의견은 생물학을 뛰어넘은 형이상학이라고 생각합니다) 자본주의에서 개인이 경쟁을 피할 수 없다는 걸 인정했습니다. 모든 시대 모든 인간은 지금과 같은 경쟁을 할 수 밖에 없다고 인정하지 않은 것이 문제입니까? 네, 그렇게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제 생각엔 아라고른님이 자본주의의 예를 너무 일반화하는 것 같습니다. -그놈

모든 시대, 모든 인간이 지금과 같은 경쟁을 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은 물론 아닙니다. 요 근래의 현대사회에 들어서 그 경쟁의 정도가 더 심해지고 가속화되는 것은 분명합니다. 인간의 이기적 본성이 인간을 절대적으로 지배한다고 말할 수 없지만, 신뢰 관계를 구축하기 어려운 현대사회에서 이기적 본성이 강하게 드러나는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상식적인 이기적 본성에 대해 자꾸 재론하게 되는 것은 나눔과 연대, 이타주의 등의 가치에 비현실적인 감상적 접근이 많아 보이기 때문입니다. 인정할 건 인정하고 넘어가자는 것이죠.

자본주의가 불과 16세기 서구에서 시작된 것입니까? 자본주의는 개인의 소유물이 존재하고 교환가치가 존재하는 그 즉시 작동하는 시스템 아닙니까?

자본주의는 개인의 소유물을 보호하는 경찰과 교환가치의 실현인 화폐를 통제하는 중앙은행, 시장의 확대를 위해 노력하는 국가 그리고 직접생산자와 생산수단 사이의 분리 등등을 통해 만들어진다고 생각합니다. '개인의 소유물이 존재'하는 방식은 시대마다 달랐고, 교환과정을 통해 항상 존재했던 교환가치지만 그것이 언제나 전사회시스템을 지배한건 아니죠. 16세기설은 주장들중 하나이고 전 19세기에서야 비로서 전세계적인 자본주의 시스템이 이루어지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그냥 가난한 사람들이 아니라 현대빈곤이 사회문제로 본격적으로 나타난 것도 18세기 말 이후부터라고 알고있습니다.

현대의 세련된 금융시스템이 나타난 것은 근대의 일이지만, 자본주의적 생활양식에 따른 빈곤 문제는 농경이 시작된 이후 곧바로 나타난다고 봅니다. 자본주의적 부익부빈익빈 현상은 농경과 같은 자본투입에 비례하는 생산활동이 나타나면, 곧바로 시작된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농사지어 먹고 사는 A, B를 가정합니다. A도 소가 한마리, B도 소가 한마리 있고, 농경에 따른 가치생산은 소의 노동력에 대략 비례한다고 가정하지요. 재수없게도 B의 소가 병들어 죽고, A의 소는 새끼를 낳아 두 마리가 되었습니다. 농사를 지어야 하는 B는 A에게 소를 빌립니다. 중요한 건, "빌린다"는 것입니다. A가 소 한마리를 B에게 거저주지 않는 이상 B는 A에게 어떤 형태로든 대가를 지불해야 합니다. A는 소를 빌려줌으로써 "소유권"을 행사하여 경제적 가치를 생산하게 되고, 이것이 반복되면 A는 놀고 먹을 수 있게 됩니다.

A가 그냥 놀고 먹게 될까요? 상대적으로 풍족한 식량을 바탕으로, 자식을 많이 낳고, 소를 더 잘 돌봐서 소의 숫자를 늘이고, 땅을 더 많이 개간하여 경작지를 늘입니다. 빈익빈부익부는 소유권이 존재하고 자본의 투입을 통해 가치생산이 더 많이 발생하는 즉시 나타나는 일반적인 현상입니다. B의 자식은, "아빠, 아빠는 왜 더 열심히 일하는데 A보다 먹을게 없는거야?"라고 말을 할 겁니다.

자본주의 시스템이 사회에 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은 물리적 화폐에 의존하지 않는 금융시스템이 발달하면서 더욱 강력해졌지만, 물리적 화폐가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우리 일상생활에서 볼 수 있는 자본주의적 부익부빈익빈 시스템은 아주 정교하게 나타나게 되고, 고려, 조선의 경제만을 놓고 보아도, 그 특징이 지금과 별반 다르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동물사회에서 자본주의적 병폐가 나타나지 않는 것은 동물에게 소유물이 없고 - 재화를 소유하기 위한 지능과 수단이 부족하기 때문에, 이동을 하면서 물건을 들고 다닐 수 없기 때문에 -, 소유를 통한 권력구조보다 물리적, 육체적 힘이 지배하는 사회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앞에서 언급된 '현대빈곤'문제라는 것에 대해, 과연 그것이 과거의 빈곤과 뚜렷이 구분되는 근본적 차이가 있는 것인지 의심되고, Aragorn은 본질적으로 농경사회 이후의 모든 빈곤은 동일하다고 봅니다.

현대빈곤과 근대이전 시대의 빈곤은 다릅니다. 근대이전시대에 대체로 가난은 치료해야 할 질병이었고 모든 사회는 일종의 상호부조를 통해 극단적인 빈곤이 발생하지 못하도록 억제했습니다. 그것이 그 사회의 존립조건 이었기 때문이죠(그렇다고 근대이전 시대를 찬양하는 건 아닙니다. 과거가 좋았다는 건 아닙니다). 하지만 자본주의 세계에서 빈곤은 구조적으로 생산되는 필수조건입니다. 가령 인클로저 운동을 통한 도시빈민의 형성은 저렴한 임금의 노동자를 얻기 위한 기반이 되었죠. 봉건 제도는 그런 정도의 빈민이 발생한다면 붕괴되고 말죠. 하지만 자본주의는 그런 빈민의 형성을 자신의 기반으로 합니다.

이러한 빈민형성은 산업사회가 시작되던 초기의 단순 육체 노동자를 필요로 했던 시대에 국한된 것 아닙니까? 그리고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일 수도 있는데, 빈민층이 형성되고 때마침 적당한 산업기술의 발달, 자본의 형성이 맞물려 올리버 트위스트가 살았던 사회의 모습이 만들어진 것 아닌가 보고 있습니다.

아라고른님이 든 예는 현대 자본주의의 사회적 관계를 일반화한 거라고 생각합니다. 대부분의 비자본주의 사회에선 농사지어먹고 사는 A, B가 서로의 소유권을 극단적으로 주장하지 않았습니다. 소유권의 발달은 대체로 부르주아가 주도한 근대국가의 발달과 함께합니다. 또 A는 일정정도 풍족해지면 현대 자본주의 사회의 일반적인 경향처럼 그렇게 자신의 재산을 늘리러 노력하지 않습니다. 과거의 많은 공동체사회가 유지될 수 있었던 이유중 하나는 잉여 생산물을 비축하지 않고 낭비해 버렸기 때문입니다. 화폐 또한 일반화된 건 자본주의 사회 이후부터입니다. 화폐가 다른 모든 상품믈 통괄하는 일반적 가치형태가 되면서 사람들은 화폐가 줄 수 있는 것보다 화폐자체에 집착하게 되었다는 분석은 유명하죠.

-칼폴라니의 <거대한변환>에 위의 예가 잘 설명되어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본주의의 "자연발생설" 혹은 역사의 오래됨을 강조하기위해, 위의 Aragorn이 든 것 같은 예를 들지만, 그것은 폴라니에 따르면, 오히려 자본주의의 예를 근대 이전의 사회에 적용시킨 것이고, 근대이전의 사회에서는 공동체전체가 강조되는 사회였다고 합니다. 이는, 현대의 많은 문화인류학적 연구에서도 확인되는 내용입니다. 예를들어 마빈해리스. --GooGoo22

잉여 생산물이 딱히 쓰일 곳이 없다면, 그렇습니다. A가 적당히 일하고 먹고 살 수 있을만큼 되었는데, 더이상 욕심낼 필요가 없습니다. 저만해도 일정정도 풍족해지면 재산을 늘이기 위해 크게 노력하지 않을 겁니다. 유통시스템이 발달하고 끊임없이 소비를 자극하는 것들이 생겨나기 때문에 경쟁이 심화되는 것도 크다고 봅니다.
문제는 개인이 아니라 끊임없는 증식함으로써만 성립하는 '자본'의 존재죠.

역사를 공부하는 이유중 하나는 지금과 다른 세계를 보고 상상력을 기르는 것이라 하는데 아라고른님은 같음만을 보고 계신 것 같습니다. 전 과거 시대의 경제를 자세히 보면 지금과 그 특징이 매우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놈

일부러 같은 것만 보려고 하는 것은 아닙니다. B) 당연히 지금과 다른 것도 있고, 같은 것도 있지요.

우리가 빈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취할 수 있는 실천적 행동은 무엇입니까? 돈을 잘 벌어서 빈곤에서 벗어난다는 위에 언급된 이야기 말고.

돈 잘벌어서 빈곤에서 벗어나는 건 개인의 수준에선 옳은 말입니다. 하지만 한 개인이 빈곤에서 벗어난다고 사회의 빈곤문제를 해결되는건 아니죠. 그리고 만약 '현대사회'란 것이 지구인구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아프리카와 남아메리카, 아시아의 여러지역을 포함한다면 현대사회는 불평등이 심화되고 있으며 정보는 독점되고 있습니다. 시장에서의 무한경쟁시스템이 엄청난 생산력의 발달을 가져왔고 적어도 상당기간 동안은 계속될 것이라는데 동의하지만, 그건 이런 시스템이 훌륭하기 때문이 아니라 다만 강력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실천은? 찾아봐야죠. 사실 좌파라고 불리는 사람들은 대부분 이문제의 해결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좌파와 우파의 구분기준은 평등의 이념이라는 주장에 전 동의합니다. 물론 이 문제의 해결은 개인들의 결단이나 의식적인 실천과 더불어 자본주의 체제의 모순이 폭발함으로써만 가능할 것 같긴 합니다. 그리고 한가지, 개인이 빈곤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지 않는가라는 생각때문에 숙명론에 빠지셨다면, 그런 숙명론은 언제나 지금의 세계를 유지시키는 사유방식이라고 말하고 싶네요. 한 개인이 사회적인 빈곤 문제를 해결할 수 없는건 당연합니다. 상당히 집단적인 노력(가령 소련조차)도 빈곤문제의 해결에 실패했습니다. 우선은 그냥 맘 편하게 가지고 한가지 사회적 실천에라도 연대하면 되지 않을까요? 머, 사랑의 리퀘스트 이런건 말구요. 전 개인에게 지나치게 엄격한 윤리와 희생을 강요하는 건 좀 싫습니다. 어쩔 수 없는 경우가 많긴 하지만.. .

개인이 빈곤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지 않는가라는 생각때문에 숙명론에 빠지셨다면
개인이 개인의 빈곤문제를 해결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회적 빈곤은 인간의 사고방식과 모든 생활양식이 뿌리채 뒤집어지기 전에는 절대 해결되지 않는 문제라고 봅니다. 고대로부터 시작된 사회적 빈곤을 혁명적 전환 없이 해결할 수 있다고 믿는 것이 오만이고 착각이라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인간의 뇌가 모두 연결되어 의식이 공유된다거나, 개미사회과 같은 통제된 집단을 형성하거나, 영화 매트릭스와 같은 시스템이 갖추어지지 않는다면, 사회적 빈곤 문제가 근원적으로 해결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아, 문명의 발달을 모두 뒤돌리고, 풍요로운 자연자원의 채집, 수렵 생활로 돌아가는 방법도 있겠습니다. 지구의 크기를 감안하면 90% 이상의 인구를 모두 죽여야할테지만.

자본주의체제의 모순이 폭발하는 일은 없다고, 혹은 폭발해봐야 달라지는 것이 없다고 봅니다. 경제공황과 같은 일시적 시스템마비는 발생할 수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것을 계기로 인간의 사유와 생활방식이 달라지지는 않습니다. 개개인의 생활방식은 수천년 전이나 지금이나 유사합니다. 예수가 살던 시대, 혹은 그 이전에도 고리대금업자가 있었고, 지금도 고리대금업자가 있고, 그들은 매우 유사한 방식으로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특별한 남의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 자신의 특징적 한 단편입니다.

결국 자본주의체제가 종국에 자멸한다 하더라도, 그 라이프사이클이 반복될 뿐이라는 것입니다.

사회적 빈곤은 인간의 숙명이 아니며 전환을 통해 해결될 수 있다고 봅니다. 인간의 오만은 오히려 지금 자신의 처지를 절대시하고 그것이 변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는데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놈

어떤 종류의 전환을 통해 타개책을 내어 놓을 수 있을지 궁금합니다. 사회적 빈곤의 범위를 좁히고 조금 더 구체화시켜본다면, 앞에서 언급된 사회적 사고에 해당하는 경우 말고, 나름대로 열심히 일하는 것 같은데 상대적으로 최저의 생활수준을 유지하는 대다수 가난뱅이 월급쟁이 등의 문제 말입니다. 절대적 기준에서 보자면, 지금 이 순간의 최저층의 생활수준은 과거보다 분명 더 낫습니다. 그러나 상대적 괴리는 줄어들지 않고 있습니다.

사회적 실천에라도 연대하면 되지 않을까요
Aragorn이 보기엔 또다른 "종교적 문제"라고 봅니다. 신이 없다, 신은 존재한다, 이런 논쟁과 다를바 하나 없는 문제라는 것입니다. "연대"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무엇인가 있다"라고 말을 하지만, Aragorn이 보기엔 그 뒤에 아무것도 없습니다. 종교적 믿음을 통해 이 세상이 정화되고 모두가 살기 좋은 세상이 된다고 말하는 것과 똑같이 들린다는 것입니다.

Aragorn에게 신이 있다는 것을 보고 느끼게 해준다면, 그 신이 내게 의미가 있다면, 그에 맞는 믿음을 가질 겁니다. 좌파의 연대도 똑같습니다. 하지만, 일부 종교인들처럼, 신을 믿지 않는다고 죄인취급하고 사람을 백안시하는 것과 마찬가지로(예수천국불신지옥), 믿음을 주지 못하는 좌파의 연대에 동참하지 않는다고 비윤리적이고 무지한 자라 공격하는 것은 매우 짜증나기 이를데 없죠.

전 아라고른님이 좌파연대에 동참하지 않는다고 비난하지 않았습니다. 그런 뉘앙스가 느껴졌다면 죄송합니다. 저 다만 어떤 실천방법이 있느냐는 질문에 이런 방법이 있다고 생각한다는 것뿐이었습니다. 그리고 '연대'가 단지 종교적인 문제가 아니라 실제로 뭔가를 만들어 왔다는 건 노동조합의 역사만을 검토해도 알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뭐, 달리 생각할 가능성이 많으신 것 같지만서두. --그놈

노동조합의 역사는 물론 높이 평가합니다. 다만, 지금 우리 사회 가난뱅이 월급쟁이의 문제는 노동조합과 같은 방식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문제라고 생각되기에 그렇습니다. 노동조합의 발달로 빈곤의 상당한 문제가 해결되었고, 되고있지만, 이런 것들은 근본적으로 최저수준의 보장을 확보한 것이 크다고 봅니다. 문제는 급여 몇십만원 더 받아서, 근무시간 몇시간 줄여서 - 물론 중요한 문제이긴 합니다만 -, 생활고에 허덕이는 삶의 방식 자체가 바뀌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뭔가 다른 것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네, 뭔가 다른게 필요하죠. 근데..

이상적인 경제체제에서 빈곤의 문제가 어떤 식으로 해결됩니까? 예를 들어, 모든 사람의 재산이 동일해서 빈부의 차가 사라집니까? 아니면, 기간을 정해놓고 빈부의 차를 없애어 버립니까?(구약성서에 보면 희년이라고 해서 몇년에 한번씩 빚을 모두 없애버리는 그런 제도가 있습니다) 각자 열심히 노력해서 충분히 경제적 능력을 갖춥니까? 사회가 구성원들을 골고루 잘 교육시켜주고 경제적 능력을 갖추어 줍니까? 어떤 방식이 가능합니까?

이상적인 경제체제는 잘 모르겠습니다. 다만 가능성을 열어놓고 지금의 문제 해결을 위해 노력하다보면 어떤 지역에서는 어떻게 해결하고 또 다른 곳에서는 또 다르게 해결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모호한 생각뿐입니다. 물론 자본주의가 아니란 건 분명합니다.

Aragorn이 보기엔 인간의 이기적 본성을 어느정도 충족시켜주면서 빈곤의 악순환 문제를 해결해주는 합리적 경제가치 생산 시스템을 구축하는 것이 훨씬 빠르고 현실적이고 만족스럽고 옳은 방법이라고 봅니다. 뜬구름 잡는 이야기로 현실을 도외시할 것이 아니라, 몇가지 중요한 부익부빈익빈의 핵심적인 요소를 제거함으로써 사회 전체의 안정성과 위험을 감소시키는 것이 더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Aragorn이 누구나 빈곤의 문제로, 빈곤의 공포에 직면할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유는 간단합니다. "나는 절대 빈곤해질 가능성이 없어."가 되면, 죽었다 깨어나도 사회적 빈곤 문제가 해결될 수 없습니다. 자동차를 타지 않는 사람이 교통사고보험에 가입하지 않는 것처럼, 빈곤해질 가능성이 없는 사람은 빈곤문제를 해결하지 못합니다. 누구나 경우에 따라 그 사회에서 가장 빈곤해질 수 있어야 하고 - 직접적인 자신이 아니어도 됩니다. 가까운 인척으로도 됩니다. - 그래야 그 절대적 빈곤의 수준에 대해 사회적 합의가 가능하고, 사회적 대응이 가능해집니다. 그런 면에서 현실적인 해결책은 안정되지 않은, 다소 불안한 역동적인 사회구조가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고만고만한 수준에서 안정화되어 버리는 선진국이 결코 좋은 것이 아니라고 봅니다.

이러한 시스템을 가능하게 만들어주는 근본적인 원동력은 인간의 생물학적 특성이, 똑똑한 부모 밑에 항상 똑똑한 자식이 태어난다거나, 잘 생긴 부모 밑에 항상 잘생긴 자식이 태어나지 않는, 인생지사 새옹지마의 특징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만일 어떤 우등한 특질이 특정 계층에서만 유전되어 버린다면,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은 절대 깨뜨릴 수 없는 인도의 카스트 제도입니다. 시간이 지나면 종분화가 되어 버릴지도 모르겠군요.

시장 아래서 빈곤의 공포에 직면하게 되면 그는 경제적 가치를 위해 전력을 기울이겠죠. 전 그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공포를 통해 일면적 인간을 만드는 시스템. 차라리 공포를 제거함으로써 다면적으로 자신을 발전시킬 수 있게 한다면 더 풍부한 사용가치들을 생산할 수 있지 않을까요?

엇, 글쎄요? 논의가 겉돌고 있는 것 같은데 말입니다. 빈곤은 매우 상대적인 개념이고, 오늘날에 있어 빈곤은 과거의 입에 풀칠하기 힘든 절대적 빈곤과는 달리, 상대적 괴리감, 좌절감, 헤어날 수 없다는 자포자기에 더해 가족간의 갈등으로 가족이 해체되고 자식 교육이 망가지는 그런 상태를 가리킨다 볼 수 있습니다. 결국 이런 과정을 거쳐 극빈층으로 떨어지는, 빈곤의 악순환에 빠져들게 되지요. 모든 사람들이 최소한으로 먹고 입고 잘 수 있어도, 사회적 빈곤 문제는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상태라는 것입니다. 즉, 최저수준에 대한 빈곤의 공포는 항상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제가 가장 걸리는 문제는 자본주의적 경제활동을 통해 단기간에 부를 쌓을 수 있는 방법이 존재하지 않으면, 이들 계층은 안정화된 사회 시스템 내에서 영원히 빈곤계층으로 남을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빈곤의 상당한 원인이 자본시장에서의 소외라는 것을 강조하는 것도 그 때문입니다. 즉 모든 계층이 자유롭게 자본시장에 참여할 수 있는 기회 자체가 빈곤층의 문제를 근원적으로 해결해줄 수 있는 열쇠 아니냐는 것이고, 이러한 길을 열어놓기 위해서는 자본주의의 틀이 기본적으로는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과거의 혈연공동체, 지역공동체를 되살릴 수 없다면 말입니다.

Aragorn님의 주장을 신자유주의적이라고 한 이유는 1)시장에서의 경쟁을 통한 가능성의 중시 2)근본적인 이기적 인간 본성의 가정 3) 인류 역사는 언제나 시장경제의 역사였다고 보는 점 즉 자본주의가 자연스러운 것이라는 주장 4)빈곤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점 등이었습니다. 그리고 신자유주의자들도 자신들의 시스템을 통해서 빈곤을 최소화 할 수 있고 인간능력의 최선화를 꾀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그놈

현대의 금융경제시스템을 절대적 국가권력이 합리적으로 통제할 수 있고, 절대적 국가권력이 합리적으로 자본을 적재적소에 투입할 수 있고, 부동산 소유를 없앨 수 있다면, 시장경쟁과 자본주의적 접근 방법이 필요없다는 것에 동의할 수 있습니다. 공산주의가 실질적으로 가능하다면, 이라는 말과 동일한 것인가요? 이러한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면, 빈곤의 악순환에서 빠져나오는 유일한 방법은 자본시장에 참여하거나, (매우 자본주의적인) 자영업을 하거나, 2세 교육을 통해 고소득 전문직을 얻어 빠져나오는 방법밖에 없다고 봅니다.

약간 옆으로 새는데 Aragorn의 기본적인 성향이 자유주의라 할 수 있고, 억압과 틀을 싫어합니다. 과거 빈곤문제를 해결해 주었던 강제적 혈연공동체, 지역공동체 등이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하고, 그 틀 안에서 희생되었던 개인의 인권과 존엄성에 대해 간과할 수가 없습니다. (결코 지금의 기준에서 인간적이고 이상적인 그런 사회가 아니었습니다.)

전쟁 와중에 집에 남겨진 여자들이 경제 활동을 시작하여 전통적 가치관의 틀에서 벗어날 수 있었고, 그 결과는 전통적 가족의 해체로 이어지는 것이 피할 수 없는 필연적인 결과라고 생각됩니다. 과거로 되돌아갈 수 없는 큰 강을 이미 몇개나 건넜다는 것이고, 지금 상태에서 개개인의 경제적 자립, 그에 따른 극심한 경쟁 등이 피할 수 없는 운명으로 판단됩니다. 이 상황에서 빈곤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인가, 고민해 보아도, 답은 쉽게 나오지 않습니다. "최소한은 보장해 줄께. 나머지는 네 인생 네가 알아서 살아라."는 것밖에 없다는 것이죠.

Aragorn님의 주장을 신자유주의적이라고 판단하기에는 역시 너무 거시적인 기준을 개인의 사고를 제단하는 데 사용한 오류가 있는 것 같습니다. 신자유주의는 현재 학자들이 세기말의 자본주의를 과거의 자본주의와 구분짓기 위해 사용하는 용어이자 사회주의자들이 현재의 자본주의를 규정하는 하나의 틀이므로 한사람의 생각을 표현하는 단어로는 적당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다만 Aragorn님이 합리적 사고에 집착함으로써 오히려 객관성의 오류에 빠져들고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해봅니다. 사실 우리는 교육을 통해 합리적으로 사고하는 법을 배운 것 같지만 사실은 자본주의적 사고를 당연하게 여기도록 열심히 이데올로기를 주입받은 측면도 없지 않기 때문이지요..또한 Aragorn님이 가정하는 몇가지 사실또한 별로 합리적인 가정이 아닌 것 같습니다. 자본주의적 경제활동을 통해 단기간에 부를 축적하는 방법이 과연 빈곤계층에게 가능할까요? 모든 계층이 자본시장에 참여할 수 있는 기회가 균등하게 주어진다고 보십니까? 아메리칸 드림이라는 말을 아신다면 이는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일이란것은 명확합니다. 그리고 시스템의 문제를 언급하셨는데 인류가 언제 시스템을 설계하고 그 시스템에 맞추어 산 적이 있다고 보십니까? 사실 헤게모니는 좌파적이건 합리적이건 지식인보다 자본가들 그리고 자본주의와 민주주의를 교묘히 결합시킨 정치가들에게 있습니다. 권력이 존재한다고 인정할 때 현재 노동자계층이 얻으려고 하는 것은 바로 권력입니다. 그들의 주장을 조금이나마 민주주의적 동의에 의해 실현시킬 권력말입니다. 정치경제학이란 용어에서도 볼 수 있듯이 빈곤이란 문제는 정치적 문제이기도 합니다. 시스템적 문제로 빈곤의 문제를 환원하려는 시도는 별로 근원적인 해결책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Echo

  1. 자본주의적 경제활동을 통해 단기간에 부를 축적하는 방법이 빈곤계층에 가능할까?
    이것이 불가능하다면 빈곤계층은 영원히 빈곤계층일 뿐입니다. 월급쟁이의 빈곤문제는 절대 해결하지 못합니다. 그리고 실제 사회를 관찰하고 경험한 것으로 이야기하는게 아니라, 막연한 추측과 상상으로 이런 의문을 제기하는 것이라면, 더이상 이야기하고 싶지 않습니다.
    자본주의적 경제활동, 특히 소규모 자영업은 제대로 교육받지 못한 평범한 사람이 빈곤에서 탈출하는 유일한 방법이며, 여전히 유효한 방법입니다. 평범한 시장바닥에 위치한 조그만 떡볶이 가게, 김밥 가게, 이런 자영업자들이 모두 빈곤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착각입니다. 포장마차 같은 것도 잘 운영하면 연봉 1억짜리 월급쟁이 전혀 부럽지 않습니다.
    얼마 전 동네에 새로 큰 빌딩이 올라갔는데, 두 부부가 10년 동안 조그만 정육점 운영해서 번 돈입니다. 아무리 못해도 그 빌딩 짓는데 20억 정도 투자했을 겁니다. 무슨 특별한, 예외적인 상황이 아닙니다.
  2. 모든 계층이 자본 시장에 참여할 기회가 균등하게 주어질까?
    당연히 완전히 균등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빈곤 계층이 자본 시장에 참여할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것도 큰 착각입니다. 현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자본 시장에 참여할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 경우는 회사에만 갖혀 있는 월급쟁이, 뭣도 모르는 학생들입니다. 자영업자들은 돈을 직접 만지기 때문에 자본 시장에 익숙하고, 자신에게 잘 맞는 자본 시장을 쉽게 찾아들어갑니다.
    자본 시장이라는 것을 주식시장으로만 좁게 보는 것도 착각입니다. 웬만한 유통시스템은 모두 자본이 맞물려서 재화를 사고 팔아 이익을 남기고 있고, 돈으로 돈을 버는 것인지, 유통을 하는 것인지 잘 구분되지 않습니다.
  3. 노동자 계층이 정치 권력을 얻어야 한다는 것이 지금의 논의와 무슨 관계가 있는지 모르겠군요?
    --Aragorn
소자본의 상업적인 경제활동을 통해 부를 축적한 실례를 드셨는데 빈곤의 문제를 개인의 문제로 생각하신다고 하여도 우리사회에는 성공하는 사람 못지않게 더욱더 빈곤한 처지로 전락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신다면 이는 그다지 빈곤계층에 적합한 해결책은 아닌 것 같습니다. 저는 Aragorn님이 빈곤계층을 분류하는 정확한 기준이 무었인지 좀 알고 싶습니다. 단지 소득수준을 기준으로 구분한다고 한다면 대다수의 월급쟁이가 정육점을 운영하는 사람보다 월급을 적게 받는다고 생각하셔서 월급쟁이들을 빈곤계층안에 포함시키시는지 여쭈어보고 싶네요..왜냐하면 Aragorn님은 빈곤계층이 단기간에 부를 축적할 수 있다는 예로써 정육점을 운영하는 부부를 예로 들면서 웬만한 월급쟁이 부럽지 않다고 하셨고 또한 윗글에서는 빈곤계층으로서 월급쟁이를 포함시키셨으니 말입니다. 그래서 1번에 대한 답은 그다지 논리적이지 않은 것 같습니다. 그리고 Aragorn님께서는 빈곤계층 모두가 자본시장에 참여할 수 있는 기회를 열어놓기만 하면 빈곤의 문제가 치유될 수 있다고 윗글에서 말씀하셨는데 구체적으로 어떤 과정을 통해 빈곤계층이 그 기회를 통해 빈곤계층을 벗어난다는 말씀이신지 .. 이것도 정육점 부부의 경우나 포장마차같은 자영업에 의한 방법과 비슷한 맥락인지 아니면 다른 구체적인 방법이 존재한다는 말씀이신지 잘 모르겠습니다.유일한 방법이라고 언급하신 걸 보면 빈곤계층이 모두 소자본을 가지고 자영업을 해서 자본시장에서 성공할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하시는 것 같은데 상점을 운영할 가게라도 가지기 위해서 필요한 소자본을 소유하려면 빈곤계층이 아니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또 포장마차를 잘 운영하면 웬만한 월급쟁이 부럽지 않다고 말씀하셨는데 우스개소리 같습니다만 전국의 포장마차 하시는 분들이 모두들 능력이 안돼서 포장마차를 잘 운영하지 못해서 월급쟁이만큼 돈을 못 번다고 주장하시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Echo는 빈곤계층의 대다수를 구성하는 이들중의 하나가 저임금 노동자라고 생각하고 그래서 노동자계층과 빈곤계층의 교집합이 상당히 크다는 가정하에 노동자들의 빈곤을 언급하면서 이 문제가 정치적인 문제와 맞닿아 있는 문제라고 생각해서 정치권력의 획득과 부의 정당한 분배가 빈곤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데 권력의 문제를 언급하였던 것입니다.--Echo


GooGoo22가 보기에, 현 사회경제 체제하에서, 빈곤의 문제로 빈곤의 공포에 직면하는 것은 사회경제적 위치에서 밑바닥쪽에 위치한 사람들이지, 사회의 윗쪽에있는 사람들은 절대 아닙니다. 물론, 사람들은 자신의 initiative를 잘 발휘할 수 있는 사회적 보상체계가 있는 쪽에서 보다 더 많은 잠재력을 발휘할 수 있고 그러한 사람이 많은 사회가 발전할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유인 요인이 빈곤이라고 생각하다니.. 참으로 놀랍습니다. 근대초기의 임금철칙의 현대적 부활로 보입니다.

무슨 말인지 와닿지 않는데, 당연히 빈곤의 공포에 직면하는 것은 절대적 빈곤에 가까워지는 사람입니다. 사회의 위쪽에 있는 사람들은 당연히 지금 가진 것이 많기 때문에 당장 빈곤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머리 속에 꽉 주입된 선입견으로 계속 같은 식의 말을 반복하는 것 같은데, 누구나 빈곤의 공포에 직면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은 경제 문제에 있어 예외적인 절대적 권력자가 존재해서는 안 된다는 것 뿐입니다. 근대 초기의 임금 철칙과도 별 상관이 없습니다. --Aragorn

글쎄... 무엇때문에 그렇게 공격적으로 나오는지 알 수 없습니다. 답답하긴 저도 마찬가지입니다만. 사람이 대화를 하는 것은 상대방의 생각이 어떤지 알고 싶어하기 때문입니다. 만약 아니면, 아니라고하고 그 정당한 이유를 댈 수 있으면 족합니다. deleteme.

GooGoo22가 보기에, Aragorn의 사고를 상당부분 지배하고 있는 것은 다윈의 진화자생존이라는 개념인 듯 보입니다. (물론 그러한 단어를 직접사용하는 것 같아보이지는 않지만) 하지만, 그러한 개념을 사회경제적인 방면에 적용하는 것은 상당히 위험한 결과를 낳을 수 있습니다.
다윈의 진화, 적자생존에 대해 정확히 알고 쓰는 말하는 것인지 모르겠는데, 다윈의 진화, 적자생존을 잘못 이해하는 것은 어느 경우이나 위험한 것이고, 사회경제냐 아니냐를 가리지 않습니다. --Aragorn

그럼에도, GooGoo22는 진화와 적자생존이라는 관점을 조심스럽게 적용해 빈곤의 문제를 한 번 살펴볼까 합니다. 무한경쟁=적자생존은, 우수한 개체(군)이 살아 남과 열등한 개체(군)이 도태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렇다면, 과연 무엇이 우수하고 열등한 것을 결정하는 것일까요? 그것은 바로 주변상황입니다. 주변상황에 잘 적응하는 개체가 번성하겠죠. 이것이 아마도 그 상황에서 LocalOptima이겠죠. 하지만, 주변여건이 바뀌면 그 LocalOptima도 바뀔 것입니다. 중생대에 공룡이 번성했으나, 신생대에 포유류가 번성하는 것과 비슷한 것이겠죠. 근데, 한쪽에의 압력이 너무강해(빈곤에의 압력이 너무강해), 한 방향으로의 특화만 강조된다면(경제적 생존에 필요한 노동력투여에만 집중할 수 밖에 없다면), 그런 개체들은 심각한 변화에 살아남기 어렵게 됩니다. 공룡은 당시 가장 훌륭한 LocalOptima였지만, 그것이 오히려 변화에 방해가 되었던 것이죠. 잘 생각해보아야 할 대목입니다.

논리를 잘못 적용시킨 것 같은데, 변화로의 압력이 바로 '빈곤에의 공포'입니다. 빈곤의 공포에 민감하게 반응하는데, 변화에 살아남기 어렵게 된다는 것은 이해할 수 없는 논리입니다.
빈곤에의 압력이 너무 강하면 문제가 될 수 있다고 했는데, 누가 빈곤에의 압력이 강하면 강할수록 좋다는 주장을 하고 있습니까? 자신의 주장하는 것이 어떤 것을 가정하고 있는지,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 것인지 정확히 되새겨볼 필요가 있습니다. 답을 정해 놓고 논리를 끼워맞추지 말아줬으면 합니다.
그리고 Aragorn은 똑똑하고 우수한 개체가 살아남는 것이 좋으니까 그렇게 하자, 열성 개체를 제거해 나가자, 이런 식의 황당한 주장을 하는게 아닙니다. 이런 것은 진화와도 전혀 관련이 없고, 진화나 생물학적 적자생존의 논리와 연결시키지 않기를 바랍니다. --Aragorn

글쎄, 닭이 먼저인지 달걀이 먼저인지는 머리속에서만은 알 수 없는 일입니다. 어느쪽의 주장이 맞는지 검증해보기 위해서 우리는 증분석 혹은 EmpiricalAnalysis 라는 걸 합니다. 물론 그 실증분석이란 것도 상당부분 모델을 만드는 사람의 가치관에 영향을 받을 수 밖에 없습니다만. 부자부모/권력자부모 밑에서 부자/권력자자식들이 많이 나오는지, 아니면 사회가 개방적이어서 정말로 개천에서 나는 용이 더 많은지는 실제 세어보는 수 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탁상공론으로 아무것도 결론 나지 않습니다. 그리고 반복적으로 '답을 정해놓고 논리를 끼워맞추지말라'고 요구하는데 글쎄요.. 저야말로 왜 그런말을 듣는지 알 수 없습니다. 가능하다면 구체적으로 설명부탁드립니다.-GooGoo22


이러한 시스템을 가능하게 만들어주는 근본적인 원동력은 인간의 생물학적 특성이, 똑똑한 부모 밑에 항상 똑똑한 자식이 태어난다거나, 잘 생긴 부모 밑에 항상 잘생긴 자식이 태어나지 않는, 인생지사 새옹지마의 특징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만일 어떤 우등한 특질이 특정 계층에서만 유전되어 버린다면,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은 절대 깨뜨릴 수 없는 인도의 카스트 제도입니다. 시간이 지나면 종분화가 되어 버릴지도 모르겠군요.

GooGoo22가 보기에 위의 주장은 사회적인 요건을 간과한 심각한 요류투성이의 문장이다. 물론 똑똑한 부모밑에 똑똑한 자식이 태어나는 것만은 아니지만, 현재의 체제하에서는 부자 부모밑에 부자 자식이 나올 확률이 엄청나다. 현재 사회에서 성공을 결정하는 요인은 가계의 유전적 요인이 아니라, 가계의 사회경제적인 위치이다. Aragorn이 주장하는 빈곤의 위협에 의한 사회의 역동성유지가 잘 되기 위해서는, 위에도 언급했듯, 모든 사람이 그런 위협에 처할 가능성이 있어야하나, 그 위협은 사회의 중하층계급에만 전가되고, 상층계급에서는 그 부와 성공이 세습되기 마련이란 것이다. 만약 빈곤의 위협에 의한 사회역동성유지가 제대로 추구되려면, 모든 사람은 동일한 선상에서 시작할 수 있는 제도가 보장되어야 할 것이다.
그런 제도로는, 엄정한 세무집행, 높은 상속세율, 양질의 공교육 및 낮은 고등교육 학비 등의 제도가 필요하리라 본다. 물론, 개인이 살아 있을때 자신의 부의 축적은 인정되어야 할 것이다.

몇가지 잘못된 논리를 따라가고 있는데, 빈곤의 위협이 수단이 되어 사회의 역동성이 유지되지 않는다. 사회가 역동적이면 누구나 빈곤해질 수 있는 가능성을 갖게 된다. 순서가 거꾸로 된 것이다.
그리고 부자 부모 밑에 부자 자식이 나올 확률이 엄청나다고 했는데, 실제로 그러한지 유의미한 근거를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부를 상속하기 때문에 그렇다는 것인가? 상속된 재산을 자식이 어떻게 얼마나 쉽게 날려먹는지 주변에서 사례를 잘 보고나서 다시 이야기했으면 좋겠다.
위의 문장이 오류였다면, 이미 우리 사회는 고정적인 신분 계층이 확립되어 있어야 한다. 우리 사회에 고정적인 신분 계급이 존재하는가? 그것이 아니라면, 도대체 무엇이 오류라는 것인가?
우리 사회는 이미 충분히 높은 상속세를 부과하고 있다. 이미 정해진 상속세율을 정확히 지키고 탈세하지 못하도록 조세행정을 잘 적용시키는 것으로 충분하다. 그리고 한가지 착각하는 것 같은데, 우리 사회에서 아무나 허투르게 상속세를 안 내고 빠져나가지 못한다. 가능할 것 같으면 직접 해 보면 안다. 변칙 상속, 증여 등의 잔머리를 굴려서 빠져나가는 것은 모두가 다 아는 대재벌가의 몇몇 뿐이다. 그 덕분에 조세법 등이 많이 발전했다. 그리고 우리사회에 빈곤 계층이 존재하는 것은 삼성의 이재용이 증여세를 포탈한 것과 직접적인 관련이 없다.
만일 부의 상속이 완전히 차단된다면, 이 세상에는 머리가 뛰어난 똑똑한 놈 아니고선 돈을 손에 쥐지도 못하는 사회가 된다. 멍청하고 경제적으로 무능한 사람이 돈을 손에 쥐어볼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부모의 재산을 물려받는 것이다. 왜 이런 기회를 모두 빼앗으려고 하는 것인가?
--Aragorn

모두가 다 아는 대재벌가도 그렇게 교묘하게 빠져나가는데, 그렇지 않은 사람들에게 조세 행정이 잘 이뤄지리라 믿어지지 않습니다. 대체적으로 우리나라의 조세체계는 잘 갖춰있는지 모르겠으나, 실제 적용에 있어, 탈세는 아주 광범위하게 일어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알고 있는한 자영업자는 세금을 제대로 내고 있는 사람이 별로 없으며, 고소득 전문직들도 비슷하다고 합니다. 그리고 부동산관련 재산세 체계도 엉망인것으로 알고 있습니다만. 물론, 본 주제와 밀접한 상속 증여 부문에 있어서는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소득 및 재산세도 제대로 징수하지 못하는 대한민국 국세청이 상속/증여부문에서만 눈부신 활약을 하리라 기대하기는 어렵지 않을까 싶습니다. 증거를 대라구요? 물론 없죠. 저에게 합당한 연구비와 제 노동에 대한 댓가를 지원해주신다면, 연구해볼 용의도 있습니다만. -와타나베노보루


자본시장을 통한 부의 획득이 가능하려면 최소한의 종자돈 (몇천만원의 자본과 그 이상의 빚)을 마련할 수 있어야하고, 그 냉혹한 자본시장에서 종자돈과 leveraged asset을 잃지 않기 위한 최소한의 지식이 있어야한다. 누구나 자본시장에 참가할 수 있지만, 그것조차 할 수 없는 사람들도 많다. 그렇지 않게하기 위해, 사회가 최소한의 안전망과 제도를 마련해야 한다는 것이다. --GooGoo22

사회가 최소한의 안전망과 제도를 마련해야 한다는 것은 이미 충분히 강조되었다고 봅니다. --Aragorn

현대의 금융경제시스템을 절대적 국가권력이 합리적으로 통제할 수 있고, 절대적 국가권력이 합리적으로 자본을 적재적소에 투입할 수 있고, 부동산 소유를 없앨 수 있다면, 시장경쟁과 자본주의적 접근 방법이 필요없다는 것에 동의할 수 있습니다. 공산주의가 실질적으로 가능하다면, 이라는 말과 동일한 것인가요? 이러한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면, 빈곤의 악순환에서 빠져나오는 유일한 방법은 자본시장에 참여하거나, (매우 자본주의적인) 자영업을 하거나, 2세 교육을 통해 고소득 전문직을 얻어 빠져나오는 방법밖에 없다고 봅니다.

GooGoo22가 보기에, 현체제하에서는 위의 Aragorn의 빈곤에서 빠져나오기 위한 방법이 상당히 설득력이 있어보인다. 하지만, 그것이 빈곤에의 강요가 정당화 될 수 없다고 본다. 그리고, 그러한 방법들을 적용하기 위해서는, 거듭강조하듯, 사회적인 장치가 마련되어야 할 것으로 본다. 오히려 무조건적인 빈곤에의 위협은 자본(시장)에서 소외된 사람들을 영원히 그 위치에 머물게 할 뿐이라고 본다. 그리고, 빈민층부모의 초인적인 인내와 자식의 노력으로 계층이동을 할 수 있다는 것은, 현체제유지를 위한 신화와 비슷한 것이라 본다. 물론 그런 case가 가뭄에 쌀나는 정도있으나, 그것은 특수한 경우이다. (같은 경우로 NBA에 목을 메고 있는 미국 뒷골목의 흑인소년들이 있다.) 어째서, 사법고시 합격자중, 부모형제중 사법고시 합격생이 많은 가계에서 합격자가 많은지는 심각하게 생각해봐야 할것이다. 사법고시에서 등락은 매우 미세하게 판가름난다고한다. 1차의 경우 절반이상의 응시생이 커트라인에서 평균 1점이상 차이가 나지 않는다고한다. 주변의 고시생이 있으면, 한 번 문의해보라.

사법고시를 예로 드는 것은 별로 적절치 않다. 한국의 현재 사법고시 시스템은 지나치게 진입장벽이 높은 비정상적인 경우이다. 사법고시 합격자의 수도 적기 때문에 지금의 주요 논의와는 큰 관계가 없다. 친인척 가운데 사시 합격자가 많은 경우 사시 합격비율이 높은 것은 경쟁이 심화된 상태에서 충분히 나타날 상황이다. 사시가 아닌 다른 어떤 직업이라도, 친인척 가운데 유경험자가 있다면, 당연히 사전에 배경지식을 충분히 쌓게 되고, 더 많은 동기부여를 받을 수 있다. 사시에 합격할 수 있는 똑같은 능력을 가진 사람들이 있을 때, 하필이면 사법고시를 선택하는데 있어서, 친인척은 중요한 영향을 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무조건적인 빈곤에의 위협" 같은 한번도 언급되지 않은 개념을 무작정 가져와서 상대방의 논리를 공격하는데 사용하는 것은 스스로의 편견으로 상대방의 주장을 백안시하는 것이다.

GooGoo22가 사법고시를 예로 든 것은 고소득 전문직중 가장 대표적예이기 때문이다. 저소득층부모의 초인적인내와 자식의 노력으로 고소득 전문직으로 계층이동을 할 수 있는 경우란, 적어도 GooGoo22가 알고 있기로는, 사법고시 합격만큼이나 어렵습니다. 부모의 백그라운드 없는 사람이 고소득 전문직으로 이동할 수 있는 구체적이고 일반적인 예를 들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GooGoo22

GooGoo22가 직접 한국 사회의 자본 시장이 어떠한지 확인해 보고 나서 이야기했으면 좋겠다. 자신이 잘 모르는 것에 대해 편견과 선입견으로 색칠해 버리는 것은 곤란하다. --Aragorn

GooGoo22는 한국 자본시장의 첨병으로 일하고 있습니다만...^^; 물론 첨병=장기판의 pawn같은 신세이다보니 거시적으로 한국자본시장을 바라보지 못했을 가능성도 조금은 있을 수 있지만... 그래도, 전혀 모른다고는 매도당할 만큼은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무슨 근거로 AragornGooGoo22가 한국자본시장에 대해 직접확인해보지않고, 자신이 잘 모르는 것에 대해 편견과 선입견으로 색칠해버렸다고 했는지 궁금하다.


우선 이야기할 건 저도 감상적 접근법을 경계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역사가 자동적으로 진보한다고 생각하지도 않고, 나눔과 연대, 이타주의에 무조건적인 신뢰를 보내는건 현실적이기를 원하는 모든 생각들에 있어서 조심해야 한다고도 생각합니다. 감상적 접근법은 사실 좌파쪽에서도 많이 비난받아왔습니다. 그렇다고 완전히 극복된 것 같지는 않고 또 근본적인 수준에선 꼭 버려야할 것이라고 생각하지도 않지만, 일단 현실을 분석할 때는 지양햐야할 태도겠죠. 하지만 인간의 본성은 이기적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지도 않습니다. 제가 아는 한 생물학은 인간의 성격에 대해 상당히 넓은 영역을 배정하고 있습니다. 인간의 성격은 이기적이지도 이타적이지도 않은, 생물적 존재와 사회적 존재의 복잡한(창발성을 지닌?) 구성이라고 생각합니다 (생명과학을 하시는 노스모키안들에게 자문을 구해야겠네요. 음.. 유전자 레벨에서의 이기성이 곧바로 개체나 사회적 레벨에서의 이기성이 되는건 아니다정도? 좀 오래전에 읽어서 기억은 잘 나지않지만;; 이기적유전자에서 이기적인 유전자는 개체수준에서의 이타적인 행위를 하게 할 수도 있다고.. HELP!^^) 근데 사실 이 문제는 어느정도 '믿음'을 포함할 수밖에 없는 것 같네요. 저야 사람들이 보통 '본성'이라고 부르는 것은 대체로 사회적으로 구성되었다고 생각하지요..

빈민형성은 위에서도 조금 얘기한 바와 같이 현재도 계속 진행되고 있습니다. 일정정도의 실업자는 계속 만들어져서 임금압박의 수단으로 사용되고 있으며, 저발전된 제3세계빈민은 선진국 노동자의 임금압박 수단으로 이용되죠. 빈민형성은 단지 산업사회 초기의 모습만이 아닙니다. 위에서도 얘기했듯이 빈곤의 구조적 생산은 자본주의의 존립조건입니다. 지구 전체를 보자면 자본주의가 확대되면서 절대빈곤이 늘었을 뿐만 아니라 빈곤의 비율 또한 높아졌습니다. 잉여생산물은 인구증가를 뛰어넘어서 훨씬 늘어났는데도 말입니다.

빈곤문제의 해결에 자본주의적 방식은 전혀 도움을 주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빈곤을 생산해온 것이 자본주의입니다. 자본주의가 안 좋다고 전근대적인 삶의 방식이 좋았다고, 그리로 되돌아가야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 방식의 해결은 저도 아라고른님과 같이 가능하지도 않고 별로 좋지도 않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자본주의가 발달시킨 생산력을 이용하면서 앞으로 나가야 하는데, 그중 '합리적이고 절대적 국가권력'을 통한 해결책은 가능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어떻게 절대적이고 합리적인 권력이란 게 존재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제대로된 공산주의는 합리적이고 절대적 국가권력을 만들자는 것이 아니라고 알고 있는데...-_-a) 그리고 아라고른님이 말씀하신 모든 계층이 자본시장에 자유롭게 참여할 수 있게 해야 한다는 주장은 빈곤을 확대재생산하고 있는 자본주의의 틀을 그냥 유지해야 하네요. 음.. 가난한 사람은 백만원들고 '참여'하고 부자는 100억 들고 '참여'하겠죠? 자본시장에의 참여엔 기본적인 베이스가 있어야 할 뿐만 아니라 정보취득능력이 있어야 하죠. 또 누군가가 자본시장에서 버는 이득은 또 다른 누군가의 손해가 아닐까요?

그래서 어쩌자는 거냐는 질문이 이런 토론에서 나오는 건 당연하겠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르겠습니다. 어떤 식으로 하진 말아야 한다고 말할수는 있어도 어떤 식이어야 한다고 주장하진 못하겠습니다. 하나의 해결방식이 존재할 수 없고, 오히려 지금과 같이 하나의 생활방식을 강요하는 세계를 부수고 나온 더 나은 세계라면(불행히도 더 나쁜 세계가 올 수도 있겠지만) 제가 예측하고 정의할 수 없는 다양한 방식들이 존재하지 않을까요? 상당히 모호하죠? 네, 자본주의가 승리하고 있는 시대에서 더이상 뭐가 나오겠습니까. 반자본주의 진영은 지역적 모델(가령 사파티스타)은 부분적으로 존재하지만 전체적인 프로그램에선 상당한 회의에 빠져 아직 나오지 못한 것 같습니다. 유럽식 사회민주주의도 반자본주의입장에서 보면 실패한 시도였구요. 어설픈 전 더 혼란스럽구요. 근데 요즘은 반세계화운동에 희망을 걸어보는 것 같습니다. 물론 아직은 미약하죠. 그러니까 이런 시도들이 계속되면서 만들어가는 그 과정 속에서 어떤 플랜이 나올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자본주의적 생산관계 아래에선 잉여가치로 생산되어 자본이 취득하며 자본자신의 목적을 위해 쓰여지는 부분이 개체의 발전을 위해 쓰여진다는 것 정도? 흠.. 더 모호하군. 어쨌거나 생산수단의 사회화?) --그놈

Aragorn의 토론

결론적으로 Aragorn의 사상이 신자유주의라는 비판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가 되겠습니다.
Aragorn의 사상이 신자유주의라는 문장이 비판인가요? Aragorn 님의 주장이 신자유주의가 아니란 말씀인가요?
Aragorn의 생각에 대해 그것이 신자유주의다라고 말하는 것을 이해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신자유주의라고 말하는 것은 실질적으로 "자연발생적 시장"과 경쟁원리에 충실해야 한다, 그 구체적인 방편으로 세계화, 시장개방 등을 주장하는 것이고, Aragorn은 세계화, 시장개방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적절한 통제와 경제체제의 변화가 필요하다면, 그것이 자본주의적 일반적 특질에 반하더라도 전체를 위해 얼마든지 강요할 수 있다는 입장이지요. 두 개념이 별로 연관관계가 없어 보이는데, 이상하게도 이 페이지에서는 사회주의적 좌파연대가 아니면 모두 신자유주의라고 규정해버리는 경향이 있습니다. Aragorn의 사상을 규정한다면, 차라리 개똥철학이라 말하는 것이 정확합니다. 어떤 교과서의 이론에 상당한 영향을 받은 것도 아니고, 섬세한 사유와 논리, 연구가 뒷받침된 것도 아닌, 그냥 직관적인 개똥철학 말입니다.

deleted

저는 자본주의냐 사회주의냐는 식의 구분은 별 의미가 없습니다. 앞에서 이미 정리했지만, 수천년 동안의 인간의 역사를 살펴보건데, 자본주의적 생활양식은 인간이 피할 수 없는 본성에서 비롯된 자연스러운 것이라는 점입니다. 좁은 의미의 자본주의에서 벗어나 새로운 대안을 찾는 것은 물론 좋습니다. 그러나 적어도 지금 이 순간에는, 모두가 (거의) 동등한 입장에서 경제활동을 펼칠 수 있도록 시스템을 갖추는 것이 더 좋다고 생각하고, 극빈층을 제외하고는 모두가 자본시장에 뛰어들어 나름대로 살길을 모색하는 것이 더 낫다고 봅니다. 또한 빈곤의 악순환을 끊기 위해 최소생활수준과 공교육을 사회가 보장해준다는 것 이상의 무슨 특별한 주장이 나오지도 않습니다. 도대체 어떻게 하자는 것인지? 그냥 기도드릴까요?

어쨌거나 중요한 토론의 요점은, 자본주의의 큰 틀을 곧바로 부정하지 않는다고해서 신자유주의라고 말하는 것은, 하늘의 비행기를 보고 별이라 말하는 것과 별반 다를바 없습니다. 사실 어떻게 보면 신자유주의라는 것은 일부 좌파연대가 세계화, 시장개방에 대응하기 위해, 그 상대를 규정하기 위해 만들어낸 용어로 보이는데(정확한 용어의 기원이 어떻게 되죠?), 요즘 이야기되는 걸 보면, 마치 과거의 빨갱이 색칠하듯, 아무 것이나 다 신자유주의라고 이름 붙여 버린단 말입니다. 신자유주의의 정체도 모호하게, 눈에 보이는대로 무조건 그 틀 안에 넣어버리는 것이죠.

신자유주의의 정체와 장점, 단점을 명확히 집어내려면, 어떤 특징을 갖고 있는 것이 신자유주의인지, 왜 그런 방식에서 특정한 문제가 발생할 수밖에 없는지 명확히하고, 지금 우리가 이야기하는 특정한 주제가 어떻게 해서 신자유주의인지 보여주어야 합니다. 밑도 끝도 없이, "에~ 그건 (반동 자본가 계급의) 신자유주의다~"라고 말하면, 매우 당황스럽습니다. 저 사람이 과연 내 글을 제대로 읽고서 그런 말을 하는 것인지 말입니다.

그리고 여전히, 이상적 경제시스템이 어떤 것인지, 그 안에서 사회적 빈곤문제가 어떻게 해결될 수 있는지는 아무도 이야기하지 않고 있습니다. 아주 대략적이나마, 자세히는 아니더라도 주요 골격과 특징이나마 설명해 줄 수 있어야죠. 아이디어 수준이라도. --Aragorn

deleted
파이n등분 이야기는 무슨 이야깁니까? 사회안전망에 대해서는 앞에서도 누차 이야기했지만, 빈곤의 악순환에 빠지지 않을 정도의 사회안전망이 필요하고, 우리가 그 수준에 대해 사회적 합의를 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고 반복하고 있습니다. 실업수당, 고용보험 당연히 필요하고 저도 열심히 내고 있습니다.
엄밀히 말해 계약직 채용이 아닌 정규직 채용을 통해 고용의 안정성을 보장해주는 것도, 개인이 부담하게 될 경제적 위험부담을 조직을 통해 완화시키는 셈입니다. 회사에서 일시적으로 장사가 안 된다고해서, 영업이 안 된다고 월급 안 줄 수 없지요. 대신 장사가 잘 된다고 곧바로 그만큼 급여를 높여 받지 못하게 됩니다. 회사에서 남들보다 열심히 일하고 생산성이 좋다고 해서, 그것에 비례해서 급여 줄 수 없습니다. 공동체적 조직의 성격이 강하기 때문에 2배 생산성 좋으면 1.4배 정도(이건 순전히 임의적 숫자입니다) 급여를 더 받게 됩니다. 경우에 따라 노후보장의 성격도 있어서, 단지 회사에 오래 근무했고 나이를 많이 먹었다는 이유로 급여를 더 받는 경우도 있습니다. 회사는 영속성을 보장해주는 것이 중요하고, 신뢰를 받을 수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Aragorn의 이야기를 단순하고 고전적인 성장우선, 분배우선, 이런 식의 관점에서 선입관을 갖고 재단하지 않았으면 합니다. 상식적인 것들을 다시 되풀이할 필요는 없습니다.
아참, 덧붙이는데, 의료보험에는 불만 많습니다. 의료보험 자체가 필요없다는 건 당연히 아니고, 지금 우리나라의 의료보험 제도에 불만이 많다는 겁니다. 정작 중요한 병에 걸리면 치료도 못하고 죽는데, 별 시덥잖은 사소한 병은 무슨 보험혜택이 그렇게 많은지. 소득수준에 따라 보험수가 적용비율을 차등화시키든지, 어떻게 해서든, 좀 더 자연스러운 사회보장시스템을 만들 필요가 있고, 어설픈 의료보험관리공단의 놀고 먹는 사람들은 다 잘라버리고 싶습니다. 의료보험과 관련되어서는 개인적인 안 좋은 경험이 좀 있습니다.

deleted

부의 분배에 대해 Aragorn 님은 모든 사람의 재산이 동일해서 빈부의 차가 사라지게하는 것이냐는 식으로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이건 그냥 극단적 예를 들어본 것 뿐입니다. 큰 의미없는 표현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극단적 예를 들면서 제기한 문제는, 그런 식으로 똑같이 분배하지 않는다면,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이냐, 이런 의문을 제기한 겁니다. 똑같이 분배하지 않는다면, 그 기준은 지금과 크게 다를 것도 없습니다. 그저 정도의 차이만 잘 조절된 것이겠죠.

품앗이 제도는 경제적 빈곤과는 관계없는 협력의 모델이었습니다
품앗이가 가능해지려면 상당히 폐쇄적인, 서로 엉킨 공동운명체여야 합니다. 과거의 품앗이는 농경사회를 기반으로 한 것이고, 대를 이어 한 마을에 모여 사는 사람들은 실질적으로 같은 집안 사람들이나 다를바 없습니다.

특히 품앗이가 실제로 작동했던 근본적인 이유는, 농사짓는 행위 자체가, 일시적으로 많은 노동력이 투입되는 그런 작업이기 때문입니다. 품앗이가 없으면, 농사짓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니까요. 그들 나름대로 인력 자원을 효율적으로 배분하기 위한, 더 정확히는 생존하기 위한 처절한 몸부림이었을 뿐입니다. 조금이라도 경작지의 면적을 넓히기 위한 그런 방법 말입니다. 이 땅에서 보릿고개가 거의 사라진 건 70년대 중후반이 되어서이고, 그 이전에는 단 한번도(약간 과장해서 말입니다) 보릿고개를 극복한 적이 없었습니다.

과거 우리나라의 농사를 짓는 것을 보면, 보통 농사짓는 사람들이 자기 땅 절반, 남의 땅 절반, 이런 식으로 짓습니다. 땅이 많은 부자는 땅을 빌려줍니다. 이런 상황에서 주인집 땅에 씨뿌리고 모내기하는데 주인집에서 당연히 인력을 동원해주게 되고, 자기집 농사만 끝내고 소작인 농사는 거들어주지 않는다면, 말이 안 되죠. 소작인이 열심히 농사지을 이유도 없고요.

때문에 이 사람들은 품앗이 자체가 고마운 것이라든가 윤리라든가 이런 생각을 갖고 있지 않았습니다. 아주 당연한 것이고, 모두가 살아남기 위해 택해야 했던 처절한 전략이었을 뿐입니다. 옆에서 농사짓는 사람이 경쟁자가 아니고, 만일 주변에 농사짓는 사람이 없어지면, 노동력 확보가 안 되어 자신도 덩달아 굶어죽게 되는, 공동운명체였다 이겁니다.

그러나 그 농사짓는 사람들이 실제로 서로를 배려해주는 건 상황에 따라 다릅니다. 그들이 협동을 하는 것은 사실 지극히 이기적 관점에서, 협동이 상생의 방법이었기 때문에 그런 것이고, 공유가 상생이 안 되는 경우는 가차없이 상대방을 짓밟아버립니다. 옛날에는 수리관개시설이 열악했고, 늘 가뭄과 홍수에 시달리곤 했습니다. 홍수는 그나마 좀 낫습니다. 협동하면 막아낼 수 있는 거니까. 가뭄때는 자기 논에 물을 조금이라도 더 대기 위해 한밤중에 몰래 물을 대고, 서로 낫, 곡괭이, 호미 들고 죽일 듯이 싸우기도 합니다.

어차피 물을 나누어서는 모두가 죽게 되고, 한 사람이라도 물을 몰아서 제대로 농사짓는 것이 낫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낙태권리 중간에 제가 쓴 윤리적 논란거리 목록 가운데 마지막을 보십시오) 가뭄때 그렇게 피흘리며 싸우지만, 가뭄이 끝나고 다시 추수철이 돌아오면 재빨리 추수하기 위해 (때가 있으니 말입니다) 서로 언제 싸웠냐는 듯이 품앗이하며 도웁니다. 생존하기 위해서 말입니다.

덧붙이자면, 농업생산력이 높아지고 품앗이를 하지 않아도 생존의 문제에 직면하지 않는 수준이 되면서, 품앗이는 자연스럽게 사라졌습니다. 여전히 농촌사람들이 서로 농사일을 도와주기는 하지만, 지금은 일당을 주고 받으면서 일을 하죠. 실제로 품앗이를 해 보면 매우 피곤하고 짜증납니다. 난 네 밭일할 때 잘 도와줬는데, 넌 왜 설렁설렁하냐, 이런 식으로 따질 수도 없고, 갈구기도 어렵습니다. 절박한 생존의 위기가 그들을 강하게 묶은 것이고, 그것이 풀리면 그들은 이익에 따라 움직이는 우리의 모습으로 돌아옵니다.

http://www.cfe.org/ 대체로 이곳의 의견과 같은 것들을 신자유주의라고 부릅니다. 특히 발간 자료중에 하이에크의 책들.



실증적 증거들


  1. 컬럼비아 대학 경제학과의 Sala-i-Martin은 1970년에서 1998년까지, 소위 신자유주의 시기동안의 세계각국의 GDP 및 여러가지 경제지표들을 이용하여, 빈부격차와 절대빈곤을 조사하였다. 그가 내린 두가지 결론은

    1. 해당 기간동안 국가간 빈부격차는 꾸준히 감소하였다. 국가 내 빈부격차는 약간 증가하였으나, 국가간 빈부격차를 상쇄할 만큼 크지 않았다.
    2. 절대빈곤층도 감소하였다. 세계의 하루 1달러 미만 생활인구는 20%에서 5%로 감소하였다.

  2. Dollar와 Kraay는 Foreign Affairs지 2001년 1-2월호에 국가간 빈부격차에 대한 광범위한 조사에 대한 논문을 게제하였다. 이들의 결론은 다음과 같다. 국가간 빈부격차는 경제지표의 조사가 시작된 이래 200여년간 계속해서 증가하였다. 그러나, 한가지 예외가 있었는데, 그것은 예의 신자유주의가 발흥하기 시작한 1980년대 이후부터로 이 기간 이후 현재까지 국가간 빈부격차는 계속해서 감소하고 있다는 것이다.

  3. 갈브레이스의 반론의 요약
    Dollar & Kraay (이하 D&K)에 따르면, 1975년이래 국제적인 빈부격차는 감소해왔는데 그것은 주로, 인도/중국/그리고 세계화전략을 취한 나라들의 급격한 성장에 따른 것이라고함. 그러나, 인도, 중국, 베트남은 오히려 예외적인 케이스로 생각해야할 것임. 왜냐하면 이들국가들은 완전한 globalization에 의해 성공한 것이라기보다는, 자본의 엄격한 통제, 장기적인 공식적 개발 계획, 농업개혁, (차관이 아닌) 내부저축에 의한 공업화등으로 국제적인 금융위기의 위험에서 벗어나 있었기 때문임.

    오히려 D&K는 data set에서 진정한 globalization국가들을 제외시켰음. 그 예로는 불과 얼마전만하더라도 가장 globalization에 앞서나가는 아르헨티나와, globalization의 쇼크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러시아, 그리고 1990년대 초반 globalization에 앞장섰다 실패한 Asian Tiger들이 있음. 오히려, 국제 성장률은 국제적으로 조직된 금융체제인 1945~1971의 브레튼우드체제하에서 1980년대후반의 규제완화=국제화시대의 그것보다 훨씬 높았음.
    갈브레이스 자신의 연구에 따르면, 1980년대(globalization의 시대)이후, 분명하게 industrial pay에 있어 불평등이 심화되고 있음. 이것은 UN의 data set에 기반한 것이며, K&D가 사용한 세계은행의 자료보다 5배나 상세한 내용을 담고 있음.

    1980년대이후 경제정불평등은 세계적으로 증가하고 있으며, 스칸디나비아 및 1997년이전의 동남아시아의 경우는 예외적이었음. 이러한 패턴은 세계화의 힘-높은 국제이자율, 부채위기, 급진적인 자유화등-이 노동소득 구조의 불균형을 높게 하고 있음.


  4. [http]Dollar와 Kraay의 논문


"; if (isset($options[timer])) print $menu.$banner."
".$options[timer]->Write()."
"; else print $menu.$banner."
".$timer;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