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적인직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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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클리드는 그의 '원론'에서, '선은 폭이 없는 길이'이며, '직선은 두 점 사이를 잇는 가장 짧은 선'이라고 정의하였다.



1. 그러한 선이나 직선은 존재하는가?


꾸는자는 "존재할 수도 있지만 결코 우리가 인식할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즉, 철학적 의미는 있을지 모르나 과학적 의미는 희박하다.

musiki는 물리학적으로 직선은 모르지만 일단 "폭이 없는 길이"는 존재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지 않을까 싶은 움직임을 본적이 있다. 초끈이론이라는 것이 이런 것이 아닌가 유추된다.

그렇다면 수학적 의미는 어떨까요?
원래 '순수한'수학은 인간의 이성으로 추상적이거나 형이상학적인 것을 탐구하는 학문이라고 생각합니다.(철학과도 일맥상통? ^^ ㅡ 실존주의는 제외해야 할까...?) 때문에 수학적 의미야 충분하죠. 없다면 왜 유클리드가 정의 했겠습니까. ^^ 꾸는자

그 이유는:

  1. 질량을 갖고 있는 물체는 자체 인력으로 다른 사물에 영향을 주기 때문이며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의 원리와 같은 맥락. 관찰자의 질량이 '완벽한' 선을 휘게 한다)
  2. 혹 우리 주변에 존재한다 하더라도, 빛을 반사할 '폭'이 없기 때문에 인식할 수 없다.

서상현의 생각: 2번 근거는 '인식할 수 없으면 존재하지 않는다'라는 생각이라서 재미있습니다. 우주에 에테르가 가득 차 있는데, 이 에테르를 인식할 방법이 전혀 없다면, 에테르는 없는 걸까요? :-)
저는 분명히 '존재할 수도 있지만 우리가 인식할 수 없다' 라고 하였습니다. ^^ 존재와 인식은 다릅니다. 다만. 우리가 인식할 수 없는 것도 그 존재 가능성에 대해 이성적으로 생각해 볼 수는 있죠. 그리고 '관찰할 수 없는 이성적 탐구영역' 은 '과학적' 이라기 보단 '철학적' 이라고 하는 것이 옳을 것 같다는 이야기 였습니다. 그리고 잠시 다른 말을 하자면.. 에테르의 존재여부증명은 끝난것으로 압니다만. ^^ 꾸는자

zetapai의 생각 : "존재할 수도 있지만 결코 우리가 인식할 수는 없다"에 대하여 "실제로 존재하지 않지만 사고 속에 구성할 수 있다"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폭이 없는 경로를 상상할 수는 있지만 실재할 수는 없을 거란 생각입니다.
그리고, "관찰자의 질량이 '완벽한' 선을 휘게 한다" 에 대해서: 질량이 있으면 그로인해 공간이 휘어있기 때문에 그로인해 휘어있는 선이 직선이 되므로 직선의 경로를 분명히 설정할 수 있다고 생각됩니다.
휘어있는 공간안에 휘어있는 '직선' 이 과연 '완벽한' 직선일까요. '완벽한' 이나 '이상적' 은 '언제나' '항상' '주위 환경과 상관없이' '절대적인' 과 더 관련이 있다고 생각하는 꾸는자
'직선의 정의가 무엇이냐'에 달린 문제가 아닐까요? 수학에서는 '두점사이의 최단경로'로 정의한다고 알고있고, 물리에서는 '두점 사이의 빛의 경로'라고 정의한다고 알고있습니다. 결국 두가지 정의는 빛이 최단경로를 따라가기 때문에 마찬가지 얘기가 된다고 보여집니다.
'경로'가 무엇이냐, '공간'이 무엇이냐에 따라 달라집니다. 기준에 따라서, 빛이 휘는 것이 최단경로이지만, 다른 관점에서는 아닙니다. 분명히 휘었다고 말하는데, 똑바른 것은 더 가깝죠. 먼저 공간Space을 정의하고, 공간 내의 점Point, 위치Position가 무엇인지 정의하고, 경로Path가 무엇인지 정의하고, 길이Length가 무엇인지 정의해야 합니다. --Aragorn

zephid의 생각 : 피타고라스학파가 제논에게 공격을 받았던 것은 당시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단위' 개념의 부재 때문이었죠. 상상 속에서만 도출이 가능한 학문이었다는 겁니다. 그렇지만 지극히 이상적이기만 했던 피타고라스 학파의 시도는 결국 문예 부흥 시대를 계기로 수학의 발전을 이끌어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상적인직선이 현재로선 수학적인 시도의 가능성만 제시할 수 있을 뿐, 인간이 알아볼 수 있는 장치적 구현을 통한 인식은 불가능 하지만 그 가설로 인해 2차적인 실체를 이끌어 낼 수 있다면 사실상 실존하는 것이며, 말머리 같은 '그러한 직선은 존재하는가?'라는 흑백론적인 질문은 불필요하다고 생각되는군요.

만약 이 페이지가 꾸는자님께서 이상적인직선의 철학적 본질에 대한 논의를 유도하시기 위해 만든 장이라면 주장하시는 두가지 이유는 심상적으로 분명히 '존재'한다는 것과 '실체'를 부정하는 양방향의 근거가 제시되어야 하지만 지금은 과학적인 의미로서 활용되기엔 희박하다라는 내용을 증명할 수 있는 근거 밖에 없으므로 참여자들로 하여금 혼돈에 빠지게 하는 것 같습니다. (주제넘은 참견이 아니었는지요 :) )

naya의 생각: 존재의 개념에 대한 것에 대한 논의가 있었던 것 같군요. 존재한다는 것에 대해서 먼저 합의를 본 후에 '직선'이 '존재'하는지를 논의하는게 옳을 듯. 아래에 수리철학적 관점이라든가... 수학을 공부하는 학생의 관점들도 생각해보면, '존재'에 대한 관점이 되겠죠. 존재라는 것이 결코 쉬운 개념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더군다나 '직선'과 같은 추상적인 개념이 '존재'한다는 것을 논할 때는 더더욱 그렇겠죠? 세상에 사랑이 있냐고 묻는 질문만큼이나 애매한 질문이라고 생각이 됩니다.

Puzzlist의 생각: 이런 종류의 질문은 어떤 관점에서 "존재"를 생각하느냐에 따라 사람마다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수학자의 관점에서 본다면, 점은 크기를 생각할 필요가 없는 대상, 직선은 폭을 생각할 필요가 없는 대상을 부르는 하나의 명칭에 지나지 않습니다. GraphTheory에서 "Königsberg의 다리 문제"를 풀기 위해 오일러는 각 지역을 점으로, 각 다리를 선으로 대치했지만, 그 영역이 정말로 크기가 없다거나 다리의 폭이 0이라는 뜻은 아니죠. 그럼에도 분명히 지역과 다리는 점과 선으로 잘 작동합니다.

2. 수리철학적 관점


2.1. 선과 직선의 개념

유클리드 혹은 에우클리데스에 따르면, "선은 폭이 없는 길이"이고 직선은 선의 일종으로 "두 점 사이를 잇는 가장 짧은 선"입니다. 우리가 이런 "선"에 대해 논의할 때, 플라톤이 지적했던 것처럼, "실제로 눈 앞에 그어진 선"과 "선" 그 자체를 구분해야합니다. 앞의 것은 물리적인 것으로 우리가 "선"이라고 잠정적으로 합의한 것이고 뒤의 "선"은 수학적이고 추상적인 존재죠. 우리가 "선"을 확인할 수 있는 사례들은 이외에도 몇 가지가 더 있는데요, 말하자면 건물의 모서리와 모서리를 잇는 "선"이라든가 바다와 하늘이 맞닿는 "선"이 있겠죠. 하지만, 이것들은 모두 우리가 "그린 선"과 동일한 존재론적 지위를 갖고 있을 것 같습니다. 이렇게 본다면, 원래의 질문을 "에우클리데스적인 의미에서의 직선을 구현하는 물리적 대상이 존재하는가?"로 물어본다면 당연히 "없다"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고 (물리적 존재를, 어떤 의미에서건 시공간을 차지하고 있으며 인과적인 영향력을 갖고 있는 대상으로 본다면요), 따라서 유용하게 남는 질문은 "그렇다면 에우클리데스적인 의미에서의 직선은 도대체 어떤 존재론적 지위를 갖는가, 그게 존재한다는 건 무슨 의미인가" 정도의 물음일 것 같습니다. (추가 : zetapai님의 지적처럼, 실제로 어떤 기하학 체계 내에서도-리만기하학이든 로바체프스키기하학이든- '두 점 사이를 잇는 가장 짧은 직선'은 "존재"하죠. 이 때의 "존재"라는 건, 물론 그 체계 내에서 구성할 수 있다는 의미에 가깝겠지만요.)

2.2. 기하학적 대상의 추상성

우리는 3차원적 공간 지각에 익숙해져 있으므로(게다가 그것을 "2차원적으로 나타내는 시각적 설명"에 더 익숙해져있으므로) 수학에서 기하학이 추상적으로 인식되는 것에 적응하기가 꽤 어렵습니다. 물론 "물리적 기하학(우리가 경험하고 직관적으로 인식할 수 있는 3차원적 기하학)"에 우선순위를 두어야 한다는 주장을 펴는 수학자들(철학자들)이 없는 건 아니지만, 어쨌거나 기하학을 하겠다고 나서는 수학도라고 하면 4차원 이상의 도형을 "그려보는/생각하는" 것이 황당한 일이라고 생각해서는 곤란하겠죠. 하지만, 일반적으로 우리의 기하학적 직관은 대부분 3차원에 기반을 두고 있으므로 수학자들이 각 "면"이 정사각형이 초정사각형이나, 모든 "면"에서 구로 보이는 "원환체"(구의 단면을 자르면 크기가 다른 원이 나오듯, "원환체"의 단면을 자르면 크기가 다른 구가 나옵니다)를 다룰 때 그런 것들을 다루는 정당한 이유는 어디에 있느냐 하는 질문을 하게 되기가 쉽죠. 하지만, 적어도 수학적으로 보자면, 초정사각형과 정사각형의 존재론적 차이는 없다고 볼 수 있거든요. 정사각형 자체가 "물리적"으로 실재하는 게 아니기 때문이죠. 어차피 모든 수학적 대상은 추상적이고 "구성되는 것"이지, "실재하는 것"이 아니니까요.

2.3. 수학적 대상의 존재론 - "수", "집합", "함수"는 존재하는가?

이 문제에 대한 서로 다른 견해들이 "존재한다"(!)는 것을 먼저 염두에 두면, 이 개념들에 대해서 몇 가지 말할 수 있는 게 있습니다. 말하자면, "수"와 "함수"는 전통적으로 "집합"으로 환원적 설명이 가능한 것으로 여겨진다는 거죠. 이걸 인정한다면(물론 어떤 관점에서는 인정하지 않을 수도 있겠습니다만), 결국 "수학적 대상은 존재하는가"의 문제는 "집합은 존재하는가"의 문제로 바뀐다는 건데요(직관적으로는 받아들이기 힘들지만, 위치, 폭, 길이, 높이, 부피 등을 "갖는" 기하학적 대상들 역시도 n차 유클리드 공간에서 추상적으로 구성되는 것이므로 n차 순서쌍들의 집합으로 환원 가능합니다. 우리는 "기하학적 대상들을 시각적으로 나타낸 것"과 "기하학적 대상들을 수학적으로 정의하는 것"의 차이를 구분할 수 있으니까요). 아무튼, 수학의 "집합론으로의 환원가능성"을 받아들인다면, "집합" 개념은 어디서 그 근거를 찾을 수 있을까요? "공통의 것으로 묶을 수 있다"는 우리의 직관에서?

2.4. 전통적인 수리철학에 대한 도전 1 - 자연수는 어떤 집합인가?

"집합" 개념을 받아들이더라도, 수학을 구성해내는 데 있어서는 무엇보다 "자연수"가 만들어지는 게 중요합니다. 자연수와 기본적인 사칙연산으로부터 정수, 유리수, 그리고 (데데킨트 절단 등의 방법을 통해서) 실수(의 연속성)를 구성해내어야지만 도대체 해석학(analysis)이라는 게 가능해지니까 말이죠. 프레게와 러셀은 자연수를 "집합의 특성"으로 받아들였습니다. 말하자면, 1은 "원소가 1개인 모든 집합들"의 집합(즉, 무한집합)인 거에요. 2는 "원소가 2개인 모든 집합들"의 집합이죠(이렇게 정의하면, 무한대를 정의하는 게 조금 힘들어지기는 하겠지만). 폰 노이만은 유한서수들의 집합으로 보았죠. n(ull set)을 공집합 기호라고 본다면, n=0, {n}=1, {n,{n}}=2, ...이 되는 거죠. 체르멜로는 n=0, {n}=1, {{n}}=2로 보았습니다. 물론 자연수를 "이미 주어진 것"으로 생각하고, 그것을 순환적이긴 하지만 이런 식으로 설명하는 게 별 문제 안된다고 볼 수도 있는데, 어쨌거나 "수학기초론"에서는 이런 것들이 문제가 된다고 볼 수도 있죠. 도대체 어떤 집합이 자연수냐는 거에요. 수리철학자들은 여전히 이 문제를 가지고 싸우고 있지요......

프레게와 러셀이 정의한 숫자 1은 “원소가 1개인 모든 집합들의 집합”이 아닙니다. 1을 정의하는 데에는 1 이라는 개념을 사용할 필요가 없습니다. 1은 “만약 a와 b가 A의 원소이면 항상 a=b를 만족하면서 공집합이 아닌 집합 A들의 집합” 입니다. 그 다음에 +를 정의한 다음, 숫자 2는 1+1로 정의합니다. 물론 그러면 결국 숫자 2는 “원소가 2개인 모든 집합들”과 같은 집합이 됩니다. 이런 식으로 해서 1, 2, 3··· 이라는 개념을 쓰지 않고도 자연수를 모두 정의할 수 있습니다.

해석학에서 자연수의 개념을 꼭 이거다 라고 정의 할 필요는 없습니다. 실수를 데데킨트 컷으로 정의하던 것은 옛날 이야기이고, 지금은 “이러이러한 성질들을 만족하는 것”으로 정의합니다. 이제 보통은 데데킨트의 컷은 그러한 성질을 만족하는 모순되지 않는 것이 실제로 존재한다는 것을 보이기 위해서 한 가지 예로 사용될 뿐 이제 실수의 정의로 사용되지는 않습니다. 자연수 역시 자연수가 만족시켜야 하는 성질을 가지고 정의할 수 있고, 폰 노이만이나 러셀 등의 개념은 한 가지 가능한 예로 보는 것이 대세 아니던가요? -- ALee

2.5. 전통적인 수리철학에 대한 도전 2 - 인과적 힘을 갖지 않은 대상에 대해 지식을 가질 수 있는가

위에서 "꿈꾸는자"님이 은연중에 가정하고 있는 것이 "인과적 지식론"이라고 불리우는 건데요, 말하자면 "인과적 영향력을 갖지 않는 대상에 대해서는 지식을 가질 수 없다"라는 거죠. 다시 말하자면, "우리가 지식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인과적인 영향력을 가진 대상에만 적용된다"는 건데요. 왜냐하면 어떤 대상 a에 대해서 우리가 안다는 것은 그 a가 어떤 방식으로든 우리의 믿음(생각)에 대해 어떤 영향을 가져야지만 되는 거니까요. 이런 것은 "물리적인 인과적 효력을 갖지 않은 것에 대해서 우리가 그것이 존재하고 그것에 대해 알 수 있다고 어떻게 말할 수 있는가?"라는 식의 직관에 기초하고 있다고 볼 수 있는 걸 겁니다. 그렇게 본다면 우리가 어떻게 "수학적 대상"에 대해 "수학적 지식"을 가질 수 있는가에 대해서 상당히 묘한 난관에 부딪히게 되죠. 이에 대해서는 인식론을 전공한 철학도보다는 수학도분들의 해명 내지는 비판을 기다리는 게 더 좋을 것 같은데요..... ^^; 말하자면, "수학적 지식은 무엇에 대한 앎이냐?"는 거에요. 이건 다른 말로 (물론 종교에 대한 비판이 아니라는 점을 전제하구요) 무신론자가 "신에 대한 지식이 가능하냐?"고 묻는 것과 같은 거라고 할 수 있는 거죠. (물론 관점에 따라서는 두 문제가 서로 다른 문제라고 할 수 있지만요.)

2.6. 최근 수리철학의 한 입장

최근의 수리철학은 수학적 대상의 존재론적 지위가 "패턴(pattern)"의 그것과 일치한다고 생각합니다. 이 패턴 개념은 다양한 수학의 대상들을 적절하게 추상적인 수준에서 "묶어" 주는 개념으로 여겨지기 때문에, 약 2,30년 전부터 수학을 "수와 도형에 관한 학문"이라는 낡은 정의 대신 "패턴의 과학(science of patterns)"으로 정의하는 데 많은 수학자들이 일치하고 있습니다. 이 패턴의 존재론적 지위에 대해해서는 플라톤주의와 아리스토텔레스주의의 견해가 엇갈리기는 하지만, 어쨌거나 자연적인 대상에서 다양한 패턴을 발견할 수 있다는 것(그것이 대상 자체의 속성인지, 아니면 우리의 인지구조의 탓인지, 둘의 협력인지에 대해서는 흥미로운 견해가 엇갈릴 수 있겠지만)이 수학의 추상성을 플라톤적 이데아의 영원한 세계로부터 구원하고 싶은 사람들에게도 매력을 준다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물론 플라톤주의자들은 그 패턴 자체가 "이데아적"이라고 생각하겠지만요).


3. 수학을 공부하는 학생의 관점

3.1. 수학자들이 관심을 가지는 것

아무개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수학자들은 직선이 존재하는가와 같은 질문은 거의 하지 않습니다. 물론 지금도 수학기초론을 연구하는 수학자들이 조금은 있습니다만 그들의 작업도 철학으로서의 수학기초론과는 거리가 있는 것으로 알고 있고요.(자세한 것은 저도 잘 모릅니다만.) 수학을 공부하는 학생으로서 어떤 수학적 대상의 존재성에 대해서 제가 관심을 가지는 부분은 그것이 수학적으로 건전하게 정의되었는가 하는 점입니다. 예컨대 '직선은 폭이 없는 길이'라는 것은 '폭'이나 '길이'에 대한 사전 정의가 없기 때문에(그리고 설사 그런 것이 있더라도 가장 기초적인 대상을 그 이후에 전개될 복잡한 개념을 통해 정의하는 부자연스러움 때문에) 수학적으로 바람직하지 못한 정의가 되는 것이죠. 그렇다면 수학적으로 건전한 정의란 무엇인가? 여러가지 이야기를 할 수 있겠지만 파고들어가보면 결국 '집합을 이용한 정의'라는 것이 정답이 아닐까 합니다.

3.2. 수학자들이 관심을 가지지 않는 것

집합론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무한집합을 직관적으로 다루다 보면 처리하기 곤란한 모순이 발생할 수 있다는 점입니다. 보통 수학과의 정규 교육과정에서는 집합론을 2-3학년쯤에 배우면서 공리적 방법을 통해 무한집합을 모순없이 다루는 법을 배우게 됩니다. 그 구체적인 내용은 선택공리(the axiom of choice)와 그 동치 명제들, 초한기수(transfinite cardinality), 초한귀납법(transfinite induction) 등이 되는데 이 내용들이 수학을 공부하다보면 잊혀질만 할 때 한번씩 나와서 수학의 전체 구조가 난해한 논리학적 심연 위에 자리잡고 있다는 사실을 상기시켜주곤 하죠. 하지만 수학도들의 수학의 기초에 대한 문제의식은 보통 그 정도에서 멈춥니다. 수학기초론에 대한 수학자들의 일반적인 무관심은 그것이 수학연구의 논리적 기초에 가할 수 있는 잠재적 위협이 이미 (20세기의 여러 연구를 통해서) 제거된 상태인데다가, 그렇다고 수학기초론의 연구가 새로운 명제의 증명이나 기존 연구에 대한 새로운 통찰같은 것을 제공해주지도 못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3.3. 수학에 대한 '철학'

이러한 논의와 별개로 수학을 공부하는 사람들은 다들 자기 나름의 수학적 대상에 대한 존재론을 가지고 있기 마련입니다. 그것은 말 그대로 '철학'에 속하는 문제여서 (그가 수학적 규칙을 지키면서 이야기하는 한) 서로 관여하지 않고 존중해줍니다. 다른 모든 분야에서와 마찬가지로 존재에 대한 철학은 그 사람의 연구를 추동하고 영감을 불러일으키는 기본적인 바탕이 되는 것이니까요. 수학과 교수님들 중에도 물리적 직관을 중요하게 여기고 복잡한 수학적 정의같은 것은 필요악 정도로 생각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3.4. 수학적 대상의 계층

수학적 대상의 존재론적 위상이나 수학적 지식의 인식론적 성격에 대해서 제가 말할 수 있는 것은 별로 없는 것 같습니다. 그래도 몇가지 말씀드려본다면 우선 수학적 대상들 중에도 여러 계층이 있다는 것인데요, 가장 기본적인 수학적 대상들인 수(자연수, 유리수, 실수, 복소수 등)와 도형(직선, 평면, 곡면 등과 이들을 포괄하는 다양체의 개념)과, 이들을 연구하기 위해 고안해 낸 수학적 장치인 group, ring, field, module, algebra, topological space 등의 개념들 사이에는 차이가 있을 수 있다는 점입니다. 예컨대 group은 수를 다시 한번 추상화해서 만들어낸 개념이고(역사적으로는 다항식의 해집합이 대칭군을 이룬다는 사실의 발견에 기인합니다만) topological space는 도형들이 정의되는 공간의 개념을 최대한 일반화해서 만들어낸 개념인데, 그렇다면 '수가 존재한다'는 명제가 'group이 존재한다'는 명제보다 더 받아들이기 쉬울 거라는 거죠. 크로네커라는 수학자는 대충 '신이 인간에게 준 것은 자연수뿐이다. 나머지는 모두 인간의 창조물이다'라는 얘기를 했다고 하는데, 저는 거기에 꼭 동의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 느낌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3.5. 수학의 신비

과연 자연수나 직선이 이상적인(신이 내린) 형태로 먼저 존재했던 걸까요, 아니면 모든 것이 인간의 추상화 능력에 의해 구성된 걸까요? 저는 어느 쪽이건 간에 우리가 수학적 대상들을 알맞는 형태로 정의하여 혼동과 모순없이 사용할 수 있다면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만, 그 가장 기본적인 대상인 자연수 안에도 우리가 아직 비밀을 벗기지 못한 미지의 영역(특히, 소수의 문제들. 그런데 놀랍게도 소수의 문제는 해석학을 포함한 현대 수학의 모든 발달된 도구들을 이용해야만 접근이 가능하다 see also 만가설)이 존재한다는 것이야말로 정말 신비로운 일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ISBN-0691004056] [ISBN-8972824690]
최근에 대학신문에서 서평을 보고 알게된 책입니다. 아직 읽어보진 못했지만 이상적인직선페이지의 주제에 대한 좋은 참고도서가 될 것 같습니다. 이 책은 신경생물학자 샹제와 수학자 꼰(Connes)의 대화 형식으로 쓰여졌다고 하는데, 샹제가 어떤 사람인지는 다른 분께서 가르쳐주시면 좋겠고, 꼰은 필즈메달리스트이고 지금도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는, 설명이 필요없는 당대 최고의 대가입니다. 그런 사람이 이런 주제로 책을 썼다고 하니 어떤 내용일지 정말 궁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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