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디오파일의몇가지유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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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디오파일의 몇 가지 유형

윤광준씨의 "소리의 황홀"이라는 책의 한 챕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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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 더 좋은 음을 내는 기기가 나왔거나, 있다는 소리가 들리면 만사 제쳐놓고 그것을 탐구한다. 숫자에 어두워도 메뉴얼에 있는 제원 수치는 정확하게 기억하고, 가문의 역사는 몰라도 그 물건을 만든 사람의 이력이나 활약상은 너무도 소상하게 꿰뚫고 있다.

국내에 자료가 없더라도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주변 사람에게 편지 한번 해본 적 없지만, 밤새 두꺼운 사전을 뒤져가며 어려운 영문편지를 쓰는 건 보통이다. 다음날 아침 일찍 우체국에 가 국제 우편 창구에 줄 서는 수고를 전혀 귀찮아하지 않는다. 오디오 때문에 인터넷에 통달했다는 사람을 수십명 넘게 알고 있다. 하지만 이들이 학교 다닐 때 이렇게 열심히 공부했다는 얘기는 들어보지 못했다.

국내 오디오 잡지는 이미 시시해져서 잘 읽지 않고, 비싼 값을 주고 미국이나 일본 오디오 잡지를 정기구독한다. 용산, 세운상가, 서초동, 광장동에 있는 전자상가를 순례하는 것이 일상의 취미로 자리잡고, 몇몇 오디오 가게 주인들과는 술자리를 같이 할 만큼 가깝게 지낸다. 오랜 관계를 유지하면서 호형호제하는 경우도 있다.

좋은 CD플레이어가 나왔다는 오디오숍 김 사장님의 전화를 받자, 갑자기 마음이 설레기 시작한다. 일본에서는 얼마인데 특별히 싸게 해주겠다는 친절한 제의다. 순간 머릿속은 환율계산으로 바빠지고 갑자기 횡재한 기분이 든다. 앞뒤 안 가리고 덜컥 사겠노라고 약속을 한다. 평소 꿈에 그리던 환상의 명기가 내 손에 들어온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뛰기 시작한다.

잠시 후 정신을 차려보니 돈이 걱정되기 시작한다. 예지난 번에 산 스피커 할부금도 아직 남아 있다. 예금 잔고를 확인하고, 주식 시세를 다시 뒤적여본다. 덜컥 살 수 있는 금액은 아니다. 아내의 눈치가 심상치 않다. 전에 산 앰프는 선배로부터 싸게 구입한 것이고, 스피커는 가격을 1/10로 속여 안심시켰지만 뭔가 알고 있는 눈치다.

이리 저리 머리를 써봐도 별다른 대책이 없다. 때마침 스치는 생각 하나, 보험회사에 다니는 친구의 강압에 못 이겨 아내 몰래 들어놓은 교육 보험이 있다. 보험료를 납입하는 3년 동안 사연도 많았다. 과감하게 이번 기회에 해지하기로 결심한다. 보험 회사에 들러 확인해보니 생각보다 꽤 많은 금액이다.

오디오숍으로 향하는 발걸음이 착찹하다. 아니 즐겁다. 조금 후면 성공한 뉴욕의 여피족들이 사용한다는 '와디아'CD 플레이어가 내 것이 된다. 영화에서 보았던, 마천루의 야경이 창 밖에 비치는 푸른 색조의 세련된 거실에 놓여 있던 바로 그 기종이다. 감자기 내가 그들과 같은 반열에 올라선 기분이 든다.

오디오숍에서 운반해온 와디아는 천상의 음을 들려준다. 바로 어제 들었던 헤레베헤 지휘의 베토벤의 장엄미사는 더욱 장중하고 깊이 있는 울림으로 바뀌었다. 바이올린의 활이 움직이는 것이 보이는 듯했고, 가수의 목소리는 영혼을 담아 나직하고 침착한 표정으로 다가왔다. 평소 듣지 않던 재즈곡에선 미처 몰랐던 현장의 감흥과 연주의 열기가 새삼 대단하다는 걸 체험했다. "이보다 더 좋은 시스템이 과연 필요한가?"라고 스스로 반문해 보기도 했다.

오디오에 꽤 많은 시간과 노력을 들였지만 CD 플레이어 하나를 바꾸어서 이렇게 달라진다는 걸 경험한 날은 정말 행복하다. 이제 오디오를 바꾸는 일은 이것으로 끝이다. 이젠 다시 새로운 기기를 사지 않겠다는 비장한 결심까지 한다. 처음 사흘 동안은 집중하고 또 집중했다.

바이올린의 음색과 질감은 너무도 투명하고 유연해져서 연주자와 나 사이엔 공기마저 사라져버린 듯하다. 손에 잡힐 듯한 생생한 울림은 연주자의 숨소리마저 들리는 듯하고 활에서 연기처럼 뿜어져 나오는 송진의 입자까지 보이는 것 같다. 오페라 아리아를 부르는 레나타 테발디는 정확하게 스피커 가운데에 서 있고, 낭랑하게 떠오르는 그녀의 맑은 목소리는 연주 공간을 넘어 바로 앞에서 나는 듯한 착각마저 들었다. 이 작은 변화는 지금까지 들었던 음악을 새롭게 느끼게 했다. 음악을 듣는다는 즐거움과 새로운 오디오를 장만했다는 행복감이 뿌듯하게 밀려왔다.

새 CD플레이어의 활약이 커질수록 점차 앰프와 스피커가 그 수준이 못 미친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최신 오디오 잡지에 소개된 미국제 앰프 "제프 롤랜드"가 눈에 띈다. 현대 건축물 같은 날렵한 비례의 은색 알루미늄 샤시는 기존 어느 앰프보다 세련되어 보였다. 어느 유명 평론가는 이전 제품은 이를 위한 예고편에 불과하다고 쓰고 있다. 인터넷을 찾아보아도 역시 마찬가지 내용이다. 이 앰프라면 지금 상태보다 더욱 훌륭한 음을 당장 들려줄 것 같다.

이런 생각이 들자, 지금 갖고 있는 앰프의 문제점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CD플레이어의 성능을 뒷받침해줄 고음역 해상력이 떨어져 재즈 연주에서 중요한 스네어 드럼의 음이 선배의 시스템에 비해 덜 감각적이다. 찰찰하는 소리가 날이 서지 않고 주변 음에 묻혀 버리는 것 같다. 베를리오즈의 "환상교향곡" 4악장에 나오는 큰북의 타격 음이 가슴 떨리기는커녕 귓전을 스치는 정도의 위력밖에 없다. 생상의 3변 교향곡 "오르간"은 파이프 오르간의 장중하고도 넘실거리는 듯한 음의 파도가 강어귀의 물결만큼도 느껴지질 않는다.

잡지 기사에서 본 앰프의 이전 모델을 사용하고 있는 선배의 예찬閨沮 곁들이면 지금의 모든 문제는 앰프 때문이라는 결론이 나온다. 오랜 정륜과 까다로운 감식안을 가진 선배의 말이니 그의 말은 100% 신뢰할 만하다.

이번엔 앰프를 바꾸고 싶어진다. 그 발단은 새로 산 와디아 때문에 생긴 것이다. 지금까지 별 불만없이 사용했던 시스템이 학습 지진아처럼 느껴지기 시작한다. 어렵게 한 CD플레이어의 감동이 채 가시기 전에 또 다른 불만이 계속 생겨나고 업그레이드 욕구는 나날이 커져만 간다. 지금보다 더 좋은 음악을 들을 수 있다면 기회를 보아 주식을 처분할 계획이다.

이런 경우도 있다. 한번 산 오디오는 절대 바꾸지 않는다. 이런 유형의 사람들은 대단히 무딘 감각의 소유자이거나 진정한 음악 애호가일 확률이 높다. 오디오란 것이 소리만 나면 (되지) 그 이상 무엇이 필요하냐고 생각하는 사람들이다. 기계는 신경 안 쓰고 오로지 음악만을 즐기는, 수천장의 CD를 가진 사람들도 간혹 있다.

나의 선배인 재즈 평론가 김진묵 같은 경우가 여기에 해당된다. 그는 차 안에 있는 카세트 이상의 오디오가 왜 필요하냐고 내게 묻곤 한다. 음악을 들을려면 실제 연주의 감동을 느끼는 것이 최고란 지론이다. 음악회 정보를 수집하고 작곡자.연주자와 곡목에 대한 이모저모를 살펴본 뒤 공연장에 가서, 무대의 공기를 느끼고 연주자의 모습을 직접 보는 것까지 포함한 제반 행위가 음악 감상의 즐거움이란 것이다. 백번의 오디오 감상보다 한번의 연주회가 주는 감동이 훨씬 크다고 강조한다. 오디오란 마치 통조림과 같아서 신선도가 떨어지는 재료의 맛을 즐기는 것과 같다나. 가지고 있는 수많은 레코드와 CD는 자료로서의 중요성 때문에 수집한다는 거다. 그는 15년 전에 만났을 때 본 낡은 오디오 시스템을 아직도 사용하고 있다. 아무런 불만 없이...

이른바 레코드 콜렉터들이 일반적으로이런 유형에 해당된다. 시시콜콜한 연주가의 디스코그라피를 줄줄 외고 명연, 명반을 귀신처럼 골라내지만 정작 그 연주의 진가를 확인하는 과정엔 별 관심이 없다. 이미 통조림이 된 음악을 잘 요리해서 더 맛있게 먹을려는 노력은 절대로 하지 않는다.

'세상은 넓고 모을 디스크는 많다'라는 확신에 찬 이들은 회현 지하상가나 황학동 중고 레코드점에 가면 만날 수 있다. 참고로 이들은 세월히 흐르면 전문 연구가나 학자로 되는 경우가 많다. 정진의 결과로 '붓을 가리지 않는 명필'의 경지에 다다른 고수들인 것이다. 오디오와 같은 잡다한 관심을 과감히 끊고, 일로매진하여 자신이 추구하는 목표를 가시적 성과로 만든... 이들은 대단한 사람들이다. 무심의 경지에 이른 달인이거나..

오디오에 빠져 있기 않기에 아내에게 구박받지 않고, 기기를 사느라 적금 해약한 뭉칫돈을 쓰지 않으므로 경제적으로 덜 궁핍한 편이다. 그들의 집에 가보면 사방 벽에 가득 꽂힌 레코드와 CD로 발 디딜 틈이 없다. 그 많은 레코드를 언제 듣느냐고 물어보지만 한번도 시원한 대답을 블어본 적이 없다. 레코드 래크의 빈틈을 보면 거기에 채워 넣을 새로운 레퍼토리를 찾느라 여념이 없다. 레코드 컬렉터들은 빈틈에 무엇인가 체워 넣는 테트리스 게임을 잘 하는 공통점이 있다. 그들은 레코드를 모으면서 그 안에 담겨 있는 내용 확인에는 이상하게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오디오 애호가와 음악 애호가는 공통된 점도 있지만 다른 점도 있다. 이 둘 사이의 균형 감각이 더욱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지만 취향의 문제이므로 더 이상 얘기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어느 경우가 되든 음악을 듣기 위해 오디오와 레코드를 산다는 건 분명하다.

이들 유형과 전혀 관계없는 부류 가운데 가끔 장식용으로 오디오를 구입하느 사람들이 있다. 이들에겐 가급적 덩치가 크고, 번쩍번쩍하는 금색이 칠해진 오디오라면 더욱 환영받는다. 무엇보다 최신형이라야 하고, 첫눈에 질릴 만큼 거대한 크기나 장정 서너 사람이 매달려 겨우 들 수 있는 육중한 물건이면 적격이다. 이들에게 오디오는 좋은 것과 나쁜 것만 존재한다. 최신 오디오의 수많은 기종을 줄줄 외며 이건 어떻고 저건 어떻다 얘기하지만 자세한 내용을 아는 것은 별로 없다. 주변 인사가 새로운 기기를 샀다는 얘기를 들으면 제일 처음 묻는 것이 가격이다. 놓을 공간이 있다면 한 세트 더 들여놓고 싶다고도 생각한다. 고급 오디오 숍 주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사람들이다.

이런 부류에는 자수성가한 사업가나 연륜이 쌓인 재벌가들 말고, 땅 투기로 갑자기 돈을 벌었거나 성공한 아버지의 자식들이 많다. 적어도 주택을 소유한 사람들이므로 큰 거실을 채우기 위한 용도로 오디오는 매우 유용하다. 최고급 외제 오디오는 자기의 신분과 재력을 은근히 과시할 좋은 물건이다. 천박한 문화적 식견과 허영을 충족시키기에 음악과 오디오만큼 좋은 것은 없다. 벽장에 들어찬 레코드와 CD는 대개 전집류가 주류를 이루고 뜯지 않은 새 레코드가 즐비하다. 한글 번역이 되어 있지 않은 원판을 듣는 경우란 드물다. 협주곡이란 뜻의 "콘첼토"와 연주회의 "콘서트"를 같은 의미로 읽기 때문에 이들의 집에 가서 음악을 들려 달라고 하면 엉뚱한 곡을 듣게 된다. 직접 고르라고 하는 수도 있고, 자신이 좋아하는 곡을 물어보면 매우 싫어한다.

이렇게 거창한 오디오는 술 마실때와 외부 사람들을 초대했을때 힘을 발휘한다. 이때 듣는 곡은 오디오의 성능을 과시하기 위한 음악과 대중가요다. 또 한 가지, 바흐, 베토벤, 모차트르 이외의 음악가들은 낯설기 때문에 전혀 모르는 외국인의 이름이나 마찬가지다. 이들과 잘 사귀어 지적 허영을 채워주면 가끔 좋은 술을 얻어마실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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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서점에서 쭉 넘겨가며 보았는데 꽤 찔리는 부분이 많았다.. ^^ --AEBass

흠, 많은 참고가 되었습니다. 저는 주로 방송에서 얼핏 괜찮은 곡을 들으면 필사적으로 그 음반을 구해서 듣는 싸구려 잡다형입니다. 요즘들어 Jazz를 조금 즐기게되면서 부쩍 오디오기기에 관심이 가더군요. 업그레이드와 가격 사이에서 고민하고 있었는데...^^ 하지만 어떻게 해야 할지 더 모르겠어요~ 잉잉~ --zetapai
개인적으로 찾는 오디오숍이 몇 군데 있습니다.(뭐 거래는 한 곳에서만 하지만요..).. 고민 끝나면 도와드릴 수 있을 거 같네요.. ^^ -- ChangAya

위의 글을 읽다보니 장정일이 "아담이 눈 뜰 때"에 썼던 '뮤직 러버'와 '일렉트로닉 리스너'의 구분이 생각나는군요. --Khakii
저는 그 '뮤직 러버'와 '일렉트로닉 리스너' - 오디오는 전자 기기라기 보다는 전기 기기에 가깝습니다만 - 사이에 우열이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음악을 듣는 것은 고상하고 지적인 취미이며, 소리를 듣는 것은 단지 허영일 뿐이라는 뉘앙스를 풍기는 그러한 구분도 마음에 들지 않고요. 어차피 취미의 영역입니다. 공자 가로되 "마음을 움직이는 소리를 '음악'이라 하고, 그렇지 못한 소리를 단지 '소리'라 이른다"라 하였습니다. 맑고 깨끗한 소리가 들려주는 음악에 마음이 움직이{感動}고, 심신의 안정과 평화가 온다면 그 또한 훌륭한 취미의 영역이 아닐런지요. --ChatMate
예, 저도 그 구분은 지나치게 도식적이라고 생각합니다. 일종의 방편적 구분으로 받아들이면 되지 않을까 합니다만.--Khakii

gracky생각에 진지한 음악 애호가로서의 오디오파일의 좋은오디오에대한 필요의 정당화로서 최고의 명문은 후 노부유키씨가 스테레오사운드 102호에 쓴 '좋은 음악은 좋은 음으로 듣는다' 라는 컬럼이다. 좋은오디오는 진지하게 음악을 듣기 위한 필수품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그 컬럼을 읽고 공감과 감동을 느끼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 컬럼의 백미라고 생각되는 부분을 인용하면 '음을 경시하는 청취자는 있어도 음을 경시하는 연주가는 없다. 만일 음악가가 음에 자신을 의탁하지 않는다면, 화가는 색깔을 가리지 않을 것이다. 음악을 듣는 이가 어정쩡한 음으로 음악을 듣는다는 것은, 그것은 빨간색 조명 아래서 그림을 보는 것과 같은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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