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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찌하여 가난한 사람들이 있을까?
목차
1.1. 사회적 사고 ¶
빈곤의 원인이 무엇일까 고민해 본 적이 있는가. 게으름, 무지, 나태, 신의 처벌 등이라고 여기던 시절이 있었다. 그러나 현대 사회복지를 공부하는 사람들은 그렇지 않다고 생각하고 있다.
- 무지 : 낮은 학력은 빈곤의 직접적인 원인이다. 학력이 낮은 자들은 고소득을 얻을 수 있는 직업에 종사하지 못한다. 이것을 해결하기 위해 공교육이 확대되었다. 그러나 자원의 효율적인 배분과 관련하여 논란이 존재한다.
- 질병 : 가족 가운데 환자가 있으면 경제적, 심리적 어려움이 가중된다. 치료에 시간이 걸리고 치료비가 많이 든다면 이 가족이 빈곤층으로 떨어지는 것은 당연하다. 또한 간병으로 인한 가족의 과외 노동과 심리적인 피로는 가족의 관계를 약화시킨다. 가장의 질병은 더 직접적으로 이러한 효과를 가져온다. 건강보험(사보험)으로 이것을 해결할 수 있지 않느냐는 의견은 부분적으로만 옳다. 사보험은 질병에 걸리기 쉬운 사람들을 받지 않는다. 더 질병에 걸리 확률이 더 높을수록 더 보호받지 못한다. 대부분의 복지국가는 국가에서 의료문제를 해결한다. 모든 치료비를 지원하는 것은 물론 가장의 경우 그가 일을 하지 못해 얻지 못한 소득을 보전해 준다. 간병인을 지원해주거나 가족 가운데 한 명이 간병을 할 수 있도록 지원한다.
- 실업 : 가장의 실업은 가족 전체의 불행이다. 실업의 원인은 여러 가지이다. 그 가운데 노동자 개인이 직접적인 원인인 것보다 그 외적인 변수에 의한 경우가 더 많다. 실업 역시 사회적인 사고이다.
- 폐질 : 사고나 질병으로 더 이상 노동할 수 없는 사람은 경제적으로 어렵다. 우리나라 등록장애인의 89.4%는 후천적인 원인에 의해 발생했다.(2000년도 장애인 실태조사 결과보고서 - 보건복지부 see also 장애인)
1.2. 자본이득으로부터의 소외 ¶
위의 사회적 사고가 빈곤의 주요한 원인인 것은 분명하나, 가족의 가장이 경제 활동에 무관심하고 잘못된 방법으로 접근하는 것이 대다수 월급쟁이 가난뱅이의 문제라고 생각한다. 위의 사회적 사고는 빈곤 가운데에도 최저층이 형성된 원인은 잘 설명해 주지만, 겨우 입에 풀칠하며 사는 많은 월급쟁이들의 문제를 정확히 설명해 주지는 못한다. 가난한 월급쟁이의 빈곤의 악순환을 단순히 고용주의 노동력 착취로 접근하는 것은 18세기, 19세기에나 적용할 수 있는 논리이다.
80~90년대 가난한 월급쟁이의 문제는 가장의 수입에 맞추어 모든 것을 졸라매어 생활하고 늘어나는 주거비용을 감당하기 위해 10~20년간 저축하다 힘빠지는 것이 원인이었다. 그러나 월급쟁이가 되어보지도 못한 많은 자영업자들은 그보다 훨씬 경제적으로 윤택한 생활을 하는 것이 일반적이고, 그들이 결코 월급쟁이보다 학력이 높지도 않고, 자영업자의 소득을 세금을 안 내어서 얻은 소득이라고 말할 수도 없다.
가난한 월급쟁이의 자금운용 상황을 보면, 많은 경우 돈을 잘못 굴리는 것을 살펴볼 수 있다. 대한민국 서울에서 가난한 월급쟁이들이 빈곤의 악순환에 빠져든 실질적인 이유를 꼽으라면, 자본시장에 참여하여 자본이득을 얻지 못한다는 것이다. 현실적으로 급여만으로 서울에서 주거비용을 감당한다는 것은 빈곤의 악순환에 빠져드는 직접적인 원인이 된다. 이러한 악순환에서 벗어나려면, 수천만원 정도의 최소규모 자본으로 주택 부동산 시장에 참여하여 자본이득을 얻어야만 한다. 아파트 분양 청약하기, 전세끼고 주택 구입하기, 은행 융자 끼고 주택 구입하기 등의 다양한 기법을 통해 자본이득을 얻는 경우 5~6번의 거래로 자신의 집을 마련할 수 있게 되고, 빈곤의 악순환에서 벗어나게 된다. 이러한 자본시장의 규모는 매우 크고, 이 자본시장에 참여하지 못하는 경우를 극빈층이라고 구분할 수 있다. Aragor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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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마른 자가 우물을 파는 것과 마찬가지로, 빈곤한 자가 직접 우물을 파는 수밖에 없다. 아무도 빈곤한 당신의 운명을 바꾸어주지 못한다. 배부른 자의 환상에 동참하면, 더욱 그 상황에서 헤어날 수 없을 뿐이다.
경제적 가치를 생산해내지 못하는 자는 빈곤하게 살 수밖에 없다. 애초에 신분이 높아서 다른 사람의 것을 뺏을 수 있거나, 원래 가진 것이 많아서 쓰기만 해도 끝이 없는게 아니라면. 빈곤에서 벗어나는 유일한 방법은 더 많은 경제적 가치를 생산해내는 것이고, 그것에 관심갖는 것이다.
결국 극빈층의 빈곤의 악순환의 고리를 끊는 건, 최소한의 생활보장과 교육의 기회, 즉 경제적 가치 생산의 기회, 이 두 가지로 접근하는 것이 정석이다. 목마른 자의 고통을 해결하는 것은 우물에서 물을 퍼올리는 것이고, 사회가 제공해 줄 수 있는 것은 물을 퍼올리기 위해 펌프에 물 한바가지 부어주는 것이다.
어쨌거나 지금 대한민국을 살아가고 있는 모든 당신이 자본시장에서 수익을 내지 못하면, 평생가도 집 장만하기 어렵다는 것은 장담할 수 있다. 교육수준이 낮아서, 자본이 없어서, 정보가 없어서, 자본시장에 뛰어들지 못하는 것이 아니다. 곧 죽어도 선비가 돈 밝히지 못한다는 나태한 이기심이 문제일 뿐이다. --Aragorn
"돈을 쫓으면 손에 쥘 수 없고, 돈이 따라오게 만들어야 한다"는 업계의 격언을 잘 생각해야 한다. 단순히 돈을 쫓는 것으로 돈을 쥐는 건 아니다. --Aragorn
1.4. 기업의 노동력 착취 ¶
자본과 정보를 독점하는 기업의 소유주가 노동력을 착취하여 피고용인이 최소한 먹고 살 수 있을 정도로만 급여를 제공하여 빈곤의 악순환에서 벗어날 수 없다.
한 면으로는 맞는 말처럼 보일 수 있으나,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월급쟁이가 최소한 먹고 살 수 있을 정도 + alpha 의 급여를 제공받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나, 그것이 자본과 정보를 독점하는 기업의 소유주 때문은 아니다. 그보다는 경쟁시장에서 살아남기 위해 제품의 원가를 떨어뜨려야 하고, 그 과정에서 저절로 급여수준이 최소수준으로 수렴한 것이라고 보는 것이 더 정확하다.
요즈음 기업에 있어 기업의 소유주가 주식의 배당금을 받는 것은 은행금리를 넘어가는 경우가 거의 없다. 회사를 소유함으로 얻는 자본이득은 배당금에 의한 이득보다 주식거래차익에 의존하고 있다.
대부분의 주식회사는 매출대비 순이익을 수%밖에 내지 못하고 있으며, 많은 회사가 적자에 시달리기도 한다. 예외적으로 10~20%의 매우 많은 이익을 내는 회사는 직원들의 급여 수준이 동종 업계에 비해 몇십% 가량 높은 것이 일반적이고, 연봉의 수십%를 성과급으로 지급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래봐야 평균적인 월급쟁이가 평균적인 자영업자에 비해 많은 소득을 얻는 것은 아니다.
증권거래시장이라는 자본시장은 여러 회사들이 실적 경쟁을 하는 일종의 경마장이자 도박장이다. 이 자본시장을 통해 회사가 원활히 자본을 유입한다는 근본적인 순기능이 있으나, 실제로는 경제지표, 돈 놓고 돈 먹는 도박장의 모습에 더 가깝다. 기업의 소유주는 이러한 자본시장에서 막대한 자본이득을 얻을 수 있는 기회를 독점하여, 피고용인에게 자본이득의 기회를 주지 않는 것이 일반적이나, 스톡옵션이나 우리사주 등을 통해 급여 대신 자본이득을 넘겨주는 경우도 종종 나타난다. 그러나 스톡옵션의 본래 취지는 급여를 대신하는 것이 아니고, 주가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기업의 주요 경영진과 피고용인에게 주가 상승과 연동되는 유인요소를 제공함으로써 주주의 이익을 극대화시키는 것이다.
평범한 월급쟁이의 빈곤의 악순환의 원인은, 시장에서의 자유로운 경쟁, 그 자체이다. --Aragorn
잘 이해가 안되는데, 그게 바로 자본가들의 착취 아닌가요? 이득의 '형태'가 배당금이냐, 주식거래차익이냐가 중요한게 아니라, 생산된 부를 자본가들이 (자본을 소유한다는 사실만으로) 독점한다는 사실 자체가 중요한게 아닌가요? 자본가의 착취는 개별 기업 수준에서 이루어지는게 아니라 시장 전체에서 평균이윤율의 형성을 통해 이루어진다고 배웠던 기억이 납니다만. --Khakii
"생산된 부"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 기업에서 생산한 모든 부가가치를 이야기하는 것입니까? 직원들에게 돌아가는 급여와 일반관리비용은 무엇입니까? 회계에서 이야기하는 순이익은 온갖 비용을 다 뗀 순전히 소유주의 입장에서 보는 이익이지요. 기업이 "생산한 부"를 자본가들이 독점한다는 것은 이해할 수 없는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시장전체에서 평균이윤율을 형성한다는 것은 은행예금이자의 평균이자율을 확보한다는 것과 똑같은 것 아닙니까? 실제로 그 숫자가 크게 차이나는 것도 아니고, 주가지수와 은행금리는 서로 시소처럼 오르내립니다.자본가에게 투자금에 대한 수익을 보상하는 것은 지금 상태에서 볼 때, 효과적 경제활동, 적절한 자원투입을 위한 동기부여밖에 안 된다고 봅니다. 적절한 자원투입이라는 건, 말처럼 쉽지않고, 정말 피말리고 머리 터지는 작업입니다. 그리고 그 결과 더 많은 기회, 더 매끄러운 경제활동이 가능해지죠. 또한 이 "자본가"라는 것이, 사실은 대부분 금융기관이고 푼돈모아 만든 펀드이고 정년퇴직자의 퇴직금입니다.
기업이 이익을 많이 낸다고, 배당금을 통하지 않고 회사의 돈이 주주에게 넘어가는 일이 있습니까? 그런 일이 벌어지면, 아마 경영자가 업무상 배임이나 횡령 정도로 처벌받게 될 겁니다. 그렇지 않다면, 회사가 생산해낸 부는 회사와 종업원들에게 그대로 남는 것이죠. 주주가 돈을 버는 건, 주식시장이라는 제로섬게임에서 도박해서 버는 돈입니다.
결국 이러한 시스템은 기업의 종업원이 뒤돌아서자 마자 자본가가 되는 시스템이고, 한쪽에서 생산한 부를 다시 자본시장을 통해 효과적으로 자원분배하는 큰 순환고리를 형성하고 있는 것뿐입니다. 우리나라에 (재벌빼고) 독점적 권력을 쥐고 회사를 통해 노동력을 착취하는 자본가 계급이 존재합니까? 모두 동전의 양면과 같은 것인데. --Aragorn
2.2. 빈곤 문제에 대한 바람직한 질문방식 ¶
최적의 상태와 현실에 대한 논의를 구별할 필요가 있을 듯
이런 논의를 할 때, 우리는 암묵적으로 "최적의 상태"에 대한 논의를 하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말하자면, "최적의 상태에서도 빈부의 격차는 존재할 수밖에 없다"라는 거죠. 하지만, 우리가 문제로 삼는 "현재의 체제에서의 빈부의 문제"는 그와는 다른 문제라고 여겨집니다. "어느 사회에서나 빈부는 존재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이 현재 존재하는 빈부의 격차를 설명하거나 정당화하는 건 아닐테니까요 (적어도 그런 논의로 인해 빈부의 존재에 대해 어떤 통찰력은 갖게 되기는 하지만요). 비유하자면, 수학에서의 어떤 존재 증명과도 같은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왜 정확히 그 값이 거기에 존재해야 하는가에 대해서는 "좀 더 많은 것"이 필요하다는 거죠.
문제를 다르게 던져보면 어떨까 싶습니다. "왜 가난이 존재해야 하는가"라는 질문 대신, "현실의 빈부 격차는 어떻게 해서 발생한 것이며 어떻게 유지되는 것인가"라는 질문이죠. 질문을 어떻게 던지느냐 하는 것은 대부분의 사람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 아무개
-- 아무개
빈부격차가 발생한 이유는 개인의 사유물이 존재하고 소유권이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유지되느냐도 소유권에서 찾을 수 있어서, 즉 한 번 내 것이면 영원히 내 것이기 때문입니다. 조금 더 어려운 문제이지만, "가난함의 최저 수준은 어떤 정도가 적당하냐, 부유함의 최고수준은 어떤 정도가 적당하냐, 전체적인 구성원의 부의 분배는 어떤 통계분포를 갖는 것이 최적이냐"의 답을 찾는 것이 낫다고 생각합니다.
빈부격차를 줄이는데 공교육과 조세정책, 사회보장제도가 큰 역할을 하지만, 많은 국가에서, 어쩌면 모든 국가에서 이들이 큰 효과를 보지 못하고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대략적으로 답을 만들어낸 후, 현실을 거기에 맞추어 나가는 것이 실제로 선택할 수 있는 최선의 방책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빈곤의 문제, 부의 공정한 분배 문제는 사회 구성원 누구나 잘 알아야 하는 문제라고 생각하는데, 저의 12년간의 공교육에서 이러한 문제에 대해 제대로 배우거나 논의해본 적이 한번도 없습니다. 구체적으로 얼마나 세금을 내는 것이 적당한지, 공교육은 어느정도까지 제공되어야 하는지, 사회보장제도는 어떤 수준이 적당한지, 정말 제대로 고민해보고 전체의 합의점을 찾아내고 공감대를 형성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핵심은, "숫자"입니다. --Aragorn
빈부격차를 줄이는데 공교육과 조세정책, 사회보장제도가 큰 역할을 하지만, 많은 국가에서, 어쩌면 모든 국가에서 이들이 큰 효과를 보지 못하고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대략적으로 답을 만들어낸 후, 현실을 거기에 맞추어 나가는 것이 실제로 선택할 수 있는 최선의 방책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빈곤의 문제, 부의 공정한 분배 문제는 사회 구성원 누구나 잘 알아야 하는 문제라고 생각하는데, 저의 12년간의 공교육에서 이러한 문제에 대해 제대로 배우거나 논의해본 적이 한번도 없습니다. 구체적으로 얼마나 세금을 내는 것이 적당한지, 공교육은 어느정도까지 제공되어야 하는지, 사회보장제도는 어떤 수준이 적당한지, 정말 제대로 고민해보고 전체의 합의점을 찾아내고 공감대를 형성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핵심은, "숫자"입니다. --Aragorn
사실 이런 문제에 대해 "객관적인 합의"에 이르기는 쉽지 않은 것 같습니다. 만일 제가 한 번 더 무언가 이야기를 덧붙여도 된다고 한다면, "최적의 답을 구하고 거기에 맞춰가는 것"이라는 문제 설정 자체는 그리 현실적이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실제로 이루어지는 것은 "어디까지 요구해서 얻어낼 수 있는가"의 문제입니다. 후자는 "말하는 입장"이 명확한 문제이고, 전자는 아닙니다. 전자가 더 바람직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저로서는 "적어도 현실적으로는" 후자의 문제가 더 현실적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사실 냉혹한 이해관계가 지배하는 현실 속에서 "공감대"를 찾아낸다는 것이 지나치게 이상적인 게 아닌가 하는 거죠. 적어도 "빈곤"과 같은 생존의 문제에서 말입니다. 아무개
3.1. 가난은 나라도 책임 못진다 ¶
가난은 나라도 책임 못진다
이 말은 경우에 따라 조심스럽게 적용시켜야하는 말일 것이다. Aragorn은 이 말을, 나라가 나름대로 공정히 부를 분배해 보아야 누군가는 가난하게 살 수밖에 없다는 것, 도를 지나치게 재화를 공평히 분배하려는 것은 아니함만 못하다는 뜻으로 받아들인다.
우리가 보통 도덕적해이라고 말하는 MoralHazard라는 말의 뜻을 정확히 알 필요가 있는데, 이것은 비윤리적인 기업가가 회사돈을 빼먹는다거나, 뒷돈을 거래하는 것을 두고 하는 이야기가 절대 아니다. 이는 경제학 용어로, 경제주체에게 합당한 수준의 위험부담이 부과되지 않으면, 위험한 곳에 마구 돈을 투자하거나 해서 손실을 남에게 전가하게 된다는 뜻이다. ( see also : 도덕적 해이 )
예를 들어, 보험을 든 사람은 사고위험을 피해가는 주의를 덜 기울이는 것, 의사가 의료보험금을 타내기 위해 과잉진료를 하는 것, 관치금융 시대에 부도가 잘 나지 않는 점을 이용해 은행이 마구잡이 대출을 하는 것 등을 가리킨다. 마찬가지로, 나라에서 가난에 대해 전적으로 책임을 진다면, 그 사람은 생산을 위해 노력할 필요가 없어지고, 적어도 동기부여에 있어 많은 문제점을 갖게 될 수밖에 없다.
이러한 면에서는, 기업가나 시장에서 장사하는 아주머니나 똑같이 비윤리적인 태도를 보이는 것이 보편적이다.
3.2. 빈곤은 분배의 문제일까? ¶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나라, 이 시대에서 만큼은 빈곤의 원인이 분배문제에 직접적으로 걸려있는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상속, 부와 권력의 세습, '분배문제'보다는 '대물림'이란 봉건적 요소의 잔존이 빈곤의 악순환 고리에 더 밀착해 있다고 봅니다. 죽을 때, 모든 재화와 권력 등을 그 자리에 그대로 두고 죽기로 하면, 빈곤의 악순환 고리를 약하게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소유, 그자체로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정정 당당히 벌은 것은, 내 삶을 윤택하게 하기 위해,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의 삶을 윤택하게 하기 위해 쓸 수 있음은 너무도 지당한 일입니다. 당연지사, 대물림하지 않는 소유를 말합니다. --bullsajo
5. 다른 의견들 ¶
싸그리 다 도인이 되어서 빈부에 연연하지 않는건 어떠할는지요...-_-a --새벽공기
빈곤의 문제는 빈곤 자체가 아니라 그것이 악순환을 계속한다는데 있다고 본다. . 위와 같이 분명히 우리가 자본주의 사회를 선택한 이상, 그리고 사회가 정상적으로 시스템이 작동되고 있다는 가정이 성립하면 부와 빈곤이라는 문제는 절대 피할수 없는 문제이다. 하지만. 항상 문제가 되는 것이 부유한 사람은 그 기득권을 사회적인 합의 없이 계속 유지 할려는 데 있다. 부와 권력이라는 것은 흐르지 않으면 썩게 마련일 것을 말이다. 과연 사회적으로 다들 인정할수 있는 부의 재분법은 없는 것인가?...--nonfiction
빈곤의 문제는 빈곤 자체가 아니라 그것이 악순환을 계속한다는데 있다고 본다. . 위와 같이 분명히 우리가 자본주의 사회를 선택한 이상, 그리고 사회가 정상적으로 시스템이 작동되고 있다는 가정이 성립하면 부와 빈곤이라는 문제는 절대 피할수 없는 문제이다. 하지만. 항상 문제가 되는 것이 부유한 사람은 그 기득권을 사회적인 합의 없이 계속 유지 할려는 데 있다. 부와 권력이라는 것은 흐르지 않으면 썩게 마련일 것을 말이다. 과연 사회적으로 다들 인정할수 있는 부의 재분법은 없는 것인가?...--nonfiction
5.1. 우선 상황을 제대로 인식하는 것부터 ¶
필요한 만큼(비상시를 대비하고도 충분히 남을 정도)을 지나치게 넘어섰으면서도 다른 사람의 소유물을 뺏어가며 자신의 재산을 축적하려는 동기는 자연스럽지 못하다. 적어도 인간의 본성과 자연의 법칙을 들어서 위의 상태를 합리화 하기는 힘들 것이다. 물론 필요한 만큼의 정도를 명확히 규정하기는 힘들 테지만 그 선에 가까이 가기도 힘든 상태에 있는 사람이나 그 선을 지나치게 넘어선 상태에 있는 사람들이 있음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인정하고 있을 것이다.
간단히 말할 수는 없겠지만 지금까지 내가 알고 있는 지식을 살펴보면 동물이나 식물이 살아가는 방식은 오히려 인간의 삶의 방식에 비해 약자와 강자의 차이가 크지 않은 것 같다. 절대적인 지배자가 멋대로 휘두르는 삶의 방식이 아니라 오히려 끊임없이 균형을 맞추려는 동기가 훨씬 크게 작용하는 삶인 것 같다.
핍박받는 자가 핍박에서 벗어나려는 동기, 힘을 갖지 못한 자가 힘을 갖으려 하는 동기는 힘을 갖는 자가 힘을 유지하려는 동기보다 더욱 절실하게 발휘되는 동기라고 생각한다. 다른 사람의 것을 빼앗아가면서까지 지나치게 소유하려는 동기는 그 동기의 논리적인, 윤리적, 감정적인 부분을 봐서도 계속해서 갖고 있기 힘든 동기라고 생각한다.
안타까운 것은 물론 다른 곳도 그렇겠지만 대한민국이라는 곳에서는 적어도 많은 사람들이 생존의 자연스러운 방식이라고 생각하는 무한경쟁 마저도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했다는 것이다. 역시 쉽게 판단할 수는 없겠지만 재산이 많은 사람들 중에 그래도 정당함에 가까웠던 방식으로 돈을 번 사람의 비중이 적다는 것이다. 이런 상황이 빈곤층에게 불신과 패배감, 기회주의를 심어 넣게 되는 것 같다. 빈곤층의 숫자를 보는 것보다 나를 그리고 다른 사람들을 더욱 슬프고 답답하게 만드는 것은 바로 이런 감정의 문제일지도 모른다. 그렇기에 무엇보다도 절실히 관심을 기울여야 할 것은 적어도 사람들이 왜곡된 감정과 판단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라도 이런 왜곡된 상황이 생기게 된 원인을 제대로 인식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것이 당장 실제 상황을 바꿔놓지는 않을지라도 해결책의 시작이 될 수 있지 않을까?
--dotory
--dotory
5.2. 문제를 제대로 바라보려면, 윤리, 도덕의 잣대를 없애라 ¶
윤리와 도덕의 잣대를 들이대면, 문제의 본질을 흐려버리고 적절치 않은 비유와 은유를 통해 사실을 왜곡해버린다.
많은 것을 소유한 사람이 비윤리적으로 남의 것을 빼앗는다는 생각은 편견이다. 약자일수록 비굴한 경향이 강하고, 그들끼리 서로 등을 치고 도둑질하기도 한다. 약자는 윤리적이고 도덕적이며, 강자는 비윤리적이고 비도덕적이라고 말하지 말라. 오히려 잘 배운 강자일수록 사회에 대한 의식이 분명하고 나름대로의 엄격한 도덕적 기준을 갖고 있다. 그는 그런 여유를 통해 자신의 마음을 다스릴 수 있는 강자이다.
동물과 식물이 남의 것을 빼앗지 않는다는 것은 틀렸다. 동물의 경우 제각기 생존전략이 달라, 어떤 동물은 남의 것을 빼앗아먹기만 한다. 각자 자신이 가장 잘할 수 있는 것에 목숨을 건다. 그들이 재산을 소유하지 않는 것은 그만한 지적인 수준에 오르지 못했을 뿐이다. 재산을 소유하고 그 소유권을 바탕으로 가치를 재생산해내는 전략은 효과적으로 밥벌이를 하는 가장 좋은 수단이다. 이렇게 생산된 잉여가치를 통해 자신은 노예를 거느릴 수 있고, 정치적인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게 된다.
많이 소유한 자는 나름대로 그들끼리 경쟁을 하게 되며, 그들 사회에서 경쟁에 도태되지 않기 위해서 끊임없이 노력하고 발버둥친다. 그들 또한 위태위태한 동적평형 상태에 놓여 있으며, 한순간 그들의 기반을 잃고 무너질 수도 있기에 많은 비용을 들여 끊임없이 안전장치를 마련해 나간다. 사람의 눈과 귀는 한번 수준이 올라가면 내려올 줄 몰라서, 10평짜리 단칸 셋방에 살 때에는 25평 집만 이사가도 좋겠다고 생각하지만, 25평 집에 이사가면 50평 집에 이사가길 바라고, 그 다음엔 수영장 달린 집을 원한다. 공부 잘하는 사람이 이 정도면 충분하다, 난 더이상 공부를 할 필요가 없다고 말하는 것을 보았는가? 경쟁에서 살아남으려면 주위 사람들에게 자신은 끊임없이 상승세를 타고 있으며, 발전해 나가는 도중이라는 것을 과시해야 한다. 일단 내리막이라는 것을 주위 사람들에게 드러내게 되면, 밑으로 곤두박질 치는 것은 순식간이다. 그들은 제자리에 서 있기 위해 끊임없이 내달려야 한다.
도덕, 윤리의 잣대로 남을 탓해서는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는다. 도덕, 윤리는 똑똑한 놈들이 멍청한 놈들을 현혹시켜 길들이기 위해 만든 허상이다. 똑똑한 놈들은 그런 것을 개의치않는다. 자신들만의 별세계를 만들어 놓고, 이익을 챙기는 것이다.
부가 적절히 재분배될 수밖에 없는 환경을 만들어 주어야 한다. 또한 이러한 부의 재분배는 전체의 이익을 극대화하는 것을 목표로 해야 모두가 자멸하지 않고 살아남을 수 있을 것이다. --Aragorn
5.3. 몽땅 갖더라도, 몽땅 써버리지는 말아야 한다. ¶
공작왕이라는 일본 만화를 보면, 여타의 만화들이 자주 그러듯이, 미국을 은근히 비아냥거리는 이야기가 나오죠. "전 세계 45억의 인구가 미국의 중산층이 사는 것처럼 살게되면, 지구의 에너지나 물자는 5분도 버틸 수가 없게 된다..." "부" 자체는 미덕이 될 수 있지만, '에너지, 물자절약'하고 살아가는 것은 인류의 종말을 조금은 늦출 수 있는 일이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합니다. "부"를 추구하더라도 "에너지와 물자"의 소비는 최소화한다...이런 삶은 재미없게 느껴지기 시작하죠. --Roman
5.5. 사회 발전의 원동력은 '빈곤'이 아니라 '문제' 그 자체이다. ¶
'사회 발전의 원동력'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동력이 빈곤이라고 보기 보다는 '문제' 그 자체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빈곤이란 인간이 풀어야 산적한 문제들 중의 하나에 불과하죠. 경제적 빈곤 자체가 사회발전의 원동력은 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발전의 원동력은 '내게 주어지지 않은 것을 얻고자 함.' 이라 생각합니다. --bullsajo
또한 빈곤이 존재한다는 것은 그 빈곤을 어느정도 해소하기 위한 사회적 비용을 발생시키게 될 때에, 오히려 사회 발전의 원동력이라기 보다는 사회 발전의 저해 요소로 이해될 수 있는 측면이 있다는 것을 간과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Roman
7. 관련 자료 2 : 가난한 자가 직접 이야기하는 빈곤의 현실 ¶
- 꿈이 있었나 봅니다. 누구나 그렇겠지만. 언젠가 그려둔 꿈으로 가는 길과 꿈의 세상에 대해, 일정국면을 접할 때마다 현재상태를 비추어봅니다. 진도가 많이 쳐져있네요. 더군다나 이제는 그 꿈을 숨을 쉬고 있는 동안에 시도해 볼 수 있을지조차 알 수 없어졌습니다. 즉, 꿈이 사라진 것으로 보입니다. 가난 때문이지요. 며칠전만 해도 '새로운 터와 새로운 삶'이란 문장을 머리속에 넣고 때가 되었는지를 가늠해 보고 있었답니다. 요 며칠간 가난으로 인해 발생한 사건들이 제 주변에서 너무도 많이 일어났답니다. 요즘 전 혼비백산 상태입니다. 도대체 문제를 어떻게 풀어야 할 것인지. 아, 가난이 주고간 깊은 상처와 밟힌 자존심은 어떤 현실적 제안도 받아들이지 않는군요. 가난한 그 아버지는 가족들 전체의 집단자살을 꿈꾸고 있습니다. 결국, 전 월급쟁이로 남기로 결정 했지요. 제가 이 곳에 월급쟁이로 남아서 할 일이래야, 잘 분배가 될 지 어떨지조차 알 수 없는 '돈 만들기' 밖에 더 하겠습니까? 물론, 그곳이 어디든 내가 서있는 곳애서 그렇듯 냉소적으로 살고 싶지는 않기에 현재 안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범위까지는 해보고자 '인간보완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는 중입니다. 공식적으로. 이런 프로젝트의 시도와 제 가난과는 전혀 상관이 없습니다. 가난이 제게 준 결론은 '월급쟁이로 남아있기, 그 외 어떤 생각도 절대 가슴에 품지 말 것' 이것입니다. 집단자살과 안주라는 선택이 사회발전에 어떻게 기여하게 되는지는 모릅니다. 집단자살을 하여 자원소모 포트를 줄이고, 안주하여 사회의 충돌요인을 줄이므로 발전에 참여하게 된 것인지. --bullsajo
- 윤구현이 지난 3년간 일한 곳은 1,325세대가 사는 영구임대아파트에 위치한 종합사회복지관이다. 11.5평의 집에 혼자 사는 노인부터 일곱 명이 사는 집까지 다양하다. 두부부가 노모를 모시고 두세 명의 아이를 기르는 집을 보면 어떻게 방을 쓰는지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이곳 아이들을 보면서 저들이 자라 이곳을 떠난다고 해도 다른 어떤 곳으로 갈 수 있을까를 생각한다. 물론 이곳에도 대학을 다니는 친구들이 있다. 그러나 국민기초생활보장법수급권자인 아이들 가운데 대학에 간 경우는 찾기 힘들다. 올해도 내가 관리하는 고등학교이하 연령대의 250명의 아이들 가운데 대학을 간 친구들이 있기는 하지만 소위 명문대는커녕 4년제 대학을 간 아이도 한 둘 뿐이다. 좀 괜찮은 대학에 진학하고 휴학을 반복하는 아이를 보면 가난하기는 해도 졸업은 시켜준 부모님이 고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