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식과지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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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은 머리에서 나오고, 지혜는 마음에서 나온다.

지식은 직접 전해줄 수도 있지만, 지혜는 직접 전해줄 수 없다.

지식은 연속적이다. 어렴풋이 아는 상태가 있을 수 있다. 사실 우리가 아는 모든 지식은 불명확하다. 하지만 지혜는 불연속적이다. 깨닫던지, 못 깨닫던지 둘 중의 하나이다.

지식은 있는 그대로의 서술과 설명으로써 전달하는 것이 가장 효과적이다. 반면, 지혜를 전달하는 가장 쉬운 방법은 메타포를 사용하는 것이다.

지식에 대한 설명은 결정적(deterministic)이다. 동일한 지식을 이 세상 끝에 떨어진 서로 다른 두 사람이 설명한다 하더라도, 핵심적인 내용이 틀릴 수는 없다. 하지만 지혜에 대한 메타포의 선택은 결정적이지 않다. 거기에는 옳고 그른 것이 없다. 적절한 것, 부적절한 것이 있을 뿐이며, 아름다운 것, 아름답지 못한 것이 있을 뿐이다.


성경이나 불경처럼 아름다운 메타포난무하는 서적은 드물다. 라마크리슈나, 라마나마하리쉬, 라즈니쉬 같은 깨달은 사람들 또한 아름다운 메타포를 구사하였다.

깨달음의 단계에서 인간은 최대한의 창조지성 Creative Intelligence을 발휘하게 된다. 따라서 모든 지식의 경계가 무너진 순수한 잡종적지식아이러니에 다가서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아름다운 메타포를 만들어낸다.

하지만 모든 깨달은 자들이 메타포에 의지한 것은 아닌 것 같다. 크리슈나무르티는 모든 걸 직접적으로 말했다. 그것이 그의 위대한 점이지만, 문제는 듣는 사람들이 그것을 머리로만 이해하고 말았다는 것이다. 마치 지식에 대한 이해처럼.


인간에게는 감성과 이성이 있다. 감성은 우리에게 좋은 것과 싫은 것, 아름다운 것과 추한 것을 느끼게 한다. 우리는 감성을 통해서 사물을 일차적으로 바라보고 판단한다. 감성은 우리 주위의 모든 자극을 다 수용한다. 하지만 이러한 따스함은 너무 연약하여 옳은 진리를 지탱할 수 없다. 이 진리를 지탱해 주는 것은 이성이다.

이성은 너무나 차디차서 진리가 샘솟진 않으나, 감성이 퍼부어내는 진리를 지탱해 준다. 이성을 통해서 옳고 그른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성은 우리가 옳은 길로 가도록 인도해 준다. 우리가 감성에 치우쳐 자신을 돌보지 않을 때 이성은 우리에게 찬물을 끼얹는다.

감성은 감성대로 이성은 이성대로 역할이 뚜렷하다. 문학가, 예술가들은 이성을 두들겨 유연한 감성을 지어낸다. 이성으로 치우쳐 무미건조할 우리의 삶을 아름답게 해준다. 그들이 만든 작품 세계는 보편적인 것보다는 독특한 측면이 강조된다. 남의 것을 흉내내는 것은 수치이다. 남이 느껴 보지 못한 것, 느꼈을지라도 제대로 표현하지 못한 것을 드러내야 한다. 그럼으로써 그들은 우리의 감성 세계를 더욱 풍성하고 다채롭게 해준다. 이것이 그들의 공덕이요 은혜이다.

한편 과학자들은 출렁이는 감성을 억제하여 딱딱한 이성 논리의 벽돌을 쌓아 나간다. 감성으로 치우쳐 혼란할 우리의 삶을 질서 있게 해준다. 그들이 이룬 업적에서는 특수한 것보다 일반적인 것이 강조된다. 모든 사람이 쉽게 공감할 수 있는 것이라야 한다. 그들은 보통 사람이 쉽게 지나쳐 버릴 것에 주의를 집중하여 보편적인 원리를 이끌어 낸다. 그럼으로써 우리 주위의 환경을 변화시키고 삶을 풍요롭게 해준다. 물질 문명은 실로 이들의 공덕이다.

감성과 이성이 마음 속에서 하나가 되어 만날 때 진리는 불꽃을 터뜨린다. 지식과 지혜는 그 불꽃들이다. 지식의 측면에서 지식과 지혜를 말한다면 지식은 정보량이다. 많이 알고 있느냐 적게 알고 있느냐이다. 지혜는 그 정보의 활용 정도를 나타낸다. 같은 지식을 갖고 있으면서도 그 지식을 잘 풀어서 현실에 적용시키는 사람이 지혜로운 사람이다. 지식이 다른 사람들이 똑같은 일을 똑같은 시간에 해냈다면 지식이 적은 사람이 더 지혜로운 사람일 것이다. 그는 적은 지식을 잘 활용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혜의 측면에서 지식과 지혜를 말한다면 지식은 외부에서 경험을 통해 얻은 것이요, 지혜는 내부에 잠재되어 있는 것을 드러낸 것이다. 지식을 얻기 위해서는 많이 관찰하고 생각하고 사물에 집착해야 하지만 지혜는 정반대이다. 끊임없이 일어나는 사물에의 선입관이 잠잠해질 때, 찾으려는 외부 세계가 이미 자신 속에 간직되어 있음을 자각하게 되는 것이다.

지식은 분별을 전제로 한다. 분별 이전의 하나의 상태에서는 지식이 있을 수가 없다. 분별 혹은 분별하여 나누어진 것들이 있어 그들의 상호 관계가 확실한 참 명제가 될 때 그것이 지식이다. 그 지식을 얻을 때 '안다' 라고 한다.

지혜는 우리의 선입관이 지어 놓은 분별의 세계가 사실은 분리될 수 없는 하나의 세계라는 것을 자각하는 것이다. 따라서 지혜에서는 외적인 감각이 오히려 거추장스런 장애물이 될 수 있다. 그 감각이 깨져 모든 것이 하나라는 지혜에 도달할 때 '깨닫는다' 라고 한다. 이것은 일종의 체험이다. 우주가 상호 작용하는 많은 요소로 이루어진 통합된 전체라고 할 때, 많은 요소에 집착하는 것이 지식이요 통합된 전체에 이르는 것이 지혜이다.

지식은 언어로 표현된다. 수식으로 된 언어, 글로 된 언어, 말로 된 언어, 이 모든 것들이 지식을 표현하는 수단이다. 지혜는 언어로 표현되지 않는다. 언어란 원래 분별에서 생긴다. f=ma, 꽃, 사과, 사람, 정치, 사랑, 개념 따위의 모든 언어는 분별한 것을 표현하기 위해서 생긴 것이다. 따라서 지혜는 근본적으로는 언어로 표현이 안 되지만 비유와 상징으로 표현되곤 한다. 그리고 체험에 따른 행위로서 드러난다.

지식이 있는 자는 그 지식을 말로써 표현하지만 행위로 옮기는 사람은 매우 드물다. 하지만 사물의 이치를 깨달은 사람은 그것을 행동으로 표시한다. 그는 모든 것이 자기와 분리되지 않은 하나라는 것을 체득했기 때문에 모든 것을 포용한다.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인정해 주고 아껴 준다. 이것이 사랑이다. 사랑은 언제나 그 뿌리를 지혜에 두고 있으며 지혜의 열매는 언제나 사랑이다. 이것이 거룩한 성인의 마음이다.

지식을 많이 얻은 자는 남을 이롭게 할 수도 해롭게 할 수도 있다. 이것은 위태롭긴 하나 큰 추진력이 있어 위대한 영웅을 길러 낸다. 진실로 큰 지식은 그 한계를 알기 때문에 지혜를 존경한다. 진실된 성인은 영웅의 모습이 될 수도 있고 진실된 영웅은 성인이 된다. 지혜를 닦고 지식을 알아 세상과 더불어 보자. 지혜와 지식은 등불이 되어 길을 안내할 것이다.

- 우주변화의원리를 통하여 본 지식과 지혜에 대한 생각 (김정현)

BertrandRussell의 글 : Knowledge and Wisdom [http]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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