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순이보여주는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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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순이 보여 주는 세상

우리는 영어를 공부한다. 그리고 그 공부는 대부분 한국어를 통해 이루어진다. 대부분의 한국 학생들이 처음 접하는 문장 중 하나일 "아이 앰 어 보이"(I am a boy)를 배우면서 동시에 "나는 소년입니다"라는 의미를 되새기고 외운다. 이러한 한국어와 영어간의 대응관계는 대학생이 되어서까지 연결되곤 한다. 학교에서 나름대로 영어를 잘하는 축에 끼인다고 생각하는 학생이 타임誌 연구모임에서 영어 한 줄을 읽어 내리고 이를 다시 눈동자를 이리 저리 굴려가며 한 단어 한 단어 축어적으로 번역하여, 자신이 발화한 어설픈 국어 문장을 듣고 그 자리의 많은 사람들이 -- 혹은 자기자신을 포함하여 -- 비로소 이해를 하는 장면은 그다지 드문 일이 아니다.

완전한 번역이 가능할까? 원론적인 이야기를 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아프리카오지에선 '간결하다'라는 개념 자체가 잘 쓰이지 않아서 무지무지 긴 多音節 단어를 이루고 있다고 가정해 보자. 우리는 단순하고 간결하며, 깔끔한 느낌을 주는 글을 보고 이런 말을 한다. "그 글 참 간결하군". 이 말을 그 아프리카 오지의 언어로 번역을 한다면 아마도, "그 글 참 어쩌구 저쩌구 ....... (약 30초 경과) 하군"이 될 것이다. 과연 앞서의 문장 그 자체가 주었던 짧고 깔끔하며 단순한 느낌을 후자도 똑같이 전달할 수 있을까? 여기서 우리는 다시금, 언어는 삶의 양식(Lebensform, 『Philosophical Investigations』)이라는 LudwigWittgenstein의 명언을 기억하지 않을 수 없다. 그 오지의 사람들과 그들의 삶 속에는 '간결하다'라는 개념자체가 그다지 간결하지 않은 것일지도 모른다. 혹시 그들에게는 '간결하다'라는 개념에 대응하는, 그러나 좀 이질적인 무슨 개념이 있을런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네들의 삶 속에 '간결하다'라는 개념 자체가 큰 의미를 차지하고 -- 혹은 큰 기능을 갖고 -- 있지 않는 한에 있어서 이의 번역이란 사실 무의미할 수 있다. 살고 있는 세상 자체가 다른 것이다.

언어는 틀이고 툴(tool)이다. 인식의 도구이며 종속이다 -- 우리는 사용하며 또 지배받는다. 우리는 언어로 세상을 구성하고 세계를 이해한다. 다른 언어를 사용하는 이상, 동일한 사태를 보고 다른 인식을 할 수밖에 없다<1>. 맥루한의 말에 빗대어 "언어는 메시지다"라고 말하고 싶다. 어떤 언어를 사용하느냐에 따라 그 메시지가 달라질 수 있다는 말이다. 필자는 이러한 예로써 語順이라는 언어의 한 측면에 대해 논의해 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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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언어학에서 언어가 우리 사고의 방식을 결정한다고 하는 것을 언어 결정론이라고 한다. 싸피어-훠프(Sapir-Whorf) 가설이 이 이론을 주장했고, 20세기 언어학에 많은 영향을 끼쳤지만 현재는 학계에서 그 자체로 받아들여지고 있지는 못하다. 싸피어와 훠프는 어떤 개념이 특정 언어에만 존재하는 것에서 출발하여 해당 언어 사용자의 사고의 고유함을 말했지만, 그러한 경우에도 충분히 성공적인 번역이 가능하다는 점이 이 가설에 대한 가장 큰 반격이다. 필자 역시 이 가설에서 한 걸음 물러선 입장이며, 우리의 삶과 그 양식이라는 보다 큰 그림을 봐야 한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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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뇌는 기본적으로 시간, 공간적으로 가까운 것들이 상호 깊은 관계를 맺고 있는 상황에 친숙하다. 그림이 그렇고, 말과 글이 그러하다. 이런 이유로, 모든 언어에서 정보의 관련성이 높은 것일수록 공간적, 시간적으로 인접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빨간 옷"이라는 정보를 전달하기 위해서 "빨갛다"는 개념을 전달하고 한참을 이야기하다가 10분쯤 후에 "옷"의 개념을 전달한다고 생각해 보라. 인간의 뇌는 그런 상황에 적합하도록 만들어져 있지 않다. 그림도 일종의 언어인데, 이 경우에도 '근접성'을 벗어나지 않는다(교통 표지판이나 화장실 표식 등을 생각해 보라). 가장 관계가 깊은 것들끼리 물리적으로 가깝게 배열을 하는 게 정보 전달에 효과가 높다. 따라서, 이 단어와 저 단어가 인접해 있다는 이야기는 이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의 사고 구조 속에서는 이 개념과 저 개념이 관련성이 높다라는 말로 이해할 수 있다.

언어라는 것은 시간 속에서만 존재하는 일차원적 소리의 흐름이다. 어느 누구도 단박에 한 문장을 전달하지 못한다. 언어는 흐름 속에서만 의미를 전달할 수 있다. 이것은 글이나 그림에도 적용될 수 있다. 아무리 속독법을 연마한 사람일지라도 한 페이지 분량을 한눈에 집어넣을 수는 없으며, 어떠한 그림의 감상에도 시선의 흐름이 있을 수밖에 없다. 따라서 사람의 사고 역시 어떤 흐름을 갖게 되는데, 이는 언어의 흐름과 비슷하게 同期化된다.

언어 유형학(typology)에서 가장 대표적인 지표로 사용하는 것이 문장 내에서 주어, 술어, 목적어의 순서이다. 물론 이때의 순서는 해당 언어에서 절대적으로 고정적인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좀더 기본적이고 보편적으로 사용되며, 별다른 강조의 의미 등을 전달하지 않는 -- 언어학에서는 무표적(unmarked)이라고 한다 -- 어순을 일컫는다<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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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한국어는 자유 어순 언어이다. 따라서 정해진 어순을 논한다는 것이 모순으로 들릴 수 있다. 하지만 여기서 논하는 어순은 무표적 어순을 말한다. "사랑해 당신을"이나 "당신을 사랑해", 혹은 "사과를 내가 좋아한다"나 "내가 사과를 좋아한다" 등이 모두 가능한 어순이지만 각각의 경우에서 후자(무표적)가 더 일반적이고 기본적인 어순이며, 전자(유표적)는 뭔가 부가적인 의미 혹은 강조의 효과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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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과 일본어가 주목술이고, 영어가 주술목에 해당한다. 재미있는 사실은 세계 언어의 99%가 주어가 목적어에 선행하는 어순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3>. 주어, 술어, 목적어로 만들 수 있는 모든 경우의 수가 6가지임을 고려할 때 99%라는 것은 놀라운 비율이다. 이는 곧 촘스키안(Chomskian)들의 보편문법(Universal Grammar)에 대한 증거로 사용되곤 하는데, 필자는 인간이라는 존재가 공통적으로 갖는 (생리적/문화적) 삶의 형태에서 나타나는 필연적 결과라고 본다. 물론, 우리가 눈이 세 개였고, 뇌 속에 뉴런이 아니고 뭔가 다른 게 있었다면 당연히 언어와 그 어순이 달랐을 것이다. 반대로, 어순이 다르다면 사고와 삶의 형태가 다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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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VSVOVSOVOSOVSOSV
44%35%19%2%0%0%
S는 주어, O는 목적어, V는 동사. 출처는 John R. Anderson, Cognitive Psychology and Its Implications. --쓴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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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Crystal, David, 『The Cambridge Encyclopedia of Language 2E』,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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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로 된 "David loves Jane."과 우리말의 "데이비드는 제인을 사랑한다."를 예로 들어보자. 양자는 논리적으로 동일한 명제라고 한다. 하지만 정말 인식되는 것이 동일하다고 할 수 있을까. 단순히 각 단어의 일대일 대응을 치환하여 적절히 나열해 놓은 것을 동일한 의미라고 말할 수 있을까. 의미의 의미에 대한 논의가 필요하겠지만 그냥 상식적인 차원에서 생각해 보자.

양자는 각 언어 사용자들의, 동일한 사태에 대한 사고의 접근법의 차이를 보여주고 있다. 영어를 사용하는 사람은 "David loves Jane"이라는 말을 하는 과정에서, 먼저 그 주체인 데이비드David를 보고(정신적인 초점을 말함), 다음 바로 사랑하다love라는 행위가 생각이 나는 것이다. 다시 말해, 데이비드와 가장 연관성이 높은 정보는 "사랑한다"는 개념이다. 이제, "사랑한다"는 개념과 관련성이 높고, 또, 사고의 흐름으로 봐서 적절히 와야할 것은 제인Jane이 된다. 반대로, 한국어로 말하는 사람의 사고에서는, 데이비드라는 행위의 주체가 먼저 오는 것은 같지만, 그 다음 사고의 흐름은 "제인"으로 간다. "데이비드는 제인을 사랑한다"라는 상황에서 "데이비드"와 관계성이 높으면서도 그 사람의 심적 포커스의 흐름을 잘 따르는 순서는 "제인"이 된다는 의미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사랑한다"는 개념이 따라온다.

이와 같이 하나의 표현은 그 표현을 한 사람이 해당 경험을 생각할 때의 사고 흐름을 웅변해 주고 있는 것이고, 우리는 그 흐름을 따라 사고를 해야 진정한 '수용'이 되는 것이다.

관계사절에서는 이런 차이가 더욱 극명히 드러난다. 영어에서는 명사가 앞에 오고 그 명사를 수식해주는 관계사절이 뒤에 따라오는 반면, 국어에선 정반대가 된다. 수식절이 앞에 오고 명사가 뒤에 온다. 재미있게도 주술목의 언어에서는 수식절이 피수식어의 뒤에 오는 것(postmodification)이 일반적이고, 주목술에서는 피수식어의 앞(premodification)에 온다<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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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Shopen, Timothy, 『Language Typology and Syntactic Description Ⅱ』, 1985, p. 144, "Further in verb-medial languages of the SVO sort, postnominal RC&Relative Clause&s are the overwhelming norm and are to our knowledge always the dominant or most productive form of RC." "Finally it is only in verb-final languages that prenominal RCs are the only or most productive form. This is so for example in Japanese, Korean, and Tibet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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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의 문장을 보자.

"I/was hit/on the head/by the ball/which was thrown/by David."

다음은 위의 문장을 의미 단위별로 번역하되 원래의 순서를 유지한 경우이다.

"나는/맞았다/머리를/공에/던져진/데이비드에 의해" (←"나는/맞았다/머리에/공에의해/그것은던져진것이었다/데이비드에의해"- ^^;;)

우리는 보통 위 문장의 해석을 주문 받는 경우, 눈동자를 문두의 I에서 맨끝의 David로 옮겨가고 다시 문장을 거슬러 올라오면서 한국어 문장을 만들어 낸다. 그런 문장은,

"나는 데이비드에 의해 던져진 공에 머리를 맞았다"

정도가 될 것이다.

영어 문장과 국어 문장 둘은 모두 동일한 사태를 서술한다. 그러면 결과적으로 두 문장은 그 의미에 있어 일치하여야 한다. 위의 두 문장이 서로 같은 의미라는 점에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간과하는 중요한 차이점이 있다. 그것은 필자가 말하고 있는 '어순'이라는 것이다.

모국어로서 영어를 하는 사람이라면, 위의 영어 문장을 읽으면서 먼저 그림 속에 내가 등장을 하고, 그 다음 하여간 "얻어 맞는다"는 생각이 들것이다. 다음엔, 눈길이 나의 머리 쪽으로 옮아가고, 그 다음 공이 떠오를 것이다. 그리고는 마지막으로 '데이비드가 던지는 행동'이 그려진다.

하지만 같은 사태를 기술하고 있는 국어 문장에서는 그 순서가(주어를 제외하곤) 정반대가 된다. 이 문장을, 눈길이 전후로 뛰어 다니면서 한국어의 어순에 맞추어 해석하려고 노력을 하는 사람은 영어를 한국어식으로 이해하려고 하는 셈이다.

촘스키의 언어학에서는 이런 차이를 "핵(head)의 위치"로 설명을 한다. 위 두 문장 모두 핵은 "맞다"라는 동사이고 "데이비드가 던진 공에 의해 머리를"이라는 구절은 맞다라는 동사를 좀 더 자세히 부연 설명하는 것(보충어)이다. 공이 포함된 명사절에서 핵은 "공"인데, "데이비드가 던진"이라는 절이 "공"을 부연 설명하고 있다. 이 경우 보다시피 영어에선 핵이 앞에 오고, 국어에선 뒤에 온다. 이를 일러 핵선행(head-initial) 언어, 혹은 핵말(head-final) 언어라고 부른다.

영어는 핵선행 언어이기에 다음과 같은 문장은 -- 비록 문법적으로는 문제가 없다고 할지라도 -- 어색하게 느껴질 수 있다.

That that that John is honest is obvious is surprising is widely known.

하지만 위 문장을 다음과 같이 고치면 상황은 달라진다.

It is widely known that it is surprising that it is obvious that John is honest.

한국어로 된 자연스러운 문장은 어떤가? "존이 정직하다는 사실이 명백하다는 사실이 놀랍다는 사실은 널리 알려져 있다" (뭐 그다지 자연스럽다고 할만한 건 못 되지만)

마지막 예로 국어 사전과 영어 사전에서 "언어"라는 단어에 대한 정의를 비교해 보자.

언어 : 사람의 생각이나 느낌을 소리나 글자로 나타낸 것, 또는 나타내기 위하여 사용되는 말이나 글자 따위의 수단<5>

language : the system of sounds and words used by humans to express their thoughts and feelings<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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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한+ 국어사전, 성안당, 1998

6. Oxford Advanced Learner's Dictionary 5E, Oxford, 19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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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순이 전반적으로 반대라는 느낌이 드는가? "수단"이라는 말이 국어에선 맨 뒤에 갔지만, 영어에서는 이에 상응하는 system이라는 단어가 앞머리에 왔다.

영어에서는 가장 큰 범위의 정보가 앞머리에 오고 이를 부연하는 자세하고 구체적인 정보는 끝으로 가며<7>, 국어에선 그 반대로 가장 큰 범위의 핵심 정보가 뒤쪽에 놓인다. 이런 이유 때문인지는 몰라도, 우리나라 말은 끝까지 들어보지 않으면 알 수 없다는 이야기를 하고, 주소의 순서나 이력서의 학교 순서가 영어와 반대로 가며, 주제문의 위치도 국어에선 단락 맨 뒤에 오는 예가 많지만, 영어에선 맨 앞에 오는 경우가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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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영어에선 이를 엔드-포커스end-focus 법칙이라고 한다. 문장에서 긴 구문은 뒤로 보내고 주어를 짧게 하려는 경향을 말한다. 일반적으로, 긴 표현은 좀 더 구체적이고 현 대화 시점에서 더 중요한 정보인 경우가 많다. Pass me the salt라는 문장에선 salt가 문미에 있는데 이 때 가장 중요한 정보는 salt가 된다. 하지만, Pass the salt to me는 me가 더 중요한 정보가 되며, 이 문장은 "다른 사람이 아니고 바로 나한테 소금을 달라"는 의미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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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을 할 때에 "어제 종로에서 만난 남자와 비슷한 옷을 입은 친구의 동생이..."와 같은 문장과 "The brother of ..."로 나가는 문장은 청자/화자의 두 표현에 대한 인식구조의 차이를 반영한다. 영어에선 한 문장 안에서 말하려는 정보의 핵심이라고 생각되는 것을 먼저 때리고 그것의 보충 설명을 해 나간다. 하지만 국어에선 그 핵심이 맨 뒤로 오는 것이 일반적이다.

근래에 흥미로운 연구 결과가 발표되었다. 미시건 대학의 사회 심리학자인 리처드 니스베트(Richard Nisbett) 교수는 다른 문화적 배경을 가진 학생들의 사고 습관의 차이에 대해 연구를 했다<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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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http]How Culture Molds Habits of Thoughts, from The New York Times, August 8,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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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결과에 따르면 미국과 일본 학생들에게 큰 고기 하나가 작은 고기들 사이에서 헤엄치는 수중 사진을 보여주자, 일본 학생은 주로 그 장면과 배경을 먼저 서술했다는 것이다. 예컨대, "연못이나 호수가 있는데...", "바닥은 바위 투성인데...", "물이 초록색이고..." 등으로 설명을 시작했다. 이와 반대로, 미국 학생은 곧바로 가장 큰 물고기에 대해 설명하기 시작했다. 전체로 봐서 일본 학생들은 배경에 대해 미국 학생보다 70%나 더 많은 진술을 했고, 그 외에도 움직이는 개체와 그렇지 않은 것의 관계에 대해서는 두 배나 더 많이 언급을 했다. 중요한 것은 아까의 큰 고기를 새로운 배경과 함께 보여준 경우 일본 학생들은 그 물고기가 동일한 것이라는 사실을 인식하는데 훨씬 더 많은 어려움을 느꼈다는 것이다.

니스베트 교수는 이 외에도 여러 가지 실험을 중국, 일본, 한국 등지의 동양권 학생과 미국 학생에 대해 수행했고, 결론적으로 동양의 학생들은 좀 더 맥락과 관계에 주의를 주는 전체적 사고(holistic reasoning)를 하고, 서양의 학생들은 객체(object)를 맥락에서 분리하려고 하는 분석적 사고(analytic reasoning)의 경향이 있다고 말했다.

필자는 여기서, 어순이 이런 문화적/사고의 차이를 만들게 했다고도, 문화적/사고의 차이가 어순을 결정했다고도 말하고 싶지 않다. 어찌 보면 닭과 달걀의 문제 같은데, 둘은 상관 관계가 있다는 식의 약간은 조심스러운 생각을 해본다. 우리 삶의 양식의 유사성에서 우리가 공유하는 언어가 생기고 이 언어는 다시 여타의 복잡한 요소와 결부되어 우리 삶의 양식을 바꾸고 이는 또다시 언어로 되먹임 되고 있으며 이 과정은 삶이라는 전체 그림 안에서 그려지고 있는 것이 아닐까<9>. 또, 그렇다면 결국 우리의 외국어 공부라는 것도 삶의 양식이라는 몸의 공부에서 이뤄지는 것이라고 해야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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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윈스턴 처칠의 "우리가 건물을 형성하면 건물이 우리를 형성한다."(We shape our buildings, and afterwards our buildings shape us)라는 말은 비록 현실의 완전한 싸이클을 언급하진 않았지만, 이와 관련하여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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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창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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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창준님 글 읽고 비누는 이것저것 생각 중. 정보의 근접성에 있어 어순같은 거리적 인접성에 한한 분석 말고 위상학적 이웃관계에 근거한 설명이 어쩌면 우리의 사유체계를 더 잘 보여 줄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얼핏. 개념의 연쇄작용이 화자와 청자간에 같은 방향은 아닐 것이기 때문(위의 얘기는 발화된 언표에 해당되지 언표를 발화하기까지의 사유를 설명하기에 부족하므로). 아직은 잘 모르겠음. 역시 언어학은 흥미진진함. 고민조차 즐겁고 재미남. (p.s. 유월씨 추천하신 언어학책 외에 윗글의 주제에 관련된 읽을 만한 책 있으면 소개를 부탁드려도 될까요?)

위의 얘기는 발화된 언표에 해당되지 언표를 발화하기까지의 사유를 설명하기에 부족하므로

제 주장은 핵심은 발화된 언표는 사유와 동조화 되어가고(개인적인 측면이 아니고 집단적,역사적인 면), 또 사유는 이런 발화된 언표를 따라갈 수 있다는 겁니다. "위상학적 이웃관계"(뭔지는 잘 모르겠으나, 문법적 구조나 의미론 등의 비교적 심층을 말씀하시는 것이라 가정한다면)를 말하셨는데, 이것 역시 어순의 공간/시간적 인접성에 의해 영향받고, 또 반대로 위상학적 이웃관계는 공간/시간적 인접성을 규정하려고 한다는 논지이지요. --김창준

위상학적 이웃관계(...) 역시 어순의 공간/시간적 인접성에 의해 영향(제한)받고, 또 반대로 위상학적 이웃관계는 공간/시간적 인접성을 규정하려고 한다는 논지

이게 핵심인 듯 싶습니다. 저 역시 그런 생각을 전제하고 드린 얘기였는데 그만 모호한 표현으로 다른 해석이 되고 말았군요. '위상학적 이웃관계'란 개념과 개념을 잇는 노드로 바꿔 말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핵심 개념(촘스키 식으로는 '핵')에 그와 가장 밀접한 의미의 방계 개념이 순차적으로 파생되는 지형. 그 각각을 잇는 연결 고리가 바로 노드겠지요. 여기서의 이웃관계는 당연히 개념간의 관련성을 쫓게 되구요(이렇게 된다면 어순과 일치할 수도 그렇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따라서 화자에만 한정된 얘기가 될 수도 있고 언표보다는 사고 자체에 한한 개념이 될 수도 있겠습니다.
기본적으로 두신 전제 "(무표적)어순"이 이론 언어학에서는 당연한 것일 수 있겠지만, 화용론으로 넘어가면 곧이 통용되기 어려워 보이기 때문에 의문을 품기 시작한 것입니다. 거리적 인접성만으로는 부족하다고 생각한 것은 그때문이지요. (참고로 저는 사회언어학Sociolinguistics의 입장에 서있습니다.) --비누

언어라는 것은 시간 속에서만 존재하는 일차원적 소리의 흐름이다.
사람의 사고 역시 어떤 흐름을 갖게 되는데, 이는 언어의 흐름과 비슷하게 同期化된다.

화자의 입장에서 전달하려고 하는 의미를 'XXX'라고 할 때, 'XXX'의 '형태'는 결코 언어의 형태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XXX'가 언어라는 '체'에 걸러지면서 언어라는 (어순을 포함하는)형태를 이루게 되고 청자에게 전달이 되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화자의 입장에서는 'XXX'가 완성이 되고 언어가 형성이 되는 반면에 청자의 입장에서는 'X', 'X', 'X'를 시간의 흐름대로 전달 받으면서 원래의 'XXX'를 구성하려고 노력하게 됩니다. 즉, 제 생각은 인간에게 있어서 '발화하기까지의 사유'(사유의 깊이나 너비를 말하는 것이 아닌 형태적인 것을 말합니다.)는 동등하나 화자와 청자의 입장이 다르다는 생각입니다. 이는 청자의 입장에서는 사고의 흐름이 초기에는 언어의 흐름에 종속적이 되지만 결국에는 언어의 흐름과는 상관이 없는 'XXx'(여기서 처음의 'XXX'와 달라졌다.)를 형성한다는 생각입니다. (음.. 제가 여기서 말하려고 했던 것은 '@$@%$#%#^%@#%@^'였는데 제대로 표현이 됐는지 모르겠군요.. :) ) --picxenk

저는 우리 사고의 언어와 일상적 언어가 "동일"(identical)하다거나 "동등"(equivalent)하다는 식의 무리있는 주장을 하는 것이 아님에 유의해 주십시오(사피어훠프 가설을 저 스스로도 액면가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는다고 글 중간에 썼지요 -- 요즘 이걸 믿는 사람들은 언어적 지식이 전무한, 혹은 아마추어리즘의 일반인이 대부분이죠). 한말씀만 드리죠. 한 사회에서 그 사람의 사고에서 개념적 배열과 발화되었을 때의 개념적 배열(청자가 일차적으로 접하는 것)에 차이가 크면 클 수록 전체적으로 의사소통에 드는 비용은 높습니다. 이 비용을 낮추는 쪽으로의 힘이 작용한다 이거지요. (제가 쓴 언어학책추천 중에 개론서적 하나 정도는 읽어보시길 권합니다) --김창준

의사소통에 있어서 '언어'와 '글'이 가장 중요하고도 효율적인 도구라지만 '사고의 배열'이 점점 더 형이상학적으로 될수록(사고를 할 때 위상학적 관계에 비해 글이나 언어로 표현될 때의 위상학적 관계가 서로 멀어질수록) 비용은 점점 더 커지고 오히려 비효율적 도구로 전락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고보면 더 좋은 '도구'는 없을까하는 생각도 해봅니다. --picxenk

StarCraft를 보아도, 두 가지 어순(?)이 가능합니다.
  1. 유니트(주어)를 선택한 뒤에 마우스 오른쪽 버튼으로 대상(목적어)을 클릭하면 자동으로 행동(동사)를 결정합니다.
  2. 유니트(주어)를 선택한 뒤에 행동(동사)를 선택하여 대상(목적어)을 결정합니다.

WebTabulaRasa에서 --

...세계에 존재하는 5000여개의 언어 중에 문법적 주어가 목적어에 선행하는 언어(SVO, SOV, VSO)가 99%에 달합니다...
생뚱맞은 소리지만, 1%의 언어를 알고 싶네요 :) . --아무개
Hixkaryana, Apalai, Bacairi, Makusi, Jamamadi, Apurina 등. --김창준
저는 주어가 목적어에 선행하지 않는다면 그것이 주어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국어에는 없지만 수동태도 있지 않습니까? -- PuzzletChung
그것은 주어의 정의를 뭐로 하느냐에 따라 얼마든지 바뀔 수 있는 일이겠지요. --김창준
S, O, V의 여섯 가지 조합이 모두 존재합니다. http://gshin.chonnam.ac.kr/class/syntax/02week.htm -- Puzzlist
SOV : Korean, Turkish, Japanese, Persian, Eskimo
SVO : English,, French, Swahili, Hausa, Thai
VSO : Tagalog, Irish, (Classical) Arabic, (Biblical) Hebrew
VOS : Cakchiguel (9Guatemala), Huave (Oaxaca, Mexico)
OVS : Apalai (Brazil), Barasano (Colombia), Panare (Venezuela)
OSV : Apurina and Xavante (Brazil)
대표적인 것들만 모와보았습니다. --얀종이

결론은 어감이 주는 느낌을 그대로 받아들이는게 중요하다는 말이죠? --GreenT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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