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남준과TV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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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은 흐름이 미술사 수업과제로 제출했던 백남준과 그의 작품('TV나무')에 대해 쓴 보고서이다.

참고로 백남준을 느끼고 싶어하시는 분들께 추천해 드릴 작품으로 강남 포스코 빌딩 내의 'TV나무'를 들고 싶다. 과천 현대 미술관에 상설 전시되어 있는 다다익선이나 기타 소품들에 비해 이 작품이 흐름에게 주었던 느낌이 보다 강렬했다.

백남준 작품에 드러난 천재의 면모와 과학, 기술- 예술의 관계- 'TV나무'를 중심으로

1. Prologue

“천재적인, 혹은 훌륭하다고 일컬어지는 미술가(artist)와 과학자(scientist)의 천재성의 이면에 어떠한 공통점이 있지 않을까?” 내 자신이 미술, 그리고 과학(기술’enginerring’포함)이라는 두 영역 모두에 보통의 사람 이상의 관심을 가지고 있었고, 어렸을 때부터 나 나름대로의 시각으로 바라보아오던 그 두 영역엔 분명 무언가 공통의 요소가 있었다. 또한 내가 살고 있는 이 시대는 과학기술과 기계 문명의 중요성을 날로 더하고 있으며, 그로 인한 과학 기술 혹은 기계 문명의 지배마저 담론화되고 있는 시대이다. 이러한 환경 속에서 “현대 사회가 추구하는 과학기술, 올바른 ‘기계 문명과 인간과의 관계’-인간화된 과학 기술문명- 정립이 예술을 통해 가능할 것인가, 가능하다면 어떠한 방법으로 행해질 것인가.”의 문제가 나에게 다가오게 되었다. 이러한 나의 유년기로부터 현재에 이르는 궁금증을 해소하기 위해 이번 report를 쓰기로 했다.
과학자와 예술가의 눈은 같다. 남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본다-
Report를 시작하기에 앞서 이렇듯 다소 장황하기 까지한 나의 생각과 고민을 털어 놓는 이유는 본 report의 주제를 분명히 하기 위해서이기도 하지만 또한 일종의 고백을 하기 위함이다. 내가 감상하였고, 분석하려는 작품은 국내 유수의 미술관이나 갤러리에 전시된 작품이 아니다. 물론 그 작품의 작가는 국내뿐만 아니라 국외의 보도매체의 공식적인 평가자료들을 통해 이미 수십 차례 검증된 작가이다. 그 작가의 이름은 바로 ‘백남준’. 앞서 말한 나의 의문점을 해소해줄 매개가 되어줄 작가로 백남준 씨를 택했고, report요건에 부합하도록 ‘미술관 (미술관 수준의 갤러리 포함)’에 전시된 그의 작품을 여러 개 감상했으나 솔직히 별다른 감흥이 오지 않았다. 착찹한 심정에서 마지막으로 발길을 돌린 곳이 Posco Center였다. 건축물 자체로도 이미 그 예술성을 입증 받은 그 빌딩에(제14회 서울시 건축상 금상 수상) 백남준 씨의 작품이 전시되어있다는 보도매체의 자료를 접하고 작품에 대한 별다른 정보 없이 그 빌딩을 찾았다. 지하도로 연결된 건물 지하로부터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올라가 개방성 있는 건물 로비에 서 있는 그의 작품을 대하는 순간 “아, 정말 아름답다!” 라는 말이 입에서 터져 나왔다. 아름다움(美)을 대할 때면 으레 내 몸에 흐르던 일종의 전율이 또 한번 내 몸을 관통하는 순간이었다. 이러한 경험으로부터 나는 report의 대상이 되는 작품을 Posco Center 로비에 전시된 ‘TV나무’로 할 수 밖에 없었다. 이것이 나의 고백이며 양해를 구하는 부분이다.

2. 감상 대상-Posco측의 설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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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남준 PAIK NAM-JUNE (1932~, Korea)
작품명: TV나무(철이 철철)/ 1955년 作
크기: 8x8x11m
재료: TV 모니터, 알루미늄, 스테인리스 스틸 |}}

작품설명:‘과학과 예술, 대중의 만남’을 추구하는 이 작품은 ‘TV 나무’로 불리고 있다. 나무는 그 모양에서 붙여진 이름으로 단순, 친근한 느낌을 주는 동시에 의미를 준다. 철기둥 나무에 달린 열매와 꽃은 이러한 튼실한 나무에서만 피어난다는 뿌리 깊은 나무를 의미한다 또한 여기 저기 매달려 서로 조화를 이루는 총 284개의 TV모니터들의 구성, 영상은 첨단적 환상적 분위기를 나타내어 현대 문명의 특징인 속도감을 여실히 반영한다. 이를 통해 이 작품은 Posco의 인간 사랑, 환경 사랑, 미래 지향의 이미지를 예술적으로 담아내고 있다.

작품에 대한 설명에서 이미 알 수 있듯이 이것은 나의 감상, 혹은 분석이 아니다. 이것은 Posco측이 설명해 놓은 작품 앞 설명대의 말이다. 이 설명엔 불필요한 부분도 있지만, 인용이라는 측면에서 여과 없이 본문을 모두 실었다. 그럼 이제부터 내 나름대로의 작품에 대한 생각을 기술하도록 하겠다.

3. 아름다움(美)이란 무엇인가?

Prologue에 서술했듯이 내가 이 작품을 감상과 분석의 대상으로 선별한 이유는 바로 ‘아름다움’이다. 보다 분명히 말하자면 그것은 ‘직관적’ 아름다움이다. (이것은 내가 그 작품이 내 시야에 들어오는 순간 ‘아!, 정말 아름답구나!’하는 탄성을 내질렀다는 데서 알 수 있다.) 예술을 예술로 규정짓는 잣대에는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지만, 내가 생각하는 첫째 조건은 바로 ‘미美’이다. 즉 대상에서 아름다움을 발견할 수 있을 때 그것은 하나의 예술이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아름다운 자연의 한 장면을 바라보면서 예술적이구나 라고 말할 수 있을지언정 그것은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예술’은 아니다. 즉, 예술을 구성하는 요소에는 인간의 ‘의도’가 개입-작가가 존재-되어 있어야 한다. 자연의 한 부분을 어떠한 사진작가가 그것이 아름답다는 직관 혹은 사고의 과정을 거쳐 담아내었을 때 그것이 예술이 될 수 있다. 우리가 논하는 대상은 이미 검증된 작가의, 즉, 작가가 있는 것이기 때문에 두번째 예술의 요건은 여기서 논하지 않기로 한다.

그렇다면 ‘아름다움’이란 무엇인가?

아름다움’에 대해서 정의하기에 앞서 ‘아름다움’의 상대적이라는 것을 밝혀두고 싶다. 내가 같은 작가(백남준)의 여러 작품 속에서도 특정 작품에서만 아름다움을 발견할 수 있었듯이, 혹은 같은 작품을 두고도 사람마다의 반응이 다르듯이 그것은 대상과 감상자에 따라 상대적인 것이다. 내가 생각하는 ‘아름다움’은 크게 두가지 경로를 통해 감상자에게 전해질 수 있다. 하나는 ‘직관’에 의해서이고, 하나는 ‘사고’에 의해서이다. 직관이란 판단-추리 등의 사유(思惟) 작용을 가하지 않고 대상을 감각적으로 포착, 파악하는 작용 을 말한다. 즉, 오감에 의해서 사유의 작용이 일어날 수 없을 정도로 짧은 순간적 시간에 느껴지는 경로가 아름다움이 전달되는 첫째 경로이다. 두번째 ‘사고’에 의한 경로는 (직관에 의한 전달에도 물론 그렇지만 더더욱) 감상자가 이미 가지고 있는 지식을 바탕으로 -그것이 경험에서 나온 것이든, 매체를 통해 습득한 것이던 간에- 대상 자체가 보여주는 혹은 들려주는 것 이상의 것을 찾을 수 있게 한다. 이 두가지 경로는 서로 분리 될 수 없으며 시간적 차이가 다소 존재하되 결국은 두가지 경로를 통해 전달된 하나의 이미지가 그 대상에 대한 아름다움을 형성하게 된다. 따라서 아름다움 이라는 것은 다분히 감상자에 의존적일 수 밖에 없고 따라서 상대적이다.

감상 주체를 ‘나’로 했을 때 내가 생각하는 아름다움의 구성요소는 다음과 같다. 대상을 구성하는 요소들 간의 다양성과 질서(일체감unity), 대상의 단순성(simplicity), 각 요소들 간의 균형(balance)과 조화(harmony) 가 그것들이다.

3.1. 작품이 지닌 아름다움의 근원(작품 자체가 내재한 美:각 요소): 관찰에 의한 묘사와 분석

이러한 요소들을 전제로 내가 백남준의 ‘TV 나무’처음 본 순간 아름답다고 느꼈던 것은 아마도 작품의 크기와 그 크기를 이루는 각 부분들이 조화롭게 구성되어있었다는 것이 나의 시각을 통해 들어와서 였을 것이다. 즉, 이 작품의 주 재료가 된 스테인리스 스틸과 티비 모니터의 조화가 그 핵심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들 요소를 보다 자세히 들여다 보자. 먼저 스테인 리스 스틸은 이 작품의 골격을 이루고 있다. 즉, 나무로 치자면 나무 기둥 및 잔가지인 것이다. 기둥은 높이 11m의 수직에 가까운 각도로 아래로부터 위로 다소 좁아지는 직선의 철근 두개로 되어 있다. 잔가지는 1m 안팎의 철근이며 안쪽(기둥쪽)으로부터 바깥 쪽으로 약간의 아치형을 그리며 기둥에 붙어있다. 여기에서 우리는 각 요소들간의 ‘조화 또는 균형’을 형성하는 면모를 볼 수 있다. 기둥과 잔 가지간의 길고- 짧은 (물리적)‘길이’의 조화, 역시 기둥과 잔 가지의 직선-곡선에서 나오는 ‘형태상의 조화(균형)’가 그것이다. 각각의 잔가지들은 우리가 실재 볼 수 있는 자연의 나무에서 그렇듯 아래쪽으로 올수록 길고, 위로 갈수록 짧아지는 형태를 가지고 있으니 이것 또한 자연의 질서에 부합하는 것이라 하겠다. 다음으로 이 작품을 구성하는 다른 요소인 TV모니터를 보자. TV모니터들은 크기에 있어서 차이를 가지고 있다.(크기의 조화) 표면적으로 나무에 달린 열매, 혹은 잎사귀를 형상화한 TV모니터들 역시 아래에 달린 것은 비교적 큰 크기이고, 위에 달린 것은 비교적 작은 크기라는 점에서 균형감과 안정감을 선사한다. 또한 주시할 것은 이 모니터들이 배열된 각도이다. 각도들 또한 다양하되, 바닥에 평행한 평면에서 180도를 벗어나지 않는 범위 내에서(아래쪽을 향하여) 일체감을 형성하고 있다. 이것들이 가지가 되는 철근의 길이에 따라 수적 차이를 가지고 배열되어 있다. 다음으로는 철근과 TV모니터의 관계를 살펴보자. 우선 그 형태적 차이 선(line)과 정육면체의 입체(cubic)에 의한 조화가 있고, 색의 차이-무채색의 철근과 밝고 화려한 색감이 교차하는 TV모니터-에서 나오는 조화가 이 작품을 풍성하게 한다. 또한 이러한 (물리적인)형태, 색감 의 차이는 서로 다른 속도감을 형성한다. 즉, 수직으로 곧게 뻗은 큰 규모의 기둥철근으로부터 수직상승의 속도감을 느낄 수 있는 반면, 가로로 나열된 TV모니터들의 빠른 화면 전개는 수평으로의 속도감을 선사한다. 이런 각 요소(철근과 모니터) 개별의 다양성과 일체감에서 나오는 조화와 균형, 요소간 조화와 균형이 시각적 아름다움을 형성한다. 전체적 형태의 단순성 역시 이 작품에 드러난 하나의 아름다움의 요소이다. 철근이 지극히 단순화된(추상화된) 형태로 한눈에 나무 기둥과 잔 가지임을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

3.2. 작품이 지닌 아름다움의 근원(외적 측면:환경, Posco center 로비)

다음은 작품 자체에서 잠시 눈을 돌려 작품이 전시된 환경을 바라보자. 이 작품을 관람한 시각은 오전 10시 반경으로 적절한 각도의 햇살이 빌딩의 창을 통해 반짝거리며 쏟아지고 있던 때이다. 이 빌딩에 들어서 (지하에서 1층 로비로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이동하며) 인상적으로 느꼈던 것은 개방성이었다. 아무런 구획이 없는 허허 벌판을 두고 개방적 ‘공간’이라고 말 할 수 없다. 공간이라 함은 자연 상태에 일정한 구획을 상하, 좌우로 설정함으로써 생기는 것이다. 그러한 공간의 본질적 속성 때문에 공간은 제한적일 수 밖에 없다. 이러한 공간의 제한성 (닫힘성)을 해소할 수 있는 소재가 바로 ‘유리’이다. ‘유리’를 구획을 설정하는 요소인 벽면, 천장으로 사용함으로써 구획의 설정이라는 공간의 본질에 부합하면서도 외부 요소를 시각적으로 끌어들일 수 있어 시각적, 심리적 개방성을 공간에 부여하는 것이다. Posco Center의 로비는 이러한 유리의 특성을 백분 활용한 예라고 할 수 있다. 건물 전면은 벽이 유리로 외어있음은 물론 천장 또한 골격을 이루는 철근을 제외하고는 유리의 세상이다. 이런 유리에 의한 면은 작품에 풍부한 빛을 선사하며 이것은 무광택, 단일 색의 철근에 채도에 따른 풍부한 색감을 부여하고, 또한 광택이 있는 TV모니터가 적당량의 빛을 반사해 냄으로써 보다 화려한 장면을 연출하게 한다. 이 작품이 만일 사방이 닫힌 흰 벽면의 -내가 이제껏 보아온 국내 대다수 미술관이나 화랑의 벽면처럼- 덜 개방적인 공간에서 자연채광이 아닌 인공의 불 빛을 받으며 서 있었다면 내가 느낀 감흥이 고스란히 다시 전달될지에 대해서는 의문이다. 이 작품을 보면서 나는 어린 시절 방문했던 사방이 유리로 된 돔형의 남산 식물원이나 제주도 여미지의 식물원에서 빛을 반사하여 반짝거리던 거대한 활엽수들이 떠올랐고 이로 인해 작품이 더욱 생동감있게 다가왔던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미술 작품으로부터 감상자가 받는 인상은 개인의 배경 지식을 바탕으로 해서 작품 자체가 내재한 美로부터 유발되기도 하지만 그것이 주변환경과 어떻게 상호 조화를 이루는지, 즉 전시되는 공간의 특성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그런 측면에서 (백남준 자신이 직접 작품의 전시 장소를 보고 작품을 구성했는지는 알 길이 없지만) 이 작품을 그 자리에 놓아둔 사람의 혜안에 경의를 표한다. 이런 생각에 처음 작품을 대하고 앞서 말한 (본문 1 페이지 하단) 안내 표지판에 쓰여져 있던 Posco 측의 상업주의적 작품 설명에서 비롯된 반감이 다소 누그러졌다. 중세의 여러 조각상이나 건물의 회화가 신성에 도움이 된다는 이유로 그 시대에 권위를 가졌던 교회의 아래 그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던 것처럼 오늘날 소위 최고의 권위를 가진(경제적 힘을 가진) 대기업의 상업성의 그늘 아래 작품이 숨쉴 수 있고, 그 빛을 발할 수 있다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아이러니일지도 모르겠다.

4. video art-왜 video인가?

이 작품이 지닌 특색이자 백남준 작품의 대표적 특성이라 할 수 있는 변화하는 영상에 대해 살펴 보자. 이들 영상은 매우 반복적이면서도 다양한 색깔 변화를 가지고 속도감 있게 전개되고 있었다. 빠른 속도로 변해가는 영상이어서 뚜렷하게 각각의 장면을 인지하고 기억해 낼 수는 없었지만 반복적으로 관찰하는 동안 몇 개의 장면을 구분해 낼 수 있었다. 이들 화면을 장면 장면을 분리해 보면 춤추듯 물결치는 피아노 건반의 이미지, 그의 예술적 동반자 샬로트 무어만이 TV첼로를 연주하는 이미지, 고대 아프리카 탈이나 한국 탈 등을 현대인의 모습과 오버랩시킨 것, 순백색의 눈밭의 이미지, 최첨단 비행기와 맞물린 posco전경, 들 끓는 용광로 등을 비롯해 내가 포착해내지 못한 몇가지 영상들의 조합으로 되어있었다. 언급한 네 개의 이미지 중 앞의 둘은 백남준 자신의 예술을 드러낸 것이고 뒤의 둘은 이 작품이 갖는 상업성 한계성 때문에 첨가된 것이다. (그렇다 할지라도 들 끓는 용광로의 강렬한 이미지는 작품을 훼손시켰다고 볼 수 없었다) 이들 이미지들이 어떠한 방법에 의해 구현되어 나열되며 백남준의 작품 세계에서 어떠한 1차적(표면적), 2차적 의미를 갖는지 알아보자.

4.1. 작품이 지닌 아름다움: 내용적 측면-모니터에 전개되는 영상

그의 작품들은 입체적이며 움직임이 있고 동시에 회화적이다. 시각을 주로하여 감각적인 자극을 동시에 일으키는 영상 이미지들을 통해 그는 기술공학적, 사회학적 현실을 놀랍도록 충격적이고 정교하게 그려내고 있다. 우리의 분석대상인 ‘TV나무’에서는 상업적 이유로 이러한 특성이 다소 표현되지 않고 있다. 하지만 화면을 통해 전개되는 POSCO로고와 전경이 나에게 산업사회의 대기업이 지닌 경제적 힘을 느끼게 하고 쓴 웃음 짓게 했다면 그것 또한 사회 현실을 그려낸 것이라 할 수 있겠다. 이러한 사회적, 기술 공학적 현실의 반영은 냉철하기는 하나 지루하거나 무겁지 않다. 그것은 백남준이 창조해낸(엄밀히 말하면 재조합한) 영상 이미지가 철저히 오락적 요소(fun)를 밑바탕에 깔고 있기 때문이다. 화려한 색감을 지니고 속도감 있게 흘러가는 영상은 그에 걸맞게 비트 있는 음악만 어우러진다면 오늘날 젊은이들의 눈과 귀를 사로잡는 뮤직비디오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 수많은 모니터들에서 쉴새 없이 중첩되고 혼합되고 반복해서 흘러나오는 영상의 이미지들은 보는 이들의 직관을 자극하여 즐거움을 준다. 차가운 전자매체, 즉, 과학 기술과 예술의 즐거운 만남이 그 비디오 파편들을 통해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과학 기술과 예술의 랑대부의 필요성을 이해하려면 그의 사상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4.2. 그의 예술관

"예술은 사기다!" 85년 한국을 방문하면서 그가 내던진 이 한마디에 여기 저기에서 말이 많았다고 한다. 그 자신이 말한 ‘예술은 사기’라는 말의 의미를 들어보자. “예술은 잘하면 사람을 감동시키기도 하지만 나를 포함한 대부분의 예술가들이 진지한 표정을 내세워 독자들을 눈속임하는 경우가 많다. 내가 말한 사기라는 말은 에고의 예술을 일컫는다. 나는 지금도 폼잡는 예술은 하고 싶지 않다.” 그 자신의 말에서 드러나듯이 어쩌면 그의 예술을 이해하는 데에는 별다른 지식이 필요할지 않을지도 모른다. 백남준 작품에 대한 몰이해에서 오는 일종의 공포와 부담감을 가지고 미술관을 찾았을 때 아무런 감흥을 느끼지 못했으나 어쩌면 절망적인 심정으로 별다른 기대 없이 그의 작품을 마주했을 때 비로소 아름다움을 발견했던 내가 바로 그의 말의 산 증인이다. 때로는 고전적 미술로부터 비롯된 엄숙주의와(사실 이 말엔 문제가 있다. 실제로 현대 미술이 탄생하기 전에도 나름대로의 해학과 재치를 내재한 미술 작품들이 많이 있었으니 고전적 미술에서 비롯된 엄숙주의는 보는 사람과 그러한 미술을 전해온 매체가 조장한 잘못된 관점이라 할 수도 있겠다) 감상에 앞선 과다한 지식이 작품 감상을 방해하여 개개인이 상대적으로 느낄 수 있는 예술로부터의 재미(fun)를 반감시킬 수 있다고 생각한다. 어차피 아무런 감흥을 주지 못하는 것은 예술로서의 핵심적 요소가 결여된 것으로 유용성이 없다.

그의 예술을 읽어가는 데 별도의 지식과 상식을 필요치 않으나 그의 사상을 되짚어보는 일은 그의 예술을 은연중에, 가슴으로, 이해하는데 상당한 도움을 준다고 생각된다. 내가 생각하는 그의 작품은 매우 ‘사상적’이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말하는 ‘사상’은 단순히 어떤 주의(ism)로서의 사상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그가 지닌 그의 예술에 대한 총체적인 철학. 그것을 사상이라 부르는 것이다) 그의 사상을 형성하는데 중요한 요소가 되었던 것은 그의 초기 시절 속했던 예술집단 ‘Fluxus’ 이다. ‘Fluxus’란 라틴어로 유동, 끊임 없는 변화의 흐름 등을 의미하며 그 집단의 정신 또한 단어의 사전적 의미와 크게 다르지 않다. 기존의 엄숙한 틀을 깨고 예술이 조장하는 계급의식을 타파하는 것 그것이 Fluxus의 모토이며 백남준 예술 철학의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기도 한 것이다. 현대 사회에 들어와 인류는 필요에 의해 과학 기술을 발전시켜왔으며 그로 인해 발달한 기계 문명은 물질적 측면에서 인간의 삶을 풍요롭게 하는 데 기여한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이러한 기계 문명의 발달 속도가 가속화되면서 필요에 의해 기계 문명을 발달시켜오던 목적성을 잃고 기계문명에 의해 인간의 사고방식, 가치가 경도되는 지경(기술이 사회적, 심리적 환경을 결정하는 위치에 서게 됨)에 이르게 되었다. 이렇게 인간이 기계 문명에 종속되는 것과 제도권 예술이 인간 사회에서의 계급화를 조장하는 것. 이 두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백남준은 ‘인간화된 기술’ 또는 ‘인간화된 예술’은 주장하기에 이르렀다. 기술이 인간화되기 위해서는 그것이 사용자인 인간에게 친숙해야 한다. 인간에게 친숙해 지려면 어떠해야 하는가? 가장 쉬운 방법으로는 만만해 지는 것을 들 수 있다. 만만해 지려면 어때야 하는가? 우스워 보이고 그것을 대하는 이로 하여금 즐거움을 느끼게 하면 되는 것이다. 우스워 보이고 즐거움을 주는 것. 인간과 과학 기술 사이에 그런 역할을 할 매개체로서 백남준은 예술을 택한 것이다. 이로써 그가 고민해 오던 아니 인류 전체가 안고 있던 핵심적인 문제는 해결의 실마리를 마련한다. 이러한 실마리를 두고 그는 예술의 도구로 비디오를 택했다.

4.3. 왜 video인가?: 소통과 참여의 예술 실현

백남준은 60년대에 이미 “앞으로는 텔레비전 음극관이 캔버스를 대체할 것”이라는 매우 낙관적이면서 매체 중심 적인 사고를 하고 있었다. 특히 “오늘날 예술가들이 붓과 바이올린, 폐품으로 작업하지만 미래에는 반도체와 저항기로 작업할 것”이라는 말은 과학기술 이상주의자적인 관점까지 내포하고 있다. 실제 그의 이러한 예측은 많은 부분에서 들어맞았다. 오늘날 현대 미술의 한 분야인 영상예술가들은 비디오나 테크놀러지를 매체로 혹은 그 이상의 것으로 사용하는 예가 부지기수이기 때문이다. 백남준 역시 자신의 이러한 주장을 공고히 하는데 한 몫했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그는 왜 비디오를 택한 것일까? 그것은 비디오가 가진 본질적 속성에 관련이 있다. 비디오라는 것은 시각, 청각적 요소를 모두 가지고 있음으로 해서 기존의 회화(시각적 요소만 지님)보다 감상자로 하여금 받아들이게 할 수 있는 통로를 몇배로 증가시키게 한다. 실제로 백남준의 많은 작품들엔 시각적 이미지와 함께 청각적 요소인 음악이 중요시 되어왔다. (그가 예술을 시작한 것도 미술이 아닌 음악에서 였다. 또한 비디오 예술로의 출발도 그가 가진 음악성을 보다 적극적으로 구현하기 위함이 었다고 한다) 내가 감상한 ‘TV 나무’는 전시된 장소가 본래 예술의 공간이 아닌 사무의 공간(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사무의 기능을 위주로 구성한 예술적 공간)이어서인지 작품 자체가 나에게 주는 청각적 자극은 없었다. 다만 건물 전체에 흐르는 피아노 선율이 원시림이 평화롭게 존재하는 식물원의 이미지와 어우러져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작품이 직접 뱉어내는 웅얼거림을 들었으면 더욱 좋았겠지만, 그런 음악으로나마 조금은 위안이 되었다.
비디오가 가지는 보다 근원적인 속성을 나타낸 인용문을 살펴보자. 『 비디오를 통한 새로운 이미지 개발이 인간의 지각을 변화시키는데 기여한다는 생태학적 차원의 소통문제에 관계된다. 백남준의 비디오 테이프 작업은 새로운 이미지를 창조함으로써 직접적이고 접촉적인 참여TV를 만드는 일로 일관되어 있다. 백남준 비디오 테이프의 양식적 특징인 변속적으로 복수화 또는 파편화 되는 이미지의 중첩현상은 활자매체와는 다르게 동시시각을 요구할 뿐만 아니라, 이미지의 비결정성과 과속의 변화가 새로운 생리학적, 혹은 의학적 반응을 일으키는 가장 효과적인 “직접-접촉예술”이라고 말할 수 있다. 』 사실 비디오가 효과적인 ‘직접-접촉’예술이라는 말이 얼른 이해되지는 않는다. 물론 가공된 정보를 맹목적으로 전달하는 TV에 비해 비디오 카메라만 든다면 내가 직접 참여하여 이미지를 생산해 낼 수 있다는 점에서 보다 능동적인 매체이긴 하지만 어차피 비디오를 사용한 작품을 그저 바라보는 관람객의 입장에서는 그러한 능동성이 그다지 유용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앞에 인용한 문구의 ‘비디오를 통한 새로운 이미지 개발이 인간의 지각을 변화시키는데 기여한다는 생태학적 차원의 소통문제에 관계된다.’라는 문장에 주목해 보자. 기존의 캔버스에 그려진 회화는 정지된 이미지로서 보는이의 사고작용을 적극적으로 이끌어 내는 데 상대적인 제약이 있다. 반면 비디오는 시시때때로 변화하는 이미지를 구가함으로써 보다 많은 인식과 사고를 필요로 하게 하고 그럴 기회를 제공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비디오는 직접적인지 아닌지는 몰라도 훨씬 더 보는 이의 피부에 다각도로 와 닿는 접촉 예술임에는 분명한 것 같다. TV나무에서 사용한 이미지를 예로 들어 보자. ‘눈’의 이미지는 다소 딱딱해 보일 수 있는 철근의 이미지를 중화시킬 수 있는 역할을 한다. 춤추는 건반 또한 고정된 전시물로서의 작품이 지닌 정지의 면모에 생동감을 불어넣을 수 있다. 또한 아프리카 탈이나 한국 탈 등을 현대인의 모습과 오버랩 시킴으로써 세계사적 동질성, 세계화의 이미지 등도 전달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첨단기술의 중심 POSCO의 이미지를 덧붙임으로써 예술성과 함께 작품 제작의 중요동기였을 상업성에도 충실하고 있다. 이렇듯 조합된 영상은 그것을 바라보는 이로 하여금 다양한 이미지들을 순차적으로 수용하게 하는 매우 적극적인 방식이다. ‘TV나무’는 그것이 기업의 자본에 의해 만들어졌고 기업 내부에 존재한다는 점에서 사회적인 메시지를 충분히 담아내고 있지는 못하나 만일 사회적 메시지-이를 테면 현대 사회의 심각한 문제이면서 작품의 외면적 모습인 나무와도 관련되는 환경 문제에 대한 영상 같은-를 그 자리에 담아내었다면 그것이 얼마나 효과적으로 그러나 은밀히 작가의 사상을 파급시키는데 효과적이었을 지는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백남준이 비디오를 매체로 택한 데에는 비디오가 전통적 예술의 속성을 제공할 만한 요소를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이 또 하나의 이유였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사상적으로 그는 전통적 예술이 지닌 외적 속성들-엄격한 테크닉을 통해 특정 집단에 의해 소량 생산되어 희소가치를 지님으로써 소유의 대상이 되는 속성-에 반기를 들고 그에 반하는 예술을 추구하고자 했다. 그런데 비디오가 가진 대량생산적 기법과 한정된 수명, 일시적 영상, 쉽게 복제 가능하여 수량적 한계, 희소가치가 사라지는 특성 등이 오히려 그가 추구하는 예술의 본질적 성격과 맞아떨어진 것이다. 그렇다고 전통적 예술이 가진 내적 속성, 이를테면 회화성, 까지 침해 당해 소멸해 버렸는가 하면 그런 것은 아니다. 오히려 하나하나가 회화가 될 수 있는 장면들을 중첩하고, 반복하고, 색감과 형태에 있어서 다양한 변화를 시도함으로써 더욱 풍부한 회화적 요소를 내재한 예술로서의 영상을 만들어 낼 수 있었다. 이러한 사실의 배경엔 필연적으로 기술의 발달이 뒤따랐다.

4.4. 비디오 아트를 위한 기술 개발: 비디오 신시사이저Video Synthesizer

기술의 인간화를 위해-기술로의 친숙한 접근 방식의 하나로- 예술이 기여하고 다시 그 예술을 기술적 요소가 뒷받침한다는 것은 예술과 과학 기술이 가진 동반자적 특성을 여실히 보여주는 것이다. 이런 동반자적 특성을 여실히 드러낸 예가 바로 백남준의 예술이다.

백남준이 TV수상기를 이용하여 시도한 작품은 크게 세 종류로 나뉜다. 『첫째는 설치된 수상기 이미지가 그 내부 회로 변경에 의해 특수한 시각적 효과를 산출하는 경우이고, 둘째는 내부 회로를 조작하는 대신에 비디오 테이프를 사용하여 좀 더 현란한 시청각적 이미지를 얻어내는 경우이며, 셋째는 폐쇄 회로 설치를 통하여 카메라가 포착한 현장이 동시에 모니터로 피드백 되어 거울의 효과를 창출하는 경우이다.』 ‘TV나무’의 경우에는 세가지 형식 중 두번째 경우의 설치작업이다. 이 그룹의 작품은 비디오 촬영기와 비디오 합성기에 크게 의존하여 이미지를 생산해 낸다. 여기서 말하는 비디오 합성기 (video synthesizer)는 백남준에 의해 예술적 목적으로 개발되었다. 이 기계가 구체적으로 어떤 편집을 가능케 하는지는 다음에 인용한 백남준의 말에 분명히 드러나 있다.

“난 일곱 개의 다양한 원전을 한번에 편집할 수 있는 건반을 원했다. 실재적인 시간 속에서 이루어지는 편집 말이다. 내가 처음으로 생각했던 것은 일곱 개의 영상을 지닌 일곱 대의 카메라였는데, 이 영상들은 개폐대를 통해 순간적으로 혼합될 수 있었다. 그래서 이 기계는 두 가지 장치를 가지고 있다. 하나는 순간적인 혼합을 위한 건반이고, 다른 하나는 적외선부터 자외선에 이르기까지 색채를 바꾸는 아주 작은 시계이다. 연주자가 색을 바꿀 수 있다. 일곱 대의 카메라는 일곱 가지 색채에 맞추어져 있다. 한대의 카메라는 적색만 촬영하고, 다른 카메라는 청색을 그리고 또 다른 카메라는 그 외 다른 색만 촬영한다. 일곱 가지 무지개색이 있다. 이 색채들의 혼합은 사람들이 보는 것에 영향을 미친다.”
이런 방식으로 만들어진 색과 형태는 매우 자극적이다. ‘TV나무’에서만 보더라도 반복적인 샬로트 무어만의 이미지는 각종 형광색으로 중첩되고 있고, 들 끓는 용광로는 굳이 색의 변조를 거치지 않더라도 이미 강렬하다. 각각의 이미지들이 스타카토 식으로 콜라주 편집되어 있으며 빠르게 반복, 변형, 분열되는 다소 현란하다고 까지 표현할 수 있는 이미지들은 관객의 오감을 활성화 시키고 결국 만국의 언어로서 막강한 소통의 힘을 뿜어낸다. 국경, 성별, 인종, 나이를 초월하여 그것을 보는 이가 누구이건 간에 그 영상이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나름대로 받아들일 수 있게 하는 것이다. 그러한 메시지를 수용한 대중이 나아가 그로부터 자신의 비판 능력을 신장시킬 수 있을 때 백남준이 추구했던 예술이 완성되는게 아닐까 생각을 해본다. 어쨌든 이런 목적 달성에 백남준식 예술이 매우 유효하다는 것을 알아보았다.

4.5. video synthesizer의 활용 가능성: 백남준의 말

백남준은 <다기능 컬러 TV 신시사이저>라는 선언문에서 이 기계의 활용 가능성을 기록했다. 그는 영상 변조의 특성을 예술사의 위대한 이름과 결합시켰다. 여기서는 다음과 같은 그의 말을 통해 실제로 그가 입증해 낸 가능성(이제는 가능성이 아니라 실제 능력이 되겠다)이 어떤 것인지 간단히 형상화 해보자.

{{|
이것 때문에 우리는 텔레비전 스크린 캔버스를 만들어 낼 수 있다.
레오나르도처럼 정확하게
피카소처럼 자유분방하게
르느와르처럼 화려하게
몬드리안처럼 심오하게
폴록처럼 격렬하게
제스퍼 존슨처럼 서정적으로.|}}

백남준은 이러한 기계를 만들기 위한 작업을 전파공학자와 공동으로 성공적으로 해낸 것이다. 백남준의 이러한 모습은 그가 단순한 예술가를 넘어서 기술을 응용 창조해 낼 수 있는 능력까지 겸비한 창조자임을 보여준다. 그리고 이러한 창조자적 면모에서 그의 천재성을 엿 볼 수 있다.

5. 천재 예술가 백남준: 과학기술과 예술의 관계


5.1. 백남준의 천재성: 경계들로부터

구겐하임 미술관의 큐레이터인 존 핸 하르트는 “현대 문명에 대해 혜안을 가졌던 백남준은 50년 전부터 테크놀러지의 혁명적 변화를 아트로 승화시켰으며 TV라는 기계를 인간화했다”고 찬사를 보낸다. 그런가 하면 백씨 자신도 예술가의 역할에 대해 “과학 기술을 예술로 승화시켜 아름다움을 창조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의 예술활동에 있어서 과학기술은 작품을 만들기 위한 도구일 뿐만 아니라 작품의 화두로 그 중심에 있음을 보여주는 예라 하겠다.

우리의 분석 대상인 ‘TV나무’를 보자. 그것은 정보, 미디어와 과학 기술의 중심에 서있다고 볼 수 있는 TV와 (사실 볼 수 ‘있었던’. 이제 TV의 시대도 어느 정도 가고 있다. 인터넷 사용시간이 TV시청 시간을 넘어섰으며, 백남준 자신도 시대의 변화에 걸맞게 post video를 내새우며 레이저라는 또다른 매체로 그 작품의 도구를 변화시키고 있다) 우리나라의 산업화에 큰 공헌을 했던 철강. 이 두 가지는 우리 사회에서 과학 기술의 발전에 의한 기술 발전의 대표적 상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 두 가지를 재료로 가장 일차적인 형태의 자연(식물)인 나무를 표현해 냈다는 것은 자연을 소재로 하여 과학 기술을 다룬다는 그의 발상의 일면을 잘 드러낸다. 그의 사고는 항상 boarder line에 있어왔다. 다시 말하자면 서로 배치되는 것 같은 영역의 경계를 쉬지 않고 오가는 것. 그것이 바로 그의 사고의 핵심이다. 그리고 그러한 사고를 바탕으로 그는 그렇게 다르게만 보이는 두 영역을 합성해 낸다. 그 자신이 바로 하나의 synthesizer가 되는 것이다.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그 시대에 아직 개척되지 않았던 많은 분야에 손을 뻗쳐 업적을 이룩함으로써 천재성을 인정 받았다면, 이미 많은 분야가 개척되고 고도화된 현대 사회에서는 각기 발전된 영역 사이에서 공통성을 발견해 내고 충돌을 완화시키고 조화시켜 비전을 제시하는 것이 천재성의 증거가 아닐까 생각한다. 이런 맥락에서 백남준은 창조성과 미적 직관력, 분석력을 지닌 예술가와 과학자 혹은 과학 기술자 그리고 문명사가의 경계를 빠르게 넘나들며 그의 천재적 면모를 입증해 내고 있다.

5.2. 과학과 기술 그리고 예술의 관계

과학, 기술-예술의 관계에 대해서는 앞에서 충분히 언급하였으므로 여기서는 근 본질적 특성들에 대한 정리만 하도록 하겠다.
표면적으로 과학 기술과 예술의 관계는 애증의 관계이자 상보적인 관계에 놓여있다. 본래의 과학과 예술은 모두 인간을 위해 인간이 만들어낸 것이나 현대에 이르러 인간의 사회적, 심리적 환경을 조장함으로써 인간을 오히려 그 하위에 두려는 경향이 있다. 이런 면에서 볼 때 현대의 과학과 예술은 인간을 한쪽에 두고 같은 편에 대치하고 있는 형상이라 할 수 있겠다. 한편으로는 과학기술과 예술 두 영역이 또한 서로 적대적이기도 하다. 하나는 서양합리주의에 입각한 이성적 산물이라 믿어져왔고 나머지 하나는 인간의 이성과는 대비되는 감성의 영역 한가운데 자리하고 있다는 이분법적 생각이 이 둘의 관계를 적대적 관계로 만든다. 이제까지의 과학, 기술과 예술에 대한 시각이 이와 같았다면, 백남준이 제시하고 실천했던 예술을 통한 기술의 인간화 와 예술의 인간화 작업은 보다 발전적으로 두 영역간의 공생을 논하는 것이라 할 수 있겠다. 이런 발전적 시각의 바탕엔 두 영역이 지닌 공통성이 자리한다.

기본적으로 예술활동이나 과학활동 모두 섬세한 감각에 의학 지각작용(이를 테면 ‘관찰’같은)으로부터 시작한 다는 점을 비롯하여 예술에서 아름다움을 결정짓는 요소라고 보는 질서(일체감unity), 대상의 단순성(simplicity), 각 요소들 간의 균형(balance)과 조화(harmony)는 과학에 있어서도 중요한 잣대가 된다는 점 등이 그 공통성의 핵심이라 할 수 있다. 우리는 주변에서 실제적 예를 찾아낼 수 있다. 과학의 가장 기본적인 원리가 되는 ‘가장 많은 현상을 설명할 수 있는 가장 단순한 이론이 진리에 가깝다’는 것에서 드러나는 단순성과 예술에서의 심미적 단순성이 다르지 않다는 것이 그 예이다. 또한 창조성, 미학, 직관력에 따라 동일한 데이터를 가지고 같은 공식에 도달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론으로 완성한 과학자와 그렇지 못한 예(특수 상대성 이론의 완성: 아인슈타인과 앙리 푸앵카레의 예. 아인슈타인이 결국 이론을 완성해 냈다.) , 그리고 현대의 물리학이 양자 역학에 이르러 추상적으로 되어간 것과 현대 미술이 구상을 포기하고 비구상으로 간 것이 우연의 일치만은 아니라는 학계의 주장 . 마지막으로 과학기술과 예술 그리고 사회에 대해 예술적 창조력과 분석력으로 많은 예측을 하였고 그것이 실현되었으며 그 자신도 실현에 많은 기여를 한 백남준의 예술인생이 미술과 과학, 기술이 지닌 공통적 면모를 직간접적으로 입증해 내는 예라 할 수 있겠다.

결국 앞으로 예술과 과학, 기술이 나아 가야할 발전 방향은 앞에서 언급한 그들의 관계에 대한 세가지 관점 중 마지막 것이어야 한다. 그리고 그런 바람직한 방향으로의 동행의 중심에 백남준과 그의 작품이 서있음을 다양한 각도로 분석해 보았다. 이제 남은 과제는 그것을 좀더 활성화 하여 예술과 과학 두 영역이 서로의 발전에 촉매제가 되어 시너지 효과를 창출케 하는 것이라고 하겠다.

6. Epilogue

이제 어느 정도 나의 장황한 물에 대한 답의 꼬리 정도를 발견한 것 같은 기분이 든다. 나름대로 백남준의 사상과 예술세계를 파악하고 그의 예술인생에 드러난 과학과 예술의 발전적 방향을 짚어내기 위해 여러 권의 책을 읽고 생각해 보았지만, 아직 부족한 점이 더 많다. 그러나 그러한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이번 작업은 나 자신이 품어왔던 오랜 물음에 대한 해답으로의 첫 걸음을 떼었다는 데에도 큰 의미가 있다. 또한 그에 앞서 백남준의 사상과 예술인생을 되짚으며 나의 삶에 도움이 될 많은 요소와 가치를 발견했다는 것도 커다란 수확이다. 여기에 난해한 암호코드를 해독하는 것 같기만 했던 현대 미술을 대하는 과정이 이제는 좀 더 수월하고 친숙하게 다가온 다는 것 또한 개인적으로는 성과이다.
이런 많은 것들을 느끼고 경험할 기회를 주신 선생님께 감사를 드리며, 앞으로 계속해서 나의 물음에 대한 해답과 나아가 방안까지 진지한 탐구를 해 나갈 것을 내 스스로 다짐해 본다.

7. Reference

<백남준 그 치열한 삶과 예술> 열음사. 2000. 이용우 지음
<백남준 이야기> 열화당.2000. 이경희 지음
<백남준. Video- 비디오 예술의 미학과 기술을 찾아서> 궁리. 2001. 에디트 데커 지음, 김정용 옮김
<천재성의 비밀Insights of Genius-과학과 예술에서의 이미지와 창조성> 사이언스북스. 아서 밀러 지음, 김희봉 옮김 2001.
<백남준 비디오 때, 비디오 땅> 1992. 국립현대 미술관 편저
<미술과 물리의 만남 1,2> 도서출판 국제. 1995. 레오나드 쉴레인 지음 김진엽 옮김
<백남준 해프닝 비디오 아트> 디자인 하우스 1999. 김홍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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