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의미와가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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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곤페이지로부터

인간의 의미와 가치는 경제논리를 능가한다.


일본에서 3번째의 생산성을 가진 바 있었던 한 기업의 사시는 "F=ma"라는 가속도의 법칙이었습니다.([http]이상한 회사(참조링크)) 힘은 질량과 가속도의 곱에 비례한다는 뜻으로 알고 있습니다. 이 회사는 구성원들에게, 레저와 게임을 제공할 수 있는 시스템을 구축하고, 업무시간에 무슨 일을 하든지, 정해진 과업만 수행하면 책임을 묻지 않는 굉장히 수용적인 방침을 내세웠습니다. 다시 말해서, 점심 시간 전에 한 시간 멋대로 수영하고, 오후 4시쯤, 열심히 벤치프레스를 들어도 뭐라 하지 않는 기업이었던 것입니다. 과제 수행에 도움이 된다는 판단이 든다면, 대학원 진학 성명을 낼 수 있고, 내고 나면 석사까지 회사에서 책임지고 해주는 완벽한 사원 중심의 회사였던 것입니다. X 이론(인간은 가만히 놔두면 악해진다.)대로라면, 이 회사는 망했어야 했습니다. 하지만, 일본 내의 생산성 3위의 굴지 기업이 되었습니다. M(질량=개인의 존재에 대한 가치부여)가 A(업무에 대한 속도)와 맞물려 F(파격적인 업무성과)를 이루었기 때문입니다. 실례에서 얻는 교훈들을 철저히 무시하고 나면, 이론가는 언제나 승리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빈곤"이 방치되는 문제는, '인간'에 대한 자기 비하와 몰가치 선언이 될 수도 있습니다. 전기 자극 장치처럼 빈곤이 여기 저기 도사리고 있는 사회에선 분명히 많은 사람들이 긴장하고 살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이 꼭 효율로 갈 것인가는 한번쯤 짚어보아야 할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빈곤의 영속적인 존속"은 그다지 효과있는 사회 발전을 위한 수단은 아닙니다. 생존의 문제로 사람을 몰아가는 방식으로는 보다 나은 성취와 효율성은 기대되지 않습니다.

동급의 인간들 중에서 특정인 하나가 가장 일을 잘 할 수 있는 최적의 효율성이 발휘되는 시점은 자신이 하는 일에 대한 동기 부여와 자신의 의식이 지향하는 바, 그리고 체력 등의 에너지의 요소가 그 일을 향해 제대로 집중되었을 때입니다. 자신이 그 일을 해야 한다는 사실에 대한 마음과 생각의 일치가 없는데 최적의 노동 효율이 나올 수 있다고 생각한다는 것은 넌센스입니다. 직장 다니는 사람들이 주변의 사람들을 잘 살펴보다 보면, 남달리 일을 잘하는 사람들은 또한 남달리 자신을 관리하고 효율적으로 자신의 업무에 집중하는 동기와 관심, 그리고 합당한 이유를 자신 안에서 잘 형성해내고 있는 사람인 경우가 많다는 것을 잘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 사람에게 자신 앞에 주어진 일은 이미 자신이 하고 싶은 일로 변화하여 있습니다. 그 동기의 형성요인이 뭔지는 직접 얘기해보고 말해보기 전까지는 잘 알 수가 없는 법입니다.(이걸 다 안다고 얘기하면 억지겠죠.) 그러나 보다 자신의 가치에 대해서 합당한 지원을 해주는 회사 시스템이 성공적인 결과를 보여주며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은 생존 논리와 같은 자기 비하적 관점에서 억지로 일을 하는 현상을 넘어서서 자기 내부에서까지 인정받는 동기부여를 가능케 하는 것이 보다 중요하다는 것을 역설하고 있습니다. '빈곤'이라는 것에 대한 반작용으로 열심히 살아서 발전했다고 하더라도, 그 개인이나 사회가 보다 나은 발전을 향해 가기 위해서는 그 이상의 의미와 가치가 필요합니다.

"회사에 들어가게 되면, 업무 파악을 먼저하고 우선, 그 일을 완전히 자기 것으로 소화하지 않으면 안된다"라는 표현이 있습니다. 자기 것으로 만든다는 과정은, 그것이 자기가 하고 싶은 일 정도로 되도록 자신 내부에 일을 능동적으로 하게끔 만드는 동인을 제대로 만들어 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말일 수 있습니다. 이 동인의 형성 과정에서 경제적 가치 생산행위와는 다른 도덕이나 윤리, 또는 자기 고유의 가치 요소가 충분히 개입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도태된다기 보다는 상승작용을 통해서 더 경쟁에서 강하게 만들어 줄 수 있는 것입니다. 경제적 가치 추구가 혹, 무위로 돌아갔을 때, 전사적인 전략의 변화를 감당하게 하고 구성원들로 하여금 동요하지 않고 다시금 도전하도록 하고, 자신감을 잃지 않도록 이끄는 것은 무엇일까요? 경제적 가치 추구 과정 중에 생기는 불상사를 제대로 해결하거나 방지하고 있는 가치들은 과연 무엇일까요? 각 개개인들의 존재감이나 역할, 가치에 대한 고려와 어느 정도의 믿음을 주고 받을 수 없는 회사라면, 경제적 가치의 추구 활동은 오래 지속될 수가 없습니다. 도덕이나 윤리의 요소는 명목적이나 계속적으로 필요한 것이고, 개개인 자신을 경제적 가치를 향해 갖가지의 난수를 딛고 나아가게 만들어주는 유연함으로 전환됩니다. (개인이 하고 싶은 "일"과 개인이 추구하는 가치는 약간은 다른 요소입니다. 혼동은 피해주었으면 합니다.)

실제로 현실로 들어와 많은 사람들을 하나하나 관찰해본다면, 개인이 자기 삶 속에서 자기 자신의 경제활동을 위해 부여하는 의미는 이미 논의 되어 있는 것을 훨씬 능가하게 됩니다. 전체 구성원들이 모두 생존의 문제를 과장되게 해석하는 것뿐만이 아니라 각 개인이 가진 수많은 동기 부여 능력의 가능성의 측면들을 바라보게 되면, 정확한 경제 가치 생산을 해내는 힘은, 보다 인간적 의지를 포함한 동기 유발 능력과 자기 합리화 등등에 더 많은 비중을 두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될 수 있습니다. 개개인의 존재감을 명확히 염두에 두지 않는 전체의 고려에는 균형을 위한 미시적 접근이 필요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우리 이웃의 빈곤을 지속적으로 방치한다면, 우리 역시 카자흐스탄의 사람들처럼, 점점 늘어나는 빈곤의 악순환에 빠지게 될 것이라는 메세지가 나의 이야기에는 함의되어 있습니다. 타국에서 빈곤한 사람들이 늘어가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자신에게 오는 재화의 량이 더 많아지는 것이라 단기적으로는 더 좋은 것일 수도 있겠지만, 만약, 우리 주변의 사람들이 빈곤해져가는 것을 방치하고 있다면, 결국 자신도 그 빈곤의 악순환에 같이 휩쓸리게 될 것입니다. 카자흐스탄의 국가지도자는 나였을 수도 있고, 본인이었을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우리 자신의 도덕과 윤리라는 것에 대한 보다 확고한 생각이 없고, 정치지도자를 향해서 비판하고 조정할 수 있는 힘을 구성하는 가치와 의미를 지니지 못한다면, 스스로 노예되기를 선택하는 것과 하등 다름없는 일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 자신의 빈곤이나, 그 이상의 파멸을 가져오는 일이 될 것입니다. 그다음에 우리가 단지 빈곤이라는 것에 대한 반작용뿐만이 아니라, 보다 다른 이유에서도 더크게 활동할 수 있는 동기를 제공받을 수 있다라는 것을 말하기 위해서, 한 회사의 사시인 "F=ma"의 일례를 들었습니다.

사람은 경제 활동 그 자체에만 존속되고, 그 삶 속에만 갇히자고 살아가야만 하는 존재는 아닙니다. 경제는 삶의 많은 것들을 설명하고 있지만, 우리들 각자는 경제적 사고를 뛰어넘는 수많은 것들로 하루하루 다른 삶을 만들어가고 있습니다. 삶은 그 삶을 살아가고 있는 인간의 온전한 몫이지, 경제의 몫은 아닙니다. 빈곤은 인간이 겪는 수많은 고통 중에 하나이며, 이를 겪고 있는 인간들에 대한 이해 없이 옆에서 이를 어떤 논리로 재단하고자 하기만 하는 것은, 빈곤한 사람들에 대한 조롱이며, 빈곤하지 않은 자신에 대한 위로에 지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빈곤을 한두가지의 관점만이 아닌 보다 객관적이고도 사실적으로 볼 수 있는 눈이 빈곤페이지로부터 목격되기를 고대합니다.--Roman

"빈곤은 인간이 겪는 수많은 고통 중에 하나이며" 라고 하셨는데, 그렇게 같은 선상에 놓고 같은 수준에서 이해될 수 있는 그런 고통은 아니라고 생각해요. 빈곤은 인간이 겪는 수많은 고통을 유발하는 근본적 고통이라고 생각하는 거지요. 보세요, 입에 풀칠을 못해 눈이 뒤집혀 곧 죽게 생겼는데, 최고권력자의 고통이, 회장님의 고통이, 예술가의 알을 깨는 고통 따위가 어찌 눈에 차 오겠습니까? --맑은 2008.2.29(금)
비슷하게 질문을 해보겠습니다. 저는 죽음이 수많은 고통을 유발하는 근본적인 고통이라고 생각합니다. 당장 여러가지 이유로 죽게 생겼는데, 그누구의 빈곤의 고통이든 그게 어찌 그 죽을 사람의 눈에 차오겠습니까? --Roman
"여러가지 이유로 죽게 생겼는데"라고 한 말 안에는 "입에 풀칠을 못해 눈이 뒤집혀 곧 죽게 생겼는" 사람의 상황도 포함되어 있는 게 아닌지요? --맑은 2008.3.5(수)
당연히 포함되어 있습니다. 아래 말씀 주신대로 빈곤의 상황에서 기아로 죽게되던 AIDS로 죽게되건, 코너에 몰린 회장님이 자살하던, 예술가가 모종의 예술적 절망 끝에 자살하던 죽는 그 순간에는 타인의 그 어떤 고통이던 죽는 당사자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을 수 있겠죠.(물론, 타인을 죽인 죄책감에 자살하는 사람에게는 타인의 죽음이라는 고통이 자신의 죽음을 초래한 예가 될 수도 있겠죠) 빈곤이 보다 근본적인 고통이라 다른 고통과 같은 선상에 놓일 수는 없다고 말하는 것에는 아래와 같은 이의가 있습니다. 물론, 사회적인 차원 또는 거시적인 차원에서는 빈곤의 의미는 굉장히 커다란 의미가 됩니다. 과거에 비해서 훨씬 많은 사람들이 돈과 쾌락을 향유하는 작금의 시대에, 과거에 비해서 또한 월등히 많은 사람들이 빈곤의 고통을 겪고 있으니 당연히 '머리 숫자'로 보자면 인류에게 빈곤은 보다 커다란 고통임이 분명합니다. 다만 생리학적으로 죽지 않는 사람은 단 한명도 없다는 현실을 보자면, 죽음은 빈곤앞에 선행하는 고통이자 고통의 본질 자체로 '머리 숫자'로나 사회적 의미로 보나 궁극이라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지금 당장 맑은님이 원하는대로 집필하면서 제 진심어린 의견을 다소 반영하여, 빈곤은 인류가 겪는 죽음 다음의 고통이라고 얘기하면 될 것 같습니다만 상기에 적은 문맥상으로는 이렇게 적으면 다소 맞지 않습니다. 그 당시에 이 내용을 쓰던 순간의 언중들은 빈곤과는 다소 먼 상황에 있는 이른바 엘리트라고 불리울 수 있는 분들이나 사회적인 빈곤이 오히려 사회 발전의 원동력이 된다는 의견을 가진 분 등등이었기 때문에, 이 분들 앞에서 이야기할 때, '빈곤은 인간이 겪고 있는 수많은 고통 중에 하나'라는 표현은 오히려 수많은 고통 중에 빈곤이 겪고 있는 당사자들에게 얼마나 비참한 고통이며 수수 방관되어서는 안된다는 사실을 좀 더 객관적으로 바라보면 이 분들이 알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바램에서 이야기 한 것입니다. 다소 굵직한 토대로 다른 문맥에서 이야기한다면, 또다른 표현이 나왔을 것입니다. 제가 맑은님의 의도를 짧은 문장만으로 대단히 섬세하게 뉘앙스까지 잘 파악하기를 바라셨다면, 저는 이미 씌여진 내용으로부터는 그런 의도와 뉘앙스를 발견할 방법은 없었는지 묻고 싶었습니다.

얼마전에 좋은 집안에서 빈곤의 고통과는 상관없이 살아온 친구 하나가 갑자기 죽음을 선택한 일이 있었습니다. 제 친구들의 이 친구의 죽음의 대한 결론은 그가 왜 죽었는지 멋대로 추측하거나 불쌍하게 여기는 것은 오히려 망자의 선택을 모독하는 일이 될 수도 있으니 그만 하자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다시 한번 느낀바가 있었습니다. 인간의 고통은 본질적인 것과 비본질적인 것으로 나뉘어지는 것이 아니라 사회학적인 관점을 떠나 오로지 한 개인의 차원으로 들어가보았을 때 일종의 동위를 갖고 있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 친구가 중학교때 학교에서 전교 1등을 하고 좋은 집에서 좋은 음식을 먹을 때 저는 반에서 꼴찌를 하고 월세방에서 끼니를 거르고 위태롭게 살면서 삶에 대한 절망감에 빠져 있었습니다. 그당시 제 기억이 정확하다면 사실 저에겐 죽음이 어른거리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어찌되었든 살아남은 것이죠. 그 친구는 제가 겪었던 빈곤의 고통의 일부도 체험한 바가 없지만, 그 자신만의 이유로 죽음에 이르렀습니다. 정확한 이유는 말할 수도 없고 알 수도 없습니다. 하지만, 저는 더 어리고 약할 때 제가 빈곤을 이겨내었듯이 성인이되고 의지가 있던 그 친구는 왜 자신의 그 근본적이지도 않은 고통을 이겨내고 살아남지 못했는가 따질 입장이 되지 못한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저는 한개인의 죽음 앞에서 이게 빈곤보다는 근본적이지 않은 고통으로 죽었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되지 못합니다. 죽은 그 사람에게 있어선 그게 빈곤이었든 다른 이유였던 그를 죽음으로 몰고간 그 고통은 그 사람에겐 궁극이자 근본적인 고통 그 자체일거라고 생각할 따름입니다. 적어도 그 사람에겐 빈곤보다는 근본적이지 않은 고통으로 죽음을 선택한다는 내용이나 인식이 끼어들 여지가 없을거라 생각할 뿐입니다. 물론 조금 더 이야기를 확장하자면 자기가 원하지도 않는 죽음을 당하는 사람의 이야기도 나와야겠죠. 다만, 죽음 앞에서는 만인이 일단은 동등하고 많은 고통이 일렬 횡대를 서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 제가 갖고 있는 솔직한 인식의 모습입니다.--Roman

죽는 순간 자체만을 두고 보면, 이런 경우도 있습니다. 내가 지금까지 어떤 가난한 사람들에게 매달 쌀을 보내고 있다가, 쌀 보내기를 중지한다는 어떤 통보도 없었기에 그들을 도울 다른 후원자도 없는 상황에서, 갑자기 어떤 사고가 나서 지금 죽어 가고 있다면, 그 죽어가는 제 눈에는 그 가난한 이웃들의 배고픈 내일이 가물 거릴 것입니다. 그렇지만, 내가 오랫동안 가난이 목숨을 겨냥해 오는 삶을 지속해 왔다면, 간신히 매달려있던 이타심이란 것이나마 모조리 사라져 없어지고, 오로지 살아남기 위해 이기심만 번뜩이게 될 것 같습니다. 맑은이는 그럴 것 같은데 Roman님은 그렇지 않을 수도 있겠지요. 즉, 지속되는 빈곤의 고통 속에서도 이타심을 발휘한다거나 다른 가치를 추구하는 경우가 있다면 그것은 예외 상황일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맑은 2008.3.5(수)

지금 공이 엉뚱한 곳으로 날아가고 있는 듯해요. Roman님의 글은 좋은 뜻이 담긴 글이었습니다. 토를 단 것은 그 부분에서 나와는 생각이 좀 다르다 싶어 확인차 던진 질문이었습니다. 다르다고 여긴 부분은 다음과 같습니다. "여기 헐벗고 배고픈 한 인간이 있는데, 내가 줄 수 있는 것이 밥값 정도 밖에 안 된다면 밥을 먼저 줘야 할 것이고, 조금이라도 더 여유가 있다면 밥을 좀 적게 주고 옷을 함께 입힐 수 있는 방안을 찾아야 한다는 것이 맑은이의 생각인데, Roman님의 그 말은 마치, 헐벗고 배고픈 사람에게 옷을 먼저 입혀 주어야 한다는 주장을 하는 듯하여, 괜히 토를 달아 보았습니다. 이런 제가 단 토가 오해이길 바라고, 오해라면 이제 이 스레드를 마쳐야 할 것 같습니다. --맑은 2008.3.5(수)

소수가 이익보는 것 이외에는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 과연 지도자가 되어야만 하는가?

"소수가 이익보는 것 이외에는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 국가기관의 지도자가 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봅니다. 다만, 그 소수의 이익집단만을 위한 지도자는 될 수도 있겠지요. 그런데, 그런 사람이 국가 기관의 지도자가 되었다면 그게 바로 이른바 '혁명' 아니겠는지요. 부르조아 혁명 or 프롤레타리아 혁명. 그러나, 혁명이 아니고 개혁 수준의 변화를 추구하는 지도자는 분명히 모든 국민들의 이익에 충돌이 발생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 폭력과 회유를 제외한 모든 종류의 노력을 쏟아 부어 국가적 지도력을 발휘할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이미 뽑아 놓은 지도자가 눈에 띄게 소수의 이익에 편중된 것으로 보인다면, 그 지도자 잘못 뽑은 것이죠. 국가기관의 지도자 자격이 없음을 알면서도 잘못 뽑았겠습니까? 그 경우 사기 당한 것이라고 봐야지요. 그리고 그 댓가는 사기꾼이 지는 게 아니라 국민들이 지는 것입니다. 특히, 혁명 주체와 대립하는 계급이 지는 것이지요. 부르조아 독재이면 프롤레타리아가, 프롤레타리아 독재라면 부르조아가, 군부 독재라면 양민이. 그러나, 아무리 이리저리 나눠보고 역사를 뒤져보고 해도 그 어떤 종류의 권력 형태에서도 프롤레타리아가 댓가를 치르지 않는 경우는 보지 못한 것 같습니다. 이에 대해선 어떤 말을 이어나가야만 할까요? --맑은 2008.2.29(금)
카자흐스탄페이지에 저는 그런 상황에 대한 예제와 이에 대한 우려와 그래도 국민들이 권력을 감시하고 견제할 수 있는 충분한 힘을 가져야만 한다는 당위를 내세우고는 슬며시 자릴 떠버렸습니다. 죄송하지만, 저는 프롤레타리아나 부르조아의 정의를 제대로 이해하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본론을 탐독했던 사람이 아닙니다. 다만, 냉철하게 현실을 돌아보자면, 우리가 노무현 대통령에 대한 반발로 뽑은 새로운 권력자는 폭넓은 국민의 이익보다는 '건설경기'에 메달려 있는 건설관련 업체들과 고소영(고려대+소망교회+영남지역), 강부자(강남 땅부자)로 대변되는 특정 이익 집단에 대해서 '속보이는 정치적 특수'를 제공하는 사람처럼 보인다는 우려를 나타냈을 뿐입니다. 물론, 지금까지 통치를 계속하고 있는 카자흐스탄의 자기 주변 사람들의 이익밖에 모르는 지도자의 인기는 십수년이 넘은 지금도 아직 대단하고 그 정치적 파워는 엄청나며, 나라의 경제적 발전 속도도 늦춰지지 않았습니다. 단지, 아직도 실업과 저임금의 나날 속에서 절망하거나 실망한 젊은이들이 자살하고, 피부색 때문에 출세하기 힘든 백인들인 러시아인들이 황인종인 카작인들에게 차별 당하며 인종적인 차별이라는 고통을 당하고, AIDS에 걸리거나 알콜중독에 빠지거나 LSD에 경도된 사람들이 참 많이들 고통 받고 살아가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 나라의 예제를 정확히 많은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었다면, 아마 우리는 스스로를 최면에 빠뜨리고 도덕적으로 문제가 있는 지도자를 쌍수를 들어 환영하면서 뽑지는 않았을거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아무도 카자흐스탄에 어떤 일이 있는지 아는 사람도 없고, 가서 생생히 겪은 이야기를 하는 사람도 없습니다. 그리고 자기가 겪지 않는 이상 그 어떤 고통도 비슷하게나마 이해될 수 조차 없으니까요.--Rom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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