둘: 도올 김용옥 -- "흙, 건강, 디자인"(1999.8) ¶
작성 : 동방불패(mosan) 2001/03/28 08:16
출처; 월간디자인 99년 8 월호
특집/WING 1999 SEOUL/기조강연 도올 김용옥 흙, 건강, 디자인/152쪽-155쪽
출처; 월간디자인 99년 8 월호
특집/WING 1999 SEOUL/기조강연 도올 김용옥 흙, 건강, 디자인/152쪽-15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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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은 느낌의 표현이다. 모든 예술작품은 "느껴진 세계"이다. 느낌의 궁극적 주체는 氣다. 그러나 상식적 차원에서 예술을 말할 때, 우리가 말하는 느낌의 주체는 인간이다. 인간은 氣의 거대한 사회이다. 이성이나 오성 등, 느낌과 대비되는 듯이 보이는 인간의 기능도, 느낌과 분리되는 것이 아니라, 느낌의 다양한 양태에 속하는 것일 뿐이다. 그러므로 나의 기철학의 체계 속에서는 감성과 오성의 이원론은 성립하지 않는다. 수학도 느낌의 한 예술적 형식일 뿐이다.
예술은 느낌의 표현이다. 모든 예술작품은 "느껴진 세계"이다. 느낌의 궁극적 주체는 氣다. 그러나 상식적 차원에서 예술을 말할 때, 우리가 말하는 느낌의 주체는 인간이다. 인간은 氣의 거대한 사회이다. 이성이나 오성 등, 느낌과 대비되는 듯이 보이는 인간의 기능도, 느낌과 분리되는 것이 아니라, 느낌의 다양한 양태에 속하는 것일 뿐이다. 그러므로 나의 기철학의 체계 속에서는 감성과 오성의 이원론은 성립하지 않는다. 수학도 느낌의 한 예술적 형식일 뿐이다.
느껴지는 세계는 무한히 다양하다. "다양함"이란 주관성의 특성에서 파생되는 것일 수 있다. 느낌을 주관성의 국부적 성격 때문에 폄하하는 것은 그릇된 것이다. 우리가 말하는 객관이란 주관의 공통성일 뿐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술은 진리함수에 국한되지 않는다. 현재적 느낌의 과거화가 곧 객관이다. 객관은 끊임없이 주관의 요소로서 작용한다. 따라서 기철학에서는 객관과 주관의 이분이 허용되지 않는다. 주관은 객관의 多를 자신의 주체적 목적에 따라 一로 통합하여가는 것이다. 그 통합을 우리는 창조라 부른다. 창조의 저변에는 우주의 창조성이 궁극적 범주로서 전제되어 있다. 우주의 易이다. 易은 곧 창조성이다.
느낌은 언제나 느끼는 것과 느껴지는 것의 통합이다. 느낌의 주체와 대상은 호상 관계적이며 호환 가능한 것이다. 일자가 타자를 일방적으로 규제할 수는 없다. 따라서 느낌의 세계는 무한히 다양하며 무한히 상호 관계적이며, 우리가 일상적으로 경험하는 한에 있어서 무궁하게 조화적이다. 그러나 不和를 경험할 때 우리는 세계간의 충동을 말하게 된다. 우주에 있어 서 不和란 궁극적으로 조화를 위한 방편적 어긋남이다. 불화가 없는 조화는 정적이며 죽음 의 가치일 뿐이다. 그러나 불화가 조화를 창조하는 고매한 이상을 결여할 때 조화를 파괴하기만 하는 비자연적 상황이 초래된다. 오늘날 생태계의 위기는 自然을 거부하는 有爲의 所産이며, 이 유위가 천지의 조화를 근원적으로 파괴시킬 수도 있는 不和의 상태를 지속적으로 조장시키고 있다는데 있다. 天地는 삶의 시공이다. 有爲의 팽대가 天地의 삶 그 자체를 죽음으로 몰아가고 있다는데 오늘날의 생태학적 위기 상황이 存하는 것이다.
아름다움은 객관적 형상에 存하는 것이 아니다. 아무리 수학적 균형을 과시하는 정교한 건조물도 단순한 권태의 대상일 수도 있다. 아무리 추한 형상도 아름다울 수 있고, 아무리 아름다운 미녀도 하루아침에 요괴한 물체로 전락할 수 있다. 이것은 단순한 인식의 변화가 아니라 대상의 구조자체를 동반하는 사태일 수 있는 것이다. 모든 存在는 無我이기 때문이다. 아름다움은 체험이다. 체험의 요소간에 배타함이 없을 때 우리는 "아름답다"라고 말하지만, 그것은 배타의 완벽한 부재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배타가 전체의 조화를 훼손시키지 않음을 말하는 것이다. 그것은 동적인 과정일 수밖에 없으며, 체험은 정적인 완벽에 만족하지 않는다.
완벽은 아름다움의 지향이다. 그러나 모든 완전은 제한을 전제로 한다. 제한 없는 완전은 있을 수 없다. 모든 완전은 제한 속의 완전이다. 그러므로 완전한 神조차도 제한 속의 존재이다. 神은 완벽할 수는 있으나 무제한적일 수는 없다. 완전은 불완전의 下位개념이다. 모든 완전은 불완전의 역동적 과정 속에서만 존재하는 것이다. 고착된 완전보다 고매한 이상을 향한 불완전이 더 아름다운 것이다. 체험의 아름다움은 체험 속에서만 성립한다. 그 제한을 넘어서는 노력을 우리는 "모험"이라고 부른다. 모험이 결여된 문명은 사멸한다. 모험이 결여 된 청춘은 청춘이 아니다.
예술은 자연을 지향한다. 그러나 예술은 자연이 아니다. 예술은 유위의 세계다. 어떠한 위대한 예술가의 작품도 자연의 막대함과 강도와 압도성을 능가할 수는 없다. 겸재 정선(鄭敾,1676-1759)의 <금강전도>가 금강산의 일만이천봉의 실경의 느낌을 압도할 수는 없다. 그러나 천만번의 일몰의 황혼의 아름다움이 문명을 진보시키지는 않는다. 그것은 그 자체로 아름다울 뿐이다. 예술은 자연을 유위의 세계로 이전시킴으로서 문명의 진보를 꾀한다. 예술은 몸의 느낌을 통하여 자연을 의식화한다. 의식이 없이는 문명은 존재할 수 없다. 예술은 非然에서 其然을 창출한다. 혼돈에서 질서를 창출한다. 질서는 前意識을 의식화한 것이다. 그것은 새로움이며, 문명의 진보의 요소이다. 그러나 진보가 꼭 직선적 가치상승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금강전도)
예술의 작품은 작자의 느낌과 감상자의 느낌의 상응성에서만 그 아름다움의 감동이 存한다. 따라서 예술적 작품에 객관적 기준이란 있을 수 없다. 느낌의 상응성의 역동적 과정에서 그 가치가 제한적으로 발현될 뿐이다. 우리가 말하는 객관적 기준이란 느낌의 상응성의 보편성 을 말하는 것이지만, 그 보편성조차 사회적 가치의 은현의 역동성속에 存하는 것임으로, 量的인 기준에 의해서만 예술작품의 가치를 논할 수는 없다. 디자인은 느낌의 디자인이다. 모든 디자인은 궁극적으로 우리의 체험의 디자인이다.
모든 디자인의 대상은 우리체험의 사건이다. 우리의 체험은 시공의 체험이다. 따라서 디자인은 시공의 디자인이다."시공의 디자인"이라는 말에서 우리가 주의해야할 것은 시공이 먼저 객관적으로 존재하고 그 존재하는 것을 디자인한다는 말이 아님을 깨달아야한다는 것이다. 시공은 시공연속체이며, 그것은 존재가 아니다. 그것은 존재의 측면일 뿐이다.
다시 말해서, 디자인은 시공의 창출인 것이다. 디자인은 氣의 디자인이다.氣의 어울림의 과정이 곧 시공인 것이다. 시공은 氣의 聚散이다. 기의 취산에서 나타나는 측면이다. 기하학적 시공은 기의 취산이 이루어지는 자리로서의 순수한 이념적 가능태이며, 기의 사회의 자리로서 상정할 수 있는 가장 거대하고도 단순한 연장성이다. 그러나 그것은 순수한 추상이다. 우리가 말하는 현실적 디자인이란, 氣에 理가 進入되는 것으로, 결코 순수한 추상의 디자인일 수가 없다. 디자인은 기하학적 시공의 디자인이 아니다. 디자인은 氣的 시공의 디자인일 뿐이다.
氣的 시공의 디자인이란,氣의 배열을 말하는 것이며, 그 배열의 구체성을 결정하는 형식을 우리는 "理"라고 부른다.氣의 배열의 가장 기본적 양식이 虛實이다.虛와 實은 보통 氣聚의 밀도에 따라 상대적으로 인식되는 개념이며,實로 구획지어지는 虛를 우리는 보통"공간"이라고 표현하지만, 공간은 기하학적 "無"가 아니라 氣의 충만태이다. 氣가 없는 공간은 존재하지 않는다.모든 공간은 氣의 社會의 動態일 뿐이다. 설계는 기하학적 공간의 설계가 아니라 氣의 설계이다.氣의 설계는 虛實의 중층적 관계의 설계이다. 따라서 하나의 대상의 설계도 그를 둘러싸고 있는 환경전체와의 관계속에서 설계되어야 한다. 一卽一切요, 一切卽一이다. 하나의 설계는 전체의 설계요, 전체의 설계는 하나의 설계다.
디자인이 대상으로 하는 것은 작은 도구로부터,집,마을,국가사회토목,국제환경에 이르기까지 전체로 연관되어 있다. 디자인은 이 모든 것을 통합하는 원리로서 설명되어야 한다. 우리가 흔히 "건물"이라고 하는 것의 특징은 삶의 시공의 창출이다. 건물의 용도가 아무리 다양해도 그것은 삶의 시공이다. 사람을 죽이는 사형실 조차도 거시적으로는 삶의 시공속의 사건일 뿐이다. 모든 "지어진 물체"는 삶을 위한 것이다. 시공자체가 삶과 유리될 수 없다. 건물 그것이 하나의 "움벨트"(생활공간)를 형성하는 것이다. 따라서 건물의 디자인은 그것을 지배하는 기하학적 형상과 그 형상이 초래하는 편의보다는, 보다 원초적으로 氣의 배열이 생성시키는 "삶의 흐름"(Flow of Life)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그것은 밀폐된 세계가 아니라 개방된 우주속의 假合的인 동일성의 체계이다. 따라서 그 기하학적 구도와 동일하게 기의 배열을 성립시키는 소재에 주목해야한다. 소재가 곧 "삶의 흐름"을 결정하기 때문이다. 기하학적 구도가 아무리 편의적으로 완벽하더라도, 소재가 "죽음의 흐름"을 형성시킨다면 인간을 포함한 어떠한 존재도 그 속에서 삶을 영위할 수 없을 것이다. 이러한 소재의 근원이 "흙"이다. 인간도 흙에서 흙으로 돌아가고, 건물도 흙에서 흙으로 돌아간다. 건물에 쓰여지는 흔한 소재들, 진흙, 돌, 유리, 쇠, 나무, 종이 등, 이 모든 것이 흙의 변형이다. 흙은 땅이다. 건물이란 곧 땅의 피륙속에 하늘을 짜아넣는 것이다.
氣的 소재로서 우리는 五行이라는 양태를 생각할 수 있다. 그런데 土는 中央土다. 金, 木, 水, 火는 모두 土로 귀속되는 것이다. 金과 木은 土의 변형이며, 水와 火는 土의 생명적 속성을 잘 드러내준다. 에집트나 희랍에서 그 주류가 형성된 서양전통에서는 건물의 소재로서 金계열의 石을 즐겨썼다. 石은 영원성의 상징이었다. 그러나 중, 한, 일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동양전통에서는 石보다는 木이나 土를 주로 썼다. 조선문명과 같이 건재로서 우수한 화강암의 소재를 풍부하게 가지고 있는 상황에서 이러한 현상은 좀 의아스러운 것이다. 그러나 동방인들에게서 건물이란 "天地의 客形"일 뿐이며, 영원성의 대상이 아니었다. 그리고 石材는 바닥이나 주춧돌로 쓸지언정, 벽을 구성한다는 것은 상상키 힘든 것이었다. 石은 虛實의 상대적 관계를 차단하는 실체적 성격을 강하게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실내공간은 우주공간속의 개방된 客形이 되어야 하며 그것은 차단되어야 할 어떤 실체가 아니었다. 공간의 기본적 특성은 실체론적인 것이 아니라 관계론적인 것이다.
人體에 있어서 五行은 장부의 기능에 상응한다. 金은 폐, 대장이요, 水는 신, 방광이요, 木은 간, 담이요, 火는 심, 소장이요, 土는 비, 위다. 인체에서도 역시 土는 중앙토다. 인체의 모든 에너지의 시원이 비, 위인 것이다. 인체에 있어서 비, 위의 일차적 특성은 腐熟이다. "腐熟" 이란 "썩힘"이요. 썩힘이란 인체에서 "소화"라는 현상으로 나타난다. 부숙은 火를 전제로 하는 것이다. 따라서 비위가 冷하면 人體는 정상적 기능을 할 수가 없다. 비위는 더워야 모든 것을 썩히고 氣化시킬 수 있는 것이다. 비, 위의 모든 소화효소작용을 火라고 표현한 것이다. 흙도 마찬가지인 것이다. 땅은 땅으로서 실체론적으로 存在하는 것이 아니다. 땅은 끊임없이 부숙의 역동체이다. 땅은 존재가 아니다. 그것은 부숙의 기운이다. 땅은 미생물의 보고요, 생명체의 집합이다. 땅이 만물을 썩히지 않는다면 우리의 삶의 공간은 온갖 시체로 점유 되었을 것이다. 땅은 단순함으로서의 복귀다. 땅은 분해와 해체의 마당이며 동시에 합성과 구성의 근원이다. 흙은 만물이 歸하고 만물이 生하는 자리며, 하늘을 구현하는 어미(母)인 것이다. 흙을 떠난 삶의 우주를 우리는 생각할 수 없는 것이다.
현대사회가 유지되고 있는 자연환경의 오염현상은 크게 三分된다:
1)대기오염(air-pollution)
2)수질오염(water-pollution)
3)대지오염(soil-pollution).
2)수질오염(water-pollution)
3)대지오염(soil-pollution).
대기오염과 수질오염에 대해서는 현대인들의 인식이 가중되어가도 있지만, 대지오염, 즉 흙의 오염현상에 대해서는 인식이 너무도 미미한 수준에 머물러 있다. 그러나 이상의 三大오염중에서 우리가 가장 회복하기 힘든오염이 대지오염이며, 현재 매우 광범위하게 확산되어 있으며 수질오염의 모체적 성격이 되고 있다. 영속적 순환농법(permaculture)에 대한 다각적 인식이 요청된다.
디자인이란 기의 사회의 배열이다. 그런데 이러한 배열이 삶의 시공에서 소기하는 바는 행위체계의 유발이다. 건축가가 디자인하는 삶의 시공간은 곧 행위의 시공간이며, 그것은 건축의 시공간성이 인간의 행위체계를 유발하고 규제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한 행위의 유발성을 우리는 어포던스(affordance, "유발성"으로 번역함이 좋다)라고 한다. 그런데 이러한 어포던스의 결과가 離社會的(sociofugal)이든지 集社會的(sociopetal)이든지간에, 그 궁극적 텔로스가 너무 쾌락주의적(hedonistic)인 측면에 치우쳐 있다. 어포던스와 관련된 서구의 논의는, 쾌적, 편의, 기능 등등의 단어가 맴돈다. 그러나 이러한 요소는 인간의 삶의 너무도 기본적인, 구태여 논의될 필요가 없는 상식에 속하는 것이다. 의자는 앉는다는 기능의 충족을 떠나 달리 생각할 수 없다. 의자가 앉는 기능을 만족시킨다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것이며 그 만족감이 편의나 쾌적의 조건을 충족시킨다는 것은 너무도 상식적인 것이다. 體는 用을 떠나서 생각되어질 수 없다. 의자는 앉기 위한 것이다. 쾌적의 조건은 기본적인 것이며 쾌락 그 자체가 그 존재의 목적이될 수는 없는 것이다. 그것이 목적인 것처럼 느껴진다는 것 자체가 너무도 기본적인 기능이 그릇된 이념성에 의하여 무시되고 있다는 현실을 반영할 뿐이다. 우리가 경계해야 할 것은 너무도 기초적인 조건을 무시하는 온갖 이념적, 심미적 허구의식이요 허위의식이다.
그렇다면 어포던스의 궁극적 텔로스는 무엇인가? 그것은 쾌적이 아니라 건강(Health)이다. 여기서 말하는 건강이란, 시공 그 자체의 건강이다. 하나의 "지어진 물체"의 조건은 그것이 형성하는 시공간을 건강하게 만드는 것이며, 그것은 그 시공간속에서 삶을 영위하는 모든 타존재를 건강하게 만드는 것이 되어야하는 것이다. 쾌적, 쾌락은 부르죠아 시민사회의 개인주의, 자유주의 이념과 관련되어 있다. 그러나 나의 기철학이 말하는 건강은 이러한 자유주의 이념을 근원적으로 揚棄하는데서 성립하는 새로운 개념이다. 인간 삶의 所以然은 행복(eudaimonia)이 아니라 건강이며, 자유가 아니라 자율이며, 개인적 쾌락이 아니라 협동의 보람이다. 디자인은 인간과 세계를 건강하게 만드는 것이어야 한다.
불란서 혁명이후 인류가 고매한 삶의 이상으로 추구해온 "자유"라는 개념은 지극히 잘못 설정된 불행한 착오다. 자유는 억압에 대해 반사적으로 성립되는 일시적 느낌일 뿐이며, 그것은 어떠한 경우에도 생명의 지속적 가치가 될 수가 없다. 자유는 곧 죽음이다. 세포하나가 몸에서 자유로워질 때 그것은 곧 죽는다. 자유는 궁극적으로 부정적 가치이지만 방편적으로 설정될 때 일시적으로 적극적일 수 있으며, 생명에 活力과 상상력을 제공하는 원천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자유는 궁극적으로 무제약일 수 없으며, 그것은 조화된 체계내에서 工夫(디시플린)를 획득함으로써 얻어지는 無爲的 느낌인 것이다. 자유는 자율일 수밖에 없으며, 자율은 他律이 아닌 자기 스스로 부과하는 工夫인 것이다. 자유, 쾌락, 쾌적, 이 모두가 궁극적으로 죽음의 가치이며 디자인의 궁극적 목표가 될 수는 없는 것이다.
디자인은 디시플린과 자유로운 상상력의 소산이다. 그러나 현대의 디자인 교육이 고전교육이나 장인교육과 같은 디시플린도 상실해가고 있으며, 또 정보사회 운운하면서 오히려 정보의 홍수속에서 상상력의 빈곤과 획일화를 초래하고 있음은 매우 유감스러운 일이다.
인테리어 디자인은 전통적으로 기존의 건축물의 내부, 천장, 바닥, 벽을 장식하는 장식술인, 二次元的 예술로서 인식되었다. 지금까지도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인식하고 있다. 그러나 인테리어 디자인은 3차원적 공간디자인으로, 또 4차원적 환경디자인의 개념으로 발전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개념적 인식의 변화가 구획되어질 수 있는 역사적 단계의 기술일 수는 없다. 고구려벽화도 얼핏 보기에는 단순한 2차원적 예술인 듯 하지만, 그 벽화를 그리기 위해서 이미 그 공간의 구조나 환경적 고려가 동시에 이루어진 것임을 알아야 할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氣의 배열"의 핵심적 의미에 간한 것이다. 건축은 삶의 시공의 창조다. 삶의 행위가 이루어지는(유발되는) 시공의 창조인 것이다. 이때 역시 가장 중요한 것은 그 氣의 社會의 연합의 시공적 주체며, 그 주체적 보통 건축의 경우 인간이다.
우리는 그 시공이 인간을 중심으로 구성되어야 한다는 매우 단순한 사실을 망각한 건물을 너무도 쉽게 접하곤 한다. 인간의 삶이 건물이라는 시공의 주체라면 그 건물은 당연히 인간의 삶을 중심으로 구성되어야 하며 그 구성의 방향은 內에서 外로 되어야 할 것이다. 목욕을 하는 "삶"의 습관에 따라 욕조의 형태가 선택될 것이며, 그 욕조의 형태에 따라 욕실의 형태나 소재가 결정될 것이며, 그의 모욕의 삶의 비중에 따라 그 욕실의 집에서의 위치가 결정되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 현대생활에서 우리가 경험하는 가옥이나 빌딩의 대부분은 內에서 外로 구성되는 것이 아니라, 철저히 外에서 內로 강요되는 것이다. 가옥의 외부가 결정되고, 그 외부구조에 따라 획일적으로 욕실의 공간이 결정되고 그 욕실의 획일적 공간의 수요에 따라 무차별하게, 주체자의 목욕이라는 삶의 행위와 무관한 욕조가 놓여지게 되는 것이다. 여태까지 건물이 지어지는 의식의 흐름이 철저하게 外에서 內로 진행되었다면, 이제 우리는 內에서 外로 진행되는 새로운 시도를 감행해야 한다. (나는 여기서 "외내건축법," "내외건축법"이라는 새로운 용어를 창안한다. 건물의 이상은 외내건축과 내외건축의 중용일 것이다.)
나는 여기서 "첨가에 의한 프로세스(additive process)를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건축의 확장의 방법론이 아닌 총체적 인식의 본질적 흐름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책상, 옷장, 침대 등의 배치는 나의 삶의 가장 긴요한 요소이다. 아무리 거대한 황궁과 같은 아름답고 찬란한 침실이 있다하더라도 그곳에서 나일론 이불이나 덮고자는 행위는, 조그만 토담집 남방향에서 비단명주를 덮고자는 행위에 비해, 전혀 그 공간의 의미를 무산 시켜버리고 마는 것이다. 따라서 앞으로는 외부건축가에 의해 내부 실내장식이 요청되는 것이 아니라, 내부인테리어디자이너에 의해 외부건축의 설계가 요청되는 방식으로 건축이 이루어지는 것이 훨씬 더 바람직할 것이다. 이 "바람직함"의 궁극적 기준은 이념이나 동아리간의 이권의 문제가 아니라 그 시공의 주체의 삶의 목적과 이념과 관습과 느낌에 따라 결정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 주체의 삶에로의 충실이야말로 건축의 건강의 척도가 될 것이며, 이것이 바로 21세기 건축의 인간화의 핵심적 과제가 될 것이다.이의 실현을 위하여 나는 후학들에게 구체적인 방안을 하나 권유한다. 실내디자인을 전공한 후 다시 건축학을 전공하여 건축사자격을 획득하라고! 그래서 도덕적으로 심미적으로 책임 있는 건축가가 되라고!
현재 한국사회를 지배하고 있는 건축문화의 대부분의 비극은 바로 어포던스가 네가티브 어포던스만 있고 포지티브 어포던스가 궁핍하다는데 있다. 다시 말해서 죽음에로의 어포던스만 있고 삶에로의 어포던스가 없는 것이다. 길거리에 지나다 천진한 행인이 아무 죄도 없이 칼침에 맞는 장면을 목격하면 우리는 도덕적 분노를 느낄 것이다. 남침하는 북한경비정에 온 국민이 들끓는 도덕적 분노를 토해낸다. 그런데 건축, 토목가의 행위가 우리의 삶을 대량학살하고, 우리의 행위를 부정적으로 유발하고, 또 심미적으로 구역질나게 만드는 것에 대해 동일한 도덕적, 심미적 분노를 토하는 자는 없다. 한국민족은 공적 죄악에 대한 관용의 폭이 지나치게 넓은 민족이다.
디자인은 궁극적으로 문명의 디자인이며, 그것은 우리 삶의 디자인이다. 문명의 디자인은 어떠한 경우에도 자연의 디자인을 파멸시켜서는 아니된다. 자연의 디자인의 조화로움 속에서 우리 문명의 디자인을 설정하는 지혜를 끝까지 버려서는 아니된다. 에콜로지를 도외시한 문명이 디자인을 이제 우리는 중지시켜야 한다. 道家가 제시하는 "樸"의 디자인을 실천해야 한다. "박"은 심플리시티다. 심플리시티는 미니말리즘이다.
유위의 폐해를 최소화하는 소박함의 지혜를 망각해서는 아니된다. 우리는 최소한 우리의 후손들을 그러한 가치관속에서 정언명령적으로 교육시켜야 한다. "虛"는 모든 설계의 궁극이다. 마음을 비우고 시간을 비우고 공간을 비우라! 비움이야말로 모든 가능성의 원천이다. 太古에는 法이 없었다. 太朴은 흩어지지 않는다. 그런데 太朴이 흩어지고 나니 法이 생겨났다. 法은 과연 어디서 생기는가? 그것은 一劃에서 생겨나는 것이다. (太古無法, 太朴不散. 太朴一散, 而法立矣. 法於何立? 立於一劃.)
우리는 정직해야한다. 그리고 자기말을 할 줄 알아야 한다. 이제 우리는 근본으로 돌아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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