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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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우 : "할머니는 말을 못하니까 전화도 할수없고, 글씨를 읽을줄 모르니까 편지도 할수가 없는데, 할머니가 아프면 어떻게 해? 할머니, 할머니 아프면 그냥 아무것도 안써도 좋으니까 그냥 아무것도 쓰지말고 편지해. 그러면 내가 할머니한테 뛰어 올테니까. 알았어?"

아프다. 보고다. 아프다, 보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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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으로' 가고 싶다. 그러나 이미 집은 없다. 나는 극단적 환경론자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들처럼 모든걸 버리고 빈 몸뚱아리로 살아갈 자신은 없다. 영화 '집으로'는 우리의 모순을 정확하게 꼬집어 흥행을 일구었다. 인스턴트에 깊이 스며들어 이미 자신의 본성조차 망각한 그리고 무기력하여 탈출의 꿈조차 버린 청장년층에게 자연과 인간의 본성을 보여준다. 돈으로 살 수 없는 아니 모든 사물에 값어치부터 따지는 우리에게 그것은 본질이 아니라고 말한다. 그러나 우리는 본질을 연구할 순 있어도 그 곳으로 돌아갈 순 없다.

환갑이 넘은 어머니와 칠순을 바라보는 아버지가 함께 산을 오른다. 등산이 아니라 생계를 위해서이다. 산에서 각종 식물들(두릅,도라지,쑥,산딸기,영지버섯)을 캐서 시장한구석에 노점을 차리고 판다. 팔다가 남은 그 비싼 것이 가끔 내 입으로 들어와도 행복하지가 않다. 구부러진 허리의 통증을 견디며 산을 타는 모습이 눈에 어른거리고, 나는 불효자일 수 밖에 없는가라는 죄책감때문이다. 반면에 부모님들은 죄책감에 시달리는 나보다 행복하다. 나처럼 돈에 목말라하지도 않고 돈때문에 불행해지지도 않을 것같다.

산을 타는 일은 어머니가 시작했다. 이전에 그런 경험이 있었던 것 같지는 않다. Freefeel:노점상도 처음이다. 아버지의 사업실패와 부도 이후로 도심의 변두리로 집을 얻어 나오면서 얼마간은 거의 괴로움에 파 묻혀 지내신 것 같다. 그리고 자궁암초기로 수술까지 받았다. 그러던 어머니가 산귀퉁이에 상추같은 것을 심으면서 먹고 남은 것을 내다 팔기 시작한 것이다. 그 때까지도 아버님은 그저 괴로움속에 보냈다. 아버님이 괴로움의 자의식에서 벗어나서 제일 처음 한 일은 나보고 결혼하라고 한 것이다. 생각이 없다고 하자 호적을 파라고 하신다. 그 때 호적을 팔려고 했었다.

어머니의 일이 돈이 된다면 나도 그 일을 하고 싶다. 어머니는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신다. 지금은 가끔 허리의 통증을 호소하시는 것 빼고는 정정하시다. 나는 돈을 벗어나 사고하는 법을 배우지 못했다. 돈을 빼고 가르치는 곳도 없다. 취업과 진급 그리고 암투, 착취가 이 시대를 살아가는 청년들의 고민이다. 얼마전에 '부자 아빠 가난한 아빠'라는 책을 읽으니 노골적으로 일해서 벌 생각말고 남들에게 일을 시켜 벌든가 아니면 돈으로 돈을 만드는 방법을 연구하라고 한다.

괴롭다. 돈도 없고 능력도 없고 톱니바퀴에 물려 돌아가기도 너무 힘들다. 오늘도 외국 프로그래머가 만든 개념을 일본사람이 해설한 디자인패턴 책을 우리나라 글로 번역한 책을 읽는다.(빌어 먹을 패턴들의 이름에 우리나라 말을 붙였으면 얼마나 좋을까?) 도태될 수는 없기 때문에... --이정호

보지도 않고 그 영화를 말하는것이 우습지만 꼭 말하고픈 것이 있다 지금 부터 말하는 내용은 영화 평론가 김소희의집으로평론에서 일부인용혹은 아이디어를 빌려온것이다. 김소희씨 영화평에도 나오지만 농촌은 우리 도시인에게 노스탤지어를 주는 대상으로 전락하고 있다. 허나 농촌은 우리의 노스탤지어를 만족 시켜줄 한가한 입장에 있는곳이 아니다. 물론 집으로가 나쁜 영화다라고 단정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농촌 문제에 관련하여 이런점을 꼭 지적해야 겠기에 이 글을 쓰는것이다. 농촌은 결코 낭만의 대상이 아니다. 결혼을 못해 고민하는 농촌 총각과 농사 빚에 시달리다 농약으로 그 생을 마감하는 수 많은 농부 아저씨들이 계신곳이 바로 농촌인 것이다. 전원일기와 6시 내고향을 아시는가 이 프로그램들이야 말로 사라져야할 1순위 프로그램들이다. 적어도 농촌 문제에관련하여 말이다. 이런 프로그램들은 계속 농촌은 노스탤지어의 대상으로 만들면서 그곳을 황폐화 시킨다 그것은 도시인들에게도 결국 피해를 안겨다 준다. 농촌에서 살수 없어 계속 도시로 인구가 유입되니까 말이다. 농촌이 진실로 살아나려면 이런 프로그램들을 없애야한다. 그리고 집으로 감독님은 이 번 영화로 얻은 수익의 일부를 농촌 생활 개선 기금으로 써주시기를 기원해본다.

이 영화를 기껏해야 '농촌'문제로 해석해서 본다면, 이는 마치 사람 인품은 안보고 입고 있는 옷만 가지고 평가하는것과 다를바가 없다고 본다. 가령 여기 등장하는 '할머니'가 탄광촌에 있었다면, 이 영화를 '탄광촌'의 시각에서 보아야 하며, 마찬가지로 '어촌'에 있었다면 '우리나라 어업문제'와 결부시켜서 영화를 해석해야 하는가? 미안하지만, 이 영화의 배경은 이 영화의 가치를 크게 결정짓는 요소가 아니다. 김소희씨는 껍데기만을 보았을 가능성이 크다. 이 영화에 등장하는 할머니는, 대도시 아파트의 경노당에 앉아있을수도 있고, 구로공단 쪽방 툇마루를 지킬수도 있으며, 수색역 근처 벤치에 앉아 있을수도 있고, 청계천 옷공장 한구석에서 재봉틀질을 하고 있대도 결국 마찬가지이다. 사람과 사람사이를 잇는 '마음'의 이야기를 하는 영화를 가지고 웬 난데없는 '농촌문제'인가 말이다. Jimmy가 농촌문제를 전혀 모른다거나 등한시 한다고 오해하지 마시길 바란다. 태를 농촌에 묻었고 대학졸업할때까지 두엄을 치고, 외양간 쇠똥을 치웠으며, 지금도 창밖에 논밭이 펼쳐진 시골 구석에서 살고 있으니 말이다. 농촌문제 걱정해주는거야 농촌에서 고마워해줄지, 아닐지, 그것도 확신이 안서는 일이거니와, 아무거나 다 끌어다 농촌문제와 연관짓는것도 본질에서 어긋나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영화수익의 일부를 농촌 생활 개선 기금으로 보내는것이 진정으로 피폐해가는 농촌에 도움이 된다고 생각하시는가? 이런 식의 섣부른 발상이 혹시 농민들의 마음을 더욱 다치게 할수 있다는 생각은 안드시는가? 농민이 바라는게 싸구려 동정심이던가? --Jimmy see also 달과손

에잇 이왕에 말 나온김에 마저 쓸수밖에 없다. 여기 등장하는 '상우'라는 소년의 엄마는 잘나가는 도시 중산층이 아니다. 교육못받고, 필시 대도시의 변두리에서 낙엽처럼 이리저리 떠돌면 산전수전 다 겪고 달랑 애비도 없는 자식 키우는 젊은 여자다. 그여자의 삶 자체는 대도시 빈민, 그중에서도 한급 떨어지는 애딸린 젊은 여자다. 그 도시빈민 여자가 그나마 먹고살길이 막막해서 찾아가는 곳이 벙어리 어머니네 집이다. 그여자가 편지를 보내온 주소는 '금호동'이었다. 금호동이 어딘줄 아시는가? 지금은 최고급 아파트와 빈민층이 뒤섞이고 난리를 치는 곳이다. 영화속의 농촌이 이상사회처럼 아름다워 보이던가? Jimmy가 보기엔 버려진 노인들이 죽을날만 기다리며 한없이 한없이 달팽이 처럼 살아가고 있더라. 그러면, 한없이 처량하게 달팽이처럼 살아가는 사람들은 모두 암담해야 하는가? 모두 동정의 대상이 되어야 하는가? 그건 아니다.

금호동 출신의 아비없는 소년이나, 남편없이 애새끼 키우는 젊은년이나, 벙어리 어미나, 움직이지도 못하고 가겟방을 지키는 노인이나, 처량맞기는 매 일반이다. 누가 이 영화를 가리켜 농촌에 대한 노스탤지어라고 해석하는가? 겨우 그정도로 해석을 하려면 애저녁에 영화비평 집어치워야 할거다. 성질 잘 안드러내는 Jimmy가 왜 지금 송곳같이 성질 벅벅 내고 있는가... 사람을 함부로 동정 한다거나, 혹은 깊이 있는 예술작품을 기묘하게 틀어서 해석하는 덜떨어진 비평가에 염증을 느끼기 때문이다. 사회문제는 사회문제대로 풀어야 할것들이 누적돼 있다. 그러나 함부로 어떤 대상을 감히 동정의 시선으로 보는것은 매우 위험한 발상이다. --Jimmy

일단 집으로를 보지않고서 영화를 논하는것이 얼마나 위험한 짓인가를 다시 한번 깨닫게 해준 Jimmy님께 감사 드립니다. 잡종은 농촌 문제에 관련하여서는 다소 히스테리컬한 반응을 일으키는 경우가 많아서 가끔 오류를 잘 저지릅니다. 집으로가 무엇을 말하려 했던 영화인지는 봐야 알것 같군요 김소희님의 말처럼 모성과 농촌이 이 영화의 핵심키워드인지 아니면 Jimmy님의 말처럼 농촌은 부차적 요소인지 말입니다. 그런데 해명할 부분이 있어서 글을 쓰지 않을 수 없군요 만약 글 내용에 동정심이 흐르는 글이 김소희 씨의 글이라면 그건 이해 할 수 있습니다(그런데 제가 읽기에는 그글에는 동정심은 없는것 같습니다) 그러나 제 글에서 동정심을 읽으셨다면 그것은 오해임을 밝힙니다.



나만 쏙 빼놓고 온 집안식구가 극장으로 "집으로..."를 보러 갔다. 나는 집만 보았다.
가뭄에 거북이 등 갈라진듯한 마음씨의 마눌님이 집으로 돌아와서는

"여보, 나 펑펑 울었어!!!"

나는 생각해 본다. 무엇이 울 마눌님을 울리게 했을까.
나는 생각해 본다. 무엇이 우리- 상우,할머니, 상우의 엄마, '집으로...'의 관객 - 의 문제일까?
나는 생각해 본다. 무엇이 우리 사이 - 상우,할머니, 상우의 엄마, '집으로...'의 관객 - 를 갈라 놓은 것일까?

우리 人간은 두 사람이 필연적으로 함께 어울려 살아야 할 존재라고들 한다. 그 관계의 파괴가, 그 아픈 실존의 나, 너, 우리 모습이 저토록 눈물나게 하는 것이 아닐까. 도시라는 훼방자 - 이제 도시는 우리의 힘으로 더 이상 어떻게 할 수 없는 신의 힘을 가진 괴물의 모습이다 - 가 우리들을 점점더 자신들에게서 또 서로서로에게서 멀어지도록 분리시키는 것이 아닐까.

나는 희망을 본다, '집으로...' 를 보고 펑펑 눈물을 흘렸던 울 마눌님의 아직도 마르지 않은 붉은 눈망울에서.--oaks

모당에서 모당보고 '집으로 가시오'라고 정치광고를 냈다(할머니 사진과 함께). 이런 빌어 먹을 녀석( ;) )들이 집으로를 보지도 않고 집으로를 단어만 따서 사용하고 있다. 모당 대통령 후보의 보좌관들은 저번에도 '빠순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여 무식을 들어내더니 이번에는 집에서 설거지나 하시오라는 식으로 '집으로'를 사용하고 있다. 차라리 말을 하지 마라! 하긴 권력에 자본에 빌붙어 구걸하는 사람들이 집이 얼마나 소중한지 현대경제체제의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하여 집으로의 의미가 얼마나 중요한지 알기나 하겠는가! 쉬리보다 더 많은 돈을 주고 집으로를 사간 미국의 영화관계자들보다 더 뒤떨어지는 꼴이라니.. 쯧쯔 ---이정호

DeleteMe 나쁜 사람들 같으니라구... 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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