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대학과한국대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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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는 퍼온글입니다. 남이 출처 밝히지않고 퍼다논 글을 다시 퍼와서 출처는 모르겠지만 개인의 실제 생활경험담으로 신뢰할 만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한 교수님도 이 글에 대한 공감을 표시하시며 학생들에게 읽기를 권고하시더군요. 다음은 그 교수님의 말씀 인용입니다:

학생들이 미국의 대학과 한국의 대학을 비교해 열띤 논쟁을 벌인 글들 중 가장 설득력이 있다고 느낀 글은 바로 아래의 글입니다. 우리가 시험은 잘 치지만 막상 문제를 찾아내고 분석하는 능력에서 떨어지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사실 학자로서 가장 중요한 자질은 후자인데요.) 이 점에 대해 아래글쓴이가 갖고 있는 시각은 상당한 정도의 현실성의 갖는다고 봅니다. 내가 그 동안 이 게시판에서 본 글들에서 가장 멋진 것 중의 하나라 생각해 여러분께 추천해 주고 싶습니다.
이 페이지의 제목때문에 혼란이 있을까봐 참고로 말씀드리면 이 글과 교수님의 말씀 역시 서울대 한 게시판에 실린 것이고 당연히 논의의 중심은 서울대였고 그들끼리의 얘기였습니다. 그러니 일반화의 오류라든지, 왜 서울대?라는 문제에 대해선 오해없으시길 바랍니다.

이 글에 대한 논의는 페이지 하단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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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6년전 MIT에 유학와서 박사학위를 받고 지금은 미국에서 회사에 다니고 있습니다. 처음 1년 이곳에서 공부할때 저는 제가 한국에서 대학교육을 받은데 약간의 자부심을 갖고 있었습니다. 주위의 많은 한국 유학생들이 서울대 과 수석 또는 서울대 전체 수석도 있고 한국 대학원생의 80% 이상이 서울대 출신이니까 미국 학생들을 바라 보면서 그래 너희가 얼마나 잘났나 한번 해보자라는 생각마저 들었습니다. 한국에서 하던 대로 이곳에서도 한국 학생들이 시험은 아주 잘 보는 편입니다. 특히 한국 중 고등학교에서 가르치는 수학의 수준이 미국의 그것보다 훨씬 높기 때문에 공대생들로서는 그 덕을 많이 보는 편이죠. 시험 성적으로 치자면 한국유학생들은 상당히 상위권에 속합니다. 물론 그 와중에 한국 유학생들 사이에서 족보를 교환하면서 까지 공부하는 친구들도 있습니다. 한번은 제가 미국인 학생에게 족보에 대한 의견을 슬쩍 떠본일이 있습니다. 그랬더니 정색을 하면서 자기가 얼마나 배우느냐가 중요하지 cheating 을 해서 성적을 잘 받으면 무얼하느냐고 해서 제가 무안해진 적이 있습니다. (물론 미국인이라고 해서 다 정직하게 시험을 보는 것은 물론 아닙니다.)

어느덧 시험에만 열중을 하고 나니 1년이 금방 지나가 버렸습니다. 이제 research 도 시작했고 어떤 방향으로 박사과정 research 를 해나가야 할지를 지도교수와 상의해 정할 때가 왔습니다. 물론 명문대이니 만큼 교수진은 어디에 내놓아도 손색이 없습니다. 한국에서 교수님들이 외국 원서를 번역하라고 학생들한테 시킬때 도데체 어떤 사람들이 이런 책을 쓸 수 있을까 의아하게 생각하던 바로 그 저자들과 만날 수 있다는 것은 굉장한 체험이었습니다. 과연 그런 사람들은 다르더군요. 태어나서 처음으로 아 과연 천재라는 것은 이런 사람들이구나 하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 사람들의 상상력과 창의력앞에 존경심이 저절로 생겨났습니다. 그동안 제가 갖고 있던 미스테리가 풀렸습니다. 그동안 교과서에서만 보던 바로 그 신기하기만 하던 이론들을 만들어내고 노벨상도 타고 하는 사람들, 그런정도가 되려면 이런 정도의 천재가 되어야 하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때부터 걱정이 되었습니다. 과연 내가 얼마나 잘 할 수 있을까? 도데체 비밀이 무엇일까? 저런 사람들은 어떤 교육을 받았을까? 물론 지금까지 수업도 착실히 듣고 시험도 그런대로 잘보고 해서 어느정도 유학생활에 자신감은 있었지만 이 부분에는 영 자신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세계제일의 공학대학에서 이 정도 교수는 갖추고 있는게 당연하고 나와는 다른 차원의 사람들이다라는 식으로 위안을 삼았습니다. 주위에 있는 미국인 학생들을 보면서 그래도 내가 한국에서 어려운 교육도 받았고 (대학교 수학도 한국이 더 수준이 높습니다) 저 아이들보다는 잘할 수 있겠지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소름이 오싹 돋는 일이 자꾸 생겼습니다. 하나 둘씩 주위에 있던 몇몇 미국인 학생들이 점점 두각을 나타내면서 점점 더 어려운 문제를 해결해 나가고 벽에 부딪치면 새로운 길을 스스로 파헤쳐 나가는 등 저를 놀라게 하였습니다. 초기에 제가 미분기하학이란 이런것이야라고 설명해주던 미국애가 이제는 제가 알아듣지 못하는 이론을 제게 설명해 줍니다. 뭐 그럴수도 있지라고 처음에는 생각 했습니다. 자기한테 맞는 분야를 잘 정했겠지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점점 더 많은 그런 케이스를 보면서 또 그들이 발전해나가는 모습을 보면서 생각했습니다. 이들중 몇명이 내가 천재라고 생각하던 그런 교수님들 처럼 되는 것이 아닌가. 바로 그랬습니다. 바로 그런 학생들이 그런 교수가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때부터 왠지 슬퍼지더군요. 저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한국 유학생에게 넘을 수 없는 눈에 보이지 않는 어떤 장벽이 있음을 느꼈습니다. 우리나라 인구수로 따지자면 이미 노벨상 수상자가 여러명 나왔어야 하고 우리나라 사람들의 교육열로 보면 이미 세계적 수준의 과학기술자가 전세계에서 활약하고 있어야 할 시점에서 왜 한국에서 일류 교육을 받은 한국 유학생 들이 MIT 에서 기가 죽어 지내야 하는지 알 수 없었습니다. 학교 도서관에서 책만 읽어서는 그 이유를 알 수 없었습니다. 시간이 더 지나고 미국 친구도 사귀고 미국 사람들의 생활을 보면서 차츰 차츰 미국에서의 교육에 대하여 조금이나마 알게 되었습니다. 일단 갓난아기때 부터 한국과 미국의 교육이 달라 지더군요. 우리나라에서는 부모가 감정적으로 때로는 분에 못이겨 매를 드는 반면, 이곳에서는 모든것이 논리 정연하게 말로 설명이 되었습니다. 아이가 왜 안되느냐고 물어보면 그것은 이렇고 저래서 그렇다고 꼬치꼬치 자세하게 설명해 주고, 투정을 부리면 온갖 기발한 계략으로 아이의 관심을 돌립니다. 부모가 항상 아이에게 말을 시키려 하고 자기 자신들이 그들의 부모로 부터 물려받은 삶의 지혜를 전해주려 노력합니다. 거의 대화가 없는 우리나라 가정과 꽤나 대조적 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도 아이가 있지만 도저히 그들처럼 할 수 없습니다. 그런식으로 대대로 물려받은 몸에 밴 경험이 대부분의 우리나라 사람들과 저에겐 없기 때문입니다. 과연 이렇게 시작이 다른데 미국에서 애를 잘 키울 수 있을까 걱정이 듭니다.

그들이 학교에 가면 차이는 더 벌어집니다. 우리나라 학생들이 암기력과 약간의 사고력, 이해력의 계발에 중점을 두는 동안, 이곳에서는 창의력, 상상력, 사회성 등을 키워나갑니다. 바로 이런것들이 거름이 되어 아까와 같은 천재들이 대학원에서 두각을 나타내는 것이 아닌가 합니다. 한마디로 우리나라 학생들이 남들이 만들어놓은 포장된 지식을 주입받는 동안, 이 곳 학생들은 생각하는 법을 배웁니다. 자발적 참여 및 토론에 의한 학습, 스스로 탐구하는 학습, 작문력, 발표력, 논리적 사고가 중요시 되는 교육을 받고 이들은 비록 미분 적분에 대하여 우리보다 늦게 배울망정 인생에서 창의력이 극대화되는 20대가 되면 어렸을때 생각하는 법을 배웠기에 스폰지처럼 지식을 습득하고 새로운 것을 창조해나갑니다.

이곳에 와서 한가지 더 놀란것은 미국사람들의 호기심 입니다. 새로운 것을 알고 싶어 하는 열정이 우리나라 사람의 몇배는 되어 보였습니다. 우리나라에서 금속활자, 물시계, 해시계 등을 발명해 놓고도 더 발전 시키지않고 있는 동안, 서양에서는 만유인력의 법칙을 발견하였고 이를 발전시켜 결국 오늘날의 과학기술로 바꾸어놓았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유치하다고 아무도 거들떠 보지 않았을 automaton (자동 인형 - 태엽 등의 힘으로 스스로 정해진 순서에 따라 움직임) 이 유럽에서는 이미 수백년 전에 유행하여 자동으로 연주되는 피아노, 날개짓하며 헤엄치는 백조, 글씨쓰는 인형등 갖가지 기발한 발명품이 쏟아져 나왔고 바로 이것으로 부터 발전하여 나온것이 자동으로 계산하는 기계, 즉 컴퓨터입니다. 제가 미국 친구들을 집에 초대하여 조금이라도 신기 한 것을 보여주면 이것은 어떻게 만들었느냐 무슨 원리로 동작하느냐는 등 질문을 쏟아 붓습니다. 심지어 하수구를 고치러 온 미국사람도 똑같은 관심을 보이면서 돈을 줄테니 자기 아들을 위해 하나 만들어달라고 조르던 적도 있습니다. 반면 MIT 의 박사과정 한국 유학생들은 시선이 1초 이상 머무르지 않고 전혀 관심을 보이지 않고 술만 마십니다. 과연 우리가 세계를 주도해 나가는 과학기술 수준을 이룩할 수 있을까요? 우리가 단지 선진국이 되기 위해 또는 노벨상을 받기 위해 과학기술을 하기 싫지만 억지로 연구하는 동안 이곳에서는 너무나 좋아서 신기해서 알고 싶어서 과학기술을 연구하는 사람들이 너무도 많습니다. 자기가 하는 일이 좋아서 하는 사람들의 열정은 절대 따라갈 수 없습니다. |}}

저는 미국의 교육이 특별히 창의력을 길러주거나 또 특별히 논리적인 사고를 길러준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물론 그 문화 바탕 자체가 수리적 논리성을 중요시하는 면도 있긴 하지만, 큰 차이는 교육이 학습자 중심learner-centered 이냐 강의/강의자(또는 교과서) 중심lecturer or lecture-centered이냐의 문제라고 봅니다. 창의력이나 논리력으로만 본다면 우리나라 초중등학생들은 미국 학생보다 어떤 면에선 월등합니다. 격차는 대학 이후에 벌어집니다. 우리나라 대학생들은 거의가 "강의나 교수, 교과서"를 자기 학습의 중심에 놓습니다. 거기에 부수적으로 자기의 개인적 학습이 "보충"식으로 들어가게 되죠. 또, 그런 강의 역시 자신의 적극적 선택이라기보다는 주변의 여건에 의해 반 강제적으로 혹은 임의적으로 선택되는 것이 다반사입니다. 이런 것 때문에 우리 대학생들은 학습에 임하는 태도가 매우 수동적입니다. 학습의 목적은 학습이라기 보다 궁극적으로 그 클라스를 무사히 마치는데, 좋은 성적을 받는데 있습니다. 내가 말하는 "학습자 중심"이라는 것은 학습자 좋은대로 교육을 하자는 것이 절대 아닙니다. 학습자의 학습 태도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네들은 자신이 선택해서 하는 공부라면 일단 "자신의 학습"을 그 중심에 둡니다. 교수도, 교과서도, 수업도 모두가 자신의 학습의 보조 도구들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들은 학습에 있어 진취적이고 적극적인 태도를 갖게 되고, 소위 말하는 독학자(autodidacts)의 습관을 기르는 겁니다. 이렇게 미국의 대학과 학생들이 학습자 중심이 된 이유는 "위기지학"을 한다는 개인주의의 인식과, 자유로운 분위기에서 공부가 (비교적) 강압적으로 부과되지 않는 사회 시스템/문화에 있을 겁니다. 자유와 방임을 거친 아이들은 일정 기간이 흐르면 어느 정도의 자발성을 누구나 갖게 됩니다. 또 이러한 자발성을 반기고 충실히 지원해 주는 사회적 장치의 유무도 중요합니다. 우리나라는 서른 넘어서 다시 교육기관으로 돌아가는 경우가 "신문에 날 정도로" 드문 일인데, 미국은 그렇지 않습니다. 한번 생각해 보아야할 문제입니다. --김창준

어릴적 교육은 국가 특유의 문화나 관습에 기인한다고 하더라도 '대학'이라는 것 자체를 따지고 볼 때, 국내의 대학생들은 'A'라는 학점을 따기 위해 노력하는 반면 (주로 비교의 대상이 되는) 미국의 대학생들은 자기가 듣는 수업을 제대로 '이수'하려고 노력한다고 하는군요. --picxenk

제가 학교다닐 때 경험에 비추어보면, 이런 결과는 미국학생과 우리나라학생들의 기본적인 자질의 차이로 인한 것이 아니라, 교육관행이나 실제생활속에서 자연스럽게 몸에 익혀 터득하게 되는 '생존방식'의 차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저는 인문학이나 과학쪽으로 학문을 깊이 판 사람은 아니지만, 나름대로 제 전공안에서 매 과목마다 취지를 충실히 이해하고 그 의미나 결과를 나누고싶어했었는데, 현실은 어떠했던고 하니, 편법과 관행을 먼저 숙지하고 있을수록 학교생활이 원활하다는 것을 매번 확인할수있었거든요. 이것은 단지 학점만의 문제가 아니라, 어떤 과목을 나름대로 제대로 이수하고자 하는 노력자체가 그 공간안에서 '헛수고'라는 느낌이 들게끔하는, 아주 기이한 능률중심의 분위기가 팽배해있다고나 할까.무엇보다 교수의 절대적 권위가 제시하는 어떤 것 이외의 답도 바라지않는 분위기에서 자기나름대로의 생각에 뼈대를 붙이고 살을 입히는 과정 자체가 존재하기란 힘든일이라고 봅니다.(어떤 아이디어도 적절한 피드백이나 생산적인 충돌이 있어줘야 제대로 굴러갈텐데, 그런 기회자체가 제공되지 않으니까요.)

아무튼, 남들보다 배로 시간을 투자해도 그 의미를 찾을 수 없는 그런 원칙적인 노력을 저도 대학생활에 적응하면서는 서서히 접고, 관행에 적응하기 시작하니까 학교생활이 한결 수월해졌던 기억이 있습니다. 한마디로 원론보다 편법을 먼저 익히는게 수라는 식의 논리가 선배들의 충고에서 먼저 나오기도 하니까요...(-_-+)

물론, 모든 과목과 모든 공부가 그런식이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제 기억에 아주 즐거운 마음으로 임했던 수업들이 몇몇 있었는데, 돌이켜보건데 그 열쇠는 주로 교수가 그 수업을 이끄는 방법이나 학생들의 학업성취도를 평가하는 태도에 있지않았나해요.(...하기는, 교수가 혁신을 바래도 현실적으로 교수 한사람당 학생수라든지, 연구비등 여러가지로 현실적 여건이 열악하니까 그냥저냥 타협하는 경우도 많겠지요.)
예를 들어 논문을 쓰는 경우에도, 그 내용자체를 문제삼기보다는 (일종의 통과의례정도로 생각하고) 다른 부수적인 것에 더 많은 에너지를 쏟게 만드는 관행도 있고요.

정말 이 사회와 문화의 모든 면과 뿌리깊게 관련되어있는,(역사와도...) 만만치않은 문제의 일단을 보고있는 느낌입니다. --아무개

언젠가 유학가있는 선배에게 미국인들은 도대체 뭘 위해 공부하냐고 애매한 질문을 한적이 있었는데 '유학의 의미'와 '미국대학과 한국대학'을 보니까 그때 제 질문의 의미와 대답을 찾을 수 있었네요. 학교 수업을 받다보면 정말 학점을 위해 공부하고 있단 생각이 듭니다.
강의시간엔 (모두다 그런건 아니지만) 출석과 진도, 레포트와 시험 그리고 학점 이외에 다른것들을 찾을수 없었습니다. 노트필기는 열심히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시험 전까지만 유효한것이고, 배운 과목조차 '이건 다시 안볼꺼니까 학점이나 잘 따놓자' '~~랑 별로 관계없데.' 처럼 단지 커리큘럼을 채우기위한 도구로 치부해버리는 분위기. 경직되고 외곡된 생각들. 안타깝고 답답하네요. 가끔 정말 이대로 학교를 다녀야 하나란 생각이 머리속을 혼란스럽게 하네요. 졸업장없이도 실력과 성실성을 인정받는 수 있는 그런 사회분위기가 되는건 무리일까요. 전진호

한국에서 학점을 위한 공부가 만연되는 이유 중 첫번째로 유학을 꼽아야겠습니다. 유학갈 때에는 학부과정의 학점을 상당히 중요해서 일단 좋은 학교를 쳐다보려면 3.7/4.3 이상의 학점을 받는 것이 좋습니다. 3.7이면 평균 A- 입니다. 그렇게 유학가서 다시 학점을 위한 공부의 폐단을 느낀다는 것은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습니다.

이야기가 옆으로 좀 새는데, 회사에서 신입사원을 채용할 때 학점 좋은 후배들은 일단 경계를 하고 봅니다. 4.0 근방의 학점을 받기 위해서 어떻게 공부해야하는지 알고 있고, 학점 뒤에 가리워진 문제점들도 알기 때문입니다.

학점을 그 사람의 실력에 비례하는 지표로 만드는 것은 아주 어렵거나 불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렇다고 무조건 학점 낮은 사람이 더 좋은 사람인 것도 아닙니다. 외국대학에서 신입생을 뽑는데 학점으로 결정할 수밖에 없는 노릇이고, 회사에서도 일일이 지원자들을 만나보고 1~2시간 이상의 심도깊은 면접을 해 보지 않으면, 점수순으로 뽑을 수 밖에 없습니다.

결국 전반적인 시스템의 문제로 귀결됩니다. 교수들도 연구, 강의에 몰두할 수 없게 잡무가 너무 많다고 하고, 학생들도 다른 것보다 학점으로 평가받으니 점수 올리기에만 급급합니다. 깝깝한 현실입니다. --Aragorn

대학에 와서 느낀점은 자신이 아는것도 중요하지만 자신이 알고 있다는것을 인정받는것이 더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중요하다는 의미는 사회적 기준에서 볼때 그렇다는 것입니다. 물론 진정으로 중요한 것은 자신이 안다는 것이겠죠. 그 사실을 망각하고 알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받기 위해서 온갖 편법이 동원되고 인정받는 과정을 위한 공부를 하는것이 문제점이라 생각됩니다. 자기가 하고 싶은 공부를 하고 있지 않은것이 문제의 원인 일수도 있겠고 (물론 자신이 원하는 학교 원하는 학과에 가서 원하고 흥미있는 공부를 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현 여건상 그렇지 않은 사람도 많다고 봅니다.) 공부하고 싶지 않은데 대학에 진학한 사람이 많아서 일 수도 있습니다. 물론 제가 삼류대 출신이라서 이렇게 느끼는 지도 모르겠지만 학점을 위한 공부가 많이 행해지는 것은 사실입니다. 교수가 원하는 답을 쓰기 위해 공부한다는 것은 참 슬픈 일인데도 그렇게 하지 않으면 도태되는 현실이 암울합니다.newtype


윗 글들을 읽어 보면 다음과 같은 결론을 얻을수 있습니다. 학점을 위한 공부가 바른 공부를 방해한다는 것이죠. 이 문제에 관하여 잡종의 견해는 다음과 같습니다. 교수 1인당 학생수를 줄이자. 학부제가 되면서 절대 평가와 상대 평가의 문제가 심각해지고 있는데 학교 측에서는 상대 평가가 아니면 제대로된 평가가 되기 어렵다고 하고 반대로 학생측에서는 상대 평가가 시험을 위한 공부에 지나치게 학생들을 묶는다고 불평하고 있습니다. 이런 것들이 모두 규모의 문제라고 잡종은 생각합니다. 이런 교실을 상상해보죠. 대학교 전공 수업입니다 . 학생수는 20명정도 그렇다면 교수는 자신이 가르치는 학생들을 모두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매 수업시간마다 학생들과 철저하게 대화하며 수업을 합니다. 이렇게 되면 학생들은 공부를 하지 않을수 없게 됩니다. 왜냐면 교수가 물어 볼때마다 전혀 답을 못할경우 자신의 실력이 백퍼센트 드러나기 때문이죠. 교수도 수업준비를 게을리 하면 당장 표시가 나겠죠. 물론 이렇게 하기 위해서는 전공 과목 수강을 2과목에서 3과목 정도만 해야합니다 사실 이런 생각이 전혀 새로운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대학원 교육이 이렇게 이루어 지고 있다고 볼수 있습니다 요즘 대학생들이 취직을 위해서도 대학원에 다 가게 되는데 그것은 전공 수업을 위와 같이 받은게 아니라 대형강의에서 일방적으로 주입받고 시험은 족보로 넘어가고 레포트는 짜깁기를 통하여 적당히 통과를 한 학생일 경우 전공 지식이 아무것도 없게 되죠. 그런 가운데 막상 취직을 할려니까 공부가 필요하고 그래서 제대로 공부하기 위해 대학원에 가는거죠.

나는삼류대다 그러나 위의 글에 동의하지 않는다

윗글에서 금속활자를 발명해 놓고 더이상 발전시키지 않는다는 식의 표현이 상당히 거슬립니다. 어차피 동양:정신, 서양:물질 에 관심이 집중되어 있는데 그게 가능했겠습니까? 문제가 있다면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이 모든 유산들의 단절이 생겼다는 것이 문제라면 문제지요. 그 이후 일본과 미국의 나쁜부분만 받아들여 만들어진 교육체제 이런것이 문제지. 님의 말을 듣고 있으면 미국적 사고에 젖어 미국만이 최고라고는 생각하는것 같은데... 지금 서양, 미국을 포함한 나라에서 동양의 의학, 정신세계에 엄청난 관심을 가집니다. 이유는 과학적 사고로는 해결되지 않는 부분을 채우기 위해서이죠. 일제시대를 거치지 않고 서서히 바뀌어 왔다면 결코 뒤지지 않을 교육체제이고 유산입니다. 미국이 이래서 좋다. 한국은 이래서 나쁘다. 라고 말하는거 누가 못합니까? 왜 그렇게 되었고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말해야죠. 정작 자신이 말하는 잘못된 교육의 결실이 자신이란것을 잊지 말았으면 좋겠군요.
친일파, 분단된 조국, 잘못된 정치가 바로 잡히지 않는다면 님이 원하는 것은 절대로 이루어질 수 없는겁니다. 미국의 교육문화랑 일본의 교육문화를 받아들인다는 것이 요모양 요꼴의 교육체제를 양산했습니다. 위의 삼재가 해결되어야 비로소 새로운 출발이 가능하죠.
정치라? 우리나라에 그런것이 있기는 있었습니까? 선거기간만 바짝 손바닥 비비면 끝나고. 정작 국회란 곳에서는 밥그릇 싸움, 당쟁이나 해대고 국민들에게 필요한 사안들은 하나도 토의, 토론을 고사하고 처리도 안해주다가 임시국회라는 명목으로 다시 열어서는 초고속으로 망치만 두드리는 것이 정치라면 정치죠. 차라리 전 사안을 국민투표로 하는것이 더 능률적이고 생산적이겠습니다. 인터넷 인프라도 잘 갖추어 졌겠다. 보안처리만 잘하면 전자국민투표하면 좋겠군요..- ㅡa
-_-a 미안합니다. 퍼온글이었군요.

"동양: 정신, 서양: 물질" 이것은 너무나 단순한 생각입니다. 그리고 사실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동양: 물질, 서양: 정신"도 아닙니다. 동양과 서양이 정신과 물질의 관계를 다르게 생각하고 있는 것이지요.

태평양 전쟁때 일본과 미국을 보면 일본은 "미국의 물질에 대항하여 일본의 정신으로 싸운다. 일본의 정신이 더 강하다."라고 광고 했지요. 하지만, 일본이 태평양전쟁에서 패한건 일본의 정신이 미국의 정신보다 약했기 때문입니다. (원자폭탄이 투하되기전 이미 일본은 태평양 전쟁 당시 대부분의 전선을 미국에게 뺐긴 상태였습니다.) 사실 전쟁은 정신과 정신이 물질을 통해서 싸우는 것이지요. 일본은 정신을 더 강하게 하는데 정신력을 쏟아 부었습니다. 미국은 물질을 더 강하게 하여 그 결과로 정신을 더 강하게 했습니다. 그 결과 미국이 가진 정신력은 일본의 정신력보다 건전한 형태의 정신력이었습니다.

고대의 로마군은 배수진을 치지않았습니다. 그들은 언제나 병사들에게 쾌적한 시설을 제공했고, 전장에서는 언제나 퇴로를 확보해서 불리할때 무사히 퇴각할수 있게 했습니다. 이러한 배려는 사실 로마군의 병사는 대부분 로마시민이었기 때문에 이루어진 것이지만 그 결과 어떤 군대보다도 더 강하고 건전한 정신력으로 싸웠습니다. 우리나라의 이순신 장군을 비롯하여 한니발, 카이사르 같은 명장들도 이길 수 있는 조건과 장소를 선택해서 싸웠습니다.

"건강한 신체에 건강한 정신이 깃든다."라는 말이 과연 서양인들이 육체적/물질적인 것이 정신적인 것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해서 한 말일까요? 태평양 전쟁때 일본군의 자살공격은 과연 물질에 대한 정신의 승리일까요?

- wizz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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