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자의 正名사상 ¶
자로가 말했다. "위나라의 임금이 선생님을 기다려서 함께 정치를 하고자 한다면, 선생님께서는 장차 무엇을 먼저 하시겠습니까?"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다. "반드시 이름을 바로잡는 것(正名)을 먼저 하겠다."
자로가 말했다. "아니 이럴 수가! 선생님의 우원(迂遠)함이여. 어찌 이름을 바로잡겠다는 말씀인가요?"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다. "거칠도다 자로여. 군자는 자기가 알지 못하는 것에 관해서는 판단을 유보하는 법이다. 이름이 바르지 않으면 말에 순서가 없게 되고, 말에 순서가 없게 되면 일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일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예악(禮樂)이 일어나지 못하며, 예악이 실행되지 못하면 형벌이 적절하게 시행되지 않는다. 형벌이 적절하게 시행되지 않으면 백성들이 어찌할 바를 모르게 된다. 그러므로 군자는 이름을 바로하면 말을 순서있게 할 수 있고, 말을 순서있게 하면 반드시 시행할 수 있을 것이다. 군자는 그 말에 구차한 바가 없을 뿐이다." (<논어(論語)> 자로(子路)편)
순자의 正名사상 ¶
(지금 만일 명칭이 정해져 있지 않다면) 다른 형체의 물(物)에 대해서 사람들은 서로 다른 마음으로 각각 (멋대로의 명칭으로) 이해하게 되고, 그 결과 잡다하게 서로 다른 만상에 대해서는 명(名)과 실(實)이 혼란되고 엉키어서 귀한 것과 천한 것의 구별이 흐려지고 같은 것과 다른 것이 분별되지 않는다. 이와 같이 되면 마음은 반드시 깨닫지 못하는 병폐가 있게 되고, 일(事)은 반드시 곤궁하고 실패하는 화(禍)를 당하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지자(知者)는 그 때문에 일을 구별하고 명사를 제정해서 그것으로 실지의 대상물을 가리키어, 위로는 그것으로 귀한 것과 천한 것의 구별을 분명히 하고 아래로는 그것으로 같은 것과 다른 것을 분별한다. 귀한 것과 천한 것의 구별이 명백해지고, 같은 것과 다른 것이 분별되기만 한다면, 마음은 깨닫지 못하는 병폐가 없게 되고 일에 있어서는 곤궁하고 실패하는 화가 없게 될 것이다. 이것이 무엇 때문에 명사가 있어야 하는가 하는 이유이다. (중략)
명칭에는 본시부터 정해진 의미는 없다. 약정을 통해서 명칭된 것일 뿐이나 약정이 안정되어 습속으로 이루어지면 그것을 합당한 의미라 하고, 약정을 어기면 합당한 의미에서 벗어난 것이라고 한다. 명칭에는 본래부터 정해진 진실성은 없다. 약정을 통해서 명명된 것일 뿐이나 약정이 안정되어 습속으로 이루어지면 그것을 진실한 명칭이라 한다. 그러나 명칭에는 본시 일정한 좋은 점이 있다. 알기 쉽고 어그러짐이 없는 것을 좋은 명칭이라 하고 한다.
물(物)에는 형상은 같으면서 그 존재하는 장소를 달리하는 경우가 있고, 형상은 다르면서 그 존재하는 장소를 같이하는 경우도 있다. (이것은 혼동하기 쉬운 것이긴 하지만) 분별하여야만 하는 것이다. 형상은 같으면서도 장소를 달리하는 경우는 그것을 하나의 명칭으로 합칠 수는 있으나 (실제의 대상물은 둘이므로) 두 개의 실체라고 한다. 형상은 변했으나 실제의 대상물은 하나이면서 이름을 달리하는 경우는 이것을 화(化, 즉 변화현상의 의미)라 한다. 변화는 있으나 실제의 구별은 없는 것을 (실제의 대상물은 하나이므로) 하나의 실체라고 한다. 이것이 사물에 대하여 실제의 대상을 고려하여 수량을 정하기 위한 근거이다. 이것이 명사를 제정하는 원칙이다.(<순자(荀子)>정명(正名)편)
묵자의 正名사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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夫辯者. 將以明是非之分. 審治亂之紀. 明同異之處察名實之理. 處利害. 決嫌疑. 焉摹略萬物之然. 論求群言之比. 以名擧實. 以辭抒意. 以說出故以類取以類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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夫辯者. 將以明是非之分. 審治亂之紀. 明同異之處察名實之理. 處利害. 決嫌疑. 焉摹略萬物之然. 論求群言之比. 以名擧實. 以辭抒意. 以說出故以類取以類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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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릇 분별한다고 하는 것은 옳고 그름을 명확히 나누고자 하는 것으로, 어지러워지는 실마리를 살펴서 다스리는 것이다. 같고 다른 것을 명확히 하고 이름과 실재의 이치를 살피어 이롭고 해로운 것을 구분하고, 의심을 해결한다. 어떻게 만물의 있는 그대로를 본떠서 (이름으로, 언어로) 요약할 수 있는가? 모든 말을 견주어 비교하여, 이름으로써 실재를 들며, 다큐먼트모드로 의미를 서술하고, 쓰레드모드로 연고를 밝히어 이들 집합의 패턴으로서 상호간에 의사를 주고 받는다.
노자의 정명사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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道可道 非常道 名可名 非常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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道可道 非常道 名可名 非常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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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가 도라고 할때에도 그것은 영원한 도는 아니요.
이름을 이르더라도 그것을 영원히 이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道德經小解 BY Christle the bard-_-
(자세한 번역은 차후 기재(記載)할 도덕경번역1장을 봐주시길)
이름을 이르더라도 그것을 영원히 이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道德經小解 BY Christle the bard-_-
(자세한 번역은 차후 기재(記載)할 도덕경번역1장을 봐주시길)
노자에서 정명을 딱 집어서 정명이라고 표현하는 부분은 없습니다. 그러나 저는 1장의 첫글을 정명에 관한 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도가 어떤 것이냐는 것은 별도의 논의가 필요로 하겠지만, 분명한 것은 名(무엇을 무엇으로 이르다는 뜻)이 정명(正名)되더라도 그것은 영원한 名은 아니라는 것이지요. 이는 본질적으로 나타나는 道와 그것을 지칭하는 名이 완전히 개념에 가깝더라도 그것은 변화하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흔히 무엇을 일러도 변하지 않는다는 것은 공간적(空間的)인 사고의 발현일 것입니다. 여기에 노자는 시간적인 개념을 추가하는 것이지요. 시간이라는 것은 영원히 변화하는 것입니다. 우주는 공간과 시간을 아우르는 말임을 비추어볼때(往古來今이 宇요, 西方上下가 宙라 -淮南子), 우주의 시간성을 도의 개념에 정식으로 포함시킨 분은 아마 노자가 처음일 것입니다. 노자의 正名은 차후에 새로 살필 것이지만, 암튼 正名의 변화는 이와 같습니다. 1장이후에 따르는 말도 모두 道와 그것을 이르는 名의 관계를 지칭하고 우주의 원리를 譯(역)하는 말이지요. 다른 도장경본(道藏經本)을 비교해보면서 궁리하면 더 의미가 확실합니다.
강증산의 정명사상 ¶
조선조의 3대이인이라면 증산 강일순, 일부 김항, 수운 최제우라고 합니다. 그중에서 증산의 사상은 매우 독특하고 의미가 값진데요. 그는 경전에 나와있는 글뿐만 아니라, 민중의 글과 지명에서도 정명사상을 논하였다는 데서 그 특징이 있습니다. 증산이 묵가(墨家)의 영향을 깊히 받았다는 것은 자하의 설인데요. 묵가에서만 볼 수 있는 민중사상의 실천의 예를 증산의 일생동안 수없이 찾아볼 수 있기 때문이지요. 그는 제자의 이름을 고쳐주는 행동(弟子 致化之名 改之致福 化之音也 與禍同音 故爲改之:제자 치화의 이름을 치복으로 바꾸었습니다. 化의 음이 禍의 음과 같은 이유입니다. 고로 바꾸었습니다.)등을 통해서 정명을 실천해나갔습니다. 더구나 글의 意와 表뿐만 아니라 音까지도 正名의 개념에 넣은 것은 증산사상에서만 볼 수 있는 혁명적인 이론입니다.(증산의 사상중에서 公事論이 있습니다. 대순에서는 이러한 정명론을 발음공사(發音公事)라고 합니다.)개인적으로 증산에 대한 연구는 오래해왔는데요. 그것이 결국은 기존의 교단(大巡, 甑山道)을 탈퇴하게 된 원인이 되게 되었습니다. 암튼 증산사상에 대한 이야기는 다음에 자세히 하지요.
See also 정명학과정명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