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의에의한교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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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은 교육자가 학생에게 지식을 고대로 전달하는 행위가 아니다. 진정한 교육은 학생의 개인적 체험에 기반한 전폭적 동의에서 출발한다. 이를 동의에의한교육이라고 한다.

갈릴레오는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다고 한다.
You cannot teach a person something he does not already know; you can only bring what he does know to his awareness.

다음은 김창준이 외국어 교육에서의 동의에의한교육 관련으로 쓴 글이다.

최소한 언어 교육에 있어서는 학생의 "기쁨에 찬" 동의가 없으면 별로 효과를 볼 수 없다는 게 제 생각입니다.

모르는 사람은 아예 모르기 때문에 아직 공부할 필요가 없으며 아는 사람은 이미 알기 때문에 다시 공부할 필요가 없습니다.

아는 것도 모르는 것도 아니고 어중간한 상태에서 나름의 문제의식을 갖고 있는 경우, 이 사람에게 누군가가 "제대로된" 한두마디만 던져줘도 그는 열가지 스무가지 일사천리로 소화하고 이해하며 자발적인 학습을 하게 됩니다.

예컨데 자신의 삶의 목표에 대해 문제의식 조차도 형성되지 않은 사람에게는 백날 종교니, 철학이니 떠들어 봐야 헛수고입니다만, 이미 개별적이고 구체적인 체험들을 통해 자신만 의 문제의식을 나름대로 형성한 사람은 공부하고 남의 말을 들을 준비가 된 사람입니다.

아담이 세상의 모든 "것"들을 보고 일일이 이름을 붙였던 것은, 보았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나라 교육의 대부분은 horse를 보기 이전에 horse라는 이름을 가르치고, 문제의식을 외부에서 학생에게 주입하려 합니다. 그러한 지식의 필요성까지도 암기하고, 이해하도록 강요하는 것이지요.

저는 후학들이 난생 처음 어떤 학문을 공부할 때 처음부터 최고의 대가에게 가서 강의를 듣는다든가 하는 것을 그다지 권하지 않습니다 -- 강의자와 피강의자의 노력에 비해 크게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이것은 결국, 스스로가 자신만의 문제의식을 갖고 있어야 하며, 또한 그 문제의식은 철저히 자신의 삶에서 우러 나와야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 이후에 훌륭한 선생들을 만나면 정말 비약적인, 계단을 서너칸 뛰어오르는 발전을 할 수 있습니다.

결국 제 후배가 한달 정도만에 그렇게 껍질을 깨고 나오는 발전을 할 수 있었던 것은 그 자신이 늘 "반성적인 학습"을 해오며 자기 영어 공부에 대한 문제의식을 형성했고 궁리해 왔기 때문입니다. 물론 절대적인 영어 공부량(input)이 이미 어느 정도 되어 있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물길을 열어줄 "열쇠"가 필요했었던거죠. 이미 물은 어느 정도 차 있었고요.

소위 세간에서 영어 꽤나 한다는 사람들이 저마다 독특하다고 주장하는 설명법에 의해 전치사나 기타 각종 영어초보자들이 어려워하는 개념들을 이해시켜 준다고 광고를 합니다만, 한번 생각을 해보세요. 과연 그런 사람들이 그런 설명법으로 전치사를 공부했을런지. 그 사람들이 그런 똑떨어지는 일반적이고 추상적인 법칙의 말을 할 수 있기까지는 그 이면에 엄청난 양의 영어 입력input이 있었다는 겁니다. 그네들이 해주는 그런 설명법들이란 건 사실 자기들의 과거 영어 공부를 뒤돌아 보고, 자신 속에 형성되어 있는 모종의 '감각'을 요리조리 재고 째고 가르고 관찰하면서 '서술'해 낸 것이다 이거지요. 따라서, 그런 설명만 듣고 전치사를 이해한다고 하는 것은 말이 되지 않습니다.

자칭 도사의 뇌 속 : (각종 영어 인풋) + (자신이 만든 전치사법칙) 
학습자의 뇌 속: ( 텅텅 비어 있고) + (도사에게 전수 받은 법칙만 달랑) 

이런 상태가 되어서는 절대 청출어람청어람 못합니다. 자칭 도사의 전치사에 대한 이해만큼에도 이를 도리가 '도무지' 없습니다.

권법에서 주먹에 대해 달통한 도사가 "권을 내지르는 법"에 대한 규칙들을 정리를 해서 애제자의 대갈통 속에 아무리 쑤셔넣는데 성공을 한들 그 제자가 도사만큼의 주먹이 나갈리는 만무합니다. "권을 내지르는 법"을 유추해 내기까지 그 스승이 겪은 과정을 제자는 완죤히 쏙 빼먹고 있기 때문입니다. 소위 '몸'이 만들어 지지 않은 것이지요. 제자는 마당 쓸기에서부터 해서, 물 긷기, 기타 등등의 몸의 수련의 과정을 겪어야만 하고, 그 제자가 스승이 정리한 그 규칙의 일련에 손뼉을 치고 춤을 추며 기쁨의 동의를 할 수 있을 정도로 과정의 축적이 이루어진 이후에야 비로소 진정한 '가르침'이 이뤄지는 것이며, 청출어람의 가능성도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이 동의는 학생 측에서만이 아니고 선생 쪽에서도 생각해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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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 teach effectively a teacher must develop a feeling for his subject; he cannot make his students sense its vitality if he does not sense it himself. He cannot share his enthusiasm when he has no enthusiasm to share. How he makes his point may be as important as the point he makes; he must personally feel it to be important. --George Polya (see also HowToSolveIt)

&From ''Mathematical discovery, New York, 198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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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료행위역시 의사가 환자에게 자신의 의료지식을 고대로 전달하는 행위가 아니다. 이상적인 치료행위는 환자의 개인적 체험에 기반한 전폭적 동의, 그리고 상호신뢰에서 출발한다. 이를 동의에의한치료 라고하며 PairDiagnosis를 통해 실천할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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