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색은 사람이 내뿜는 에너지의 파장 ¶
색이란무엇인가? 사람이 내뿜는 에너지의 파장이다.
사람들은 저마다 각기 다른 에너지의 파장을 갖고 있고, 그 색의 다름을 우리는 분별한다. 어떤 사람은 밝고 정열적으로 불타오르는 색을 지니고 있고 어떤 사람은 칙칙하기 그지 없는 시꺼먼 색을 가지기도 한다. 그 색이 분명히 드러나 무리 중에 튀어나오는 사람도 있고, 화사하든 밋밋하든 간에 자기가 속한 집단 안에서 썩 드러나려고 하지 않는 사람도 있다.
色이란 단어를 사람에게 적용하는 전통적인 어법은 '색스럽다'나 '색기가 있다' 등으로 간략히 말해 성적인 매력 혹은 욕망을 넘치게 지닌 것을 가리킨다. 또 흔히 주색잡기(酒色雜技)처럼 色을 곧 '아름다운 여자', 또는 '여자를 취하는 것'이라고 한정하기도 한다.
그러나, 아름다운 것은 여자만이 아니고, 성적인 것만이 색이 아니다. 도드러져나온 색, 강렬하거나 남다르거나 한 색만 색이 아니다. 색은 모두가 가지고 있는 것이다.
성적인 것이든, 명예와 허영이든 덧없는 물질적인 모든것이든 간에, 인간은 色을 쫓아다니게 되어있다. 그래서 나는 여기에서 色이라는 말의 범위를 인간을 강렬하게 충동질하는, 관능적 쾌락을 일으키는 모든 물질적인 것, 육체적인 것으로 보기로 하겠다.
이렇게 되면 불가에서 말하는 색즉시공(色卽是空)과 비교를 하지 않을 수 없게 되는데, 이데올로기로서는 정반대지만 용법은 비슷해질 것이다. 색즉시공의 色은 기본적으로는 우리가 보고 듣고 냄새맡고 만질 수 있는 물질세계, 우리가 원하고 뒤쫓는 욕망의 차원에서의 분별이다.
색즉시공色卽是空이기 때문에 色의 모든 일에 무심하다면, 그것은 곧 인간이기를 관두는 일일 것이다. 어차피 그 色을 초탈하고 살 인물들은 거의 없겠지만, 그러한 '진리'를 구실로 色의 길로 정신없이 폭주하는 것을 자제하거나 박탈당한 色에 대한 억울함이 덜하도록 균형을 잡아주는 중용의 미덕을 지금까지의 종교는 많이 행해왔다고 본다.
그러나 지금의 세계에서는 그와는 좀 다른 흐름에 자기를 일치시키는 것이 좋을 것이다. 우리가 대하고 있는, 이 급속도로 확장변화하고 있는 관능적 세계는 色을 잡아누르거나 무시하는 식의 미봉책으로는 다잡을 수 있는 수준이 아니다.
나라고 하는 한정된 육체와 한정된 생활공간을 가진 개인을 넘어서는 경험들과 훨씬 넓은 폭의 삶을 지금의 우리들은 가질 수밖에 없다. 이렇게 되면, 욕망에 몸을 맡기면서 동시에 자기의 테두리를 유지하는 균형법을 익히는 것이 가장 좋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생겨나는 것이 스타일이다. 넘쳐나는 色의 물결에 익사하거나 추한 꼴이 되지 않으면서도 자기의 色을 즐기고, 개발하고 아름다운 것으로 가꾸면서 잘 살아가기 위해서는 스타일이 필요해진다.
한쪽으로는 한정없이 色을 부추기는 자본주의가 돌아가는데, 이에 대항할 것이라고는 '책임과 의무' 혹은 못먹고 못살았으나 산천은 깨끗하던 시절의 '자제하자'의 윤리밖에 없다면, 어느쪽도 붙기가 난감하다.
그렇다고 무작정 반항의 길을 갈 수도 없다. 사회 대다수가 따라가는 미감과 윤리와 다른 길을 가기 위해서는, 그 모양이 과히 나쁘지 않는, 스스로 부끄럽지 않은 모습을 갖추어야만 하는 것이다. --아말감
2. 색즉시공 남발 유감 ¶
색즉시공 공즉시색'(色卽是空 空卽是色)이라는 말에 일리는 있다는 건 인정하지만, 개인적으로 이 말을 좋아하지 않는다. 주로 이 문구를 누군가가 되뇌일 때, 일종의 유야무야식의 안일함이 느껴지는 예를 하도 많이 봐와서. 이 논리는 무엇인가에 진정으로 미쳐서 이 세상 끝까지, 또는 자기심연의 끝까지 가본사람의 입에서 나와야만 가치가 있다고본다. 성서의 전도서에 보면, (저자는 말년의 솔로몬왕이라고 한다...) 첫장부터 '헛되고 헛되다.모든 것이 헛되니...'라는 구절이 나오는데, 이 말은 솔로몬처럼 이 세상의 모든 영욕과 부귀와 허망함을 거친 사람의 입에서 나왔다는 것을 참고하지 않는다면, 위험할 수 있는것이다. 같은 이유로 함부로 노자를 인용하는 것도 Felix는 경계하는 편이다.
특정한 말은 그 말을 쓰는 사람이 누구인지, 어떻게 살아온 사람인지, 어떤 맥락에서 쓰였는지가 중요하다. Felix는 색즉시공식의 논리가 특정인이 특정인의 모든 가능성의 발화를 억압하는 맥락으로 쓰일까봐 경계한다.(이렇게 열올리는 데는 다 이유가 있다.
3. 색에 대한 단상 ¶
- 색은 보는 대상이라기보다는 느끼는 대상이다. 어떤 대상의 느낌을 말할 때 우리는 색의 메타포를 자주 사용한다. 세계 언어에서 이런 느낌에 대한 색깔의 메타포는 꽤 일반적이다. 우리가 어떤 사람을 보고 "밝다"라고 하거나, "푸르다"라고 할 때 이것은 당시 그 사람의 총체적 氣的 느낌을 말하는 것이다.
- 물리적인 의미에서 색은 빛의 파동일 뿐이다. 색은 어떤 물건에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특정 파장의 빛을 반사해 낼 어떤 특성이 그 물건에 있을 뿐이다. 그런 특정 파장의 빛이 안구의 레티나를 자극하는 것을 색으로 해석하는 것은 인간이다. 똑같은 파장의 빛을 보아도 곤충은 그것을 다른 색(그들이 흑백만 볼지라도)으로 볼 수 있다. 결국 관찰자와 상관없이 존재하는 색은 없다.
- 내가 항상 궁금해왔던 것 중 하나는 색맹들이 보는 세상은 어떤 모습일까 하는 것이다. 적녹색맹에겐 적색과 녹색이 같은 색으로 보인다고 한다. 둘 다 적색으로 보이는 걸까, 아님 둘 다 녹색으로 보이는 걸까, 그것도 아니라면 우리가 경험하지 못하는 독특한 색으로 보이는 걸까.
-회색으로 보인다고 합니다
- 불가에서 말하는 色이라는 것은 원래 산스크리트어로 rupa를 번역한 것이다. 이 rupa는 우리말로 하면 "형상"이고, 영어로는 "form"을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