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말 변하지 않을 그런 진리라는것이 존재할까에 대해 토론하고 싶습니다. 저 혼자 고민하기보다 여러분들의 의견을 듣고 싶습니다.
- 세상에 변하지 않는 것은 없다. <
변하지 않는 것... <진리.
* 변치않는 진리 -> 모든 진리는 변한다.... -> 그럼 진리는?? 변치않는것은...
-> 변치않는 것은 모든 진리의 변화 중심에서 변화를 인식하는 나라는 존재다..
-> 곧...진리는 모든 진리의 중심에 서 있는 나라는 존재 찾는 행위??
-> 진리= 깨달음? = 道 --> 결국 내가 도이고 깨달음이며 진리다...
-> 문자로 나타내기 힘든 명제에 대한 나의 분석...논의...말장난 일지도.. --아무개
진리는 있다고 생각합니다. 내가 이 우주의 한 행성에서 살고 있다는 것이 사실인 이상. 하지만 인간의 지각능력으로 그것을 인식한다는 것이 가능할 것인가가 의문입니다. 인간은 정확한 지각능력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아주 왜곡해서 세상을 바라보죠. 그런 능력이 원시시대 인간의 생존을 높였을 가능성이 큽니다. 대표적으로 경계선을 실제보다 더 뚜렷하게 지각합니다. 누런 풀밭에 사자가 있는 것을 대뜸 구별해내죠. 하지만, 그로 인해 많은 착시현상이 일어나게 됩니다. 또한 보인다고 모든 것을 인식하는 것은 아닙니다. 자기에게 필요한 정보만 인식됩니다. 어떤 것은 있었는지조차 기억을 못하죠. 이런 우리가 과연 진리를 인식할 수 있을까요? 어쩜 우리가 살고 있다는 것도 기억프로그램에 의한 장난???--석-> 곧...진리는 모든 진리의 중심에 서 있는 나라는 존재 찾는 행위??
-> 진리= 깨달음? = 道 --> 결국 내가 도이고 깨달음이며 진리다...
-> 문자로 나타내기 힘든 명제에 대한 나의 분석...논의...말장난 일지도.. --아무개
진리(眞理)라는 말은 상당히 무거운 어감을 지니고 있습니다. 너무 "진지"하게 느껴지는 단어죠. 예를 들어, 그것을 "참된 이치"라고 번역하거나 혹은 "truth"라는 단어를 써서 표현해보면 "진리"라는 단어와 꽤 차이가 있다는 걸 느끼게 되거든요. "진리"라는 단어에 얹혀있는 지나친 무게를 살짝 들어내어 생각할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진리"라는 단어에는 지나친 형이상학적 선입견이 부여되어있는 것 같습니다. 우리가 현재 집합적으로 공유하고있는 "앎" 중에서 꽤 그럴듯한 (혹은 의심할 여지가 거의 없는) 근거와 논리를 통해 받아들이는 "참된 것"들은 꽤 많죠. 그것이 영원한 것인지의 여부는 아무도 단언할 수 없지만, 현재로서는 그것이 뒤집히거나 전복될 가능성이 적다는 정도만으로 충분하지 않을까요? 진리의 실용주의적 정의. 아무개
사람들이 진리를 찾는 이유는 '불안'하기 때문이 아닐까요? 실용주의적 접근은 불안을 잠재우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그놈
사람들이 진리를 찾는 이유는 '불안'하기 때문 이기도 하지만 희망하는 것이 아닐까요? 이룰 수 없는 이상국가를 꿈꾸듯이요. 아니면 '진리'를 찾기 위해 고민하고 탐구하는 과정을 즐기는 것일지도 모르겠네요. 정작 진짜 진리를 찾게되면 모두들 허탈해지지 않을까요? --picxenk
사람들이 진리를 찾는 이유는 '불안'하기 때문 이기도 하지만 희망하는 것이 아닐까요? 이룰 수 없는 이상국가를 꿈꾸듯이요. 아니면 '진리'를 찾기 위해 고민하고 탐구하는 과정을 즐기는 것일지도 모르겠네요. 정작 진짜 진리를 찾게되면 모두들 허탈해지지 않을까요? --picxenk
실용주의적이라는 단어가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진리"의 견고함을 일종의 "정도(degree)"의 문제로 이해하자는 것이죠. 비교적 단단한 토양도 지각변동이나 해일에 의해 씻겨나갈 수 있지만 우리는 그것이 "견고하다"고 생각하지 않을까요? 혹은 "대지"만큼 견고한 토대는 아니지만, 적어도 우리가 세운 건물들 역시 어느 정도는 반영구적이라고 생각하겠죠. 그것이 공기나 흐르는 물, 그리고 들끓는 진흙수렁처럼 우리가 발을 내딛을 수 없는 정도가 아니라는 점에서 "실용적인 견고함"을 받아들일 수 있다는 것이죠. 제가 말하고 싶었던 것은 "절대로 무너지지 않을" 토대를 바라는 것 자체가 불가능한 욕망이 아니겠냐는 겁니다. (물론 수학의 몇몇 명제들의 경우에는 다르겠지만, 적어도 경험적 진리에 대해서는 그것들이 "잠정적"인 것이면서도 "견고한" 토대라는 이중적인 인식이 가능하다는 거죠. 불안하지 않을 정도로 단단한, 하지만 그것이 "영원불변"이라고 믿지는 못할 정도로는 유연한.)
'불변의 지식'을 진리라고 정의한다면, 진리가 있느냐 없느냐를 논하는 것은 무의미합니다. 설령 불변의 지식이 있다고 해도 우리는 그걸 알 수 없을테니까요. 완벽한 지식체계는 존재 불가능하며, 그것을 완전히 인식한다는 것도 불가능합니다. 우리는 항상 진리의 부분만을 얻을 수 있습니다. 절대적이고 완전한 진리는 없는 셈이죠. 상대적이고 불완전한 진리가 있을 뿐입니다. 이러한 전제하에서 진리의 가장 적절한 정의는 '경험과 지식이 일치된 상태'일 겁니다. 이 정의에는 인식의 주체가 내포되어 있기 때문에 진리의 정의로서 적절해 보입니다. 저는 이렇게 생각하지요. 손가락은 5개다. 손을 펴보니 손가락이 5개네요. 지금 저는 진리 한 조각을 발견한 겁니다. 진리는 대단한 게 아니지요. 바로 이렇게 사소한 것들이 진리라고 생각합니다.--쿤달리니
"진리(Truth)"에 대한 고전적 정의가 바로 "대상과 인식의 일치"이고, 그건 다시 말해서 위에서 말씀하신 "경험과 지식의 일치"와 크게 보아 같은 의미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한 걸음 더 나갔을 때의 (철학적) 문제는, (1) 우리의 인식/지식이 a. 우리가 지식을 표현하고 저장하고 전달하는 "언어"에 크게 의존하고 있다는 것과 또한 b. 동시에 우리의 인지 구조에 의해 그 방식이 결정된다는 것이겠지요. 따라서, 어떤 "틀-언어/인지구조 등"에 의해서 인식/지식이 생겨나는가를 문제삼을 수 있을 겁니다. 그것이 바로 칸트의 초월철학이 처음으로 문제삼았던 철학적 문제였죠. 그리고, 또 한편으로 (2) 경험을 넘어선, 경험으로 해결되지 않는 종류의 "지식"이 있고, 그것의 진리성이 문제가 되겠죠. 바로 이 후자가 "형이상학적 진리"의 문제일 거구요.
인간의 진리는 두가지가 있습니다. 합리론과 경험론. 이 두가지는 항상 경합해 왔는데 좀더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신비적 세계관과 합리적 세계관입니다 (합리주의,합리론와 혼동하시면 안됩니다. 합리론은 신비적 세계관입니다.). 신비적 세계관은 유한의 인간지식이 무한을 따라잡을 수 있다는 것이고 합리적 세계관은 무한을 결코 따라잡을 수 없으므로 유한에 대한 설명만을 할 것을 전제로 하는 것입니다.(앞으로는 '신비적', '합리적' 이렇게 축약하겠습니다.) '신비적'측은 항상 소수이고 '합리적'측은 다수라고 하겠습니다. '신비적'과 '합리적'의의 대결양상은 유대인 VS 헬레니즘, 소크라테스 VS 소피스트, 주기론 VS 주리론, 예수 VS 바리새인, 아인슈타인 VS 양자론자 등의 양상으로 우리에게 항상 전해져 왔습니다. 다소 우스운 것은 우리가 어렸을 때에는 신비적 세계관을 집중적으로 가르치고 나이가 든 후에는 합리적 세계관을 집중적으로 가르치게 되는 교육체계입니다. 그러나 어려서부터 신비적 세계관을 떨쳐버리게 되면 일찍 "철이 들었다"라고 하게 되지요. 우리는 소크라테스가 옳다고, 예수가 옳다고, 아인슈타인이 우월하다고 어려서 배웁니다마는... 대다수가 나이가 먹으면 '합리적'인 인간이 우월하다고 믿습니다. 다른 각도로 말하자면 인간 본성의 진리가 있다고 믿는 쪽과 진리는 상대적이라는 쪽의 경합이 있는데 이 역시 전자는 '신비적'인 것이고 후자는 '합리적'인 것입니다. 여러분의 세계관은 절대 진리가 있다고 믿는 신비적 세계관입니까 모든것이 상대적이라고 믿는 합리적 세계관입니까? 저는 일단 신비적 세계관에 속한 사람입니다마는 --musiki
DeleteMe 독특한 분류법이고 주의깊게 생각해볼만한 문제인 것 같습니다. 이 글을 읽으며 흥미롭게 떠오른 문제는 신비적 세계관이 근대 과학의 탄생과 추동을 이끌어온 원동력이었다는 (잘 아시는 것이겠지만) 사실이었습니다. 사실 "저 너머" 혹은 "저 아래", "저 뒤쪽"을 생각하지 않고 "눈 앞에 있는 것에 대해서만 주의를 집중하는" (musiki님의 말을 따르자면 "합리적"인) 현명한 실용적 "태도"만을 가질 수 있는 사람은 흔치 않을테죠. 단순한 생각으로는 "선택은 합리적으로" 하되, "신비적인 것에 대한 희망은 버리지 않는" 것이 바람직할 수도 있어보이지만요. (참고로 부연하자면, "진리가 두 종류이다"라는 식의 서술보다는 "진리를 보는 관점" 혹은 "진리에 대한 태도"라고 부르는 게 더 적절해 보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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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리에대한명제들을 만들어 보는건 어떨까요?. 좀더 '진리'를 명확하게 바라볼 수 있게 해줄 듯 싶습니다. -- Pouch
DeleteMe 독특한 분류법이고 주의깊게 생각해볼만한 문제인 것 같습니다. 이 글을 읽으며 흥미롭게 떠오른 문제는 신비적 세계관이 근대 과학의 탄생과 추동을 이끌어온 원동력이었다는 (잘 아시는 것이겠지만) 사실이었습니다. 사실 "저 너머" 혹은 "저 아래", "저 뒤쪽"을 생각하지 않고 "눈 앞에 있는 것에 대해서만 주의를 집중하는" (musiki님의 말을 따르자면 "합리적"인) 현명한 실용적 "태도"만을 가질 수 있는 사람은 흔치 않을테죠. 단순한 생각으로는 "선택은 합리적으로" 하되, "신비적인 것에 대한 희망은 버리지 않는" 것이 바람직할 수도 있어보이지만요. (참고로 부연하자면, "진리가 두 종류이다"라는 식의 서술보다는 "진리를 보는 관점" 혹은 "진리에 대한 태도"라고 부르는 게 더 적절해 보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진리에대한명제들을 만들어 보는건 어떨까요?. 좀더 '진리'를 명확하게 바라볼 수 있게 해줄 듯 싶습니다. -- Pouch
요한복음 18장 38절 "빌라도가 가로되 진리가 무엇이냐" -- 정말 진리가 무엇일까요? 나이가 든다고 자연히 알아지는 것은 별로 없나 봅니다. 토론 하면 알 수 있을지도 잘 모르겠네요 --june8th
- 진리란 상상할 수 있는 그 어떤것 보다도 큰것이다. 만약 그것이 유한한 것이라면, 그것이 표현하는 것도 유한하여야 한다. 유한하다는 것은 제한이 있다는 것이다. 즉 그것이 표현 불가능한 것이 존재한다. 따라서 진리란 무한한 것이다. 그 무한한 것을 하나의 말속에 담고자 하는 것은 바다를 컵안에 담고자 하는 시도와 같은 것이다. 정 담고 싶다고 한다면 컵을 바다에 던지면 될 듯 싶다. ---munikang
"전능하고 선한 창조주인 신이 존재한다." 혹은, "lim(x->0) (1/x)". 유한한 문장으로 무한을 표현했다고 할 수 있지 않나요? --pocorall
그러한 방법으로 진리를 유한한 문장으로 한다면 무엇이라 표현하시겠습니까? 여전히 표현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신의 존재를 무엇으로 근거할 것이며, 선하다는 것이 무엇에 근거한 것인지(선한 신이 왜 전쟁이 존재하는 세상을 만들었는가?) 또한 전능하다는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전능한 신은 자신의 전능함을 무능으로 바꿀수 있는가?) 표현하고 나면 그 파괴되는것이 바로 논리이자 말이란 것이지요. ---munikang
- 진리라는 단어를 쓰는 것은 매우 조심스러운 일입니다. 표현하는 순간 표현되지 못한 더욱 많은 것들이 사라져버리는 것 *이니, 그것이 무엇이라 말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런 어려움을 극명하게 나타낸것이 바로 공안이지요. 마치 해가 없는 불가능한 방정식을 풀어내는 것과 같은 것이니 도대체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그래도 방정식을 풀수는 있지요 "제한"된 범위내에서 구속조건을 붙인다면 원하는 해답을 얻어낼 수 있습니다. 단지 "구속조건내의 범위"에서만 옳은 답이지만요. 그런데, 이것은 우리의 생각에서나 수학에서만 그런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실제 세계도 그렇다는 것이 밝혀지고 있지요. 예를 들어 빛의 성질이 파동성과 입자성을 모두 갖고 있고 단지 관찰자가 선택하는 방법에 따라서 파동도 입자도 될수 있다는 것이 예가 될수도 있지요, 또 현재 개발중인 양자컴퓨터가 또한 그러한 것이구요. 모든 가능한 연산상태를 큐빗안에 저장해 두었다가.(사실 저장도 아니지만요) 관찰하는 순간 모든 문제를 한번에 풀어버릴 수 있다고 합니다.(모든 암호화기법은 이컴퓨터 등장으로 끝장날거라는군요 양자암호화 하나만 빼곤) 또한 재미난 것은 관찰되는 순간 그것은 파괴되고 원래의 상태로 환원할 방법이 없습니다 슈레딩거의고양이 같은거지요. 우리가 보기전까지는 오직 가능성으로써 존재하고 보는 순간 파괴되어 버립니다. 진리도 마찬가지 아닐까요. 모든것이 진리일 가능성이 있고 그것은 표현해 내는 순간 파괴되어버려 다시는 진리가 아닌것입니다. 즉 절대적이면서(가능성의 존재로써) 상대적인(가능성중 하나가 실현됨으로써)것이 바로 진리가 아닌가 싶습니다. ---munikang
- 하지만 이러한 표현의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아주 멋지게 표현한 말이 하나 있습니다. "진리를 알지라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니" 멋있지 않습니까? 만약 우리가 자유로와 진다면 그것은 진리를 찾은 것입니다. 만약 신이 있다고 한다면 진리를 찾을 수 있도록 여기저기 우리가 알 수 있는곳에 놓지 않았을까요? 그것도 아주 발견하기 쉽게 두었을겁니다. 그런데 신이 너무도 친절하게 우리 가까이에 두어버리니, 불행하게도 등잔밑이 어두운 것처럼 우리가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 것은 아닐까요? 하여간 너무 친절해도 탈이라니까여~~~ ---munikang의 잡 생각이었슴다.
주역에대한46가지질문과대답에서 발췌해 봅니다. p 23~24 --안지성
{{| 백운 : ... 자연법칙이란 눈에 보이는 자연계가 아니라 형체가 없는 자연조화의 원리를 가리키네. 다시말해 자연계의 변화를 일으키는 이치를 뜻하는 걸세.
학생 : 그런 이치를 사람이 알아 낼수 있을까요?
백운 : 알아 낼수 있다고 보네. 사람의 이성은 바로 자연의 법칙이 우리의 정신에 그대로 새겨진 것이기 때문에 우리의 이성이 완전히 발휘하면 궁국에는 자연과 하나가 되어 자연의 법칙을 알수 있다네. 또 그렇게 때문에 사람의 이성으로는 자연의 법칙을 벗어나는 다른 것을 생각해 낼 수 없기도 하지|}}
{{| 백운 : ... 자연법칙이란 눈에 보이는 자연계가 아니라 형체가 없는 자연조화의 원리를 가리키네. 다시말해 자연계의 변화를 일으키는 이치를 뜻하는 걸세.
학생 : 그런 이치를 사람이 알아 낼수 있을까요?
백운 : 알아 낼수 있다고 보네. 사람의 이성은 바로 자연의 법칙이 우리의 정신에 그대로 새겨진 것이기 때문에 우리의 이성이 완전히 발휘하면 궁국에는 자연과 하나가 되어 자연의 법칙을 알수 있다네. 또 그렇게 때문에 사람의 이성으로는 자연의 법칙을 벗어나는 다른 것을 생각해 낼 수 없기도 하지|}}
see also 논리를초월한진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