쓴귤이 TheBrights 사이트를 훑어본 바로는 서구 근대를 규정지은 계몽주의(Illuminism)의 때늦은 흥기(興起)라고 생각한다. 계몽주의의 주요한 특징은 이성에 대한 신뢰, 세계에 대한 자연주의적 접근 등을 꼽을 수 있고 TheBrights는 여기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게다가 '계몽'의 메타포가 항상 '빛'이었다는 사실에도 부합한다. 계몽은 영어로 enligntenment이고 칸트가 "계몽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답변"에서 인용한 단체의 이름은 Illuminant였다.
칸트는 위의 글 "계몽이란..."에서 계몽을 "비겁과 게으름으로 인한 정신적 미성년 상태로부터 벗어나는 것"이라 규정한 바 있다. Illuminant의 슬로건은 "우리는 알 수 있다"였다. 이를 종합하자면 인간은 알 수 있는데 만약 모른다면 그것은 비겁과 게으름으로 인한 것이라는 게 계몽주의의 관점이다. 이와 유사한 슬로건은 20세기 초 힐베르트 프로그램에서 반복된다. "우리는 알 수 있고, 알아야만 한다."
계몽이 베버가 말한 '탈마술화'에 크게 기여했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다. 한편 계몽이 끼친 폐해 또한 만만치 않은 것이었다. 특히 2차세계대전 이후 지금까지 계몽에 대한 비판이 전개되는 시점에 계몽주의의 재래는 아이러닉하다.
근대 철학의 특질 중 하나는 인식론의 비약적 성장이다. 다른 시대의 철학과 대비되는 점이다. 근대 이전 철학에서 주요한 분야는 존재론을 중심으로하는 형이상학, 자연학(본래 형이상학metaphysics의 어원은 아리스토텔레스 전집의 편재에서 유래한다. 자연학physica 뒤에meta 나오는 책들이라는 뜻이다), 그리고 윤리학 또는 정치학이다. 크게 나누어 세계가 어떻게 이뤄져 있는가와 함께 인간은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를 논하는 것이 중심주제였다. 반면 근대 철학에서는 자연학의 철학으로부터 독립과 함께, 근대 철학은 자연학의 전제를 검토하는 학문이 된다. 인식론의 중심적인 주제는 인간이 진리를 어떻게 인식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인데 이것은 형이상학과 다른 의미에서 meta-physica이다.
여기에는 다시 전제가 필요하다. 즉, 진리란 무엇인가? 진리란 존재하는가?라는 질문이다. 그러나 근대 철학에서는 이 질문은 칸트에 이르기까지 계속 유보되어 왔다. 그리고 칸트에 이르러는 '물자체'(Das Ding an sich, Thing Itself)라는 개념으로 '요청'되기에 이른다. 칸트 철학에서 요청이란 한마디로 입증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필요한 것이다. 즉 '물자체'를 요청한 상태에서 근대 철학 나아가 계몽주의는 진리에 대한 인식을 향해 나아간다. 이것이 계몽의 아이러니인데 비합리적인 믿음으로부터 벗어나고자한 계몽이 결국 '믿음'으로 회귀하는 지점인 것이다.
이러한 '믿음'이 만들어낸 것은 참혹한 결과였다. 앞서 얘기했듯이 계몽에 대한 회의를 불러일으킨 2차세계대전은 그야말로 계몽과 계몽이 신뢰한 이성의 극단적 양태가 어떻게 전개될 수 있는지 처절하게 보여주었다. 가장 발달한 과학은 사람을 죽이는 데 사용되었고, 고도로 효율화된 조직은 아무 죄책감도 없이 사람을 죽이는데 이용되었다. 아우슈비츠는 그 계몽의 단상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데, 나치 과학자는 그저 효율적인 가스를 만드는데 골몰했고 나치 관료들은 한 명이라도 더 많은 유태인을 죽였는가를 기준으로 일했다.
이런 역사적 사실로부터 전개된 계몽에 대한 비판은 간단히 말해서 계몽이 전제하는 '이성'이라는 것이 결국 서구-남성-근대-부르주아 중심적인 하나의 '시각'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폭로하는데 집중되었다. 과학이 '가치중립적'이라고 말하는 순간 이미 그 자리에는 오히려 가치가 전제되어 있다. 즉, 근대 과학은 가치 중립적인 것이 아니라 주어진 가치에 대해 되묻지 않는 것이다. 그 점에서 과학은 이미 가치적이다.
이점에서 '합리성의 비합리성'이라 불리는 지점이 형성된다. 근대 과학의 합리성(rationality)가 집착한 Rational은 이성과 동시에 비율을 뜻한다. 근대 과학은 수학적 환원에 기초하는 데, 이것은 수학적으로 환원할 수 없는 모든 것을 사상(捨象)한다. 계몽이 전제한 합리성이란 가치 즉 목적의 합리성을 묻지 않는 합리성이라는 것이다. 가치는 수학적으로 환원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문제는 공리주의의 어긋난 시도, 윤리를 수학적으로 환원하려는 태도에서 극단적으로 전개된다.
물론, 계몽에 대한 이런 비판이 전근대의 삶을 찬양하는 것으로 귀결되지는 않는다. 계몽이 결여한 반성적 사유, 주어진 전제를 돌아보고 비판하는 태도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것은 자연주의적 세계관이 결코 제공할 수 없는 것이다. 자유라는 이름으로 이라크에 최첨단 폭탄을 퍼부은 나라에 얼마나 더 많은 자연주의가 또 필요하다는 말인가.
TheBrights 사이트를 훑어본 바로는 서구 근대를 규정지은 계몽주의(Illuminism)의 때늦은 흥기(興起)라고 생각한다. 계몽주의의 주요한 특징은 이성에 대한 신뢰, 세계에 대한 자연주의적 접근 등을 꼽을 수 있고 TheBrights는 여기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게다가 '계몽'의 메타포가 항상 '빛'이었다는 사실에도 부합한다. 계몽은 영어로 enligntenment이고 칸트가 "계몽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답변"에서 인용한 단체의 이름은 Illuminant였다.
계몽주의적인 입장을 취하는 바가 있다고해서, 현재, Bright 곧, "자연주의자들"이 하고 있는 모든 활동들이 전부 부정되어야 하는 것이라고 혹시라도 보고 계신다면, 그것이 혹시라도, "목욕물을 버리려다 아이까지 버리는"상황이 되는 것은 아닌지, Roman은 대단히 궁금합니다. 서구 근대를 규정지은 계몽주의의 때늦은 흥기라기보다는 전근대로 돌아가고 있는 사람들의 인식에 대한 현 시점에서의 경고가 되는 것은 아닐까 생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만약, Bright가 말하는 계몽주의가 철학적 사조로서의 계몽주의가 말하는 것과 일치한다면, 그것은 야만, 또는 전근대적인 판단으로 회귀하고 있는 인식에 대한 경고일 수 있다고 봅니다. 때늦은 흥기라기보다는 다시금 '계몽주의'가 필요할 정도의 야만적인 시기가 다시금 도래했다는 것이 맞는 말이 아닐까 싶습니다. 아이러닉한 상황이라기 오히려 좀 더 위험하고 위급한 상황에 따라 나온 것 같기도 하네요.
마지막 자유라는 이름으로 이라크에 최첨단 폭탄을 퍼부은 나라에 얼마나 더 많은 자연주의가 또 필요하다는 말인가이라는 문장은 제가 보기엔, 사이트를 제대로 보셨다면, 나올 수 없는 표현이 아니었을까라는 생각이 드네요. Bright는 분명히 현재, 전쟁을 벌이고 있는 미정권에 대해서 '회의적'인 반응을 보이는 사람들이 많이 올만한 사이트이지, 전쟁을 찬성하는 사람들이 올만한 곳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계몽주의'에 대한 비판이 Bright에 대한 비판과 동일한 것이 될 수 없으며, 미국에 대한 비판이 미국내에서 자국에 대한 비판을 하는 자연주의자들까지 싸그리 부정하는 것과 일치할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이것이 오히려 아이러닉한 상황이 된 것이 아닌가 싶네요.
"계몽주의" 자체에 대한 비판은 잘 들었습니다.
이라크전에 참전하는 미국의 논리 중에는 기독교적인 배타적인 자기 중심 주의가 차지하는 영향력 또한 무시할 수 없는 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현재, 그 사이트에 나와 있는 Enlightenment는 현재의 미국에서 자행되고 있는 현시점에서 비합리적인 공화당 정권의 종교의 힘을 빌어서 벌어지는 야만을 계몽하자는 단어로서 긍정적인 부분을 갖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자유라는 명분뿐만 아니라 신의 이름으로 '악'의 세력으로 보는 이라크에 최첨단 폭탄을 퍼부은 나라가 미국이라면, Bright가 하고자 하는 계몽은 현재의 미국이 '신의 이름'을 빌은 무지한 폭력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이라고 봅니다. 그것은 철학적 사조에서의 계몽주의를 말하는 것과는 시대적인 배경과 상황이 다른 것이란 이야기입니다. 다른 배경과 상황에서 '계몽'이라는 말 자체는 이전에 말해진 것과 동일한 것이 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우리가 만약, Bright로서 활동하고자 한다면, 그것은 현재의 악몽같은 문제 상황에 대해서 취할 수 있는 방법들 중에 하나를 택한 것이고, 그것은 나름대로의 적기를 타고 선택할 수 있는 행동중에 가능성 있는 하나를 선택하고 있는 것입니다. TheBrights 가 가지고 있는 계몽주의적 한계를 보고 있다면, 이것을 벗어나기 위해서 Bright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요? 아니면, 합리적 이성주의의 한계 자체를 벗어나서, 현재, 우리가 이 세계에서 벌어지고 있는 악몽같은 전쟁이나 사람들의 고통을 더 가라앉히기 위해서 할 수 있는 의미있는 다른 일들이 있다면 그것들로는 어떤 것들이 있을까요? 비판에 이어서 Roman의 질문에 대해서도 의미있는 대안을 주실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
이러한 Roman의 생각이 대단히 잘못되어 있는 것으로 판단된다면, 쓴귤님이 여기에 대해서, Roman을 위의 쓴귤님의 글처럼 enlighten 시켜주신다면 또한 대단히 감사하겠습니다.--Roman
몇 가지 먼저 지적하자면 계몽주의는 전근대적 사조가 아닙니다. 계몽주의는 '근대'라고 불리우는 시기의 특질입니다. 이점에서 계몽주의는 철학적 사조인 동시에 철학적 사조 그 이상입니다. 다시말해 근대의 보편적 관념이기도 하다는 말이지요. 여기서 '근대'는 흔히 쓰이는 것과 같이 '현대보다 이전 시대'를 말하는 게 아니라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시기를 포함하는 시기를 말합니다. 사이트에서 Daniel Dennett의 에세이 'The Bright Stuff'에 아래와 같은 문장이 있습니다. 여기서 the Enligntenment란 18세기 유럽에서 일어난 계몽운동을 일컫습니다.
The term "bright" is a recent coinage by two brights in Sacramento, Calif., who thought our social group — which has a history stretching back to the Enlightenment, if not before — could stand an image-buffing and that a fresh name might help.
TheBrights와 미국의 보수주의자들은 저도 구분합니다. 그러나 이 둘은 어떤 점에서 거울쌍입니다. 부시 미 정권을 보면 낭만주의적 수사학을 즐겨 쓰는데 이것은 나찌즘을 비롯한 파시스트 수사학의 전형적인 형태입니다. 하지만 이들이 비합리주의자냐 하면 그건 아닙니다. 극도로 효율적이고 합리적이라는 점에서 이들은 근대인이고 합리주의자입니다. 이를테면 2003년 초 미국의 이라크 전쟁 계획은 최첨단 과학무기들과 고도로 조직화된 군대 그리고 지극히 효율적인 전략에 기반해서 수행되었지요. 이들이 진정으로 신의 섭리를 따르는 자들이었다면 불벼락이 내리기를 기도해야지 이런 짓을 하고 있어서는 안됩니다. 실제로 낭만주의자들은 가치적 표현들을 과거로부터 끌어오는 이들이지 실제로 과거의 삶을 답습하는 사람들은 아닙니다. 사실 이들은 이라크의 석유를 비롯한 수지타산에 민감하게 반응하고 있고 이런 이해를 표현하는 언어가 단지 '신의 섭리'일 뿐입니다. 이 점에서 미 보수파들은 자신의 이익이 무엇인지 알고, 그 이익을 실현시키기 위한 최선의 수단이 무엇인지 아는 합리적인 인간, 근대인인 것입니다. 이 근대인의 정의는 또한 경제학이 전제하는 인간에 대한 정의와 동일합니다.2차세계대전을 미국과 독일로 압축해보자면 이들 둘은 지극히 대별되어 보이지만 실제로 수사학을 걷어내고 보면 아주 동일합니다. 효율적으로 유태인을 가스실에 넣어 죽인 독일이나, 핵폭탄으로 대량의 민간인을 학살한 미국이나 똑같다는 말이지요. Bright의한국어이름제안에 보면 번역어로 '실증주의자'를 제안한 분이 있었습니다. 이것은 적절한 번역인데 왜냐하면 계몽주의-실증주의-자연주의는 모두 동일한 개념의 다른 표현이기 때문입니다. 실증적을 뜻하는 영어 positive에는 또한 실정적(실정법이라고 할 때 그 실정입니다)이라는 뜻도 있습니다. 실증주의자는 동시에 실정주의자이기도 한 것입니다.
앞서도 언급했지만 계몽주의-자연주의의 긍정성은 세계의 탈마술화에 기여했다는 점에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긍정성의 한계에서 필요한 것은 반성 내지는 성찰이지 더 많은 자연주의가 아니라는 얘깁니다. 미국에 자연주의가 부족해서 저 모양은 아니라는 거죠. 사실 지각있는 기독교도라면 오히려 아마게돈을 연상시키는 저 전쟁을 유쾌한 기분으로 바라볼 수는 없을 겁니다. 이라크 전쟁(침공?)은 종교적/비종교적 또는 자연주의적/신비주의적 문제가 아니라 앞서 말한 '지각' 또는 '반성', '성찰'의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오펜하이머가 핵폭탄을 만든게 어디 기독교도라서입니까.
더불어 최근 대중의 신비주의적 태도는 오히려 자연주의화된 세계가 바탕에 깔려있습니다. 기업은 효율화를 위해 구조조정을 하고, '쓸모없는'사람들은 거리를 헤매게됩니다. 미국은 물론 한국에서도 빈부격차는 증가하고 있지요. 대중에게 신비주의적 태도는 일종의 현실도피 내지는 현실에 대한 불안감의 표현이라고 생각합니다. 나찌 독일에서 유태인에 대한 증오는 결국 독일의 불안한 현실에 대한 표현이었지요. 미국의 이슬람에 대한 히스테릭한 반응은 이점에서 유사한 궤를 그리고 있다고 봅니다. 이런 점에서 자연주의적 접근은 현실에 대한 해결책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쓴귤
생각나는 바가 있어 몇 줄 더 씁니다. 근대에는 두 가지 층위가 공존합니다. 한 편에는 수학적 근대, 과정합리적인 근대가 있고 또 한편에는 교양적 근대, 목적합리적인 근대가 있습니다. 이 둘은 서로 교직되어 있으면서도 일정하게 분리되어 있습니다. 철학사에서 비유하면 전자는 영미철학에 가깝고 후자는 칸트나 헤겔의 독일관념론에 가깝습니다. 단적으로 말해 근대화는 전자가 후자를 압도하는 과정으로 나타났습니다. 헤겔의 에피고넨인 맑스가 수학적 근대인 자본주의를 비판한 것도 이 점에서보면 이해가 가는 일입니다. 저는 근대를 넘어서는 길에 대해 고민하는 사람이지만 여전히 근대적 기획, 계몽적 기획이 유효하다고 믿는 분들이라면 수학적 근대와 교양적 근대의 융합, 기든스가 말한 성찰적 근대화에 대해 고민해보는 것은 어떨지 제안드려봅니다. 이것은 자연주의라고 표현할 수 없는 어떤 것일테지만 말입니다. --쓴귤
이야기를 잘 들었습니다. 덕분에 Roman에게는 이를테면 쓴귤님에 의한 계몽이 이루어질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사람들이 이 현실의 문제점들에 대한 해결을 위해서 행동하고자 한다면, 그것은 어떤 것이어야 할 것이며, 보다 현실에 대한 해결책으로 바라볼 수 있는 것, 바로 지금 이 시점에서 취해야할 행동이 있다면 어떤 것이어야 할지에 대한 힌트라도 주실 수 없을까요? 대안이 없는 비판은 언제나 많이 보아왔고, 때마다 생각지 못했던 것이나 모르던 것을 알 수는 있었습니다. Roman과 다른 사람들, 전반적인 인류의 역사를 거슬러 세계의 밑바닥을 흐르고 있는 관념과 철학과 힘의 흐름을 볼 수 없는 종류의 사람들은 최소한 어떻게 행동을 해야, 이 세상과 자신을 위해서 좋은 것이겠습니까? 결국, 어떤 행동이 필요한 것인가에 대한 힌트는 전혀 쥐어지지 않는 것이 사색가와 대화한 뒤에 자기 자리에 남아 있는 사람들의 고통인 것입니다. 이를테면, 수학적 근대와 교양적 근대의 융합, 기든스가 말한 성찰적 근대화에 대해 고민이라는 제안은 너무 거리가 멀게 느껴져 옵니다. 비록, 쓴귤님 또는 비슷한 독서가나 사색가들에게는 대단히 간단한 내용으로 느껴지더라도 말이죠. Roman은 방대한 자기자신의 지식 또는 시스템적인 사유를 통해서 세계를 파악하는 사람과는 거리가 있는 사람입니다. 쓴귤님의 이야기를 통해서 머리 속으로는 계몽된 바가 있다고 하더라도, 손에 잡혀지는 대안이 없다면, 이미, Roman에게 한 쓴귤님의 제안은 하지 않음만 못한 것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싶네요. 새벽 가까이 이렇게 충실한 답변을 주셔서 감사합니다만, 여전히 Roman에겐 새로이 알게 된 것은 생겼어도, 행동을 위해서 필요한 내용은 전혀 없는 것 같습니다.
TheBrights의 경우에는 계몽주의라는 부분에 있어서 비판을 당하고 있더라도, 우리가 현실을 살아가면서 겪는 불합리적인 상황들에 대한 보다 즉각적인 행동의 방식을 떠올려줍니다. 이를테면, 종교적인 명분으로 포장된 전쟁(종교 자체가 만들어내는 전쟁도 전혀 없다고는 볼 수 없잖습니까?)이 사라지거나 둔화될 수 있는 희망을 바라보게 해줍니다. 두번째로, 힘을 갖고 있는 종교단체가 지적으로나 배경적으로나 저항할 힘이 그다지 없는 개인들에게 피해를 끼치는 사례들에 대항할 수단이 생길 것이라는 전망을 하게 해줍니다. 현실을 위한 만족할만한 대안이 나타나기까지 행동할 수 있는 기반은 결국 현재의 이 세계가 갖고 있는 "합리적 이성관" 또는 자연주의적 사고관에 입각한 활동입니다. 계몽주의 또는 합리적 이성주의 또는 자연주의 자체가 비판 당하더라도 지금 이 세계 속에서 우리가 취할 수 있는 행동은 비판당하는 이 사고관들의 변형되거나 수정된 행위들이 될 수 밖에 없는 것은 아닐까 싶습니다. 자기 모순적인 선택이 되겠지만, 가능성이 없고 결국에는 실패하는 것이라고 하더라도, 자연주의적인 관점에서 자연주의에 의한 폐혜를 줄이기 위해 행동하는 것은 대안이 제시되지 않는 상황에서는 일단,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는 선택이 되는 것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더불어 최근 대중의 신비주의적 태도는 오히려 자연주의화된 세계가 바탕에 깔려있습니다. 기업은 효율화를 위해 구조조정을 하고, '쓸모없는'사람들은 거리를 헤매게됩니다. 미국은 물론 한국에서도 빈부격차는 증가하고 있지요. 대중에게 신비주의적 태도는 일종의 현실도피 내지는 현실에 대한 불안감의 표현이라고 생각합니다.
대중에게 이러한 태도가 만연이 된 것에 대한 해결책은 또한 존재할 수 없는가요? TheBrights는 적어도 이러한 자연주의에 의한 역작용에 대한 자정과도 같은 기능을 하는 것이 되는 것은 아닐까 또한 묻고 있는 것입니다. 만약, 현재의 쓴귤님이 행동할 수 있는 것으로서의 '대안'을 제시할 수 없다면, Roman에겐 이렇게 생각될 수 있습니다. TheBrights가 자연주의나 계몽주의에 의해서 일어난 폐혜에 대한 또다른 자연주의적 해결책을 모색해볼 수 있는 단체로 말이죠. 결국 '반성 또는 자각, 성찰'이라는 것도 합리적 이성의 작용이 아닐까 생각되니까 말입니다. 미국이건 한국이건 필요 없는게 자연주의인 것이 아니라, '반성 또는 자각, 성찰'할 수 있는 자연주의라면, 그 역시, 필요한게 아닌지 또한 묻고 있습니다.--Roman
쓴귤은 자연주의로 인한 폐해를 자연주의로 해결한다는 것은 마치 숙취를 해장술로 풀어보려는 시도라고 생각합니다. 미국이건 한국이건 '자연주의'는 이미 차고 넘칠 정도로 있습니다. 여기에 더 많은 자연주의가 필요하냐고 저는 묻고 있는 것입니다.
얼마 전 로또 복권을 사람들이 사들일 때, 텔레비전에 통계학 교수가 나와서 당첨확률이 얼마나 적은지 설명해줬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계속 로또를 샀습니다. 왜 사람들은 당첨 안될 걸 알면서도 로또를 살까요? 그건 삶에 희망이 없기 때문이고 그들에게는 희망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성공은 커녕 생존조차 어려운 시대에 사람들은 그런 희망이라도 필요한 겁니다.
한국의 로또와 미국의 신은 동일한 기능을 하고 있습니다. 확률을 보여줘도 로또를 사듯이, 과학적 사실을 보여줘도 사람들은 신을 믿을 것입니다. 따라서 로또나 신이 비합리적이라고 아무리 얘기해도 소용이 없습니다.
오히려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은 현세의 희망입니다. 지금의 인생이 만족스럽다면 저렇게 '인생역전'을 하려고 발버둥치지 않겠지요. 제 말은 사람들에게 로또가 확률이 낮다, 신은 없다고 말하는 것보다 사람들의 삶을 풍요롭게 만드는 것이 본질적인 대안이라는 겁니다. 달러 위에 쓰여진 In God We Trust라는 문장이 신비주의적이라고 말하는 것보다, 그 달러 한 장이 없어서 밥을 굶는 사람이 없도록 해야한다는 것이죠.
오히려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은 현세의 희망입니다. 지금의 인생이 만족스럽다면 저렇게 '인생역전'을 하려고 발버둥치지 않겠지요. 제 말은 사람들에게 로또가 확률이 낮다, 신은 없다고 말하는 것보다 사람들의 삶을 풍요롭게 만드는 것이 본질적인 대안이라는 겁니다.
아버님이나 옛날 사람들에게 들은 바로는 '요행을 바라지 말고 인생을 현명하게 살아라'라는 것이 삶의 지혜라는 거였습니다. 그리고, 한국의 기독교에서 얻을 수 있는 일련의 교훈중에 하나는 그 신도들이 내세적이라기 보다는 대단히 현세적이고, 부의 축적을 대단히 높은 가치로 보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기독교 신자들 중에 제대로 살고 있는 사람들은 '하늘은 스스로 돕는자를 돕는다'라는 계명을 실천하고 있습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기독교 자체를 부정하기 보다는 오히려 깊이 인정하도록 이끄는 일종의 존경스러운 부분입니다.
종교인들은 실제로,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것보다 더 현명한 종교의 가르침을 따르고 있습니다. 그 사람들과 로또 한방에 인생을 기대는 사람들을 동격으로 생각하는 것은, TheBrights가 하고 있는 것 이상의 모욕을 종교에 가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라는 생각이 문득 들어버립니다. 쓴귤님께 여쭈어보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평생 살아오시면서 지금까지 정말로 밥을 굶는 주위 사람들을 위해서 어떤 노력을 해오셨습니까? 쓴귤님은 기부금이나 아프리카 아이들에게 주는 밥을 위한 정기적 기부를 해보신 적이 있습니까? 월급의 10분의 1을 쪼개어서, 가난한 대학생의 학자금을 돕는 일을 해보신 적이 있습니까? 자신보다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지속적인 헌신을 하는 사람이신가요? 이라크의 폭격맞아 불구가 된 아이들을 위해 돈을 낸 적이 있는 분인지요? 쓴귤님의 글로보아 분명히 제가 묻는 말들 중에 포함되는 내용이 없더라도 분명히 나름의 봉사활동이나 실천을 하고 계신분일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Roman은 그 부분에 대해서도, 쓴귤님으로부터 계몽받고 싶습니다.
비판은 물론, 자격이 있는 사람들만이 하는 것으로 정해진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진정으로 쓴귤님의 의지가 온전한 것이고, 그 마음으로부터 한점 어긋남이 없는 진실을 이야기하는 것이라면, 좀 더 풍요로운 삶을 위한 현시점에서의 노력을 위한 운동을 공적으로 시도해보실 생각은 없는지요? 밥을 굶는 사람들을 실제로 돕기 위해, 대안뿐만아니라 실제의 행동으로도 행동하실 준비가 되어 있거나 이미 행동하고 계신분이신지 대단히 궁금합니다.
Roman의 경우에는 계몽주의에 대한 비판에서 보여준 훌륭한 논증과 대안을 말씀하시는 대한 신념어린 필력을 보았을 때, 만약, 쓴귤님과 같은 높은 의식과 교양의 상태에 거하고 있다면, 월급의 50% 이상을 밥을 굶는 이웃들을 위해 당연히 희사하고 있을 것이란 생각이 들고 있습니다. 그리고 진정한 밥을 굶는 사람들의 희망은 실제로 그렇게 행동할 수 있는 사람들이 주위에 많이 있다는 것을 느낄 때가 아닐까라는 생각도 동시에 들고 있습니다.
빈곤퇴치 운동과는 별개로, Roman은 자신의 경험을 통해서, 종교의 오용이나 악용을 통해서 밥을 굶는 현실에 처한 현실적 판단이 마비된 사람들을 많이 보아왔습니다. 분명히 쓴귤님만큼은 못되겠지만, Roman이 Bright라는 그다지 사람들의 인지도도 높지 않은 집단을 통해서 할 수 있는 가장 긍정적일만한 일은, 그렇게 고통받을 사람들이 단 두사람이라도 확실히 없었으면 좋겠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살아갈 수 있는 희망을 빼앗는 초자연주의에 입각한 비현실적인 몽상이나 요행을 바라는 실수가 단 두세사람에게라도 일어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것입니다. 로또를 사는 사람중에 빚진 돈이 3-4천에 이르는 친구들에게 로또를 사지 말라는 말을 할 순 없습니다. 하지만, 돈도 꽤 있고, 들어둔 적금도 충분한 사람들이 여유롭게 로또를 사면서, 상류층으로의 편입을 고대하는 것을 보면, 뺨을 한대 때려주고 싶은 충동을 느낍니다. 그것은 희망이 아니라 탐욕일 따름입니다. 만약, 종교단체가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는 것을 넘어서 과도한 환상과 탐욕을 심고 있는 것이라면, 그 과도한 탐욕에 대해서는 철퇴가 내려져야 할 것이라 생각합니다.
빈부의 격차를 줄이는 길은 빈한 사람들을 직접적으로 돕는 길도 있지만, 사람들로 하여금, 빈익빈 부익부의 악순환에 빠지도록 만드는 환상을 거두어 버리는 것일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한 환상 중의 일부를 거두어버리는 일을 위해서 Roman은 단 한순간이나마 '행동'으로서 활동해보고 싶습니다. Bright는 Roman이 오해하고 있는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다름아닌 '요행을 믿으며 살지말라'는 생활적인 교훈으로서 생활인인 Roman에게 다가왔습니다. 그리고 '하늘은 스스로 돕는자'를 도울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을뿐입니다. 그것은 주위의 빈곤을 모른척하자는 것이 아니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스스로를 도울 수 있는 길을 환상을 떠나 바라볼 수 있게끔 해주는 일을 통해서도 만들어줄 수 있는 사람들이 있어야 한다는 것일 따름입니다. 그리고, Bright 또한 말도 안되는 환상을 주조하는 또하나의 어리석은 일이 되지 않기를 기대하고 있습니다. 계몽주의나, 자연주의 또는 Bright라는 것은 계속해서 변화하는 아직, 그 정체성을 명확히 하지 않은 흐름의 일종이라 생각합니다. 지속적으로 우리는 계몽에 가까운 깨우침을 아직 젊은 한 원하며 살아갑니다. 이것이 실수로 판명되더라도, Bright의 흐름을 지속시키는 것을 도와줄 마음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Roman
쓴귤님과 같은 높은 의식과 교양의 상태에 거하고 있다면, 월급의 50% 이상을 밥을 굶는 이웃들을 위해 당연히 희사하고 있을 것이란 생각이 들고 있습니다.
뭐하러 제가 글을 쓰고 있는지 의아해지는 순간이군요. --쓴귤
뭐하러 글을 쓰고 있는지 저 또한 의아해지는 순간이군요, 글을 쓰나 어떤 종류의 행동을 할 수 있는 내용은 없고, 도덕적으로 올바른게 뭔가에만 집중하는 것은 아닐까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럼, 글이외에는 아무런 다른 행동을 취할 의지가 없으신가요? 대안을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그만두는게 좋겠다일뿐 아닌가요? 먹고살 걱정이나 하지 뭣하러 쓸데없는 일하냐 수준의 대안은 굳이 쓴귤님으로부터가 아니라도 누구에게든지 들을 수 있는 말일뿐입니다. 아닐까요?--Roman
뭐하러 제가 글을 쓰고 있는지 의아해지는 순간이군요. --쓴귤
뭐하러 글을 쓰고 있는지 저 또한 의아해지는 순간이군요, 글을 쓰나 어떤 종류의 행동을 할 수 있는 내용은 없고, 도덕적으로 올바른게 뭔가에만 집중하는 것은 아닐까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럼, 글이외에는 아무런 다른 행동을 취할 의지가 없으신가요? 대안을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그만두는게 좋겠다일뿐 아닌가요? 먹고살 걱정이나 하지 뭣하러 쓸데없는 일하냐 수준의 대안은 굳이 쓴귤님으로부터가 아니라도 누구에게든지 들을 수 있는 말일뿐입니다. 아닐까요?--Roman
Bright는 계몽주의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Dennett의 글에도 나오듯이 아주 오래된 연원을 가집니다. 계몽주의는 하나의 흐름 정도가 아니라 '근대'의 특질 그 자체입니다. 물론 근대는 단색의 시공간이 아니기 때문에 봉건유제가 남아있고도 합니다만 인류역사상 어느 시대도 이처럼 인간 합리성에 대한 신뢰를 표명한 적이 없고, 모든 것을 계산적으로 환원하려는 시도가 강하게 이뤄진 적도 없습니다.
저는 미국에서 일고 있는 근본주의의 재래를 두 가지 측면에서 이해합니다. 하나는 대중이 빈곤화되면서 계몽의 기획에 대해 역편향을 보이고 있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대중의 이런 정서에 기생하여 자신의 이속을 차리는 파워엘리트 집단의 수사입니다. 전자는 계몽의 폐해가 낳은 것이고 후자는 그야말로 계몽된 인간으로서 근대인의 전형입니다. 전자가 계몽주의의 불행한 서자라면 후자는 계몽주의의 타락한 장자입니다.
Gay와 Bright는 둘 다 숫자가 적습니다. 그러나 사회적 위치는 전혀 다릅니다. Gay는 미국에서 증오범죄의 주요 표적이고, 여전히 시민권을 얻지 못한 사람들입니다. Bright라고 자처할 만한 사람들은 일단 교육수준이 높고 소득수준도 그렇게 빠지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이 시기에 Bright가 초자연주의, 신비주의에 대항하여 일어났습니다. 이들의 어법은 정확하게 18세기 계몽주의자들, 자연주의자들과 동일합니다. 그렇다면 '원조' 계몽주의자들은 누구와 맞서 싸워야할까요?
먼저 계몽주의의 타락한 장자들을 봅시다. 이들은 첨단 무기로 전쟁을 하고,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를 고용해서 환투기를 위한 수학 모델을 만드는 자들입니다. 제가 '장자'라고 한 것은 이들이 계몽주의의 정통이기 때문입니다. Bright는 이들과 싸우려고 해도 참 싸우기가 애매합니다. 이들은 단지 신비주의적 수사만 동원할 따름입니다.
다음으로 계몽주의의 불행한 서자들을 봅시다. 이들은 현실에서 희망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로또로 인생역전을 꿈꾸고, 현세가 아닌 내세의 평안에 목매다는 그야말로 '레 미제라블'입니다. 이들은 계몽주의가 구축한 세계에서 쫓겨난 이들이지요. 합리화된 공장과 사무실에서 이들이 설 자리는 별로 없습니다.
'더 많은 자연주의'가 필요없다는 말은 자연주의 자신의 적이 바로 자연주의 그 자체에서 비롯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더 많은 자연주의로 극복할 수는 없습니다.
p.s. Bright는 얼마나 될까요? 현실에서 수소의 전자가 몇 개인지도 모르는 사람들은 무척 많습니다. 이들은 아주 비합리적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이라크 파병을 앞두고 '이익이 얼마나 될까'를 계산하는 사람들은 충분히 많습니다. 이들은 Bright라고 할 수는 없어도, 조금 다른 의미에서 자연주의자들이지요. --쓴귤
계몽이 하나의 흐름이라고 보기 보다는 계몽주의를 토대로 모이는 사람들이라고 이전의 계몽주의의 폐혜를 그대로 답습할 것이라고 볼 수는 없다는 이야기를 하고자 한 것입니다. Bright라는 모임이 계몽주의가 세상에 가져온 폐혜를 상쇄하는 보다 긍정적인 역할을 실제로 할 수 있는 단체가 될지 안될지는 미리 판단할 수 있는 요소가 아니다라는 말을 한 것입니다. 전제에 대한 반성을 하는 자연주의자가 이 세상에 전혀 없을 것이라고 우리가 단정할 수 있을까요?
케인즈가 대공황의 시점에 시장에 대한 정부 정책의 가능성을 시사했을 때 사람들은 그가 자본주의자라기 보다는 사회주의자가 아닌가라는 비판을 제기하였습니다. 그러나 지금의 시대에 이르러 케인즈를 사회주의자로 보고 있는 사람은 누가 있는지요?
또한 Bright를 진정으로 구성하고 있는 사람들이 누구인지에 대한 정확한 파악은 이루어지지 않았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전세계에서 온전한 대우를 받지 못하는 가난한 자연주의자들의 모임일지 그게 아닐지 그 누가 안다는 말인가요? 근본주의의 도래에 대한 비판은 염두에 두어야할 요소이지만 그 기치에 따라서 TheBrights같은 모임이 올바르다고 파악될 수 있는 일을 할 수 있는 가능성을 전면적으로 부정할 필요는 없을 것으로 보입니다.
더 많은 자연주의라는 말은 엄밀히 말해서 누구도 한 바가 없습니다. 다시 말해서, 이미 자연주의적 관점에서 세계를 보고 있는 사람들을 찾아 그 연대감을 가진 공동체를 구성하자는 뜻이 강합니다. 쓴귤님의 이야기를 통째로 무시하거나 쓴귤님의 정체성을 미리 판단하여 부정하고 싶은 바는 없습니다. 그러나 지금 쓴귤님이 시도하고 있는 글을 통해서 보여지고 있는 입장은 어떤 의미에서는 보다 계몽주의에 가까운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리고 쓴귤님을 통해서 Roman은 계몽받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야기하면서 내내 그 부분에 감동받고 있습니다.
Bright가 계몽주의와 일치하는 것이라면 그 어떤행동을 하던 어쨌든 불행밖에는 이끌어낼 것이 없다고 주장하는 중인 듯 합니다. 하지만, 전쟁이라는 극단적인 재앙이나 기아는 자연주의를 통한 문명의 질주가 있기 전에도 다른 이유를 통해서도 벌어졌던 일이었습니다. 주장이 한발자국 더 나갈 이유는 없다고 봅니다. 쓴귤님의 글은 Bright 속에 내재해있는 일부분에 대한 경계를 이끄는 내용이지 자연주의 자체를 TheBrights 자체를 전면적으로 부정하는 이야기까지 나아가는 것은 무리라고 생각합니다.
자연주의자들이 마치, 쓴귤님의 글에서는 '악마'처럼 묘사되고는 있지만, 자연주의자들의 업적들에 의해서 지금처럼 많은 사람들이 잘 살게 된 적은 또한 없었으며, 동시에 지금처럼 많은 사람들이 못살게된 적도 없었습니다. 양날을 가진 것이 바로 '자연주의'가 아닐까라고 생각합니다. 자연주의 자체의 발흥은 한쪽만으로 평가될 수는 없는 요소입니다. 만약, 지금의 논의에서 긍정적인 '자연주의자'를 말한다면 그것은 쓴귤님의 말대로, 반성 또는 자각, 성찰함으로써 제대로 행동할 수 있는 자연주의자들이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권고되어야 하는 것이지, 자연주의자를 전면적으로 부정하는 이야기로 화할 이유는 없습니다.
Roman은 이것이 단지 힘든 '도덕씨름'을 열심히 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만약, 기회가 닿는다면, Bright 모임에서 직접 대면을 하고 싶습니다. 그런 기회를 주실 수 있을런지요? 그리고 우리 모임의 진정한 성격은 모인 사람들의 경향이 좌우할 것이라고 봅니다. 쓴귤님같은 계몽주의에 대한 비판적인 시각을 가진 분들이 많다면, 적어도 우리 모임 내에서는 Bright는 계몽주의다라고 하는 판단이 무색해질 것 같다는 생각이 문득 드네요. 그리고, Bright라는 모임이 이러한 종류의 비판에 대응하는 방식도 보다 균형잡힌 것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리고 덕분에 Roman은 적어도 나름의 균형을 잡기를 시도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를테면, '계몽'된 것입니다. 대단히 감사합니다.--Roman
Roman은 탈근대...곧 근대를 넘어가기 위해서 쓴귤님이 고민한 내용이 대안으로 제시되기를 고대하고 있습니다. TheBrights의 이야기와는 별개로, 계몽주의나 자연주의 또는 실증주의라고 불리우는 것에 관한 비판은 유효하다고 생각합니다. 만약, 탈근대를 위한 지금까지의 사유가 어느정도 결정화되었다면, 그 모습을 이 페이지에 드러내주실 수는 없는지 묻고자 합니다. 왜냐면, 비판을 통해서 좀 더, 나은 대안을 위해 행동할 수 있는 힌트를 진정으로 얻고자 하기 때문입니다. 어느 공동체이건, 완벽하게는 그 공동체의 논리나 정의에 휩쓸리지 않는 사람들이 존재합니다.(그 공동체의 사고의 일부에만 동의하는 경우가 바로 그 경우라고 할 수 있을 것으로 보입니다.) 자유롭게 생각하고자 하는 사람들은 TheBrights에 있어서도, 그 공동체적 논리에 완벽하게 감염된 사람들이 아닌 사람들로서 활동하고 사유하고 이를 표현하는 것이 가능합니다. 위에서 제가 인신공격성의 발언을 한 것에 대해서는 대단히 죄송합니다. 기분이 상하셨다면 이점에 대해서는 사과합니다. 만약, 진정으로 자연주의를 벗어난 대안에 대해서 논하고 싶은 것이 쓴귤님의 입장이 분명하다면, 그 논의는 지속될 가치가 있다고 봅니다. 참고적으로 Roman은 자기자신이 볼 수 있는 TheBrights에 대해서만 이해하고 이에 대해서 동의하기 때문에 활동하려고 하는 것이지, TheBrights의 모든 것을 이해하고 동의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닙니다. 만약, Roman이 그 내부에서 어떤 카테고리에 위치해야만 하는 입장이 된다면, 그나마 비슷한 것은 회의주의자나 불가지론자도 아니고, 자유사상가(=Free Thinker)쪽에 가깝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그 카테고리조차도 아마 닮지 않은 사람일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사람들이 TheBrights에는 어느정도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도 합니다.
쓴귤님의 이야기의 저변에는 SustainableDevelopment(지속가능한개발)이라는 주제가 혹시 깔려 있는 것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이 컨셉은 대안을 제시하면서, 현재의 상업주의에 치중한 발전에 대한 진지한 태클을 걸고 있는 대중적인 화두 중에 하나입니다. 적어도, 디자인 계통에서는 지속 가능한 디자인, 그리고 경제나 경영에 있어서는 바로 이 주제가 중요한 이슈중에 하나를 구성하고 있더군요.--Roman
빛나는별의길 입니다. 과연 파시즘이 계몽의 대변인이었을까요? 계몽사조는 분명히 반인간적인 행동을 거부하였습니다. 오히려 파시즘은 현대적인 것이었으며, 상당부분 마녀사냥이라고 할 수 있을 만큼 종교적인 것이었습니다. 물론 고대 종교, 중세 종교와는 확연히 구별되는 것 이긴 하지만여. 토크빌과 여러 근대 정치 사상가에게서는 전혀 파시즘 같은 주장을 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파시즘의 가능성 다시 말해 대중주의 창궐의 가능성을 걱정하고 이에 대한 대응책을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근래에 20세기의 여러 야만의 결과를 계몽사조의 문제로 떠넘기는 생각과 주장들은 역사적으로 상황을 파악한 것이 아니라 단지 큰 패러다임이라는 관점에서 무리하게 판단한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아닐까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예를 들어 1차 세계 대전 이후 제 2차 이라크 전쟁에 이르기까지 우리 인류가 저지른 반인간적인 행위는 얼마나 계몽사조의 영향을 받았을까요?
유태인 대학살, 베트남에서의 만행, 이란-이라크전, 르완다 내전등의 전부 계몽사조의 결과일까요? 아이히만의 말에서 칸트의 이야기가 나왔다고 해서 과연 계몽사조의 결과일까요? 제가 보기에는 이것은 20세기 동안에 우리가 감행했던 역사적 행동의 결과물입니다. 철학자들은 언제나 모든 것이 완결되고 결과가 예정된다고 생각하고 싶어하지만 그것은 지나친 오만이 아닐까요? 결론적으로 저는 근대의 빛이 아직 우리에게 유용하며 그리고 그 생명이 가시지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공동체, 연대등의 생각이 가진 이점을 알고 있지만 그럼에도 18~19세기에 나폴레옹 마져도 보여준 인간애와 이를 실현한 세가지 덕목은 아직도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어 1차 세계 대전 이후 제 2차 이라크 전쟁에 이르기까지 우리 인류가 저지른 반인간적인 행위는 얼마나 계몽사조의 영향을 받았을까요?
유태인 대학살, 베트남에서의 만행, 이란-이라크전, 르완다 내전등의 전부 계몽사조의 결과일까요? 아이히만의 말에서 칸트의 이야기가 나왔다고 해서 과연 계몽사조의 결과일까요? 제가 보기에는 이것은 20세기 동안에 우리가 감행했던 역사적 행동의 결과물입니다. 철학자들은 언제나 모든 것이 완결되고 결과가 예정된다고 생각하고 싶어하지만 그것은 지나친 오만이 아닐까요? 결론적으로 저는 근대의 빛이 아직 우리에게 유용하며 그리고 그 생명이 가시지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공동체, 연대등의 생각이 가진 이점을 알고 있지만 그럼에도 18~19세기에 나폴레옹 마져도 보여준 인간애와 이를 실현한 세가지 덕목은 아직도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계몽주의는 충분히 그렇게 발전할 수 있습니다. 파시즘과 나치즘이 어디서 나왔습니까? 여러면에서 니체의 사상의 영향을 받은 것이지요. 니체는 계몽주의의 적자입니다.계몽주의는 인류에 잔존한 어리석음,원시성을 계몽하고 개발하면 인류에게 낙관적 미래가 있을 것처럼 말했지만 윗 분 말대로 그 결과는 세계대전이었지요.부시가 기독교사상을 가지고 이라크전을 일으켰습니까?아닙니다.나찌는 유대인을, 부시는 이슬람을 계몽대상으로 보는 것과 다름이 없지요.명분은 기독교이지만 내면에 흐르는 사상은 앵글리칸적 계몽주의입니다.실제 미국은 선조때부터 이사상을 고수하는 흐름이 있었고요(이신론같은)--ReFormer