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쇼라즈니쉬

FrontPage|FindPage|TitleIndex|RecentChanges| UserPreferences P RSS

FrontPage자우림 오쇼라즈니쉬

Osho Rajneesh혹은 바하그완 라즈니쉬, 바그완 슈리 라즈니쉬. 그의 사상에 공감하는 이들에게 '성자'로 추종되는 인도의 사상가. 도교, 불교, 힌두교 등 동양의 경전에 대한 해설서를 포함, 선과 명상에 관한 다수의 책을 저술하였다.

영문으로 쓰여지거나, 번역된 오쇼의 저서는 [http]Osho World에서 볼 수 있다.

그에 대해 아는 것이 없음에 안타까워하며.. 그의 책을 읽은것이 한권뿐이라는 것에 안타까워하며, 그 한권의 책조차 뜻을 헤아리지 못한 것을 안타까워하며-nonfiction

1990년에 세상을 떠났고, 선과 명상을 했으며, 세상은 잠시왔다가 가는 것이고, 그가 재물과 여자를 탐닉했다는 소문만 알고 있다.

인간은...아는게 없어....

이리저리 돌아다니면서 긁어모은 것을...

그에 대해서는 무척 안 좋은 얘기가 많죠. 실제로 깨달은 사람이라 보기에는 좀 어울리지 않는 부분도 있었지만, 상당히 많은 부분은 고의적인 깎아내리기가 아니었나 생각됩니다. (사실 깨달은 사람은 깨닫지 못한 사람의 기준으로 평가가 되지 않는 법이죠. 그가 무슨 행동을 하건 아트만(자아)이 없기 때문에 카르마도 없으니까요. 깨달은 사람이 꼭 가난하게 맨발로 살아야 한다는 법이 있는 것도 아니고, 코카콜라 좋아하지 말라는 법이 있는 것도 아니죠. ;) ) 그의 가르침이 주는 파급효과가 너무 크다는 것만으로 많은 나라에서 입국조차 거부되었습니다. 대부분의 종교 단체의 모임에서는 sex 에 대해서 회피하던지, 억압하는데 비해서, 오쇼 캠프에서는 free sex 입니다. 서로 원하면 누구와 해도 아무런 상관이 없어요. 그래서 Sex Guru 라는 별칭을 얻기도 했지만, 십여년이 넘게 생각해 봐도, 성을 억압하느라 애쓰는 것보다는 명상을 즐기는 것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 훨씬 더 자연스러운 방법인 것 같습니다. 그런 면에서 오쇼라즈니쉬의 가르침은 잘못되지 않았다고 봅니다. 오쇼라즈니쉬의 인간적인 면에 대한 책으로 오쇼라즈니쉬삶의기록 이란 책이 있습니다. 가까운 사람이 썼음에도 불구하고, 오쇼라즈니쉬에 대해서 상당히 있는 그대로, 객관적인 시각으로 쓴 책이 아닌가 합니다. --지상은
천재를 좋아하는 사람은 별로 없다. 그 이유는 사람들에게 열등감을 주기 때문이다. 라는 라즈니쉬의 말이 떠오릅니다. --ntames8

니체의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해설한 책이 있습니다. 물론, 라즈니쉬는 말로 했겠지만 주변에 사람들이 글로 옮겼을 것입니다. 단 3권으로 이루어진 그 책은 제 삶을 온통 뒤흔든 책이었습니다. --ntames8

The Flowering of Meditation

명상의 개화
명상은 인도식 방법이 아니다. 그것은 단순한 테크닉이 아니다. 그대는 그것을 배울 수 없다. 왜냐하면 명상은 성장, 그대의 온전한 삶의 성장이기 때문이다. 명상은 지금 현재의 그대에게 덧붙여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대가 있고 무언가 그대에게 덧붙여진다. 명상은 그런 것이 아니다. 명상은 근본적인 변형을 통해서만 그대에게 올 수 있다. 명상은 개화(開花)이며 성장이다. 성장이란 항상 전체적이다. 일부분이 덧붙여져서 성장할 수는 없다. 사랑은 그대의 가슴 어느 한부분에 덧붙여진 것이 아니다. 그대가 사랑할 때 그대의 전 존재는 오직 사랑의 색깔로 물들어 있다. 명상도 마찬가지이다. 명상은 그대의 전체성으로부터 커나온다. 그대는 명상을 향해 성장해야 하는 것이다.

위대한 침묵

침묵은 무언가 부정적이고 비어있으며 소리의 부재로 대개 이해되고있다. 이러한 오해가 널리 퍼져 있는 것은 극소수의 사람들만이 침묵을 경험했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이 경험한 침묵이란 단지 소리없음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침묵(Silence)은 전적으로 다른 현상이다. 그것은 절대적으로 긍정적이다. 그것은 존재하는 것이지 아무것도 없이 빈 것이 아니다. 침묵은 그대가 이전에는 들어본 적도 없는 음악으로 흘러넘치며 그대에게는 익숙하지 않은 향기로, 오직 내부의 눈으로만 볼 수 있는 빛으로 가득차있다.

침묵은 가공적이거나 상상의 무엇이 아니라 실재이며 이미 모든 사람들 속에 현존하고 있는 실재이다. 단지 우리가 결코 들여다보지 못했을 뿐이다.

그대의 내적 세계는 자신만의 풍미와 향기와 빛을 지니고 있다. 그리고 그것은 절대적으로 침묵을 지키고 있다. 영원히.... 어떤 한 소리도 있어본 적이 없고 앞으로도 없을 것이다. 어떤 말도 그곳에는 도달할 수가 없다. 그러나 그대는 도달할 수 있다.

그대 존재의 중심은 폭풍의 중심과 같다. 주위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더라도 그 중심에는 영향을 미치지 못하는 폭풍의 중심. 그곳은 영원한 침묵이다. 날이 가고, 해가 바뀌어도, 시대가 오고 가더라도 절대적 침묵만이 있을 뿐이다. 삶이 오고 또 가도 그대 존재의 영원한 침묵은 아무 변화 없이 똑같이 남는다. 똑같은 소리없는 음악, 똑같은 경건한 향기, 그리고 모든 일시적이고 죽어야 하는 것들로부터 언제나 초연한 그대로 남는다.

그것은 그대의 침묵이 아니다.

그대가 그것이다.

그 침묵은 그대의 소유물이 아니라 그대가 그것의 소유물이다. 그것이 바로 침묵의 위대함이다. 그대조차도 그곳에 들어서지 못한다. 왜냐하면 그대의 존재마저도 하나의 소동에 불과하기에.

감수성 있는 성장

명상은 그대에게 감수성, 세계에 속해 있다는 위대한 감각을 준다. 우리의 세계, 우리의 별이며 우리는 이곳에 낯선 이방인이 아니다. 우리는 본래 존재에 속해있다. 우리는 존재의 일부분이며 그 심장이다.

그대는 너무도 민감해져서 잔디밭의 아주 작은 잎사귀 하나라도 그대에게는 커다란 의미를 가지게 된다. 이 작은 잎사귀도 저 커다란 별들만큼이나 존재에게는 중요하기에 이 잎사귀가 없어진다면 존재는 이전과 같지않은 상실감을 느끼게 될 것이다. 이 작은 잎사귀는 독특하다. 다른 무엇으로 대체될 수가 없다. 그것은 자신만의 개성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이 감수성은 그대에게 새로운 친구를 사귀게 해줄 것이다. 나무, 새들, 동물들, 산, 강과 우정을 갖게되고 바다와 별들을 사귀게 될 것이다. 사랑이 커가고 다정함이 자랄 수록 삶은 더욱 풍요로워진다.

사랑, 명상의 향기

그대가 명상을 하게되면 곧 사랑에 다가가게 된다. 깊이 할 수록 그대 속에서 커오는 막대한 사랑을 느끼기 시작할 것이다. 이전에는 결코 알지 못했던 그대 존재의 새로운 특질, 새로운 문이 열리는 것이다. 그대는 새로운 불꽃이 되었다. 이제 그대는 나누기를 원한다.

그대가 깊이 사랑한다면 점차 그대의 사랑이 명상적으로 되어감을 깨닫게 될 것이다. 아주 미묘한 침묵의 특질이 그대의 안으로 들어오고 있다. 생각은 사라지고 틈이 생겨나기 시작한다. 침묵이 ! . 그대는 자신의 깊은 심연을 만지고 있다.

사랑이 올바른 길을 가고 있다면 그대를 더욱 명상적으로 만든다.

명상이 제대로 가고 있다면 그대를 더욱 사랑하게 만든다.

그대는 명상속에서 태어난 사랑을 원한다. 마음에서 태어나지 않은 사랑. 그것이 바로 내가 계속 얘기하고 있는 사랑이다.

세계의 수백만 쌍들이 사랑이 존재하듯이 살고있다. 그들은 ~듯이의 세계에 살고있다. 그들이 어떻게 즐거울 수 있겠는가 ? 그들에겐 모든 에너지가 고갈되고 없다. 그들은 거짓 사랑으로부터 무언가를 얻으려고 하는 중이다. 그러나 원하는 것은 전달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연인들 사이에는 좌절과, 계속되는 지루함, 성가심 그리고 싸움이 있는 것이다. 그들은 둘다 뭔가 불가능한 것을 하려고 하고 있는 것이다 : 그들은 자신의 사랑을 뭔가 영원한 것으로 만들려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불가능하다. 그 사랑은 마음으로부터 생겨났고 마음은 그대에게 영원을 보여주지 못한다. 힐끗 보는 것조차 허용되지 않는 것이다.

먼저 명상속으로 들어가라. 왜냐하면 사랑은 명상으로부터 나올 것이기 때문이다. 사랑은 명상의 향기이다. 명상은 꽃, 일천개의 꽃잎을 가진 연꽃이다. 그 꽃이 피어나도록 하라. 그 꽃이 그대를 도와 마음도 없고 시간도 없는 절정의 차원으로 움직여 가게하라. 그때 갑자기 그대는 그곳에 향기가 있음을 알게 될 것이다. 그것은 영원한 것이다. 그것은 무조건의 절대적인 것이다. 그것은 특별히 어느 한사람에게 향해 있지 않다. 그것은 특별히 어느 누군가에게만 향해져 있을 수가 없다. 그것은 관계가 아니다. 그대를 둘러싸고 있는 어떤 것이 아닌 것이다. 그것은 다른 사람과는 상관이 없다. 그대는 사랑하고 있다. 그대가 사랑이다. 그때 그것은 영원하다. 그것은 그대의 향기이다. 그것은 붓다 주위에 있어왔고, 짜라투스트라 주위에도, 예수 주위에도 있어왔다. 그것은 완전히 다른 종류의 사랑이다. 그것은 질적으로 다르다.

연 민

붓다는 연민을 "사랑과 명상의 결합"으로 정의했다. 그대의 사랑이 다른 사람을 향한 단순한 욕망이 아닐 때, 그대의 사랑이 하나의 필요가 아닐 때 , 그대의 사랑이 나눔일 때, 그대의 사랑이 구걸하는 거지의 것이 아니라 황제의 것일 때, 그대의 사랑이 되돌려 받기를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주기만 할 때, 주는 것의 순수한 기쁨을 위해 줄 때, 바로 그때 그 사랑에 명상을 더하면 순수한 향기가 뿜어져 나온다. 갇혀있던 광채가 해방되어져 나오는 것이다. 그것이 연민이다. 연민은 가장 높은 절정의 현상이다. 성(Sex)은 동물적이다. 사랑은 인간적이다. 그리고 연민은 신적이다. 성은 물리적이고 사랑은 심리적이며 연민은 정신적, 영적이다.

이유없는 기쁨속에 머무르기

아무 이유없이 그대는 갑자기 기쁨을 느낀다. 보통의 삶에서는 어떤 이유가 있어야 기뻐하게 된다. 아름다운 여인을 만났고 그대는 기뻐한다. 그대가 항상 바라던 돈을 갖게 되었다. 그리고 그대는 기뻐한다. 아니면 아름다운 정원을 갖춘 집을 샀을 때 그대는 기뻐한다. 그러나 이런 기쁨들은 오래 지속되지 않는다. 일시적이다. 그 기쁨들은 계속해서 방해받지 않고 남아있을 수 없는 것들이다.

만일 그대의 기쁨에 어떤 이유가 있다면 그것은 일시적이며 사라질 것이다. 그것은 그대에게 깊은 슬픔을 남긴채 떠날 것이다. 모든 기쁨들은 그대에게 깊은 슬픔을 남기고 떠나간다. 그러나 분명한 표시인 다른 종류의 기쁨이 있다. 그대는 아무런 이유도 없이 갑자기 기쁘다. 왜인지는 꼬집어 말할 수 없다. 만일 누군가 왜 그렇게 기뻐하냐고 물으면 그대는 대답할 수 없다.

내가 왜 기쁜지 대답할 수가 없어요. 이유가 없습니다. 그냥 단순히 그래요. 이제 이 기쁨은 방해받을 수가 없다. 무슨 일이 일어나더라고 그 기쁨은 계속될 것이다. 그것은 날이 오고 또 가도 거기에 있을 것이다. 그대는 한때 어리고 나이들어 늙어가며, 살아 있다가 또 죽어갈지 모르지만 그 기쁨은 항상 거기에 있다. 그대가 환경이 변해도 변함없이 남아있는 어떤 기쁨을 발견했을 때 이제 그대는 분명히 불성에 가까이 다가가고 있다.

지성 : 감응하는 능력

지성이란 단순히 감응하는 능력을 뜻한다. 왜냐하면 삶이란 끊임없는 변화이기 때문이다. 그대는 깨어있어야 하고 요구에 응해야 하고 상황에 도전받아야 한다. 지성적인 사람은 상황에 따라 행동하고 어리석은 사람은 이미 만들어진 해답에 따라 행동한다. 그 해답을 붓다로부터 가져왔든 예수나 크리쉬나로부터 가져왔든 그것은 문제가 안된다. 어리석은 사람은 항상 주위에 경전을 달고다닌다. 그는 자신에게 의존하기를 두려워 한다. 지성적인 사람은 자신의 통찰에 의존한다. 그는 자신의 존재를 신뢰한다. 그는 자신을 사랑하고 존경한다. 비지성적인 사람은 다른 사람을 존경한다.

지성은 재발견 될 수 있다. 그것을 발견하는 오직 하나의 방법은 명상이다. 명상만이 지성을 발견할 수 있다. 명상은 그대의 지성을 가두기 위해 만들어진 모든 장애를 제거한다. 명상은 단지 장애를 제거할 뿐이다. 명상의 기능은 소극적이다. 그대의 흐름을 막는 바위를 제거하는 것뿐이다. 그대의 샘물을 되살아나도록 하기위해 ....

모든 사람에게는 커다란 잠재력이 있다. 그러나 그 앞에는 커다란 바위가 놓여져 있다. 그대 주위에는 만리장성이 쌓여져 있다. 그대는 갇혀 있는 것이다.

모든 감옥으로부터 나오는 것, 그리고 다시는 또 다른 감옥으로 들어가지 않는 것, 그것이 지성이다. 지성은 명상을 통해서 발견될 수 있다. 왜냐하면 이 모든 감옥들은 그대의 마음속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다행히도 이 감옥들은 그대의 존재에는 다다를 수 없다. 그대의 존재를 오염시킬 수는 없다. 단지 그대의 마음을 오염시킬 수 있을 뿐이다. 그대의 마음만을 덮을 수 있을 뿐이다. 만일 그대가 마음에서 빠져나올 수 있다면 그대는 기독교, 힌두교, 자이나교, 불교로부터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모든 종류의 어리석은 생각들도 끝을 맺을 것이다. 그대는 완전히 멈출 수가 있는 것이다.

그대가 마음 밖으로 나왔을 때, 한번 지켜보라, 단순히 깨어서 목격자가 되어보라, 그대는 지성적이다. 그대의 지성은 드러났다. 원상복귀된 것이다. 그대는 해가 되는 것을 제거했다. 그대는 성직자와 정치가들의 모의를 못쓰게 만들었다. 그 밖으로 나왔다. 그대는 자유인이다. 사실 그대는 처음으로 진정한 하나의 인간이 되었다. 신뢰가 가는 인간이 된 것이다. 이제 온 하늘이 그대의 것이다. 지성은 자유를 가져다 준다. 지성은 자연스러움을 가져다 준다.

<홀로있음> : 그대의 본성

<홀로있음>은 꽃이다. 그대의 가슴속에서 피어나는 연꽃이다. <홀로있음>은 긍정적이며 건강하다. 그것은 그대자신이 된다는 기쁨이다. 그것은 그대 자신의 공간을 갖는다는 기쁨이다.

명상은 <홀로있음> 안에서의 축복이다. 홀로 있을 수 있을 때 사람은 진정으로 살아있다. 아무에게도 더이상 의존하지 않을 때, 어떤 상황에도 , 어떤 조건에도 의존하지 않을 때 그는 진정으로 살아있다. <홀로있음>은 그자신만의 것이기에 아침이나, 저녁, 낮이나 밤에도, 또한 젊을 때나 늙었을 때, 건강할 때나 아플 때도 변함없을 수 있는 것이다. 삶속에서도, 죽음속에서도 역시 변함없을 수 있다. 왜냐하면 그것은 외부로부터 그대에게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그대속에서 솟아나는 어떤 것이기때문이다. 그것은 그대의 본성, 한결같은 본성인 것이다.

내부로의 여행은 절대적인 <홀로있음>으로의 여행이다. 그대는 아무도 데려갈 수 없다. 그대의 중심을 다른 어느 누구와도 나눌 수 없다. 그대의 연인조차도. 그것은 사물의 본성속에는 없다. 그대가 안으로 들어가는 순간 외부와의 모든 연결이 끊어진다. 모든 다리가 부서진다. 사실은 전 세계가 사라진다.

그것이 바로 신비가들이 세상을 환상, 마야라고 부르는 이유이다. 세상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라 명상가에게는, 내부로 들어가는 사람에게는 마치 세계가 존재하지 않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 침묵은 너무도 깊어서 어떤 소리도 그것을 뚫고 들어갈 수가 없다. <홀로있음>은 너무도 깊어서 들어가는 데는 용기가 필요하다. 그러나 그 <홀로있음>에서 축복이 터져나온다. 그 <홀로있음>--그 신의 체험으로부터. 다른 길은 없다. 지금까지도 그리고 앞으로도 다른 길을 없을 것이다.

<홀로있음>을 찬양하라, 그대의 순순한 공간을 찬미하라. 그러면 위대한 노래가 그대의 가슴속에서 울려퍼질 것이다. 그것은 자각의 노래이며 명상의 노래이다. 그것은 멀리서 부르는 고독한 새의 노래이다. 특별히 누군가를 향해 부르는 것이 아닌 단지 가슴이 가득차서 부르고 싶기 때문에 부르는, 구름이 가득차서 비를 뿌리고 싶기 때문에 뿌리는, 꽃이 가득차서 꽃잎이 절로 열리고 향기가 뿜어져 나오기 때문에 나는 주소없는 편지인 것이다.

그대의 <홀로있음>이 춤추게 하라.

그대의 진정한 자아

명상은 그대의 진정한 자아를 깨닫게 해주는 장치이다. 그 자아란 그대에 의해 창작되거나 될 필요도 없고 본래 타고난 본성인, 있는 그대로의 자아이다. 그대는 그것과 함께 태어났다. 그대는 그것 이다. 그것은 발견될 필요가 있다. 이 발견이 가능하다면, 사회가 이것을 허용한다면 --그러나 사회는 이 발견을 허용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진정한 자아는 위험하기 때문이다. 확립된 교회에 위험하고, 국가에 위험하며, 대중에게 위험하고 전통에 위험하다. 한번 자신의 진정한 본성을 안 사람은 한 개인이 되기 때문이다.

그는 더 이상 군중심리와는 관련이 없다. 미신으로부터 멀고 더이상 이용당하지 않는다. 그는 산양의 무리처럼 몰고갈 수 없고, 명령하거나 강제되지 않는다. 그는 그 자신의 빛에 의해서 살아갈 것이다. 그는 내부로부터 살아갈 것이다. 그의 삶은 어마어마한 아름다움과 고귀함을 갖는다. 그러나 그것은 모두 사회가 두려워 하는 것이다.

통합된 인간은 한 개인이 된다. 그리고 사회는 그대가 비개인적이길 원한다. 개인성 대신에 사회는 그대에게 인격을 가르친다. 인격(personality)이란 단어는 이해되어야 한다. 그것은 persona 라는 어근에서 유래한다. persona는 가면을 뜻한다. 사회는 그대에게 거짓자아를 주었다. 그대에게 장난감을 준것이다. 그리고 그대는 그대의 전생애를 그 장난감에 매달리고 있는 것이다.

내가 본 바로는 모든 사람이 제자리를 찾지 못하고 있다. 아주 행복한 의사가 되어있을 사람이 화가가 되었고 화가가 되었으면 아주 만족했을 사람이 의사가 되어있다. 모두가 제자리를 찾지못한 것 같다. 이 사회가 혼란스러운 이유가 바로 그것 때문이다. 사람들은 다른 사람에 의해 진로가 결정된다. 그자신의 직관에 의해 결정되지 못한다.

명상은 그대 자신의 직관능력을 기르도록 돕는다. 그대를 만족시킬 것이 무엇인가를 명확하게 해준다. 무엇이 그대를 꽃피울지를 명확하게 해준다. 그것이 무엇이든 그것은 각 개인마다 다를 것이며 그것이 바로 '개인'이 의미하는 바이다. 모든 사람 각자는 독특하다. 그리고 그대의 독특함을 찾고 추구하는 것은 그대를 전율케 하며 아주 멋진 일이다.

이글은 오쇼 라즈니쉬의 '명상 -- 처음이자 마지막 자유" 에서 발췌한 것입니다.

풍요롭게 사는 것에 대하여

나는 그대들에게 부유하게, 풍요롭게 살라고 가르친다. 물질적으로나 정신적으로 모두.... 이것은 그대가 물질적으로 풍요롭게 살아야 하느냐 아니면 정신적으로 풍요롭게 살아야 하느냐에 대한 문제가 아니다. 근본적인 질문은 자연적이고 존재적인 풍요와 부유함속에서 살아야하는가 아닌가 이다. 풍요속에서 꽃을 피우는것, 삶의 모든 색깔을 다 알고, 모든 노래를 알며 모든 아름다움을 아는 것, 이것은 그대의 근본적인 욕구이다.
그래서 나는 과거와 싸우지 않으면 안되게 되어있다. 전 인류의 과거는 가난을 찬미해왔고, 가난을 영성과 동일시 해왔기 때문이다. 이는 완전히 넌센스이다.

영성은 인간에게 일어날 수 있는 것 중 가장 풍요로운 것이며 다른 모든 풍요로움이 그 안에 포함되어 있다. 그것은 풍요함에 반대하지 않는다. 오히려 모든 종류의 가난함, 빈곤함에 반대한다. 그러므로 내가 시도하고 있는 것은 너무도 혁명적이어서 세계 구석구석에서 적대감을 일으키게 되어있다. 사람들은 너무도 오랫동안 하나의 가치관과 함께 살아와서 비록 그 가치관이 비참함 밖에 주지 않는다고 해도 그 둘 사이의 연관성을 발견하지 못한다. 그 가치관이 결코 만족을 가져다 주지 못해도 그것을 버리지지 못한다.

나는 우리 산야신들이 상징이 되기를 원한다. 전세계에 인간의 비극은 잘못된 가치관에서 비롯되었음을 알리는 상징 , 가난을 숭배하기 때문에 그들이 가난하며 이것은 하나의 정신병임을 알려주는 상징. 한편에서는 가난을 숭배하고 또 다른 한편에서는 가난한 사람을 도우라고 말하니 이상하지 않은 가 ? 만일 가난이 영적이라면 모든 부자를 가난하게 만드는 것이 영적인 일이 될것이며 부자가 가난하게 되면 그는 영적인 사람이 될 것이다. 그런데 왜 도리어 가난한 사람을 돕는가 ? 그대는 가난한 사람들의 영성을 파괴하길 원하는가 ?

깊은 무의식속에 커다란 맹목이 있다. 나는 산과도 같은 무의식, 그 어둠과 싸우고 있는 것이다. 자연히 옛 가치관에 익숙한 그들은 매우 성가실 것이다. 그들이 나를 사랑하고 숭배하게 할 수도 있다. 왜냐하면 그들이 원하는 대로 해주는 것은 쉬우니까. 그러나 그렇게 되면 나는 오랜 비극과, 병과 어리석음을 계속해야 할 것이다. 그래서 나는 존경받지 않더라도 이 넌센스 같은 가치관에 따르지 않기로 결심한 것이다.

삶의 초기부터 나는 존경받는 것에 마음쓰지 않기로 결심했다. 그러면 일은 단순해진다. 그때 자연스럽고 건강한 것을 행할 수 있다. 그때 나는 물질과 정신을 연결할 수 있고 이 세계와 저 세계를 잇는 다리를 세울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나에게 있어 풍요롭게 사는 것은 이 세계에서 하나 남은 영적인 일이다.

이에 대해 사람들은 비난하고, 비평할 것이다. 모든 종교, 모든 전통, 모든 도덕과 윤리적인 규범이 나를 비난할 것이다. 기대했던 바이며 놀랄 일도 아니다. 내가 말하고 행하는 것은 근본부터 인간의 의식을 바꾸어 놓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그대가 자신에게 고통을 가함으로써 더 쉽게 명상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반대로 그 대의 육체가 쾌적하고 편안할 때 더욱 쉽게 명상할 수 있다. 또 단식할 때 명상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대는 단지 음식외에 다른 것은 생각할 수도 꿈꿀 수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대가 식사를 잘 했다면, 영양섭취가 잘 되었다면 그대는 음식에 대해 생각하지 않는다. 그럴 필요가 없는 것이다. 그대의 육체는 아주 만족했다. 어떤 문제도 일으키지 않을 것이다.

유쾌하고 기쁘게 사는 것은 명상에 해가 되지 않는다. 그것은 진정 명상의 기본적 필요이다. 나는 많은 고행 수도자들을 알지만 그들에게서 어떤 지성도, 어떤 창조성도 발견한 적이 없다. 그들의 눈속 에서 결코 초연한 빛을 보지 못했으며, 그들의 행동속에서 말로는 전하여 질 수 없는 어떤 메세지도 볼 수 없었다. 그들은 아무것도 가지고 있지 못하다. 그들은 단순히 굶고 있는 것이다. 그것이 그들의 에고를 만족시키기 때문이다. 그들이 단식을 하면 할 수록, 그들이 자신에게 고통을 가하면 가할 수록 더 많은 사람들이 그들을 숭배하러 오기 때문이다.

이것은 단지 인류 역사에서 광기어린 한 부분에 불과하다. 이제 이런 일은 끝나야 한다. 이제 우리 가 역사의 새로운 장을 열어야 할 때이다. 자연스럽고, 존재하는 분명한 삶의 장을. 그리고 육체와 영혼 사이에 벽이 아닌 다리를 놓아야 할 때이다.

Osho, Beyond Psychology, Discourse 9

붓다 이야기

어느 이른 아침 붓다가 아침 산책을 하러 밖으로 나갔을 때 어떤 사람이 그에게 물었다.

신이 있습니까 ?



붓다는 그의 눈을 잠시 들여다 보며 말했다.

"아니다. 신은 절대로 없다. 결단코 있었던 적도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것이다. 그 엉터리 같은 생각을 치워버려라."



그 사람은 충격을 받았다.

붓다를 항상 따라다니는 아난다에게마저 붓다의 방금전 그 대답은 너무 노골적이고 잔인하게 보였다.그러나 그가 붓다의 얼굴을 쳐다보았을 때, 붓다의 얼굴은 너무나 자비스러웠다.

같은 날 오후 다른 사람이 와서 신은 존재하냐고 물었다.

이번에는 붓다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렇다. 신은 있다. 신은 언제나 있었고 앞으로도 있을 것이다. 그러니 찾아보라."



아난다는 매우 당황했다. 아침에 붓다가 말한 것을 잊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사람들이 너무 많아 차마 물어 볼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가 묻기 전에 또 다른 사람이 해질 무렵에 찾아왔다. 붓다는 나무 밑에 앉아 저녁 노을의 아름다운 구름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사람이 물었다.

"신은 있습니까?"



붓다는 단순이 그에게 앉으라는 손짓을 하고 눈을 감았다.



그러자 그 사람도 따라 눈을 감았다. 그들은 잠시 침묵속에 앉아 있다가 어두워질 무렵 그 남자가 일어났다. 해가 졌다. 그는 붓다의 발을 만져주며 말했다. "응답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너무너무 고맙습니다." 하고는 떠나갔다.

이제 아난다는 피가 끌어올랐다. 거기에 아무도 없을 때 아난다는 물었다.

"당신께서 대답해주지 않으신다면 저는 오늘밤 잠이 오지 않을 것입니다. 같은날, 같은 질문에 당신께서는 세가지 대답을 하셨습니다. 첫번째 사람에게는 신은 없다고 하였고, 두번째 사람에게는 신은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세번째 사람에게는 당신께서는 소박한 사랑으로 그렇게 앉아 눈을 감으라고 몸짓만 하셨습니다. 당신께서는 그에게 아무런 말씀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나 무엇인가 일어났음이 틀림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매우 깊은 침묵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당신의 발을 만졌고 또한 당신의 응답에 고마움까지 표현하였습니다. 그러나 제가 거기에 있었을 때, 당신께서는 그에게 한마디 대답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도대체 무슨 일입니까? 저는 도무지 뭐가 뭔지 몰라 어리둥절할 뿐입니다.



붓다가 말했다. "어떤 응답도 네게 주어진 것은 없다. 왜 네가 어리둥절해야 하는가? 그것은 그들의 질문이었고, 나의 응답이었다. 너는 그것과는 관계가 없다." 그러나 아난다는 말했다. "저는 귀먹어리가 아닙니다. 저는 거기에 있었고 단지 듣기만 하였을 뿐입니다. 그러나 지금 그 세가지의 응답이 저를 계속 혼란하게 합니다. "



붓다가 말했다.

" 그 첫번째 사람은 유신론자였다. 그는 정말 묻기위해 온 것이 아니었다. 그는 확인하러 온 것이다. 그의 믿음을 내가 뒷받침해주기를 원했다. 그러므로 그는 "신을 믿는 것은 나뿐만 아니라 붓다 또한 믿는다"라고 사람들에게 말할 수 있기를 원했다. 그는 그 자신의 목적을 위하여 나를 이용하고자 했다. 그리하여 나는 없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나는 그에게 매우 엄격하여야만 했다. 그렇지 않으면 그는 그의 관념으로 가득차 아무것도 들으려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는 학자였다. 경전을 둘둘말아 외는 사람이었다. 나는 그의 머리속에서 시끄러운 소음을 들을 수 있었다. 나는 망치처럼 잔인하고 엄격하여야만 했다. 그렇지 않으면 그가 들을 가능성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는 충격이 필요했다. 나는 그에게 충격을 주었다. 왜냐하면 나는 어누구의 믿음도 뒷받침해주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모든 믿음은 그릇된 것이다.



그리고 두번째 사람은 무신론자였다. 그 역시 학자였다. 그는 모든 종류의 관념들로 가득차 있었다. 그러나 그는 그 첫번째 사람과는 정반대 였을 뿐이다. 그 또한 같은 목적으로 왔었다.

그 둘은 서로 용납하지 않았으며 서로 적이었다. 그러나 그 목적은 같았다. 그는 나에게 그의 불신앙을 옹호받고자 했다. 내가 그에게 "그렇다 신은 존재한다. 오직 신만이 있을뿐 다른 아무 것도 없다."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은 바로 이때문이다. 그런 방법으로 나는 그의 불신앙을 깨뜨려 버렸다.

그리고 세번째 사람은 참된 탐사자였다. 그는 대답을 원하지 않았다. 그는 경험을 원했다. 그는 질문하러 온것이 아니었다. 그는 어떤 관념도 편견도 없었다. 그는 할 수 있다면 문을 열고자 왔었다. 그는 나에게 상처받고자 왔다. 그는 지대한 신뢰감이 있었다. 그는 나에게 드러내줄 것을 원했다. 그러므로 나는 그에게 대답하지 않았다. 나는 단순히 그에게 내옆에 앉으라 고 말했다. 그러자 "맞았습니다. 당신께서 옳았습니다. 무엇인가 일어났습니다라고 말했다.



왜냐하면 두 사람이 깊은 침묵속에 앉아 있을 수 있다면 언젠가 무엇인가 일어나기 때문이다. 그리고 만약 그대가 붓다와 같은 침묵속에 앉아 있을 수만 있다면 무엇인가 어마어마하게 진귀한 것이 일어날 것이다. 그의 침묵에는 전염성이 있다. 만약 그대가 문을 열기만 한다면 그의 침묵이 그대의 존재 안으로 쏟아져 들어 올것이다. 그것은 마치 목욕하는 것과 같다. 그대는 그의 무의식 속에서 목욕하는 것이다. 그대는 순결하게 될 것이다. 그대는 깨끗하게 될 것이다. 먼지가 그대의 거울에서 사라지게 될것이다. 그대의 눈은 선명해 질 것이다.

붓다는 말한다.



" ······ 그래서 그에게는 아무 대답도 내 주지 않았지만 그는 해답을 받았다. 그의 침묵속에서 모든 해답중의 해답을 받았다. 그래서 그는 나에게 절하면 발을 만지면서 고마워하였던 것이다.

항복을 통한 승리

궁극에는 어떤 목소리도 언어도 없다.

누구나 그것을 듣지 않고 듣는다.

그대가 침묵하게 되어야 아무것도 그대안에서 꿈틀거리지 않는다. 그러면 듣지 않고도 그것이 들릴 것이다. 이것이 역설이다. 그러나 그대가 진리에 다가갈수록 그 경험은 더욱 불가사의하다. 이 모순된 역설과의 조우를 각오하라.
그리고 제자가 마주치는 첫번째 역설은 항복을 통한 승리이다. 그것이 첫번째 조우이다. 왜냐하면 그것이 어떻게 제자의 본성에 첫발을 내딛느냐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대는 마스터에게 굴복한다. 그리고 이 보기드문 아름다움은 복종하는 것에서 그대는 처음으로 승리하는 것이다. 그대는 마스터의 노예가 된다. 그리고 노예가 되는 것으로서 난생 처음으로 그대는 그대 자신의 마스터가 된다. 그리고 그대는 마스터가 되어본 적이 없었다. 그리하여 도에는 역설로 가득차 있는 것이다.

프리즈나는 아무 것도 알려진 것이 없다.
프리즈나는 궁극의 이해를 의미한다.

······ 아무것도 알려진 것이 없다. 그러므로 누구나 그것을 모르면서 안다. 만약 그가 보고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는 그것을 불완전하게 보는 것이다.

왜냐하면 만약 그대가 '나는 보고 있다'고 생각한다면 '나'라는 것이 거기에 있어서 그대의 현존이 방해가 될것이기 때문이다. 그대는 훼방꾼이다. 그대가 장애물이다. 아무리 그대의 에고가 미묘하더라도, 아무리 그대의 에고가 투명해지더라도, 여전히 그것이 장애물이다. 그리고 그대는 불완전하게 이해할 것이다. 그 에고가 모두 사라져야 한다. 그때 그대의 시야는 자유롭다. 그 때 거기에는 어떤 장애물도, 방해자도 없다.

만약 그대가 그것을 안다고 생각한다면, 그대는 그것을 완전히 아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만약 누가 그것(진리, 달마카야, 신)을 안다고 생각한다면, 그렇다면 그것은 완전히 아는 것이 아니다. 붓다 이전의 우파니샤드(Upanishads)에서는 말한다.
"안다고 생각하는 자는 아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모른다고 생각하는 자가 아는 것이다."

붓다이후에도 소크라테스는 같은 것을 말한다. "나는 오직 아무 것도 모른다는 것, 이 한가지만을 안다." 이것이 진리에의 접근방식이다. 그대는 계속하여 녹아버리고 있다. 그대는 너무나 용해되어 어떤 지식도 요구하지 않으며, 아무것도 깨달으려 하지 않는다.

아는 것 없이 그것을 알 때, 그는 그것을 완전히 아는 것이다.

거울은 '나는 당신을 비추고 있다.'고 말하지 않는다. 거울은 단순히 그대를 비추고 있을 뿐이다. 거울은 아무 것도 주장하지 않는다. 그리고 절대적으로 순수한 의식 또한 아무 것도 주장하지 않는다. 모든 요구는 에고로부터 온다.

만약 누구라도 이를 모른다면, 그는 참으로 알고 있는 자가 아니다. 만약 누구라도 얻고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는 전부를 얻은 것이 아니다. 그가 아무 것도 얻을 것이 없는 것을 얻었을 때, 그는 모든 것을 얻는다.

이것이 바로 내가 말하는 항복을 통한 승리이다. 만약 그대가 모든 것을 소유하고자 한다면 모든 것을 놓아 버려라. 이것이 참된 포기이자 기쁨이다. 그리고 궁극의 역설은 그 포기와 기쁨인 것이다. 만약 그대가 부활하고자 한다면 완전히 죽어야 한다.

만약 그가 옳다고 생각한다면, 그의 올바름은 완전한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내가 옳다'하고 느끼는 것은, 단지 그대가 아직도 올바르고 특별한 어떤 사람이 되고자 노력하고 있다는 뜻이다. 그리고 그대는 다른 사람들이 그르다는 것을 증명하려고 애쓰는 것이다. 덕이 있는 참된 사람은 절대로 그의 덕을 의식하지 못한다. 그의 미덕은 자연스럽다. 마치 그대가 숨쉬고, 피가 순환하고, 심장이 뛰는 것처럼 그는 고결한 것이다. 참으로 고결한 것이다. 참으로 고결한 사람은 미덕에 대하여 옳고 그름에 대하여 아무것도 모른다.

그가 옳고 그름을 초월할 때, 그의 덕은 완성된다. 그러한 지혜는 지고한 지혜의 수많은 문을 여는 열쇠이다.

달마대사는 말한다. 모든 붓다는 텅비어 있음을 설법한다. 왜 ? 왜냐하면 그들은 탐구자의 굳어진 관념들이 깨어지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만약 어떤 탐구자가 텅비어 있음의 관념에 매달린다면 그는 모든 붓다를 배반하는 격이 된다.

어떤 이는 삶이라는 것이 없을지라도 삶에 매달린다. 또 다른 어떤 이는 죽음이라는 것이 없을지라도 죽음에 매달린다. 진실을 말하자면 태어날 것도 죽어야 할 것도 없다.

 

달마대사의 선화 (관음출판사, 길연 역)중에서

죽음의 의미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

잃어버려라, 그러면 가질 것이다. 매달려 얻으려고 하라, 그러면 잃을 것이다. 역설처럼 들릴 것이다. 그러나 매우 분명한 진리이다. 씨앗은 흙 속에 파묻혀 죽을 때 커다란 나무가 된다. 만일 씨앗이 자기 자신에게만 매달려 자신을 보호하고 방어하려고만 한다면 그 씨앗은 결코 나무가 되지 못한다. 씨앗에게는 흙 속에 파묻히는 것이 죽음이며 동시에 생명이다.

나를 따르라(오쇼 라즈니쉬)에서 발췌 -- 예수에 대한 라즈니쉬의 생각, 그 글에 제가 죽음의 의미라고 생각하였습니다.

어록

"그대의 신이 죽었는가 살았는가는 오로지 그대 자신에게 달려 있다. 계속 흘러라, 그러면 그대의 신은 살아 있는 것이다. "
"누구 하나 불행하게 되는 것을 바라지 않는다. 그러면서도 모두가 불행하다."



"; if (isset($options[timer])) print $menu.$banner."
".$options[timer]->Write()."
"; else print $menu.$banner."
".$timer;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