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자룡의장판교전투

FrontPage|FindPage|TitleIndex|RecentChanges| UserPreferences P RSS
조자룡의장판교전투는 당시 아기였다가 나중에 유비의 뒤를 이은 유선을 구하기 위해 조자룡이 홀로 말을 타고 유선을 구한 이야기이다.

나관중의 <삼국지연의> 의 기록에 의하면,
{{|
조조의 대군이 형주로 밀고 들어갔을 때, 유비는 10여 만의 군사와 백성을 이끌고 신야에서 강릉으로 향하게 되는데, 그때 장비에게는 후방을 맡기고 조운에게는 가족을 부탁했다. 당양에 이르렀을 때, 조조군에게 추격을 받아 저항할 기획도 갖지 못하고 군사들과 백성들은 혼란에 빠졌다. 유비는 처자를 내팽개치고 남쪽으로 도망치고 말았다.

혼란의 와중에서 유비의 가족과 떨어진 조운의 주변에는 기병 30~40명만이 따를 뿐이었다. 그는 어지러운 전쟁터를 이리저리 헤매며 간옹과 감부인을 찾아내고, 조인의 부하 장수인 순우도를 찔러 죽인 후 미축을 구해낸다.

감부인 등을 장판까지 데려다준 조운은 되돌아가 미부인과 유선을 찾아다니다 도중에 조조의 부하 장수인 하후은을 죽이고, 조조의 자랑거리인 청홍보검을 빼앗는다. 이때 조운에게는 따르는 사람이 한 명도 없었고, 창 한 자루와 말 한 필뿐이었지만 추호도 물러서지 않았다. 오로지 유선을 찾아 다니다 토담 뒤의 마른 우물 옆에서 미부인과 유선을 발견했다. 더구나 미부인은 깊은 상처를 입고 있었다.

그녀는 조운이 몇 번이나 "이 엄중한 포위망에서 구하겠습니다."라고 했지만, 짐이 될 뿐이라며 우물에 몸을 던져 죽는다. 조운은 미부인이 목숨을 끊는 것을 보고, 조조의 군사에게 시체를 욕보이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고는 토담을 무너뜨려 마른 우물을 덮었다. 그리고 나서 즉시 가슴에 대는 갑옷끈을 풀어 엄심갑(가슴을 보호하는 쇠판) 아래 유선을 품고, 말에 올라 쏜살같이 포위망 속으로 돌진했다. 도중에 조홍의 부장인 안명을 창으로 찔러 죽이고 길을 열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장합의 부대가 습격해 왔다. 조운은 장합을 피해 옆으로 도망치다가 사람과 말 모두 구덩이에 떨어졌다. 장합이 즉시 창을 내찌르려고 했을 때 한 줄기 붉은 광선이 구덩이에서 떠오르며 말을 탄 조운이 하늘을 가르고 뛰어올랐다. 이 광경을 본 장합은 몹시 놀라 도망치고 말았다.

경산 정상에서 그 광경을 내려다보던 조조는 조운의 기세를 보고 부하에게 말했다.
"활을 쏘아서는 안 된다. 생포하라."

엄중한 포위를 뚫고 탈출했을 때, 조운의 옷은 피로 물들어 있었다. 유비를 만나자마자 그는 말에서 내려 엎드려 울며 책임을 다하지 못한 죄를 빌고는 가슴 속에 잠들어 있던 유선을 유비에게 바쳤다.
|}}


이 일의 진위 여부에 대해서는 [http]거꾸로보는삼국지 에서 기술되고 있다.
페이지를 찾을 수가 없다고 나오네요.


군대를 갔다 왔거나 데모를 해 본 사람이라면, 이러한 사실을 믿기는 쉽지 않은 일이다. 아무리 무예가 출중한 사람이라도 몇백, 몇천의 사람과 대적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김용의 소설에서만 하더라도 비교적 초기 작품인 <사조영웅전> 에는 곽정이 홀로 백여명의 몽고군을 손끝하나 다치지 않고 쉽게 처리하는 장면이 나오지만, 다음 작품인 <신조협려>에는 주백통과 같은 고수도 전쟁 속에서 상처를 입는 장면이 나온다. 후기 작품으로 갈수록 이러한 경향은 더 두드러지게 나타나서, 보다 사실에 가까운 묘사를 하고 있다. 최근 우리나라에서 일어난 신무협이라 일컬어지는 무협의 장르에서는 더욱더 사실적인 묘사가 특징이다. 아무리 무예의 고수라도 쪽수를 당해낼 수가 없다. 더욱이 수백, 수천명이 한꺼번에 맞붙어 싸우는 전쟁 속에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자룡의 장판교 전투를 다음과 같이 해석하는 시각도 있다.

때로 전해내려 오는 병기들 중에는 도저히 사람이 들 수 없을 정도의 크고 무거운 것들이 있다. 들기조차 힘든 이러한 병기들을 가지고 전쟁에 나가서 싸운다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기 때문에, 이것들은 의식용이라는 설이 지배적인데, 혹자는 이런 병기들은 위급한 상황에서 구명용으로 사용되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주군이 위험에 처했을 때, 호위무사들은 이러한 병기들을 사용하게 되는데, 발도나 출검식을 팔힘으로 할 수가 없기 때문에 발로 차서 하게 되며, 그 뒤로는 눈 앞에 걸리는 건 무조건 베며 전진하여 활로를 뚫는 것이다. 이들은 이러한 병기를 사용하는 방법을 특별히 훈련받는데, 아마도 바바의 WhirlWind 와 같은 초식을 사용했을지도 모른다. ^^

조자룡이 수백, 수천의 모여드는 적의 포위망을 뚫기 위해서 사용한 검법, 창법이 바로 이러한 종류의 것이었을 가능성도 있다. 물론 무기가 다르기 때문에, 내공을 바탕으로 했을 것이다.

고구려의 연개소문, 임진왜란때의 정기룡 장군 등의 무예가 이런 류의 것이었다는 설도 있다. 믿거나 말거나... ^^

삼국지에서의 인원수는 그대로 믿을 만한 것이 못된다는 것이 지배적인 생각인 것 같습니다. 게다가 나관중이 상당부분 부풀리거나 없는 내용을 만들어 넣었다는 등의 글은 이문열씨의 번역에서도 나옵니다. 그래서 전에는 조자룡의 무용을 멋있게 그리고 싶어서 그냥 소규모 전투에서 벌어진 일을 크게 부풀려 수많은 적들 가운데서 전투를 벌었다는 식으로 묘사한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근데 얼마전 중국 여행 다녀왔는데...사람 정말 많더군요. 진짜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_-; 또 상당수 병사들이 생업에 종사하다가 군사를 일으킬 때만 동원되는 예비군 성격을 띤다고 생각해보면... 상대편 용맹스런 무장이 달려들 때 굳이 맞부딪칠 필요가 없다면 피했을 거란 생각이 듭니다.

조자룡의 무예는 알려진 것보다 출중하지 못했다..라는 설도 있습니다. 삼국지의 진행과정을 보면 조자룡이 선두에 나서서 하는 전투가 별로 없습니다. 그만큼 뛰어난 장수였다면 최소한 돌격대(?)같은 형식으로라도 앞에서 싸우는 일이 있어야 할텐데, 큰 전투에서는 대개 그는 제외당합니다. --이기

아무리 무예가 출중한 사람이라도 몇백, 몇천의 사람과 대적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평지에서 기마의 무서움이란 대단한 것이지요. 장병을 든 기병이 보병을 유린하는 장면은 쉽게 상상이 갑니다. 다소의 과장은 있었겠지만, 근거없이 허황되기만한 이야기는 아닌듯 합니다. 내공문제는, 삼국시대는 내가무술이라는 개념이 생겨나기 이전이라는 말로 설명이 가능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리고 김용은 '서검은구록'에서 시도했던 무술의 사실적인 묘사를 일찌감치 포기하여, '신조협려'에서는 사언시 검법을 등장시키는 등 현실적인 무술관을 포기하고 무술에 대해 사실적인 묘사보다 관념적이고 미려한 언어를 중시하는 태도로 일관하게 됩니다. 이는 은퇴작 '녹정기'에 이르기까지 계속되는데, 녹정기에서는 스치기만 해도 사람의 피가 굳게 만드는 무술이 등장하기도 하고, 스치기만 해도 온몸이 녹아 물로 변하는 비현실적인 독약이 등장하기도 합니다.
최근 우리나라에서 일어난 신무협이라 일컬어지는 무협의 장르에서는 더욱더 사실적인 묘사가 특징이다.
사실적(?) 묘사는 좌백이나 설봉, 조철산 등 일부 작가의 작품 중에서도 초기 일부 작품에서만 보이는 특징으로, 풍종호, 진산, 고명윤, 한수오, 석송, 무악, 하성민, 유사하, 녹수영, 냉죽생, 금시조, 정진인, 임호, 몽강호 등의 소위 '신무협'의 기치아래 무협의 부흥기를 주도했던 더욱 많은 수의 작가들에게는 해당되지 않는 내용입니다. 그리고 건강상의 문제로 한동안 펜을 놓고 있었던 작가 설봉을 제외하면 사실적(?) 묘사를 시도했던 나머지 다른 작가들은, 그런 방식을 실질적으로 포기한 상태입니다.

안형진이 생각하기에는 가능도 했으리라 생각된다. 수백명 아니라 수천명도 가능하지 않았을까. 왜냐하면, 당시 하급 군졸들의 복장이 가죽갑옷조차 갖추지 못하고 무기라고 해야, 철기보다는 청동류가 대부분이었다고 가정하고, 조운을 비롯한 고급 장교들이 사슬갑옷을 비롯한 각종 방어구로 중무장하고 튼튼한 말과 비싼 철로 만들어진 창이나 검(조운은 장판교에서 조조의 청공검을 손에 넣는다)을 펼친체, 소위 밀고 나가면, 하급 군졸들은 그야말로 추풍낙엽처럼 쓰러지지 않았을까? 게다가 체격조건에도 크게 차이가 있었으리라 짐작된다. 철기와 청동기의 차이, 갑옷과 비갑옷의 차이는 실제로 엄청나다. 롤플레잉 게임 등에서 가죽 갑옷보다 바로 상급의 갑옷에 보통 사슬갑옷을 두는 편인데, 창을 사용한 정확한 찌르기나 곤봉등을 이용한 정확한 타격이 아니라면 사슬갑옷을 그야말로 천하무적이다. 청동갑이나 철갑은 그 이상이리라는 걸 쉽게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하다못해 가죽갑옷조차도 보통 보검이 아닌 이상 쉽게 꿰뚫기 힘들다. 당시 성인의 영양상태를 염두에 두고 운동장 한가득히 서 있는 중학생들을 상상해보면 수백명에서 수천명의 군졸들이 아비규환 전장에 흩어져있고 중무장한 조운이 준마를 타고 바람처럼 헤집고 다니는 것이 불가능하지는 않은 듯하다.
방어구로 중무장을 하고 칼까지 들고 뛰어다니면 무지하게 힘들지 않을까요? 사람같지 않은 UFC 대회 선수들도 3분을 넘기면 복날 개처럼 지쳐서 쓰러지거든요. --asiawide

참고: 안형진은 오래전에 역사 스페셜에서 당나라군에 대항한 신라군의 전술을 소개하는 프로를 흥미롭게 시청한 적이 있다. 당시 당시나라군은 대부분 철기병이 주력부대였고, 신라군은 보병이 대부분이었는데, 신라가 장창부대 전술과 신종 강노(强弩)를 사용하여 당나라 철기병을 어렵사리 물리쳤다고 한다. 당나라라면 삼국지의 배경인 삼국시대에서도 진-오호십육국-동진-남북조-수 등을 거쳐 오랜 세월 후에 등장한 왕조다. 그럼에도 당시 당태종은 신라군의 전술에 대패했고, 결국 군대를 철수한 후에 신라조정에 요청하여 강노 기술자를 보내달라는 부탁까지 한 것을 보면, 후한-삼국시대의 군사적 전술은 소설 삼국지에 묘사된 것보다 더 하등한 수준이었거나 혹은 보다 단순했으리라는 짐작을 해볼 수 있다. 즉, 군대의 수적 우열보다는 고급장교들의 장비의 수준이 전세를 가름하지 않았는가 싶다. 삼국지 초반부에 일기토가 자주 등장하는 것, 장수의 키와 체격으로 그 장수의 용맹함을 가늠하는 관행 등을 보면 더욱 확신이 든다. 즉, 적벽대전만 하더라도 조조의 기백만 대군이라는 것은 허장성세일 뿐 강동의 우수한 조선술과 해전을 위주로 발달한 무기에 무릎을 꿇은 것이지, 제갈량의 그 유명한 동풍(東風) 화공(火攻)의 역할은 고급무기를 바탕으로 한 부차적인 전술에 불과하지 않았나 싶다.

실제 조운은 무력보다는 수명으로 유명한 장수로 알고 있습니다. 오래 살았던 장수이기 때문에 오히려 전성기때의 평가가 더 높아졌다고 들었습니다. --씨엔


"; if (isset($options[timer])) print $menu.$banner."
".$options[timer]->Write()."
"; else print $menu.$banner."
".$timer;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